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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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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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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3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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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로잔_용족 다루영

DUMMY

방안에는 향긋한 풀냄새가 가득했다. 중앙건물인 공량원에 들어설 때부터 기분 좋은 냄새에 취해 피로를 잊을 정도였다.


은은한 불빛이 높고 하얀 벽을 비추었다. 흔들리는 불빛은 여인의 머리카락을 여러 가지 빛깔로 보이게 했다.


언뜻 보면 푸른빛이나 흰빛에서 깊은 바다색까지 조금씩 다른 색이 어울려 신비로웠다. 하늘빛이 감도는 하얀 피부에 눈동자는 청금석처럼 짙푸른 빛을 띠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싱그러운 바다 냄새가 났다.


상처를 치료하는 손놀림이 춤추듯 부드러우면서도 꼼꼼하고 정확했다. 사로잔은 녹디사원의 명성이 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해무찬은 깨어날 기미가 없었지만, 상처를 씻고 붕대로 가리니 그런대로 평온해 보였다.


방안을 서성이는 사로잔에게 여인이 다가왔다. 움찔 뒤로 물러서자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놀라지 마세요. 무사님의 상처도 가벼운 건 아니니까요.”


그제야 다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긁히고 찢긴 상처가 드러났다.

“이런.”


사로잔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의자에 앉았다. 찢어진 옷자락을 정리하려는데 여인이 먼저 손을 뻗었다.

“난 사로잔이오. 용각국의 무사라오.”

“다루영이에요. 녹디의 마지막 수련생이죠.”


“녹디는 의술로 유명한 곳이라 들었소. 초루산의 영기가 보호한다는 전설도 있고.”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랍니다. 스승이신 아도대사님마저 이틀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다루영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스승의 죽음 앞에서 슬픔과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사로잔도 알고 있었다. 지곡대사의 장례식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마르지 않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지막 수련생이라면 이 넓은 사원에서 혼자 지낸다는 말인가.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으니, 혼자서 장례식을 치른다는 건가.

“내가 도울 건 없소? 친구의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다루영은 괜찮다고 입술을 모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새벽에 같이 기도 올려주세요.”


사로잔은 반쯤 감긴 눈으로 끄덕였다. 해무찬의 숨소리가 안정을 찾은 후로 물밀듯 잠이 쏟아졌다.


*


어슴푸레 햇살이 산을 넘어 창문을 기웃거렸다. 사로잔은 어느 때보다 개운하게 일어났다.


어디선가 현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왔다. 구슬픈 곡조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맞아, 같이 기도해달라고 했는데!’

사로잔은 옷을 대충 껴입고 절룩거리며 뛰어갔다.


어젯밤에는 들것에 실린 해무찬만 돌보느라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중앙 대청을 지나 접견실까지 수십 개의 초가 줄지어 불을 밝혔다. 부드러우면서도 청아한 악기 소리는 그곳에서 울렸다.


촛불과 향을 따라가니 제단이 보였다. 제단은 하얀 천으로 덮였고 그 위에 시신 한 구가 가지런히 모셔졌다. 시신은 약초와 꽃으로 장식되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길고 흰 수염과 눈썹이 대사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다루영은 제단 앞에 앉아 월금으로 진혼곡을 연주했다. 사로잔을 알아보고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으나, 눈은 젖어있었다.


사로잔은 제단 앞으로 나가 두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도대사를 만난 적은 없어도 녹디사원의 명성을 지킨 이라면 출중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부디 천옥에서도 평온하시기를···.’


어떻게 도울지 둘러보던 그녀는 구석에서 반가운 악기를 발견했다. 비파를 꺼내 들고 다루영 옆에 앉았다.


다루영이 연주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로잔은 엷은 미소만 띤 채 악보를 훌훌 넘겨 진혼곡을 찾았다.


비파의 아름다운 선율이 접견실을 채웠다.


그녀는 거리의 악사로 떠돌며 여행하겠다고 계획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 정도의 솜씨가 된 것은 어머니인 타내 대모의 신념 때문이었다.


진정한 무사는 피를 부르는 무기만이 아니라 마음을 달래는 부드러움도 함께 익혀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덕분에 사로잔은 검이나 활만큼 비파연주도 훌륭했다.


타내가 가르치는 장공거의 모든 훈련생은 자신에게 맞는 무기와 악기를 함께 배웠다. 탁월한 무술 실력만큼이나 장공거를 유명하게 한 이유였다.


접견실에서는 영혼을 위로하는 연주가 이어졌다.

인간세의 미련을 버리고 천계로 올라가 영원토록 평안하기를 바라는 곡이었다. 촛불도 소리를 따라 춤추듯 일렁였다.


비파에 맞춰 다루영도 연주를 이어갔다. 같은 음을 연주하는데도 소리와 맛이 달랐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서로 이어졌다.


그녀는 월금을 연주하면서 이토록 충만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얼어붙은 마음이 따사로운 햇살에 녹아내리듯 아늑하면서도 날아오를 듯 가벼웠다.

스승을 잃고 혼자 남겨진 고독과 상실, 허탈과 비애의 벽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비파연주에 흠뻑 빠진 사로잔 역시 번뇌와 불안이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사냥대회 도중에 비파를 뜯다니. 세상일은 정말 모른다니까.’


집을 떠나 방랑할 결심을 했지만, 걸림돌도 많았다.

비르삼과 부모님의 기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로 고민하느라 마음이 무거웠다. 훌훌 털고 떠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루영과 함께 연주하는 순간 마음을 누르던 바위가 둥둥 떠올랐다. 기분 좋은 전율이 느껴졌다.


연주가 끝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운이 남아 어느 쪽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좋은 연주였소.”

사로잔이 비파를 내려놓자 다루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스승님이 보낸 분인가요?”

아도대사의 마지막 모습이 사로잔과 겹쳐 보였다.


‘끝까지 널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나. 내가 떠나도 너와 함께 갈 사람이 나타날 거다.’

스승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토록 포근한 느낌이라니. 스승님이 보낸 사람이 틀림없어.


사로잔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골똘히 생각하느라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아도대사가 누굴 보내?’


그때, 해무찬의 신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는 접견실 입구에서 기둥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가뜩이나 뻣뻣한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진 데다 바짓가랑이에는 흙과 피가 말라붙었고, 가슴과 어깨는 붕대로 감싸 무덤에서 방금 나온 모습이었다.


입구로 다가간 사로잔이 쯧쯧 혀를 찼다.

“완전 귀신 꼴이네. 옷깃 좀 여미지.”


“아우, 머리야. 친구가 죽어가는데 비파나 튕기고 말이야!”

해무찬은 한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기둥을 잡고 간신히 허리를 세웠다.


“살려줬더니 오히려 큰소리네. 또 뭐에 빠져 정신을 놓은 거야?”

“아, 아까워. 엄청나게 큰 사슴이었거든. 그놈 뿔이 얼마나 수려한 지···.”

줄지어 선 촛불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해무찬이 우뚝 멈춰 섰다.


봄의 햇살보다, 화려한 꽃보다, 궁정화가의 그림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태까지 보았던 어떤 여인도 비교할 수 없었다.

목덜미에서 오금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심장뿐 아니라 몸 안의 모든 내장이 한 번에 요동쳤다.


“당신은···.”

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여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벼락에 맞은 듯 온몸이 짜릿했다.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멈추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사로잔이 다가와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눈동자는 한곳에 고정된 채 마비되었다.

힘껏 등을 내리쳤다.


“아앗!”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해무찬이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잊었던 통증이 살아났다.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환자한테 무슨 짓이야. 응?”


사로잔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 티 나잖아. 순진하긴···. 여기 아도대사님도 계셔. 예의를 갖춰야지.”

해무찬은 얼굴이 달아올라 헛기침을 해댔다.


사로잔의 부축을 받아 제단 앞에 섰다. 묵념하라는 친구의 조언과는 다른 기도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운명의 여인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누구이든, 기필코 지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무찬은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사로잔은 손을 뻗어 다루영에게 친구를 가리켰다.

“이 친구는 해무찬. 찬이라고 부르오.”


이번에는 해무찬에게 다루영을 소개했다.

“널 살려준 분이야. 다루영이라고 녹디사원의 마지막 수련생. 우린 벌써 친구가 되었···.”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해무찬의 몸이 기울어졌다.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주저앉으니, 다루영이 부축하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덩치 큰 해태족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오히려 그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해무찬이 신음을 뱉었다.


통증 때문에 찌그러진 그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바닥에 쓰러진 채 실웃음을 짓는 그를 보고 사로잔은 웃음을 참느라 주먹으로 입술을 눌렀다.


“제법 머리를 쓰네.”

“쯥!”

해무찬은 눈빛으로 날카로운 바늘을 쏟아냈다.


손을 휘휘 저으며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사로잔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지. 난 사원을 둘러봐야겠어. 예전부터 녹디사원을 꼭 보고 싶었거든.”


손바닥으로 허공을 누르며 진정하라고 했지만, 해무찬은 간절한 눈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알았어, 알았다고.’

사로잔은 입 모양으로 대답한 뒤 휘파람을 불며 접견실을 나왔다.


흘끗 돌아보니 다루영은 일어나 앉았지만, 해무찬은 여전히 바닥에서 끙끙거렸다. 붕대 위로 희미하게 피가 번졌다.

그녀는 상처에 신경 쓰느라 해무찬의 표정은 모르는 것 같았다.


*


신기한 일이다. 여자에게는 전혀 관심 없던 해무찬인데. 드디어 인연을 만난 건가.


어떤 여자를 봐도 나무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오히려 용각국 최고의 장인이 만든 검을 만났을 때 더 요란하게 반응했다.


“운명 운운하더니. 최고점이 아니라 다루영이었어?”

사로잔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그럼 이 몸은 녹디를 둘러볼까?”


공량원 뒤편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장공거의 수련장과 비슷한 크기였다. 표창과 단검이 꽂힌 허수아비가 여러 개 서 있었다.


‘이상하네? 녹디사원은 의술로 유명한데?’

허수아비에 꽂혔던 표창과 단검을 뽑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표창은 작지만 예리하고 접는 장치가 있어 손안에 쏙 들어왔다. 단검도 접으면 손바닥 길이의 막대기가 되었다.


‘의술과 무술을 함께 배우나? 장공거에서 무기와 악기를 같이 배우는 것처럼?’

월금을 연주하던 가늘고 여린 다루영이 무기를 휘두른다니, 상상하기 어려웠다.


사로잔은 단검을 몇 번 접었다 폈다. 순식간에 몸을 돌려 반대편 허수아비를 향해 던졌다.


쇳소리와 함께 날아간 단검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허수아비의 어깨에 박혔다. 남은 표창은 정확히 가슴 부위에 맞추고 그녀는 사원의 안쪽을 향해 들어갔다.


수련장을 지나 숲속으로 낡은 건물 세 채가 이어졌다.


단층에서 삼층까지 규모는 달랐지만,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건물도 있었다. 잡초마저 무성하게 자라나 길을 감추었다.


잡초밭을 기웃거리는데 가장 안쪽, 회색빛 단층 건물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 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쳤다. 기둥 안쪽 중심부만 벽을 세우고 문을 낸 것은 사당이나 납골당을 짓는 방식이었다.


음침한 건물을 마주 보고 섰다. 바람 소리는 이내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해졌다.

‘사로, 사로잔···.’


‘뭐야? 날 부르는 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바람 소리는 계속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로잔은 단단한 나뭇가지를 찾아들고 한 걸음 한 걸음 기울어진 문짝을 향해 걸어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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