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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님의 서재입니다.

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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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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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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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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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6]

DUMMY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6]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가 그 중얼거림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미는 이미 확신을 마친 모양이었다. 이마에 손을 대고 있던 라미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군의관을 향해 눈을 떴다.


“돌아가.”


“네?”


“이제 너는 필요 없어. 돌아가.”


수고했다는 말 따위는 조금도 붙이지 않은 담백한 명령이었다.


“어서.”


“네, 넷!”


다급하게 군의관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군의관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던 나는 리체가 황급히 몸을 붙잡아 준 덕에 땅바닥에 다시 널브러지지는 않았다.

얼이 빠진 채로 자리를 뜨는 군의관을 눈으로 쫓는 것을 시작으로, 라미는 천천히 제국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대답은 취소야.”


“네?”


샤닉스의 표정은 시야가 흐릿해서 볼 수 없었다. 물론 라미 역시 나를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라미의 표정도 볼 수 없었다.


“전부 물러서. 핀을 데리고 돌아가겠어.”


그러나 그런 흐릿한 시야 사이로도 샤닉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아, 저희 군의관들이 바로 치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아니, 너희가 할 수 없는 거야.”


그야말로 가벼운 각하였다.


“아, 아라미르 님. 하지만 피, 핀 님의 상태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체가 조심스러운, 그러나 불안한 목소리로 라미를 불렀다. 그러나 라미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니야. 제국군이 치료할 수 있을 독이 아니야. 유시아가 그런 뻔한 독을 썼을 리가 없어.”


라미의 대답은 조곤조곤했다. 그러나...


“유시아에게... 데리고 가야 해.”


그제야 나는 아라미르의 목소리가 분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 없어. 비켜.”


“아라미르 님, 지금 염려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


“마지막 경고야.”


들을 가치가 없다는 선언.


“비켜. 모두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샤닉스의 표정이 순간 당황스러움이 스쳐지나갔다. 당황스러움? 아니, 당황스러움이라기보다는 공포감이랄까. 어쨌든 그런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


“그렇게는 안 되지.”


샤닉스는 그런 대사와 함께 등장한 브루타린을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봐, 샤닉스. 자네 말 들어줬으니 이제 됐지? 이제 내 차례라고.”


그렇게 샤닉스의 말문을 막아버린 브루타린은 멀리서도 이가 보일 정도로 씨익 웃었다.


“결국 이렇게 됐군. 좋아, 아라미르인지 뭔지 한 번 붙어보자고. 그러잖아도 궁금했거든.”


“군단장님.”


“어차피 이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언제고 또 다시 만나게 될 거잖아!”


브루타린이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열이 차오르고 있어서인지 잘은 들리지 않았다.


“4군단 총원 전투 준비! 각 사단 방어 대형으로!”


공격이 아니라 방어진... 결코 뚫고 나가게 놔두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리는 외침이었다.


“브루타린 군단장님!”


그러나 샤닉스가 기겁하며 외친 그 다음 순간이었다.

펑.

한순간 모든 소리가 라미를 향해 빨려 들어간다 싶더니 폭음과 함께 칼날 같은 폭풍이 라미에게서 휘몰아쳐왔다. 폭풍이 부른 거대한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세상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렇게 검푸른 어둠이 세상을 덮... 잠깐?

가뜩이나 흐릿해져가는 시야를 덮은 자욱한 먼지구름 사이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거대한 형태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모습은...


“서로 시간 낭비였군.”


용... 미끈하게 뻗은 몸체에 붙은 거대한 갈기, 거기에 길쭉하게 뻗은 꼬리.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라미, 아니, 아라미르의 뒷모습이었다. 앉아있는 내 시선에서도 마치 하늘 끝까지 닿는 듯한 거대한 체구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는 게 나았을 텐데.”


괜히 싸우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대처한, 소극적인 자신의 태도가 잘못이라는 식의 토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미르는 유연하게 비늘 덮인 목을 스윽 돌리더니 잔잔하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라. 도망가면 뒤쫓지 않겠다.”


목소리는 여전했다. 단지 클 뿐이었다. 특히나 대군을 상대로 두고 있어서인지,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도망? 누구 좋으라고!”


그에 비해 브루타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기세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우리야말로 핀 아이켈을 두고 가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병사들이 이동하는지 좌우로도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브루타린 군단장님!”


“자네는 지원군이나 제대로 대비하고 있어! 녀석들도 이제 군단장이 살아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다!”


브루타린과 샤닉스 둘 다 흥분한 상태였기에 목소리가 컸지만, 거리가 멀어진 터라 자세히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하늘을 갑자기 어둠이 덮었다.

어둠? 그러나 그것은 어둠이 아니라 검푸른 어둠이었다. 아라미르가 긴 꼬리를 둥그렇게 둘러 우리를 감쌌던 것이다.


“타격대 배치!”


시야가 가로막히자 브루타린의 괴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병력이 꽤 되는 만큼 이미 진형을 짠 상태에서도 배치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궁병대, 사격 준비!”


아련한 전투 지휘 사이로 아라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델리체.”


“네?”


“똑바로 안고 있어.”


“네?”


반사적으로 되물은 리체의 얼굴이 굳은 다음 순간이었다.


“사격 개시!”


꼬리 밖에서 함성 소리가 크게 일더니, 함성과 동시에 화살들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별다른 반응 없이 우리에게서 시선을 뗀 아라미르는 조금씩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덩치가 커진다고? 처음에는 내가 뭔가를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몸이 커지고 있는 게 맞았다. 아라미르는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팽창이 정점에 달했다고 생각한 순간, 아라미르가 고개를 치켜세우자 갑자기 시간이 멎었다. 아니, 멎은 줄로만 알았다.


“계속 사격한...!”


그러나 아라미르가 날카롭게 목을 숙인 순간, 세상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귀를 울림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진동이 몸 전체를 습격해왔다.


“아아아악!”


“으, 으아아아!”


콰라라라라락. 한 점에 억지로 우겨넣은 세상이 자그마한 계기를 틈타 폭발하는 느낌. 소리는 둘째 치더라도 땅 자체가 살갗을 찢어내는 것만 같은 파멸적인 흔들림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런 가느다란 시야 사이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아라미르의 뒷모습뿐이었지만, 그 뒷모습 사이로도 아라미르가 뿜어내고 있는 벼락같은 숨결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크아아아악!”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꼬리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로도 바깥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아라미르의 비늘에 튕겨 우리 머리 위로 내려 꽂히는 화살도 몇 발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떨어지다 말고 허공에 투명한 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대로 튕겨나갔다. 마치 거대한 알 껍질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 다시 온다아아!”


귀가 먹먹해져왔다. 소리인지, 아니면 진동인지. 혹은 둘 다인지. 그도 아니면 내 머리가 울리고 있었을 뿐인지. 어쨌든 외침과 함께 다시금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리체가 나를 좀 더 꼬옥 끌어안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를 둘러싼 꼬리가 순간 부르르 경련한다 싶더니 다시금 아라미르가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임계점을 향해 가파르게 타고 오르는, 고양감마저 느껴지는 호흡을 세상도 숨을 멈추고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옆, 옆으로오! 옆으로 산개! 산개해라아!”


흐르던 시간의 끝에 비로소 아라미르의 호흡이 멎자 시간도 잠시 멎었다. 그러나 그 짧은 멈춤 끝에 이어진 것은 방금 전보다도 한층 더 강력한 폭발이었다.


“으아아아악!”


품고 있던 모든 것을 전부 토해내는 듯한 강렬한 숨결. 스스로도 출력을 감당하지 못해 거칠게 앞뒤로 흔들리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아라미르는 어쨌든 스스로의 숨결을 제어해내었다. 땅에 맞댄 몸 전체로 땅이 갈라지는 진동이 거칠게 스며들어온다. 그리고 아라미르는 그 폭발적인 출력을 유지한 채로 대지 전부를 쓸어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휘저어나갔다.

그런 괴멸적인 분출이 끝났을 때 나는 귀가 멍하다고 느꼈다. 벼락같은 굉음을 동반한 파괴였기에 그럴 수도 있다 느꼈으나, 나는 귓가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리체의 옷깃을 깨닫고는 비로소 내 청력은 정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가 멍해서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은 고요했고, 마치 완성된 것처럼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지 화면 다음에 이어진 것은 라미의 뒷모습이었다.


“...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꼬리도, 세상을 가리고 있던 어둠도 온데간데없었다. 평범하게 다시 라미로 돌아온 아라미르는 우리와 살짝 떨어진 곳에 고고하게 서있었다. 그 너머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땅을 갈라놓은 흔적과, 그 흔적 너머로 제국군 군복을 입은 시체들이 희극의 소품처럼 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네... 네년이 감히...!”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브루타린의 절규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런 절규 앞에서도 라미는 무뚝뚝했다.


“이만하면 너희도 알았겠지.”


마치 하늘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거대한 목소리.


“비켜. 나머지도 다 죽여 버리기 전에.”


거대하지만, 차가운 목소리. 그 차가운 목소리 끝에 이어진 소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죽어버린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이제 시작이다!”


그러나 그런 죽음과도 같은 침묵을 브루타린의 목소리는 이겨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외친 브루타린은 옆을 향해 거칠게 손짓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군단장님!”


저어 반대쪽에서 샤닉스의 날카로운 부름이 들려왔지만 브루타린은 그 부름을 무시했다.


“공격 준비!”


“군단장이 살아있다는 걸 눈치 챘을 겁니다! 곧 2군단이 올 겁니다! 지금은 다음을 기약하고 후퇴해야 합니다!”


그 순간 브루타린은 흠칫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이내 기세를 잃지 않고 외쳤다.


“다음에도 똑같겠지. 그때도 또 후퇴할 생각인가!”


“군단장님, 지금 여기서 병사들을 얼마나 소모하실 생각입니까!”


샤닉스는 단칼에 브루타린 군단장의 이야기를 잘라들었다. 그리고 먼 거리에서도 브루타린 군단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우리가 아라미르와 싸우는 것을 유도하는 것이 유시안느 공주의 목적입니다!”


시아의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나는 순간 약간 정신을 차렸다. 이 상황 자체가... 시아의 목적이라고? 그제야 브루타린도 뭔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자, 샤닉스는 다시 라미를 향해 크게 외쳤다.


“아라미르 님! 일단 물러나겠습니다! 공격은 멈춰주십시오!”


하지만 그때였다.


“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귓가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와, 왕국군이다...”


비록 아직 아주 먼 거리기는 했지만, 저 멀리 강가로부터 이어지는 완만한 평지 오르막 끝에서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흙먼지가 일어나는 속도보다 그 흙먼지를 뚫고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는 기병들의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심지어 그 기병들은 내가 지휘하던 2군단 병력도 아니었다. 가장 선봉에 서서 달려오고 있는 저 부대는...


“왕국... 왕국 1군단이다!”


“왕국군 기병대 북동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우회 기동 중!”


깃발에 그려진 문양이 보일 거리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깃발의 색깔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깃발의 색깔을 확인한 순간, 제국군 사이에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번개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국 2군단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접근하고 있는 기병대... 왕실 친위대입니다!”


표정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먼 거리였지만, 나는 브루타린이 순간 이를 악무는 것을 보았다.


“방어! 방어 대형 유지!”


그제야 나는 제국군이 즉각적인 후퇴 명령을 내릴 수가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나를 강가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제국군 역시도 강가에 몰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문제는 그게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뒤로... 전부 뒤로 돌아서!”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제국군은 전장의 한가운데를 이미 잃고 있었다.

휘하의 사령사단들도 근처에 있겠지. 그 병력들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을까. 정신이 혼미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 있는 이 병력들만큼은 포진을 위해서는 우리가 있는 여기 이 가운데 위치한 지대를 활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빨리! 빨리 움직여!”


이미 전투를 거친 이 공간은 제국군이 진형을 짜는데 걸림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시체들이 즐비한 전장에서 제대로 된 진형을 짤 수가 없는 것도 분명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아라미르 님!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라미가 여전히 자리에 서있었다. 지금 이렇게 라미가 지키고 선 땅을 버려둔 채 병력을 재배치하기란 누가 봐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샤닉스는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비켜주십시오! 이대로 왕국군이 승리하게 두실 겁니까! 병력이 움직일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샤닉스의 외침에 라미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그때였다.


“안 돼요.”


여전히 나를 끌어안다시피 붙잡고 있던 리체가 드물게도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했다. 이제까지 리체가 무슨 말을 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라미가 그 대답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릴 정도였으나, 리체는 그런 라미 앞에서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그랬다간... 분명 군단장님이 위험해질 거예요.”


리체가 그런 말을 하며 내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바꿔 덮은 순간에야 나는 내 머리가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었다. 리체의 손이 얼음장 같이 느껴졌지만, 이런 날씨에 리체의 손이 그렇게 차가울 리는 없을 터였다.


“우리는 핀 아이켈 님께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겁니다! 지나갈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사고가 멎을 것 같은 현기증 속에서도 라미의 얼굴에 고심 한 가닥이 스쳐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라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리체였다.


“안 돼요.”


조금이라도 더 열기를 빼앗겠다는 듯이, 내 이마를 덮는 손에 꼬옥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다간 분명히... 분명히 우리도 전투에 휘말릴 거예요.”


리체치고는 보기 드물게 확고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런 대답에도 라미가 낭패스러운 표정을 풀지 않자, 리체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라미르 님.”


둘의 눈이 마주친다.


“저 요구를 들어줬다간, 분명히 핀 님 역시 전투에 휘말릴 거예요.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라미를 가르치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을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은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라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질끈 감았다.


“아라미르 님!”


그러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라미는 눈을 떴다.


“내 대답은 같아.”


샤닉스의 표정이 헝클어진다.


“경고한다. 이쪽으로 오지 마.”


“아라미르!”


존칭은 생략한 절규였다.


“북동쪽 왕국군 친위대 접근!”


“왕국군 2군단 농지에서 나왔습니다! 이쪽으로 전진 중입니다!”


우왕좌왕하는 제국군 사이로 흡사 비명과도 같이 상황이 전파되자 샤닉스는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라미를 두고 뒤로 돌아섰다.


“전진! 7군단 이대로 전진해서 왕국 2군단 쪽으로 이동한다! 각 사령사단에 당장 전파해!”


뒤로 물러서 진형을 정비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에는 조금이라도 전진해서 부딪히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샤닉스의 지휘는 급박하고도 간결했다.

2군단을 묶어두는 역할은 7군단이 맡고 있었던 모양이었는지, 샤닉스 뒤에 붙어있던 부하들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말을 타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렇게 씩씩거리며 서있던 샤닉스는 뒤를 돌아 라미를 노려보았다. 아주 잠시 동안.


“왕국군 옵니다!”


여전히 저 멀리 기치를 올리고 달려오는 왕국군 병력이 망막에 남았다. 열기가 차올라 시간의 흐름도 이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눈만 뜬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과정을 마치 제삼자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머얼리 앞쪽으로 나갔던 제국군 병사들이 언젠가부터 점차 뒤로 물러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전장에서 오가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제국군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시체를 넘고, 시체에 걸려, 시체가 된다. 그 시체들을 넘는데 성공한 제국군은 라미에게 다가오다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라미에 의해 시체가 되었다.


“으아아아!”


꽤나 멀리 나간 것처럼 보이던 제국군 병력은 계속 뒷걸음질 치던 모양이더니 어느 사이엔가 우리에게 꽤나 가까운 위치까지 후퇴해있었다. 그리고 그 제국군 병력을 라미는 마치 모루처럼 자리에 버티고 서서 온전하게 단신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라미의 도륙은 간결했다. 라미는 다가오는 이들을 모조리 잠재적인 위협으로 취급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생사를 가르는 경계라도 거기 있는 것처럼, 병사들이 그 경계를 넘어서는 족족 생명을 박탈당한 것처럼 허망하게 쓰러져 간다.


“아라미르으으!”


먹먹한 청각 사이로 후퇴하던 제국군 병사가 검을 들고 라미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물론 그 시도는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괴이한 각도로 목이 꺾인 병사는 검을 놓치고 힘없이 자리에 쓰러졌다. 그런 병사가 수십 수백 명은 되었다. 검을 들었든, 들지 않았든, 그게 검이었든, 아니든, 우리를 향해 접근하는 병사들은 모두 라미에게 접근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쓰러져 갔다.

그렇게 쌓인 시체의 산까지 가까스로 넘어온 병사들도 결국 다시 시체가 되어 쓰러져갔다. 호흡마저 가빠오기 시작한 나는 리체의 품에 안겨 간신히 의식의 끈을 붙잡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아, 하아...”


“핀 님! 정신 차리세요!”


어느 순간 제국군 병사들이 라미 앞에서 쓰러져 가는 역동적인 장면들이 갑자기 단조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끊임없이 귓가를 울리고 있던 수많은 소리들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 함성 소리, 알 수 없는 비명 소리... 모든 소리가 사라지자, 비로소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군단장님! 군단장님!”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찾은 순간에야, 나는 비로소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더 이상 라미 앞에서 쓰러지는 병사들이 존재하지 않음도 깨달았다. 나는 쓰러진 병사들을 앞에 두고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라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어깨를 덥석 붙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약간 정신을 차렸다.

아, 전투가 끝났었네...? 언제 끝난 거지...? 간신히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를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가닐...”


혀가 말라붙어 발음이 잘 안 된다. 나를 반쯤 뉜 채로 붙들어 올린 가닐영은 내 증상을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리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둘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을 때였다.


“아델리체.”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가닐영과 리체 둘 다 흠칫 옆을 돌아보았다.


“가서 공주를 불러와.”


“네?”


“어서.”


어느새 라미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라미는 자리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 공주님을요?”


갑작스런 이야기에 리체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지금 당장 유시아를 불러와.”


“공주님은... 지금 왕궁에 계십니다. 거길 다녀오려면... 못해도 시간이...”


그러나 리체가 당황한 말투로 그렇게 떠듬떠듬 대답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모두 물러서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순간 흠칫 움직임을 멈췄다.

저어 멀리서 화려한 기치를 내걸고 접근해오는 무리가 있었다.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기에, 나 역시 눈동자를 움직여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시아...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걸어오는 그 모습이 워낙 평온했기에 나는 잠시 이곳이 전장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시아가... 어째서 여기에...? 내가 간신히 그런 의문을 떠올린 사이에도 시아는 가볍게 걸음을 내딛어 이곳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 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무리들은 걸음을 멈췄다.


“역시... 여기가 가장 치열했네.”


무리를 뒤에 둔 채, 시체가 즐비한 주위를 둘러보며 시아가 중얼거린 첫 마디였다. 로디토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가만히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라미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그리고 그런 느낌으로 계속 다가온 시아는 마침내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고개를 살짝 숙여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별안간 라미가 시아에게 다가가는가 싶을 때였다.


“유시아!”


주위 분위기가 순간 급변했으나, 시아의 뒤에 서있던 로디토가 뒤를 향해 손을 들자 이곳을 향해 달려오려던 근위병들이 멈칫하고 동작을 멈췄다.


“이런 짓... 하지 않기로 했었잖아!”


라미는 시아의 멱살을 잡은 채로 시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시아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런 라미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면서 대답했다.


“이런 짓이라니?”


“해독제를 내놔!”


“해독제?”


“대체... 얘한테 뭘 먹인 거야!”


흥분한 라미에 비해 시아는 몹시도 평온했다. 시아는 라미의 말에 멱살을 잡힌 채로 시선을 슬쩍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아...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태연한 목소리. 그리고 목소리만큼이나 태연한 대꾸가 이어졌다.


“첫 전투라서 긴장할까봐 약을 한 알 줬는데, 그게 잘 안 맞았나 보네.”


태연한 목소리.


“너...!”


“로디토.”


“네, 공주님.”


시아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로디토가 뒤에서 다가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시아는 보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 그 물건을 받아들더니 라미의 눈앞에 그 물건을 들이대었다.


“자.”


찰랑, 작은 유리병 안에 든 초록색 액체가 흔들린다.


“지금 당장 먹여야 할 거야. 지금 바로.”


속삭이는 듯한 중얼거림에 라미는 잠시 멍하니 눈앞에 놓인 그 유리병을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아의 멱살을 잡고 있던 나머지 손마저 거칠게 놓아버렸다.

라미의 거친 손놀림에 시아는 순간 휘청하긴 했으나, 이내 다시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라미를 쳐다보았다. 라미는 그런 시아를 잠시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뒤로 몇 걸음 걸어 내게로 다가왔다.


“아델리체.”


약병을 건넨다. 리체는 엉겁결에 그 약병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병을 건넨 라미는 그제야 이를 빠득 갈았다.


“유시아.”


차가운 부름. 갈무리한 분노가 금방이라도 새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태연한 대답.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평범한 대꾸였다.


“설마 내가 핀을 죽게 내버려두기라도 할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했다면 조금 유감인데.”


그리고 희미한 미소마저 띤 채, 시아는 여유 있게 말을 이었다.


“너도 나도, 핀을 죽게 놔둘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라미는 그런 이야기를 이어가는 시아를 불꽃이 튈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짓... 이런 짓 하지 않기로 했잖아...?”


“내가 하지 않았어. 핀이 했을 뿐이야.”


시아의 응수는 간결했다. 마치 준비한 것처럼 튀어나온 대답에 라미가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자, 시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지나가듯 말했다.


“물론 내가 살짝 거들긴 했지만 말이야.”


시아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귓가에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이곳이 전장이니만큼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 말발굽 소리들이 내 근처에 와서 멎었기에 나는 그제야 시아에게 다가온 한 무리의 남자들을 발견했다.


“공주님.”


말에서 내려 간단하게 예를 표한 알데가르트 씨와 크노르츠 백작은 라미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이내 다시 시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제국군 7군단, 4군단 둘 다 전투역량 상실 상태로 패퇴했습니다. 다만 브루타린, 샤닉스의 신병은 둘 다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제국 6군단 쪽으로 달아난 모양입니다.”


“그래? 알았어.”


“말씀하신대로 추격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대로 둬도 될까요?”


“쫓아가봤자 둘을 잡지는 못할 거야. 어차피 우리도 지금 한계니까.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만 해도 충분히 힘들었잖아?”


그 둘이 달아날 거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우리 피해는 어때?”


“파악 중입니다만... 친위대와 1군단 피해는 아주 경미한 수준으로 예상됩니다.”


“그럼 2군단만 확인하면 되겠네?”


그렇게 대답한 시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제국군 시체 사이로 드문드문 왕국군 군복을 입은 시체들이 섞여 있었다. 제국군의 기동대 돌격으로 중간에 허리를 끊기는 바람에 괴멸한 2군단 본부대 병력들이었다.


“2군단은 피해가 좀 있네.”


한참 주위를 둘러보고 난 후, 시아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그거야...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봤을 때 2군단이 적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할 수도 없었을 테고요.”


알데가르트 씨는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시아의 대답도 빨랐다.


“승리라고는 해도 그건 왕국군 전체의 관점이잖아? 1군단과 친위대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거지, 2군단이 승리한 건 아니니까.”


알데가르트 씨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렇게 알데가르트 씨가 입을 닫자, 시아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층 조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공헌을 했다 해도, 2군단만 놓고 봤을 때는... 어쨌든 패배는 패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그러나 내가 그런 의문을 떠올렸을 때였다.


“2군단이 한 번이라도 전투에서 패배하면, 2군단장을 해임하기로 했었지.”


별다른 표정 없이 입을 다물고 있던 알데가르트 씨는 물론, 뒤에 서있던 크노르츠 백작도 순간 흠칫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시아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약조한 바에 따라, 현 시간 부로 왕국군 2군단장 핀 아이켈을 직에서 해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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