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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님의 서재입니다.

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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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최근연재일 :
2023.09.29 06:00
연재수 :
295 회
조회수 :
60,118
추천수 :
1,923
글자수 :
2,498,372

작성
23.09.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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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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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9]

DUMMY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9]




“윽?”


다급하게 다가온 누군가와 가까스로 충돌을 피한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더 물러섰다.


“어라?”


그러나 그 누군가는 아는 얼굴이었다.


“...라미?”


“...핀?”


라미는 당황한, 그리고 다급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부딪힐 뻔한 상황을 피하느라 잠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는 시간이 흐른 후, 라미는 황급히 내 어깨를 붙잡아왔다.


“피, 핀? 괜찮아? 괜찮아?”


“아, 응...”


부딪히지 않았는지 확인하듯 연거푸 물었지만, 듣고 보니 어쩐지 부딪힌 것을 염려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내 위아래를 훑어본 라미는 잠시 후에야 표정이 약간 풀렸는데, 그렇게 풀린 표정은 단순히 풀리기만 한 수준은 아니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벌써 움직여도 되는 거야...?”


엑, 나는 라미의 얼굴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울먹거린다는 표현을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울먹거린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라미가 나를 만나면 무슨 얼굴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반응은 내 머릿속을 헝클어놓기 충분했다.


“아, 그... 잠깐 일이 있어서...”


당혹스러움에 내가 떠듬떠듬 이야기했더니, 잠시 후 라미는 천천히 손으로 붙잡고 있던 내 어깨를 살짝 놓았다. 그리고 어쩐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혼이 날 줄 알았는데. 하다못해 원망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무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라미의 말에 나는 순간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결국 시아를 따라나선 나를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미가 건네는 말에는 그런 느낌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거기 담겨 있는 것은 온전히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뿐.


“으, 응. 괜찮아.”


처음 본다면 처음 보는 라미의 모습에 나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하고 나자, 비로소 라미는 표정을 약간 더 풀었다.


“그래도 아직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움직여도 괜찮대? 치료 더 안 받아도 돼?”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바뀌니까 당황스러운걸. 아, 라미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모습에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옆에서 리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따로 별 말씀은 없으셨습니다만...”


라미는 그렇게 대화에 끼어든 리체를 힐끗 쳐다보았다. 리체도 끼어들고 싶어서 끼어든 것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왕 나오신 김이니 블라도스 님이라도 한 번 만나보고 가시면 어떨까요.”


“블라도스 씨?”


“아까 아침에도 들렀다 가셨어요. 주무신다고 했더니 그냥 가셨지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블라도스 씨도 여기 있어?”


“네. 총사령부와 같이 움직인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구호소에 계시고요.”


그렇게 대답한 리체는 라미를 힐끔 쳐다보았다.


“여기 바로 옆이니, 잠깐 들러보실까요.”


누구에게 말하는 거지. 그러나 라미는 알고 있었다.


“그래.”


라미의 대답에 리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래서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입니다.”


리체는 우리 둘을 두고 앞서나갔다.


“가자.”


라미가 나를 지켜보면서 그렇게 말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비록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고는 해도 부상자는 있는 모양이었다. 리체의 말처럼 얼마 걷지 않아 의무병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구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마치 의무병처럼 환자를 보고 있는 익숙한 얼굴도 발견했다.


“마력전사령관님.”


“응?”


가위와 붕대를 앞에 두고 부상자를 보고 있던 블라도스 씨는 리체의 부름에 그렇게 고개를 돌렸다.


“어...”


좀은 놀란 눈치. 블라도스 씨는 우리를 한 명씩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나에게 시선을 꽂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자네 벌써 일어나도 괜찮나?”


윽, 안 되는 거였나? 그러나 리체가 능숙하게 그 말을 받아주었다.


“괜찮다고는 하시는데, 정말로 괜찮은가 싶어서 와봤습니다.”


“그래?”


블라도스 씨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면 꽤 오랫동안 환자를 보고 있었나 보군. 가위와 붕대를 자리에 내려놓고 블라도스 씨는 일어섰다.


“이봐, 여기 처치는 자네가 좀 하게.”


옆에서 같이 환자를 보고 있던 남자가 당황했지만 블라도스 씨는 개의치 않았다.


“잠깐 쉴까. 이리로 오게.”


휘적휘적, 블라도스 씨는 몸을 놀려 구호소 구석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바쁘시네요.”


“어...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묻고 나니 뭔가가 이상하다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환자를 보실 일이 아니지 않나요? 사령관이나 되시는 분께서...”


“하하하, 그렇지. 일이라고 한다면 내가 직접 할 일은 아니지.”


“그럼요?”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야.”


“일이 아니라뇨?”


“업무가 아니라 내 취미생활중인 거지.”


취미생활?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이렇게 병자들을 돌보는 게 취미생활이라고? 그러나 블라도스 씨의 표정은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매우 밝아보였다.


“마침 당장 내 손이 비어있기도 하니까. 어, 거기들 앉으쇼.”


여기는 휴게실인가, 창고인가. 적당히 대충 모양새만 만들어둔 듯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블라도스 씨는 물병에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더니 딱히 의자로 보이지는 않는, 적당한 받침대를 우리에게 자리로 내어주었다.


“그럼...”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자리에 앉자, 블라도스 씨는 대뜸 입을 열었다.


“입을 벌려보게.”


“네?”


“진찰을 해야지. 입을 벌려보게. 아~”


이렇게 보는 거야? 내가 엉겁결에 입을 벌리자, 블라도스 씨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내 입안을 들여다보았다.


“목이 아직 많이 부었고만.”


블라도스 씨가 혀를 차듯 이야기하자 입을 벌리고 있는 나 대신 리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말씀은...”


“아, 말 그대로야. 목이 아직 많이 부어있다고.”


리체가 원하는 방향의 대답은 아닌 것 같은데.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내 그 이야기에 대한 질문이 또 이어졌다.


“그럼?”


다만 그 질문은 리체가 던진 것이 아니었다. 라미가 그렇게 입을 열자, 블라도스 씨는 입을 열 줄은 몰랐다는 듯이 라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씨익 웃었다.


“걱정할 필요까진 없을 거요. 비전문가의 판단이긴 하지만.”


엥? 입을 열고 있었기에 질문은 하지 못 했지만, 어째 쉽사리 이해가지 않는 그 대답에 내가 눈을 크게 떴더니 블라도스 씨는 조금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약학에는 나도 조예가 썩 깊진 않아서. 사실 내과도 잘 모르고. 난 외과에만 관심이 있거든.”


“치유계통이 전공 아니셨나요...?”


“치유계통이 전공인 마법사인 거지, 의사는 아니니까.”


“그럼...”


리체에 이어 라미가 다시금 입을 열자 블라도스 씨는 라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정도면 딱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 정도는 말해줄 수 있소. 목이 좀 부어있는 것 말고는... 이제는 열도 없군. 아, 입 다물어도 되네. 왜 아직 벌리고 있어?”


“그런 건 일찍 말해달라고요...”


“괜찮으니 가서 조금 쉬면 될 거야. 젊으니까 내일이면 완전히 멀쩡해질걸.”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감 있는 말투에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블라도스 씨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사실 이런 건...”


블라도스 씨는 그런 식으로 가볍게 입을 열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이런 건?”


그러나 그런 내 중얼거림에 블라도스 씨는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닐세. 자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복잡한 느낌이 드는 한 마디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의식은 못하고 있었지만, 블라도스 씨도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하긴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거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실제로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죠?”


“아까 말했잖은가? 이게 내 취미라고.”


아, 그랬지. 나는 맥이 빠졌다.


“취미치곤... 좀 특이하시네요.”


“마법사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의사가 되었을 거야. 나는 저런 상처 수술하는 거 좋아하거든.”


“수술을 좋아한다고요?”


윽, 이 무슨 악취미람. 나는 나도 모르게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나 리체와 라미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냥 수술 대신 마법으로 고치면 되는 거 아녜요?”


“아하하, 나야 마법으로 고치면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법을 쓰지 못하잖나.”


“네?”


“마법을 써서 고치는 것과 다름없다면, 그 사람도 마법사라 부를 수 있겠지.”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나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자니, 옆에서 리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에블도트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그렇지. 말했었지?”


아,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블라도스 씨는 푸념하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사실 마법은 쓸 수 있어서 쓰는 거지, 내 관심사는 오히려 마법을 쓰지 않고 사람을 치료하는데 있어. 특히 그중에서도...”


기분 탓일까. 블라도스 씨의 눈빛이 살짝 번뜩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묘한 감각에 나는 나도 모르게 대뜸 입을 열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셔도 돼요?”


“응?”


“마법을 쓰고 싶어도 못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나눠주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마법을 쓰지 않고도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끄응, 이 사람이랑 이야기하면 항상 이길 수가 없다니까.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중간에 끊어 낸 것은 놀랍게도 라미였다.


“그런 이야기는 됐어.”


누구도 라미가 입을 여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휴게실 안에 잠깐 적막이 감돌았다.


“그래서... 지금 상태가 어떻다는 거야?”


“상태?”


라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나를 가리켰다. 그 시선에 블라도스 씨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으레 그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소. 괜찮다고.”


자세하게 말할 것까지 없다는 투였다. 라미는 블라도스 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만히 그 대답을 받아들었고, 그래서 우리가 있는 공간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들었다.


“읏차.”


그러나 그런 적막을 대하는 블라도스 씨의 솜씨는 능숙한 것이었다.


“그럼 돌아가 볼까.”


“쉬신다면서요?”


“방금 쉬었잖은가. 물도 마셨고.”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블라도스 씨는 진심으로 한 말인 모양이었다. 실제로 자리에서 일어난 블라도스 씨는 담담한 시선으로 리체를 쳐다보았다.


“그 외엔 용건 없지? 혹시 아델리체 양도 어디 다치셨는가?”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을 끌면서 블라도스 씨는 라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라미는 그런 블라도스 씨의 시선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블라도스 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됐네. 먼저 나가보겠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리체가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블라도스 씨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손만 대충 흔들면서 천막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블라도스 씨가 나가고 나자 내부는 다시 조용해졌고, 우리는 그 조용한 가운데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괜찮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그 침묵을, 리체는 그런 중얼거림으로 깨어버렸다.


“그럼... 저희도 가실까요?”


리체의 권유에 라미도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는 리체를 따라 천막을 빠져나왔다.

잠시 피했을 뿐인데 다시 바람을 맞자 눈이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바람을 가렸다.


“...크게 이겼다고 해도.”


“응?”


“크게 이겼다고는 해도, 부상자가 없는 건 아니군요.”


리체는 걸음을 멈춘 채 소란스러운 구호소 내부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내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니, 거의 비슷한 감상에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하긴 부상자뿐만 아니라...”


그러나 그렇게 입을 열던 리체는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이상한 이야기였네요.”


자기 자신도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돌아가시죠. 더 쉬시는 게 좋겠어요.”


“...응.”


그러나 내가 그런 리체의 안내를 받아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블라도스 님! 블라도스 님!”


어디선가 분주한 느낌이 든다 했더니, 병동 귀퉁이를 돌아가기 직전 누군가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크게 부딪힐 뻔했다.


“괘,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그러나 나와 부딪힐 뻔한 남자는 사과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를 지나쳐 구호소로 들어서며 여전히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중이었다.


“의무병! 의무병!”


등에 누군가, 그러니까 사람을 업은 채라는 것은 잠시 후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 후에 나는 그 사람이 피투성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무슨 일...”


“블라도스 님 어디 계셔! 블라도스 님!”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남자에게 접근한 의무병이 피투성이인 남자를 보고 순간 숨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칼에 찔렸어! 숨을 제대로 못 쉬어!”


뭐? 지금 어디서 전투라도 벌어졌나? 내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아, 잠깐. 지금 무슨 일인가?”


마침 그 남자 뒤를 쫓아 우르르 달려오는 병사들이 있었기에 나는 무심코 그렇게 말을 걸었다.


“비켜!”


그러나 그런 대사와 함께 황급한 표정으로 나를 그냥 지나쳐 가던 병사 중 한 명이 순간 당황한 듯 몇 걸음 가다말고 발을 멈췄다. 아마 내가 군단장이라는 것을 알아 본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이제 군단장도 아니니까 이렇게 묻는 것도 이상하군.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슨 일이지?”


그렇게 걸음을 멈춘 병사에게, 옆에서 리체가 다시 물었다.


“아, 저... 그, 포, 포로수용소에서 소란이 좀 있어서...”


“포로수용소?”


“네, 네. 자, 작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포로 한 명이 칼을 들고 반항하는 바람에...”


그렇지. 부상자가 있으면 포로도 있겠지. 생각지도 않았던 사실을 잇달아 확인하고 나자 머리가 어쩐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알겠어. 가보도록.”


“네.”


리체는 내 눈치를 살짝 살폈다.


“어디서 또 전투라도 벌어졌나 했네요.”


“아니라서 다행이군.”


나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리고 난 후에야 이게 다행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다쳤는데 다행이라니.


“돌아가시죠.”


“응.”


크게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부상자는 있다. 그리고 부상자뿐만 아니라 사망자도 있겠지. 리체가 하지 않은 말에서 그 정도는 읽어낼 수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게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포로도 있겠지. 물론 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걸어가면서 나는 진지 내부를 멍하니 눈으로 훑어보았다. 여기 어딘가, 분명 수용소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것 말고도 승리라는 찬란한 이름에 가려진 어두운 것들은 당연히 더 있을 것만 같았다.

빛과 그림자. 문득 그런 표현이 떠올랐다. 서로 각각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는, 같은 곳에 존재하면서 서로가 서로에 있어서 이면이 되는 존재들.


“핀 님?”


“응?”


“이쪽이에요.”


아, 생각에 잠긴 사이 내 발은 나를 엉뚱한 곳으로 인도한 모양이었다.


“아, 미안.”


“사과하실 필요 없잖아요.”


리체가 핀잔 주듯 대답해왔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리체는 잠시 후 뭔가 생각난 것처럼 갑자기 고개를 돌려 라미를 쳐다보았다.

내 옆을 따라오고 있던 라미는 처음에는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우리가 걸음을 멈춘 상태다 보니 잠시 후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리체의 시선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처음에 라미는 그런 리체의 시선을 무시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 눈치를 깨닫자, 리체는 즉각 입을 열었다.


“라미 님.”


리체의 부름에 라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리체는 그런 미세한 변화를 대답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혹시... 막사에 들렀다가 여기로 오신 건가요?”


라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을 생각인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인지는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아라미르!”


어디선가 들려오는 갑작스런 목소리.


“아라미르!”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라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 응? 잠깐? 이 목소리는?


“아라미르!”


블라도스 씨가 급히 이름을 외치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라미르!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아라미르!”


우리는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온 블라도스 씨는 가쁜 숨을 거세게 몰아쉬며 아라미르 앞에 섰다. 헥헥거리며 고개를 숙인 채였다.


“무슨 일이지?”


“아라미르 당신...”


블라도스 씨는 입가를 손으로 훔치며 힘겹게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급한 듯이 툭 단어를 내뱉었다.


“심장.”


“뭐?”


“예전에 심장을 꿰뚫린 적이 있었지? 그런데도 살아났었지?”


라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러나 블라도스 씨는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방금 온 친구가 심장, 심장을 찔렸어. 그것도 깊게.”


숨을 몰아쉬느라, 그리고 침을 삼키느라 블라도스 씨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제발 살려주시오. 출정 직전에 결혼한 친구요.”


당황스런 상황에 나는 다시 한 번 라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살짝 당황한 모양이던 라미도 이제는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내가 왜?”


평정을 되찾은 라미의 차가운 말에 블라도스 씨의 호소가 폭발했다.


“집에 아직 걷지도 못하는 갓난아기가 있는 친구야! 제발! 제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라미의 말은 차가웠다. 그리고 말만 차가운 것도 아니었다.


“핀.”


“으, 응?”


“나 먼저 갈게.”


라미의 말투는 몹시도 담담했다. 그래서 나는 당황했고, 그 당황함 사이로 라미는 정말로 무덤덤하게 몸을 돌려 자리를 그냥 떠나버렸다. 그리고 자리에 남은 우리는 라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라미가 사라지고, 내가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수습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허망한 표정으로 라미를 쳐다보고 있던 블라도스 씨가 별안간 굽히고 있던 몸을 가볍게 폈다. 그리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쳇, 역시 안 해주는 건가.”


블라도스 씨의 말투가 갑자기 확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는 그런 내 시선쯤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부정은 하지 않는군. 이거 좋은 정보를 얻었는데.”


뭐, 뭐야? 그러나 그런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한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리체 역시 그 모습에 말을 잇지 못하는 듯 했고, 그래서 나는 잠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블라도스 씨...?”


“응? 뭔가?”


“혹시 방금... 연기였어요?”


“연기라니? 진짜로 심장을 찔렸다니까. 자네도 방금 실려 오는 거 보지 않았나?”


블라도스 씨가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바람에 나는 기가 질렸다.


“아뇨. 블라도스 씨 말이에요.”


“아, 나 말인가?”


내가 그렇게 덧붙였더니 블라도스 씨는 그제야 내 질문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살짝 민망한 듯이 중얼거렸다.


“으흠, 역시 조금 어색했나?”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나 블라도스 씨는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그래도 늘 물어보고 싶었거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네?”


“아라미르는 심장이 꿰뚫린 이도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블라도스 씨의 대답에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로디토가 쥔 단검에 심장을 찔린 날에, 피투성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라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었...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설마... 고작 그걸 물어보려고 이런 연기까지 했단 말이에요?”


“이봐, 고작이라니. 나한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고.”


블라도스 씨가 살짝 뚱한 투로 대답해왔다. 그러나 그게 반응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혹시 또 모르잖나.”


“모르다뇨?”


“어차피 살려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처절한 모습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살짝 마음이 흔들릴지도? 그럼 충분히 연기해볼 가치는 있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린 블라도스 씨는 고개를 들어 라미가 사라진 공간을 쳐다보았다.


“물론 전혀 안 흔들린 것 같지만.”


부족한 연기력을 자책하는 듯한 술회였다. 그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지만, 블라도스 씨가 실제로 낙담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기에 말을 돌리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기라곤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이야기 잘도 지어내셨네요.”


“지어내다니?”


“방금 집에 어린 자식이 기다리고 있다느니, 출정 직전에 결혼했다느니 하셨잖아요.”


그러나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아, 그건 진짜야.”


“네?”


블라도스 씨의 반응은 담담했다.


“방금 죽은 그 친구, 애가 있어서 출정 직전에 결혼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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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22] 23.09.29 21 1 24쪽
294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21] 23.09.27 23 1 19쪽
293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20] 23.09.26 26 1 16쪽
292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9] 23.09.25 27 1 19쪽
291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8] 23.09.24 34 1 14쪽
29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7] 23.09.23 28 1 22쪽
28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6] +2 23.09.22 31 1 14쪽
28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5] 23.09.21 29 1 20쪽
28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4] 23.09.20 29 1 20쪽
28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3] 23.09.14 34 1 19쪽
285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2] +1 23.09.09 32 2 26쪽
284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1] 23.09.08 27 1 23쪽
283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0] +1 23.09.03 31 2 21쪽
»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9] 23.09.02 31 1 22쪽
281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8] 23.09.01 31 1 21쪽
28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7] 23.08.30 35 2 21쪽
27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6] +1 23.08.29 35 2 27쪽
27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5] 23.08.28 38 2 17쪽
27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4] 23.08.27 34 2 19쪽
27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3] +1 23.08.26 35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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