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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님의 서재입니다.

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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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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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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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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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4]

DUMMY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4]




“비가 오네요.”


토독토독, 막사의 천장을 두드리고 있는 소리를 그제야 인지한 나는 나도 모르게 바닥을 쳐다보았다.


“배수로를 파둬서 괜찮을 거예요.”


리체는 내가 무엇 때문에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는지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그게 그 용도였군.”


“네.”


나는 마지막 단추를 잠갔다.


“갈까.”


“네.”


막사를 나선 우리는 천천히 시아의 막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많이는 안 오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아니었으나 리체의 복장은 살짝 유난스러웠다. 무두질을 말끔하게 한 가죽 외투는 거의 종아리까지 덮을 정도로 길이가 넉넉했는데, 그 넉넉한 품 밑으로 두툼한 밑창을 덧댄 장화가 걸음마다 언뜻언뜻 눈에 들어왔다.


“그런가요.”


리체의 반응은 다소 무덤덤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리체의 외투에는 모자가 달려있었는데 그마저도 매끈한 걸로 보아 외투와 마찬가지로 기름을 제법 바른 모양이었다. 게다가 눈은 물론 코까지도 덮을 만큼 품도 넉넉해서 나는 리체가 앞은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


심지어 거기에...


“네?”


나는 리체가 들고 있는 커다란 우산을 힐끔 쳐다보았다. 물론 나도 우산을 들고 있긴 하지만 리체의 우산은 내 것과 비교해도 좀 유별나다는 느낌이 있었다.


“마법사들은 다 그런가?”


그런 내 중얼거림에 리체는 즉각 대답했다.


“평범한 사람들도 비 맞는 걸 좋아하진 않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걸 감안해도 과하게 철저하다는 느낌인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리체를 바라보았더니, 리체는 그런 내 시선에 담긴 뜻을 읽어낸 듯 살짝 뾰족하게 대꾸해왔다.


“왜요?”


“그 정도면 평소에 물은 어떻게 마시나 싶어서.”


리체는 표정을 살짝 찌푸렸지만 내 의문에 별다른 악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가볍게 한숨 쉬었다.


“물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요. 물에 닿는 게 싫은 거지.”


“같은 말 아닌가?”


“다르거든요.”


물웅덩이가 생길 정도의 비는 아니었기에 우산을 쓴 병사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설마 씻는 것도 싫어하...”


리체가 몹시 뚱한 표정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도중에 말을 멈췄다.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질문 실례라고 했죠.”


“그랬나?”


내 대답에 리체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시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비만 그래요.”


그리고 또 잠시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비는 맞고 싶지 않아도 맞을 때가 있으니까요.”


가볍게 듣고 넘기자니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드는 대답이었다.


“들어가시지요.”


그러나 거기 대해서 뭔가를 더 물어보기 전에 우리는 시아의 막사에 도착했다. 어제와 같이 나는 리체와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섰고, 잠시 기다린 후에 이윽고 근위병의 안내를 받아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어서 와.”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괸 채 막사 벽면에 걸린 지도를 보고 있던 시아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러고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고 있던 생각을 끊고 싶지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체와 함께 자리에 앉은 나는 잠자코 그런 시아가 바라보고 있는 지도를, 그리고 이내 그렇게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시아를 쳐다보았다. 시아의 생각을 읽어보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지도에 시선을 꽂고 있는 시아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아가 지도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을 그리고 있을까. 시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우리는 그런 시아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가만히 숨을 죽였다.


“미안. 기다렸지.”


잠깐이라고 말하기엔 좀은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천천히 자세를 고쳐 앉은 시아는 내 예상과 같이 그렇게 말했다.


“푹 쉬었어?”


“응.”


내 대답에 시아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왜?”


그러나 그런 내 질문에도 시아는 나를 향한 응시를 풀지 않고 있다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상하네.”


“이상하다니?”


“그렇게 대답할 거라곤 생각 안 했거든.”


좀은 의외라는 식의 대답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야 없어. 네가 푹 쉬었다면 내겐 오히려 달가운 일이지.”


“왜?”


내가 그렇게 묻자 시아는 다시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괜찮아 보이네.”


그제야 나는 시아의 이야기에서 생략된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응.”


아까 낮에 이미 진짜 시아를 만나고 왔으니까. 그 시아와 이 시아는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고 나니 혼란스러웠던 마음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내 대답을 낯설게 여기는 것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시아 쪽인 것 같았다.

물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시아는 잠시 후 내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지나가듯 말했다.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상황이 좋다면 이유는 따지지 않겠다는 투였다.


“노프 시에 다녀와 줘.”


이야기라곤 했지만 갑작스런 이야기였다.


“노프 시?”


“아즈를 만나줬으면 좋겠어.”


“아즈? 걔를 내가? 왜?”


아즈라는 이름은 노프 시라는 이름만큼이나 뜬금없는 등장이었다.


“네가 여기서 출발해 노프 시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때는 이미 공화국이 노프 시를 점령한 상태일 거야.”


이건 어제 얼핏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렇게 되면, 이제 공화국이 반드시 로제노프 시를 공격해줘야 해.”


“로제노프 시?”


“그것도 최대한 빨리.”


시아는 진지했다.


“잠깐, 로제노프 시면... 로제 시하고 노프 시 사이에 있는 도시잖아?”


갑작스런 이야기에 나는 숨도 돌릴 겸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벽에 걸린 지도를 힐끔 쳐다보았다. 로제노프 시라면 로제 강이 노프 강을 만나는 곳 직전 유역에 위치한 도시...라고 알고 있었는데.


“여기를 왜? 전략적으로 큰 가치는 없는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공화국이 처음 약조한대로 제국 5군단, 3군단을 맡아줬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아즈가 지금 글래믹 시를 놔두고 노프 시를 공격해버렸으니까.”


시아는 입맛이 쓰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로제노프 시는 우리가 반드시 점령하고 넘어가야 할 요충지가 되어버린 거야. 로제노프 시를 점령하지 않고서 로제 강 너머로 병력을 보낼 수는 없어.”


군단급 사령관 회의에서는 들은 적도, 말한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꼭 설명을 요구하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시아를 바라보자 시아는 다행히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내 관심사는 점령이 아니라 진격이야. 땅을 늘리는 게 아니라 바다에 닿는 게 목표지.”


시아의 시선이 지도를 스쳤다.


“하지만 아즈는 달라. 바다보다는 땅에 관심이 많거든. 공화국이 노프 시 공격에 전력을 쏟아 부었다는 걸 알게 되면, 글로크라디아 방면 주둔군인 제국 5군단, 3군단도 곧 진격로를 차단하기 위해 로제노프 시로 달려오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아즈는 병력을 반대로 몰아 유유히 텅 빈 글로크라디아를 차지할 속셈이고.”


“제국군이 로제노프 시로 올 거라고?”


“응.”


시아가 대답에 확신 그 이상의 무엇을 담아 이야기해왔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 그럼 아즈가 텅 빈 글로크라디아로 병력을 끌고 가면, 제국군도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야?”


“그게 그렇진 않을 거야.”


시아는 공교롭다는 듯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 로제노프 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적은 공화국이 아니라 우리 왕국군이니까.”


엥? 갑작스런 이야기에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시아는 난감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일단 제국 5군단, 3군단이 로제노프 시에 발을 들이게 되면, 그 순간부터 공화국 병력은 더 이상 제국의 관심이 아니게 되어버려. 가용전력의 대부분이 로제 강 유역으로 집결한 이상, 제국군은 우선 수적 우위를 앞세워 왕국군부터 쓸어버리려 할 거야. 설사 그 사이 공화국이 글로크라디아를 어느 정도 점령한다고 해도 어차피 왕국군만 물리치면 다시 그 땅을 수복하는 건 제국 입장에서 매우 간단한 일이거든. 공화국 단독으로는 제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시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원론적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거기 담긴 논리는 간결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당장 단독으로 로제노프 시를 점령할 수도 없어. 제국을 우리 앞에 둔 상황에서, 공화국을 우리 뒤에 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거든. 뒤집어서 생각하면, 공화국을 우리 앞에 두고 제국을 우리 뒤에 둔 상황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런 상황이 되면 그 뱀 같은 녀석이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잖아.”


직관적인 비유는 없었지만 묘하게도 이해가 갔다. 내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자, 시아는 나를 살짝 올려다보며 말했다.


“알겠어? 제국군 방어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공화국이 로제노프 시를 점령하지 않으면, 우리 원정은 사실상 여기서 끝이야.”


묻고 싶은 것은 좀 더 있었지만, 시아가 꺼낸 이야기의 결론이 꽤나 당혹스러운 것이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우리가 뭘 어떻게 잘 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거잖아. 공화국의 움직임에 왕국군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공화국... 아니, 아즈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물었다기보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더니, 시아는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야, 아즈도 바보가 아니니까.”


그 대답에 알데 씨와 시아가 나누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결국 아즈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 아냐?”


“노프 시는 손에 넣었잖아.”


아직 공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시아는 이미 공화국이 노프 시를 잠정적으로 점령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공화국으로서는 이번 전쟁에서 글래믹 시... 그러니까 글로크라디아 지방이 아니라 노프 시만 확실하게 손에 넣어도, 이미 한참 남는 장사라고 판단내린 거겠지.”


그리고 시아는 작은 한숨을 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어떻게 끝나건, 노프 시만큼은 확실하게 자국 영토로 편입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이미 마쳤을 테고.”


나는 침묵했다. 사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떠올린 사전은 나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물론 노프 시를 공화국에 양보해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즈 좋은 일만 시켜주려고 이번 원정을 하고 있는 게 아냐. 공화국도 나름 챙길 건 챙겨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챙길 것만 챙기고 있어서야 곤란하거든.”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시아는 마무리하듯 말을 이었다.


“우리가 제국 4군단, 7군단을 몰아낸 지금 노프 시도 공화국에 이대로 넘겨주기에는 아까운 땅이라곤 해도, 지금 이건 단순히 노프 시를 공화국에 넘겨주고, 넘겨주지 않고 하는 문제가 아니야.”


말을 마친 시아는 자세를 살짝 바꿨다.


“가서 아즈에게 이렇게 전해. 노프 시는 넘겨주겠다. 단, 로제노프 시도 반드시 공화국이 공격해야 한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나는 시아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중얼거림 다음에 별다른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후에는 살짝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게 끝이야.”


이미 고개를 돌려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시아는 내 질문에 깔끔하게 대답했다.


“이렇게만 말해도 아즈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거야.”


“어...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만 해도 되는 거라면... 굳이 내가 갈 필요가 없지 않아?”


“맞아. 이렇게 전하기만 할 거라면 그냥 사자를 보내면 될 일이지.”


시아는 내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즈가 곧이곧대로 우리 요구를 들어주진 않을 게 분명하거든. 아쉬운 게 우리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분명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로제노프 시 공격은 피하려고 할 거야.”


“그럼 어떡해?”


내가 그렇게 되물었을 때였다. 시아는 깍지를 끼고는 살짝 턱을 괴었다.


“뭘 어떻게 해. 어떻게든 아즈더러 로제노프 시를 공격하게 해야지.”


“아니, 그 어떻게든 한다는 게 어렵잖아...”


그러나 그런 내 중얼거림에 이제까지 줄곧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던 시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그렇지. 어렵지?”


“어렵다는 걸 알면서 지금 나더러 어떻게...”


“그래서 널 보내는 거야.”


엥? 이건 또 무슨 이야기야? 당연하게도 나는 당황했지만, 이에 대한 시아의 태도는 담백했다.


“물론 내가 직접 가면 좋겠지만, 곧 다음 전투가 있을 거라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해. 그러니 네가 가서 잘 이야기해줘.”


“그러니까... 나더러 사전... 아니, 아즈를 설득하라고?”


“그게 설득이든, 강요든, 협박이든, 요청이든, 뭐든 좋아. 아즈에게서 로제노프 시를 공격하겠다는 약조를 받아와. 아니, 로제노프 시로 진군하는 모습까지 눈으로 보고 와.”


어이가 없어진 나는 다시 한 번 사전의 얼굴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그 인간을 내가?


“글쎄... 내가 말한다고 해서 사... 아니, 아즈 총령이 순순히 그렇게 해줄까?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여기서나 저기서나 사전이란 녀석은 쉬운 상대가 아니란 말이지.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시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쉽진 않을 거야.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즈니까.”


시아의 긍정에 나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물론 무턱대고 아무 것도 없이 약조를 받아오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럼?”


“이미 노프 시를 얻었다고는 해도, 공화국으로서는 뭔가를 더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얻으려고 할 거야. 그런 면에서 로제노프 시를 점령하는 것은 공화국에게 있어 꼭 무조건 손해만 보는 일은 아니지. 우리가 그를 바탕으로 무사히 로제 강 유역을 점령하게 되면 공화국 역시 노프 강 유역에 있는 다른 도시들도 노려볼 수 있을 테니까.”


가정으로나마 둘 다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선택지로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희망적인 갈래 하나를 제시한 시아는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니 아즈와 협상을 해봐. 만약 아즈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고 그게 적당한 수준이라면 우리가 그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겠지.”


“협상? 적당한 수준? 그게 어느 정도인데?”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렀을 때였다.


“그건 이제 네가 정해야 해.”


“내가 정한다니?”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었더니 시아는 그런 내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즉각 말을 이었다.


“네게 이번 교섭의 전권을 줄 거야.”


“...지금 저한테 뭘 주신다고요?”


“나는 협상에 대한 전권을 네게 위임할 거야. 즉, 이번 교섭에서 네가 내린 결정은 곧 내 결정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지.”


잠자코 시아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잠시 후에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뭐?”


“만약 네가 공화국이 로제노프 시를 공격하는 대가로 왕국군 모든 군량을 전부 공화국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우리 식량을 한 톨도 빠짐없이 전부 공화국에 넘겨줄 거야. 혹은 그 대가로 우리 왕국군 모든 병기를 전부 공화국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군말 없이 모든 무구를 바로 마차에 실어 공화국에 보내줄 거야.”


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작스런 이야기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그렇게 하면 당장 우리가 문제잖아? 그런 조건을 거는 건 말도 안 되는 것 아냐?”


“맞아, 이건 말도 안 되지.”


그렇게 대답한 시아는 싱긋 웃었다.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걸 보니, 교섭 잘 할 수 있겠네.”


나는 기가 막혀서 그런 이야기를 꺼낸 시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런 내 시선에 돌아온 것은 시아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말이 안 되는 조건도 어쨌든 지금 상상 정도는 해봐야 할 정도라는 거야. 그만큼 지금 우리에겐, 공화국의 힘이 절실히 필요해.”


그리고 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공화국이 로제노프 시를 공격하게끔 하는 것은 그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야.”


워낙 갑작스런 이야기였기에 나는 잠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생각을 할 시간을 벌어보려는 의도였지만, 머리가 새하얘진 상태였기에 내 의도는 결과로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다.


“잠깐, 잠깐,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이런 중요한 협상을 하라고?”


“응.”


“혹시... 내가 방금 네가 예를 든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협상을 해버리면?”


“말했잖아? 네 결정이 내 결정이라고.”


순간 머리가 아파왔다. 비슷한 통증을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었다.


“잠깐, 잠깐. 나는 충분히 합리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알고 보니 그게 말도 안 되게 불리한 조건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걸 생각하면 역시 이런 건 내가 아니라, 어디 외교 전문가가...”


“아니야. 이건 네가 해야 해.”


시아가 즉각 말을 끊고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심지어 시아의 말은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부탁하는 게 아니야.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서 그래.”


“내가... 해야 한다고?”


내가 다소 더듬듯이 그렇게 되묻자 시아는 그제야 비로소 숨을 내쉬며 어깨를 살짝 내렸다. 그리고 단언하듯 말했다.


“맞아, 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러나 그렇게 말한 직후, 시아는 별안간 살짝 달라진 눈매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갑작스럽지만, 네가 해야 할 일 하나 더.”


방금 들은 이야기도 제법 뜬금없는 것이었는데 시아가 연달아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나는 다소 어리둥절해졌다.


“하나 더?”


“어제 했던 이야기,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야기야.”


달라진 것은 눈매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대화 주제까지 바뀌는 바람에 나는 순간 흠칫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이야기라고? 어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역시나.”


그렇게 내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 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너, 전혀 생각 안 해봤구나.”


미약한 실망감마저 느껴지는 말투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 생각이라고 하면... 무슨... 이야기였지?”


어제? 어제 무슨 이야기를 했었지? 그런데 어제라고는 해도, 이제 내게는 어제라는 것이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순간 사고가 멎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가 어제 대화를 나눴던 시아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던 것이다.


“괜찮아. 어차피 하루 사이에 바로 떠올리긴 어려웠겠지.”


그러나 내가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자, 시아는 나를 안심시키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를 일깨우듯 말했다.


“어제, 네가 원하는 걸 생각해오라고 했지?”


“응?”


어라, 그런 이야기... 했었나? 아, 지금 생각하니 그런 주제가 있었지. 그러나 내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시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시간을 더 줄게. 노프 시에서 돌아올 때까지,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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