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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님의 서재입니다.

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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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최근연재일 :
2023.09.29 06:00
연재수 :
2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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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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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0.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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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23쪽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

DUMMY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리체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진짜라니까요?”


그러나 리체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말이라니까?”


그렇게 얼마나 말했을까, 리체는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혹 찔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딱딱한 정도를 넘어 듣기만 해도 동상에 걸릴 것만 같은 느낌의 말이었다.


“찔리는 게 없으니까 이러지!”


“그럼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른 결재하고 주십시오. 바쁩니다.”


“그렇지만 아무 말씀 안 드렸다간 앞으로 저를 계속 짐승 비슷한 수준의 인간으로 취급하실 것 같은 표정이신데요?”


“아시면 됐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내 눈물어린 호소가 먹혀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였다. 리체는 처음으로 뭔가 표정을 짓고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렇게 어린 여자애를 데리고 그러실 수 있어요?”


...호소가 먹혀든 게 아니라, 대화가 가능했다는 정도로 정정.


“아니,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옷 입고 있는 거 봤잖아? 둘 다 옷 다 입고 있었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 진짜라니까?”


저어어어어엉말 다행인 것은 그 당시 둘 다 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 그랬으니 그나마 지금 리체가 내 이야기에 일단 귀는 기울이는 거지 만약 둘 다 옷이라도 좀 벗고 있었다손 치면... 아니다. 치지 말자. 만약 그랬다간 리체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진짜로 상상도 하기 싫다.


“지금 옷이 문제가 아니라, 핀 님이 아이카를 침대로 끌어들인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아니, 아무리 술에 취하셨다지만...”


“안 끌어들였다니까아아아아!”


차라리 소를 데려다 놓고 수학을 가르치는 게 낫지...


“그럼 핀 님이 끌어들인 게 아니라 아이카가 스스로 온 거라고요?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란 말씀이세요? 아이카 성격 뻔히 아는데?”


“아니, 진짜라니까?”


“일단 끌어들인 것도 문제지만, 그런 식으로 발뺌하시는 것도 나쁜 일입니다.”


진짜 무릎이라도 꿇고 울면서 말하고 싶다. 제발, 개미눈물만큼이라도 좋으니 내 이야기가 진실일 가능성을 가지고 들어달라고.


“진짜 아냐. 정말 아냐. 무조건 아냐. 저얼대로 아냐. 그러니까... 이건...”


무릎만 안 꿇었다 뿐이지 참회 비슷한 수준의 고백을 하고 나서야 리체는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약간 생긴 모양이었다.


“...좋아요. 일단 그 사정이란 걸 일단 들어는 보죠.”


헛소리했다간 지금 당장 방을 박차고 나갈 테니 알아서 해라... 하는 느낌의 반응.


“그게 그러니까...”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뭐라 말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잠시 뜸을 들였을 때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저, 차, 차, 차를 가져왔습니다.”


아이카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와도 마찬가지고, 리체와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본 리체는 또 나를 찌릿하고 노려보았고, 그래서 나는 심히 억울해졌다. 그 와중에 내가 막 뭔가 항변을 시도하려던 참이었다.


“저, 저, 저... 리, 리체님...”


차를 탁자에 내려놓은 아이카가 덜덜덜 떨면서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응?”


“저, 저, 저어... 저, 정말 아무 일 없었어요... 저는 괜찮으니까...”


“그건 네가 법률용어를 잘 몰라서 그런 건데, 그건 아무 일 없었다고 하는 게 아니라 미수에 그쳤다고 표현하...”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지마아아아!”


이렇게 또 옥신각신.


“저, 그, 그런데...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이카는 얼굴이 화악 빨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 그, 뭐, 뭔가 하시지도 않았고요...”


그러자 리체는 얘를 어떻게 매수했어?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물론 그것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내가 따질 건지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뭐, 좋아요. 일단 이야기를 듣기로는 했으니까.”


그리고 리체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카, 일단 나가있어.”


“네, 넷...”


그리고 아이카는... 나를 한 번 슬쩍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황한 듯 말했다.


“죄, 죄, 죄송해요!”


그리고 도망치듯 후다닥.


“...그때 생각나네요.”


아이카가 문을 닫고 거실로 나가자, 리체가 변함없이 냉랭한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며칠 전에 아이카가 핀 님 엄청 무서워한 적이 있었잖아요.”


리체는 설마 그때도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하는 표정으로,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나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야기가 복잡한데... 그것도 좀 얽혀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풀어나갔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관련 있는 이야기라고 오해해버리면 될 일도 안 될 게 뻔하다.

어쨌든 리체는 그런 내 말을 듣고 팔짱을 낀 채 뭔가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리체는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말씀해보세요.”


“하아.”


고작 여기까지 오는데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나는 일단 한숨으로 기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기에, 나는 도끼눈을 뜬 리체를 앞에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네.”


나는 잠시 주저했다. 어째 말하기엔 좀 꺼림칙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하지만 내 코가 석자니까 어쩔 수 없군.


“공주님이 말이야...”


“...네?”


리체는 갑자기 튀어나온 공주님이란 단어에 그렇게 반응했다.


“...공주님요?”


“응.”


갑자기 그 단어가 왜 나오지? 하는 표정. 그러나 물론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된 마당에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리체는 잠자코 말을 이었다.


“공주님이 왜요?”


“그러니까...”


음냐, 이걸 내 입으로 말해야하다니.


“저, 그... 아이카를 불러서 말이야.”


리체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공주님이... 아이카를 불러서요?”


“응.”


주어, 서술어, 목적어를 확인한 리체는 눈을 굴렸다.


“그래서요?”


“음.”


삐질삐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 기분.


“이렇게... 하라고 시킨 것 같아.”


시킨 것 같은 게 아니라 시킨 거지만 나는 일단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리체는 그 이야기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고, 공주님이요?”


“응.”


리체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리체는 잠시 후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것을 들어 올리지는 않고, 리체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요?”


“그래.”


그나마 이야기가 통하기 시작한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긴장이 약간 풀린 채 대답했다. 리체는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잠시 후에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분명... 국왕께서 남자 귀족들에게 직접 하녀를 하사하시는 경우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대사를 앞두고는 사기진작 및 포상의 목적으로 종종 이뤄진다고는 하더군요. 그... 남성분들에겐 꽤 효과적이라고...”


리체는 얼굴이 약간 빨개져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얼굴을 힐끔 훑어보더니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중얼거렸다.


“공주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거라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갑자기 그 반응은 뭐야?”


“아니, 저는 당연히 핀 님이 강제로...”


“제발 좀 봐줘. 이제까지 우리 같이 일해 온 걸로만 판단해도 나 그렇게 나쁜 놈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줄 수 있지 않아?”


내 말에 리체는 얼굴이 좀 더 빨개졌다.


“그게... 그... 남성분들이 보통 이런 걸... 그러니까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어서요...”


그리고 리체는 아주 약간의 의혹도 포함해서 나를 쳐다보았다.


“저, 게다가 어제 술도 좀 많이 드신 걸로 아는데...”


“술?”


우물쭈물.


“그, 보통 술이라는 건 자기절제력을 낮추면 낮추는 쪽이지...”


“...술까지 마셨는데 왜 아무 일 없었냐? 이렇게 묻고 싶은 거야?”


“따, 딱히 그런 뜻은 아니고요.”


“아이카가 원하지 않을 게 뻔하잖아... 쟤 성격에 명령이 아니라면 그렇게 했겠어?”


이젠 일일이 빠릿빠릿하게 반응하기도 뭐해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내 대답이 리체에게는 조금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진짜요?”


“뭐가?”


“진짜 그런 이유예요?”


“가짜 그런 이유라도 대줄까?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런 거?”


이제는 자학 비슷하게 나가게 되는군. 내 약간의 투덜거림에 리체는 즉각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저는 단지... 그, 보통 그런 욕구가 괴앵장히 강하다고 들어서...”


굉장히 강한 것도 아니고 괴앵장히 강하다고 들은 걸 보면 제대로 듣기는 들었군. 아, 그러고 보니?


“...너도 혹시 그 하녀 언니들한테 들은 건가?”


“어, 언니들을 어떻게 아세요?”


리체는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 사람들을 어떻게 알아... 아이카가 그러더라. 그런 건 언니들한테 엄청 많이 들었다고.”


“어...”


리체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별 문제 없었고, 이 이야기 가지고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만 마칩시다. 여기 이름 쓰면 되지?”


“아, 예...”


원래는 좀 느긋하게 읽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겠군. 나는 조심스럽게 결재를 마쳤다. 그리고 리체에게 그 서류를 건네주었는데, 리체는 그걸 받아 챙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잠시 동안 머뭇거렸다.


“왜?”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리체가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응?”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도... 진짜인 거죠?”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믿어주지 않다니 하는 표정이 되자 리체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혹시나 해서. 정말로 혹시나 해서요.”


“나나 아이카나 옷 입고 있었던 거 보면 알잖아.”


“아이카야... 부지런한 아이니까 그... 후에 다시 옷을 입었을 수도 있죠.”


아무리 봐도 혹시나 하는 정도의 느낌으로 물어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어...”


리체는 내 시선을 회피했다.


“...완전범죄를 위해 다시 입었다?”


말을 말자.


“저, 죄, 죄송해요.”


“됐어. 내 인덕이 부족한 탓이지. 내 평소 행실이 다른 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구나.”


“죄송해요...”


리체가 풀이 죽어서 그렇게 말했다. 음냐, 남자의 문제점은 말야. 뭐가 어찌되었건 간에 또 여자가 저러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거지.


“그, 그런데.”


“뭐.”


그래도 조금 퉁명스러워지는 건 괜찮겠지.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고, 리체는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찔끔하며 대답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동성애자 아닙니다.”


내 대답에 리체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저, 그, 만약 신체적 이상 혹은 결함 같은 부분이 있으시면... 왕궁어의원에 한 번 면담해보시면...”


“성불구자도 아냐! 그냥 평범한 이성애자라고!”


어떻게든 나를 동성애자 혹은 성불구자 둘 중 한 범주에 집어넣고 싶은 듯한 리체의 욕망에 나는 처절하게 소리쳤다. 리체는 그런 내 답변에 얼굴을 좀 더 붉혔다.


“정말...요?”


대답하기 싫어서 나는 차를 마시는 척하며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체는 그런 내 침묵이 긍정을 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리체는 조금 놀란 말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좀 의외네요.”


“생각하시는 것만큼 짐승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따질 힘도 없어서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리체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 죄, 죄송해요.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 굳이 변명 안 해도.”


“아, 아뇨. 죄송해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뜻이 아니라요.”


내 침울한 말투에 리체는 꽤나 당황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실 뭐... 침울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그리 침울한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리체가 이렇게 당황해하는 경우도 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제야 나는 살짝 리체의 말을 들을 마음이 생겼다. 물론 나는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리체에게 좀 더 침울하게 들릴 수 있도록 목소리의 힘을 빼서 중얼거렸다.


“...그럼?”


말을 마치고 하아... 한숨을 쉰다. 부하에게 나는 고작 이정도 신뢰밖에 못 받는 사람이었나... 하는 느낌을 많이 담아서, 리체의 양심을 콕콕 찌르는 것이 내 목표였다. 쉽게 말해 장난기가 약간 발동했다는 건데, 잠시 후 리체가 실제로 굉장히 면목없어하는 동시에 어쩐지 조금 씁쓸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내드는 바람에 그 장난기는 순간 가라앉고 말았다.


“의외라고 한 이유는... 이제까지 이런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본 적이 없다니?”


“그러니까... 거절하시는 경우라든가.”


리체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으음, 사실 나도 대놓고 하긴 좀 뭐한 이야기긴 한데... 어쩌다 이런 주제가 됐지?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얼른 이야기를 마무리지어버리는 쪽이 좀 더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그런데 그게 왜?”


“어, 그러니까...”


리체는 조금 더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겐 이런 그... 이, 이런 일이 순전히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었거든요.”


응? 이런 일?


“이런 일이라니?”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하녀라고? 그 사실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덜컹하고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설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리체도 어릴 적에 하녀...였다고 했지?

리체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리체는 뭔가 깜짝 놀란 듯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급히 외쳤다.


“아, 그, 그, 그러니까 제가 이, 이런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그러니까 절대 제 이야기가 아니고요!”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랄 정도의 다급함이었다. 심지어 리체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뜻은, 그러니까 그 말뜻이 뭐냐면...”


리체가 필요 이상으로 당황해한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 리체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기보다는, 리체의 태도에 뭐라 반응해야할지를 알 수가 없어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틈타, 리체는 조용히, 그리고 매우 당황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 그러니까... 제 부모님이.”


“...부모님?”


“그, 그러니까 어머니요.”


어머...니? 리체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가 워낙 문맥상 이질적이었기에 나는 그 단어의 뜻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그 단어를 이해했을 때쯤, 리체는 고개를 슬쩍 떨구었다. 그리고 매우 슬픈 표정을 짓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그렇게... 제가 태어났...거든요.”


응?


“당시의 후작님께 국왕폐하가 하녀를 내리셔서... 그래서...”


리체의 말투는 다분히 회상적이었다. 또한 어쩔 줄 몰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늘 이런 경우가 생기면 그냥 저도 모르게 신경이...”


리체는 어떻게 말을 마무리지어야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만 듣고도 리체가 하고픈 말을 대충은 이해해냈다.


“...그렇군.”


오히려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쓰일 수가 없겠군. 나는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지만, 잠시 생각한 후 리체에게 묻지는 않기로 했다. 추리해내거나, 나중에 아이카에게 물어보는 편이 백배 낫다.


“어쨌든 그냥... 그래. 뭔가 아이카한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 말에 리체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말했다.


“...아이카 정도면 예쁜 아이인데.”


“나도 그걸 모르는 건 아는데... 으음, 하여튼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민망하네요.”


나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했다. 숙취도 좀 있고 해서 좀 더 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리체는 황급히 잠깐만요 하는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아, 저 지금 가닐영 참모장님 뵈러 갔다가 공주님께 갈 건데...”


“응?”


“저...”


그리고 내 눈치를 한 번 살폈다.


“만약 제게 물어보시면...”


“물어보다니?”


“저, 이 서류를 내면 분명히 핀 님께 들렀다는 사실을 아실 테니...”


리체는 일단 그렇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리체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런데?”


“만약 물어보시면 뭐라고 말하죠?”


“...뭐라고 말하다니?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아무 일도 없었더라 하고.”


내 말에 리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저, 공주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드리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야? 시아가 안 믿을지도 모른다... 그런 건가?


“...왠지 다른 하녀를 준비해주실 것 같은데요.”


아고, 막상 들어보니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냥 아이카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하고 다른 하녀를 뽑아서 보내줄 수도 있겠지.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왠지 내가 직접 나서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군.


“지금 간다고?”


“네?”


“공주님한테 가는 거 아냐? 나도 같이 가지.”


솔직히 이런 일로 시아 얼굴을 보기는 싫었다. 리체 앞이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다행히 리체의 대답은...


“아, 아뇨. 지금이 아니라... 저녁에나 갈 거예요. 요즘은 공주님도 너무 바쁘셔서 아무 때나 간다고 만나 뵐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 저녁이라고? 나는 리체의 대답에 직접 시아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끄응, 하고 고민했다.


“그럼 가서 만날 때, 앞으론 이런 거 안 챙겨줘도 된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좀 전해줄래?”


“안 챙겨줘도... 된다고요?”


“응, 왜? 어렵나”


“아뇨. 전해드리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만...”


리체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해드리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만... 저, 그런데...”


“이번엔 뭐가 궁금한데?”


이젠 대충 봐도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인다. 의도를 간파당한 게 찔렸는지 리체는 잠시 주저하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질문을 숨기지는 않았다.


“좀 전에 이유를 말씀하시길... 아이카한테 못할 짓인 것 같아서... 라고 하셨죠?”


“응? 응. 그게 왜?”


“저, 그럼... 다른 하녀들은 무슨 이유로 거절하시는 거죠?”


아, 리체의 질문에 나는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윽, 여기서 솔직하게 시아나 너한테 인간 이하 취급 받기 싫어서...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러나 그 대답 외에 떠오르는 대답은 없었고,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저, 혹시...”


“어쨌든 성불구자나 동성애자는 아니야.”


“...아뇨. 그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아, 네... 죄, 죄송합니다...”


리체가 얼굴이 빨개지는 바람에 나도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리체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저... 그러니까요. 물론 대다수의 남자들은 그... 이런 일에 있어서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 여부는 별 문제가 안 된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가끔 그중에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는...”


리체는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잠시 어물거렸다. 나도 그쪽 대화엔 그다지 소질이 없긴 하지만 표현하기조차 어려워하는 걸 보니 얘도 어지간히 소질이 없군. 그러나 다행히도 리체는 곧 적당한 표현을 찾아내서 말해주었다.


“그, 그러니까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 라는 분들이 가끔은 있다고 들었거든요.”


...대체 하녀 언니라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사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리체는 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물어본다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호,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마쳤다. 어, 이정도로... 그냥 타협할까? 어차피 자세하게 하면 할수록 내게 불리한 이야기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좀 다른데, 그냥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자.”


“그, 그렇군요.”


리체는 자기가 물어본 주제에 당황해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실 나로서는 그렇게 나쁜 마무리는 아니기도 했다. 더 그럴듯한 핑계를 찾을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럼...”


“응?”


대화가 끝난 줄 알고 안심하고 있던 중에,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분이 실제로 있다는... 이야기네요?”


응? 리체는 내 시선이 닿자 잽싸게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 분?”


“어, 그러니까...”


묘하게 초조한 느낌의 말투. 그리고 잠시 후 리체는 별것 아니지만 그냥 물어본다는 듯한 말투로 가볍게 중얼거렸다.


“따로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


잉? 잠깐,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그러나 내가 리체의 이야기에서 그런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순간 머릿속에 뭔가가 슬쩍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어라?


“아, 아니면 말고요! 그냥 생각난 김에 그냥 물어본 거라서!”


그러나 내 머릿속에 떠오른 뭔가가 뭔가로 구체화되기 전에, 나는 리체의 그런 한 마디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리체는 그 말을 마치고 묘하게 빨라진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리체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허둥지둥...이라고 표현하면 좋을 것 같은 동작으로 부랴부랴 방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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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1] +2 20.10.22 69 7 20쪽
173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0] +1 20.10.21 67 5 16쪽
172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9] +1 20.10.20 69 5 26쪽
171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8] +1 20.10.19 62 5 20쪽
170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7] +1 20.10.18 64 5 28쪽
169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6] +1 20.10.17 68 6 15쪽
168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5] +1 20.10.16 68 5 16쪽
167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4] +1 20.10.15 77 5 28쪽
166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3] +1 20.10.14 72 5 14쪽
165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2] +2 20.10.13 81 6 19쪽
»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 +1 20.10.12 86 6 23쪽
163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프롤로그] +1 20.10.11 133 6 2쪽
162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8 / 에필로그] +2 20.10.10 85 6 21쪽
161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7] +1 20.10.09 94 5 22쪽
160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6] +2 20.10.08 87 6 17쪽
159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5] +1 20.10.07 92 5 19쪽
158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4] +2 20.10.06 85 7 28쪽
157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3] +1 20.10.05 117 5 20쪽
156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2] +1 20.10.04 120 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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