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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님의 서재입니다.

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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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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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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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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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1]

DUMMY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1]




“여기.”


병원 응급실 앞에서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지나를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일찍 왔네?”


“바로 나왔거든.”


지나는 가볍게 대답했지만 대답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웬 교통사고?”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 이제 들어봐야지.”


“괜찮은 거지?”


“그렇긴 한데...”


나는 대답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나는 시아의 상태를 이미 들었던 것이다.


“일단 들어가자.”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우선 그렇게 중얼거렸다.

응급실 안은 정신없이 북적였다. 블라도스 씨가 있던 구호소 비슷한 느낌도 드는 공간이었다.


“아, 저기 있다.”


시아는 나보다 지나가 더 빨리 발견했다. 지나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시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머...”


시아는 머리에 하얀 붕대를 둘둘 감은 채 잠들어있었다. 하얀 붕대 사이로 흘러내린 까만 머리카락이 숨결에 따라 살포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일단 살짝 마음을 놓았다.


“야, 어떡해... 많이 다친 거 아냐?”


시아가 깰까봐 그런지 지나가 소리 죽여 이야기했다.


“아니, 그래도 이정도면...”


“뭐?”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잖아.”


내가 눈으로 주위를 훑으며 그렇게 속삭이듯 이야기하자, 지나도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나마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머리를 다쳤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지금 와서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니 생각한 것보다는 다행이라는 느낌이었다. 이마에만 붕대 서너 겹을 감아둔 상태였고, 그밖에 눈에 띄는 상처나 치료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 유시아 씨 보호자 되세요?”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던 참이었다.


“어, 저희, 보호자는 아닌데...”


“네. 보호자예요.”


나는 지나의 대답을 끊고 그렇게 답했다.


“선생님 모시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야, 우리가 보호자는 아니잖아?”


바쁜 걸음으로 사라진 간호사 누나의 뒤에서 지나가 불만스러운 듯이 따지고 들었다.


“어... 내가 말하긴 좀 그런데.”


지나와 통화할 때는 슬쩍 얼버무린 이야기였기에 나는 머리를 긁었다.


“시아 부모님은? 언제 오신대?”


“그게... 시아 부모님 안 계셔.”


“뭐?”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게 좋겠지만, 상황이 이러니까.”


지나에게 설명하려는 의도보다는, 내 마음의 부담을 덜고자 하는 느낌으로 중얼거렸더니 지나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고로 나도 부모님 안 계셔.”


“뭐?”


“따로 말할 틈이 없긴 했는데... 굳이 일부러 말할 이야기도 아니고 해서.”


주절주절.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지나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반응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미, 미안...”


“나한테는 미안할 필요 없어.”


그 대답은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유시아?”


여전히 병상에 누운 채로, 시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렇게 대답한 시아는 스르륵 몸을 일으켜서 자리에 앉았다. 동작이 자연스러워서 미처 제지할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어? 누, 누워있어야 되는 거 아냐?”


지나가 당황에 당황을 좀 더 얹어 중얼거리자 시아는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앉아 있어봤자 할 일 없으니까 누워있었던 거야. 자고 있지도 않았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시아의 말투였다.


“아, 유시아 씨 보호자...?”


우리를 향한 목소리에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두 분 다 가족분이세요?”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중얼거린 의사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썼다.


“네. 부모님은 못 오세요.”


시아의 대답은 빠르고 능숙했다. 그런 시아의 대답에 우리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의사 선생님은 안경을 벗어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아... 간단하게 설명할 테니 잘 들어주세요. 아, 수납은 했나요? 머리 부딪친 것까진 말했죠?”


우리를 향하는 동시에 옆에 선 간호사 누나에게까지 닿는 질문이었다.


“네. 수납 끝났습니다.”


“예. 환자분 지금 머리를 부딪쳤는데... 다행히 큰 외상은 없는데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선생님은 손에 든 두개골 촬영 화상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후향성 기억상실증입니다.”


“네?”


“이게 흔한 경우는 아닌데, 흔히들 말하는 기억상실 있잖아요? 지금 그 상황입니다.”


나는 통화하면서 먼저 들었으므로 좀 덜 놀랐지만, 지나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기, 기억상실이요?”


“아, 그렇다고 해서 엄청 심각한 상태까지는 아니고... 이게 오래돼서 단단한 기억들이 사라지는 경우는 잘 없어요. 최근 기억에 문제가 좀 있긴 한데, 사람 알아보거나 집 찾거나 하는 거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보통은 그런 장기 기억 말고 단기 기억들이 문제가 되곤 해서.”


어라, 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어쨌든 그런 식으로 가볍게 설명한 의사 선생님은 불편한 듯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그러니까 환자분... 최근 기억이 지금 좀 불안정해요. 대충 며칠 정도?”


“최근 기억이요...?”


“좀 오래된 기억들은 괜찮을 겁니다. 물론 지금 잃어버린 기억도 안정을 취하다보면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 머리도 찍어봤는데 당장 딱히 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


손에 든 촬영 화상을 보며 의사 선생님은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퇴원하셔도 괜찮지만 억지로 기억 떠올리려고 하지는 마세요. 일단은 푹 쉬는 게 중요하니 당분간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하시고요. 그리고 혹시 속이 울렁거린다거나 어지럽다거나 하면 바로 병원 오셔야 해요. 절대로 집에서 참지 말고. 알겠죠?”


“아, 네.”


주의사항은 간결했다. 그 말을 남긴 의사 선생님이 바쁘게 자리를 뜨자, 간호사 누나가 살짝 웃었다.


“너무 불안해하시지 말고 일단은 푹 쉬세요. 부딪친 부위는 아직 많이 부어있으니 얼음으로 찜질 자주 해주시고요. 그럼 퇴원하시면 됩니다.”


“퇴원이요? 바로 퇴원해도 되나요?”


“보자, 오늘 아침 일찍 입원했는데...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으니 괜찮을 거예요. 혹시 모르니 옆에서 부축은 해주시고요.”


지나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담백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용 자체는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일이었다.


“괜찮아.”


간호사 누나가 자리를 뜨자, 시아가 약간은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괜히 신경 쓰게 했네.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교통사고라니?”


지나가 당혹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자동차가 덮친 모양이야.”


“뭐어?”


“자동차에 직접 부딪친 건 아니고, 피하다가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쳤대.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지.”


기억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아의 설명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그 담담함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위화감을 내가 인지한 순간, 시아는 가냘프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기억에 없는 걸 말하려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방금 설명 들었지?”


“기억이... 없어?”


“그게 많이는 아닌 것 같은데...”


기억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시아가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최근 요 며칠 기억이 안 떠올라.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시아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기억상실이라. 기억상실이라.


“그, 그럼 다른 다친 곳은 없고? 사고 낸 사람은? 신고는 했어?”


“벌써 왔다갔어. 그러고 보니 경찰서에서 오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경찰서에서?”


내가 그렇게 되물은 순간이었다.


“아... 유시아 씨?”


뒤를 돌아봤더니, 마치 미리 등장 준비라도 한 것처럼 경찰이 한 명 서있었다.


“교통과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아침 사고 건 때문에 왔는데요.”


아, 이 사람이 운전자인가. 그러고 보니 옆에 사람이 한 명 더 서있었다. 별다른 특징이 느껴지지 않는, 그냥 말 그대로 평범한 남자가 제법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왔다.


“간단히 확인할 게 몇 가지 있어서요. 지금 잠시 대화할 수 있으신가요?”


“아, 지금 상태가...”


지나가 그렇게 입을 열자 경찰관은 가볍게 말을 받았다.


“당시 상황 정확히 기억 못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와서요.”


“예, 괜찮아요.”


시아가 그렇게 대답하자 지나도 할 말은 없는지 뒤로 살짝 물러섰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서있자, 지나가던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 이렇게 많이 들어오시면 안 돼요! 보호자 한 분 말고는 나가주세요!”


“사고 조사 때문에 왔습니다.”


그러잖아도 혼잡한 공간인데 병상 옆에 사람이 주르륵 서있다 보니 눈에 잘 띄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깐 나가있을까.”


누구 한 명만 남아있는 것도 그렇고, 둘 다 남아있을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런 중얼거림을 들은 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있어. 끝나면 연락할게.”


“응.”


썩 내키지는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시아도 권유하는 마당에 안에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아, 이거 참... 학생, 몸은 좀 괜찮아요? 정말 미안합니다.”


응급실을 나서는 우리 뒤로 그런 인사가 들려왔다.


“하아... 저기 안은 정신없네.”


응급실을 나오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벽 하나 사이에 두고 느낌이 다르네.”


“그러게.”


나는 살짝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많이 안 다쳤다니까 다행이네.”


“음.”


“아닌가? 다친 표시가 없어서 그런가?”


“머리에 붕대 감고 있었잖아.”


“교통사고인데 이 정도로 끝나서 정말로 다행인 거지.”


그렇게 중얼거린 지나는 잠시 뒤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아닌가? 결국 차에 부딪힌 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교통사고 맞나?”


“그러게.”


내가 그렇게 대답한 순간 나는 지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크.


“왜?”


“뭐가?”


“너 내 이야기 안 듣고 있었지?”


쩝, 눈치 하나는 빠르군.


“그건 아니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스윽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 찾아?”


“여기 병원이면... 경찰들도 제법 많이 왔다 갔다 하나?”


무심코 중얼거린 후에야 나는 그렇게 입을 연 것을 후회했다. 윽, 생각을 하고 말했어야 하는데.


“경찰? 병원에 경찰은 왜?”


“어, 그게.”


“너 뭐 죄 지은 거 있어?”


아아아아. 이럴 줄 알았어. 괜히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군.


“그럴 리가 있나.”


“그런데 왜?”


내 주위 사람들은 약점을 파고드는 능력이 참 좋단 말이야. 나는 그래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게 경찰이라고 하면... 별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에? 진짜 뭐 죄지은 거 있어?”


“아아아,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하게 보지 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듣기 전에는 넘기지 않을 기세였기에 나는 다시 한 번 섣불리 입을 연 내 자신을 책망했다.


“그, 옛날에 사고에 좀 휘말린 적이 있어서.”


“사고? 무슨 사고?”


윽, 막상 말하고 보니 이것도 지나가 호기심을 부추길만한 단어였다.


“아, 어릴 적 이야기야. 사실 오래돼서 기억 잘 안 나.”


“기억 잘 안 나는데 아직 신경 쓴다고?”


말을 하면 할수록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으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 아.


“어... 나 부모님 안 계신다고 했잖아.”


내가 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지나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사고 때문에 그런 거라.”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자 지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 저, 미안.”


“괜찮아, 옛날 일이니까.”


원래 여기까지 설명할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군. 우리는 짧은 침묵을 사이에 둔 채 잠시 그렇게 앉아있었다.


“저... 부모님이라고 하면, 혹시 두 분 다...?”


퍽이나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응.”


내가 그렇게 답하자 지나는 눈에 띄게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음, 이런 반응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그랬구나... 미안.”


“미안할 거 없어. 어차피 엄청 어릴 때 일이고... 이젠 기억도 잘 안 나.”


빈말은 아니었다. 사실 워낙 어릴 적 일이라 이젠 부모님 얼굴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래서 경찰 아저씨들 지겹도록 봤었지. 그때 이후로는 경찰 보면 반사적으로 좀... 음, 그러니까 별로더라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숨기려고 했던 건 아냐.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


나는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 그런 생각 안 했거든? 나야말로 미안.”


지나가 살짝 당황한 채로 사과해왔지만 누가 봐도 무슨 사고인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기에 나는 슬쩍 이 주제에서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기억상실이라. 실제로는 처음 보네.”


아차.


“야, 꿈에서는 네가 기억상실이라고 말하고 다니잖아?”


윽... 이야기가 여기로 튈 수 있다는 걸 미리 생각했어야 하는데.


“아, 그렇...지.”


“그런데 진짜로 기억상실인 건 아니잖아? 핀 아이켈 역할하기 편하니까 그냥 기억상실이라고 둘러대고 다니는 거 아냐?”


“나보고는 꿈 이야기 하지 말라며...”


“아.”


“그 반응은 뭐야...”


지나는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입을 완전히 다문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래도 꿈에서는 물어볼 수가 없으니까... 여기서야 알고 있지만 제대로 들은 적은 없잖아.”


변명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진 않은지 열심히 쫑알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서 좋겠네.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연습하면 할 수 있나?”


맞아... 그러고 보니 내가 이렇게 자각몽을 꿀 수 있게 된 것도 따지자면 그 사고 때문이었지. 굳이 꺼내려고 하지 않았던 기억 한 조각이 지나의 중얼거림에 걸려 올라오는 바람에 나는 순간 살짝 혼란스러워졌다.


“...왜 그래?”


“응? 아, 미안. 뭐라고?”


“역시 안 듣고 있었네.”


“듣고 있었어. 자세히 못 들어서 그렇지.”


“그게 그 말이잖아.”


계속 이야기해봤자 혼나기만 할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마침 생각난 의문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기억상실이라고 하면... 기억이 없다는 거잖아?”


“응?”


“그것도 최근 기억이 없다는 거잖아?”


다소 맥락 없이 중얼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즉각 내 이야기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알아들었다.


“시아 말이야?”


“그럼... 우리에게 왜 말을 안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기억하지 못 하는 거 아니야?”


지나도 그제야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고 보니, 연달아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잠깐, 혹시... 최근에 있었던 일을 통째로 기억 못 하는 거면 공주로 겪은 일도 기억 못 하는 건가?”


“어?”


평범하게 생각해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물론 그 기억의 결손이란 게 어느 정도인지는 시아에게 직접 들어봐야 알겠지만.

나는 잠시 그런 상황을 분석하느라 입을 다물었다. 지나도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또 다시 끊어졌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시아에게 물어봐야 된다는 거잖아?”


“그렇지?”


결론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기에 매우 싱거웠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지나는 맥이 빠진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가 되묻자 지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내 심정도 대충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응급실로 통하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걸릴까.


“어, 나왔다.”


마침 무료함을 느끼기 시작할 쯤에 응급실 문이 덜컥 열리더니 방금 본 두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여전히 긴장한 눈치였지만 살짝은 편안해진 표정이었고, 경찰관은 매번 겪는 일이라는 듯 살짝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음... 살면서 경찰이랑 또 엮일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하긴 이번에는 내가 엮인 일은 아니긴 하지만.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뭐해? 들어가자.”


“반장님, 가시죠. 진술 청취 끝났습니다.”


지나가 중얼거린 것과 걸어 나온 경찰이 중얼거린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나의 중얼거림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과, 내 근처에 앉아있던 경찰관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도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또한, 그렇게 동시에 일어서는 바람에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본 얼굴이 어쩐지 익숙한...


“어?”


우리가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고 중얼거린 것도 동시였다.


“아, 너...”


윽, 무심결에 새어나온 중얼거림이 문제였다.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차수휘?”


아고, 어째 감이 안 좋더라니.


“안녕하세요...”


그래도 간만에 봤는데 죽을상을 짓고 있어서야 예의가 아니겠지. 사실 반갑다면 나름 반가운 사람이기도 하니까.


“이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예. 그냥...”


능숙하게 손을 내밀어오는 아저씨와 악수를 하고 나자, 아저씨는 옆에 선 경찰관을 보고 말했다.


“아, 먼저 나가있어. 나 잠깐 인사만 하고 금방 나갈 테니.”


“네.”


나 역시 이 자리를 뿌리치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지나를 쳐다보았다.


“어... 시아한테 먼저 가있어. 나 잠깐만 있다가 들어갈게.”


그러잖아도 지나는 이런 곳에서 뜬금없는 해후를 맞이한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참이었다. 지나의 눈동자가 나와 아저씨를 빠른 속도로 번갈아 훑는 것이 느껴진다.


“...알았어.”


으음... 지금은 묻지 않겠지만 반드시 묻겠다는 느낌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였다. 이거 성가신 일이 되어버렸군.


“그래... 오랜만이다. 우리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너 중학생 때? 이제 고등학생인가?”


“네.”


둘만 남게 되자 그런 질문이 날아왔고, 그래서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 사이에 별일 없고?”


“저야 별일 없죠.”


그런 다음 나는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그 뒤로 뭐 나온 거 있었나요?”


“음... 아니.”


내 질문에 입맛이 쓰다는 듯, 한편으로는 면목이 없다는 듯 아저씨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고생하셨어요.”


그렇게 시간이 오래 흘렀는데 이제 와서 뭐가 발견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생각해보면 이 아저씨도 고생 많이 했을 거야.


“아냐. 반드시 잡았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 해서 면목이 없지.”


“범인이 있어야 잡죠.”


“아냐.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갑자기 어떻게 사라져? 분명 누가 있다니까?”


약간 흥분한 느낌이 묻어나는, 여전히 기억과 똑같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와서 상황 설명을 요구하던, 그때의 아저씨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여전히 그 사건 잡고 계신 건 아니죠?”


반쯤은 의미 없는 질문이라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더니, 아저씨는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지금은 교통과 소속이야.”


대답이지만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가, 정보 들어오는 건 없더라.”


이제 와서 뭐가 더 나올 것 같지는 않다만. 하지만 여전히 이 사건을 파고들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는 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아직도 정신과 다녀? 그런데 여긴 응급실이잖아?”


“친구가 다쳐서요. 아, 방금 그 같이 오신 분이 물어볼 거 있다면서 조사하고 가셨는데.”


“아, 그 교통사고 나서 기억 날아갔다던가 하는 그 학생? 그 학생이 네 친구야?”


“네.”


“허, 참. 세상 좁군.”


세상 좁다. 그 표현이 어쩐지 낯설게 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런 경우 혹시 보신 적 있나요?”


“무슨?”


“기억상실.”


내 질문에 아저씨는 난데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긴 나도 이런 질문 들으면 저런 표정 지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다만.


“그건 의사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봐. 나한테 물어봤자 나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지.”


당연하지만 걱정스러워서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뇨. 그냥 말 그대로 묻는 거예요. 경찰 생활하면서 이런 경우 보신 적이 있나요?”


내가 재차 되묻자 그제야 아저씨는 갑자기 그런 걸 왜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답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 나도 내가 담당한 사건에서는 본 적 없는데... 그렇다고 아예 없었던 경우는 아냐. 가끔, 말 그대로 아주 가끔 들려오지.”


“들려온다고요?”


“사건 처리하다가 드문 일 겪으면 동료들끼리도 이야기하고 그러지. 그래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오니까.”


아주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경우도 아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다.


“그런데 왜?”


“아, 그냥 신기해서요.”


나는 적당히 대답을 뭉뚱그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연락 좀 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연락 한 번이 없냐. 여전히 혼자 사나?”


“네.”


“그래... 연락 좀 하고 그래. 그렇지, 혹시 친구 사고 관련해서 궁금한 거 있으면 내가 다 챙겨줄 테니 연락하고. 저 사건 담당이 내 후배니까.”


“감사합니다.”


만난 상황이 나빴을 뿐, 만난 사람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 일 있어서 먼저 간다. 친구 잘 챙겨주고.”


“네.”


“연락해.”


아저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며 기억에 있는 걸음걸이로 사라져갔다. 그야말로 짧은 해후였다.


“하...”


아저씨의 모습이 문을 넘어 사라진 이후에야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옛 기억을 떠올렸더니 속이 미식거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옛날과 달리 토할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기분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군. 나는 이마를 감싼 채 잠시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어, 왔네.”


응급실에 들어가자 지나는 이미 짐을 다 챙겨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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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7] 23.09.23 28 1 22쪽
28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6] +2 23.09.22 31 1 14쪽
28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5] 23.09.21 29 1 20쪽
28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4] 23.09.20 29 1 20쪽
28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3] 23.09.14 34 1 19쪽
285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2] +1 23.09.09 32 2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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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0] +1 23.09.03 31 2 21쪽
282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9] 23.09.02 31 1 22쪽
281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8] 23.09.01 31 1 21쪽
28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7] 23.08.30 35 2 21쪽
27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6] +1 23.08.29 35 2 27쪽
27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5] 23.08.28 38 2 17쪽
27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4] 23.08.27 34 2 19쪽
27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3] +1 23.08.26 35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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