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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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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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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5.1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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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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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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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선계_영진성단

DUMMY

빛을 담당하는 진백성단이 하늘을 맡을 시간이었다.

시나브로 하늘이 밝아오자 별빛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미리내의 별들은 천천히 빛을 감추었다.


눈 부신 빛을 등에 업고 키 작은 천인이 별의 강 미리내를 건너갔다.

선계의 영진성단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불새의 날개보다 가볍고 빨랐다.


영진성의 영역, 선계는 천계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우주의 기둥 바로섬이 천선계를 내려다보는 곳, 빛과 어둠의 균형과 조화를 담당하는 곳, 저 멀리 인간세에 선사를 파견하는 곳.


마지막 별무리를 건너뛴 천인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동글동글한 몸집과 달리 얼굴에는 주름이 깊었다.

‘확실히 약해졌어. 암흑성님이 안 계시니 기력이 안 따라주는군.’


암흑성단의 수석, 해밀은 숨을 고르며 아득히 솟은 바로섬을 바라보았다.


해밀은 고개를 돌려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까마득히 멀리 암흑성단이 초록빛으로 빛났다. 거대한 초록 성단을 바라보며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사랑님, 이게 말씀하신 추억거리인가요? 정말 너무하십니다.’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스쳤다. 모자란 숨을 채우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인간세에 태어난 아랑누가 곧 스무 살이 될 테고, 영진성이 묶어놓은 결계도 힘을 잃을 것이다. 서둘러 데려와야 한다.


그것이 불새의 수레도 타지 않고 직접 미리내를 건너는 이유였다.


*


우주의 기둥 바로섬은 미리내와 선계의 경계에서 시작해 시련의 동굴을 낳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시련의 동굴은 영진성이 명상하는 수련의 장소이자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수행의 장소였다.


선인들은 일을 하다가도 바로섬을 올려다보곤 했다. 인간세에서 돌아오는 선사들 역시 도착하자마자 바로섬을 향해 절을 올렸다.

우주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모든 힘을 쏟는 영진성에게 선력을 보태기 위함이었다.


다섯 번째 영진성으로 나타난 여라함 역시 시련의 동굴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이전의 어떤 영진성보다 더 많은 선력을 다듬어야 했다. 대분성전투로 암흑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동굴을 나가기 전, 여라함은 얼음 거울 알영을 마주하고 섰다.

동굴 입구에 새겨진 알영은 천선계의 곳곳을 보여주었고, 필요한 기억을 찾아주었다.


그가 누구를 가장 그리워하는지 알영은 잘 알았다.


얼음 거울에 미사랑의 어린 시절 모습이 나타났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고 야무진 그녀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로 환하게 웃었다.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고 시위 없는 활, 무시궁을 잡아들었다.


‘별의 무덤 너머로 날아갈 테니 잘 봐.’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손끝에서 빚어진 빛의 화살이 혜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별의 무덤 너머로 날아갔다.


무시궁을 내던지더니 재빨리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누가 빨리 찾는지 내기할까!’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모습은 연기 같은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얼음 거울도 미사랑을 놓쳤는지 맑은 얼음으로 돌아왔다.

여라함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거울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였다.


“미사···.”

여라함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음 거울에 미사랑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아름답고 우아한 암흑성의 모습이었다.


인간세의 너나족처럼 꾸미고 강물에 꽃등을 띄웠다. 강물 위를 유유히 흐르는 꽃등을 오도카니 바라보던 그녀가 여라함을 돌아보았다.


‘네가 할 일을 해. 어떤 일이 있어도. 천인이나 사람이나 모두 자기 몫의 삶을 사니까.’

다정하게 웃는 모습도 희미해졌다.


동굴 밖에서 호위대장 마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라함님, 암흑성단에서 해밀이 왔습니다.”

듬직한 몸집에서 나오는 소리가 넓은 파장을 일으키며 얼음 거울에 닿았다.


여라함이 알영을 바라보았지만, 투명한 얼음에 비친 것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엷은 미소를 짓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해밀은 숨을 고르며 여라함을 기다렸다.

천계와는 다른 담백하고 정갈한 대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선계 특유의 은은한 향기로 머리가 맑아지고 평안해졌다.


마음은 어느 때보다 조급했지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동굴 입구에 여라함이 나타났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선계 최고의 신성, 여라함은 그가 만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온 우주를 통틀어 그보다 아름다운 존재는 없었다. 염라성 아유라도 발끝에 간신히 머물 것이다.


시련의 동굴에서 오랫동안 수행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했다.

검고 윤이 나는 긴 머리카락은 하얀 얼굴빛 때문에 더 짙어 보였다. 눈동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시련의 동굴보다 더 짙고 고요했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그를 볼 때마다 똑같은 표정이 되었다. 입이 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가 인사하면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해밀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넋 놓고 바라볼 때가 아니었다. 가까스로 미사랑을 생각해냈다.

‘저분에 비하면 우리 미사랑님은 얼마나 친근하고 편한 모습인가!’

간신히 불러낸 핑계였지만 효과는 있었다.


“오느라 수고 많았소.”

해밀은 앞부분은 놓치고 마지막 문장만 알아들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간세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서둘러야 하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때가 되었나···.”

여라함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암흑성단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개가 장벽처럼 가려도, 그 너머의 암흑성단을 느낄 수 있었다. 미리내를 건너면 공명의 들판 아름누리가 펼쳐진다. 그곳을 지나면 암흑성단이다.


아름누리에서 여라함과 미사랑은 함께 공부하고 수련했다. 그때는 율명도 함께였다.

진백성과 암흑성, 영진성, 이 셋을 합쳐 삼신성이라 불렀고, 어린 그들은 참된 삼신성이 되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결계는 저절로 풀릴 것이니,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여라함이 담담하게 말하자 해밀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 데려오면 되지 않습니까?”

해밀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미사랑님이 안 계시니 암흑성단 천인들이 기력을 잃어갑니다. 이러다 기어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할 정도라고요.”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묵묵히 서 있던 마로가 해밀에게 돌아섰다.

“염라성 아유라가 새로운 암흑성이기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던데?”

진백성단과 선계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염라성 아유라가 새로운 암흑성으로 정해졌기에 미사랑이 소멸한 것이라고. 아직 아유라가 즉위한 것이 아니라서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암흑성이 사라지면 한순간에 무너져야 할 우주가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해밀은 눈에 힘을 주며 발끈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우리에게 암흑성은 미사랑님뿐일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암흑성단이 건재해서 그런 소문이 났지만, 절대로 아유라는 암흑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 미사랑님이 살아계신 증거라고요!”

급기야 주먹으로 허공을 찌르며 소리쳤다.


여라함은 한 손을 들어 진정하라고 손짓했다.

“난 미사의 선택을 존중하네. 부서진 혼이 인간세로 떨어진 것도, 그 혼 조각 중 하나가 아랑누라는 아이로 태어난 것도 그녀의 선택이겠지.”

미사랑을 생각하니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꽂혔다.


여라함은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랑누가 미사의 혼 조각이기에 지켜보는 걸세. 그대로 놔두면 아유라가 손을 쓸지 모르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암흑성으로 오실 겁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데려와 혼을 빼내면 되는 겁니다.”


“나머지 혼 조각은?”

“그, 그건···.”

해밀이 입만 벙긋 버렸다.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사랑의 혼 조각이 인간세로 떨어진 것은 알지만, 어디로, 어떻게 흩어졌는지 천선계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건 율명의 칼끝에 부서진 그녀의 마지막 모습뿐이었다.


“그럼 아랑누는 어떻게 됩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죽으면 그 혼이 영천옥으로 가겠지.”


해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무 흥분해서 목소리조차 떨렸다.

“아닙니다. 나머지 혼 조각도 어딘가에서 기다릴 겁니다. 우리가 찾아내기를 바라면서요.”


“희망은 살아가는데 좋은 약이지. 때로는 잔인하기도 하지만.”

여라함이 속삭이듯 말했지만 해밀은 확답을 듣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 아이가 미사랑님의 혼 조각이란 걸 알면서도 데려오지 않은 건 너무 어리기 때문이었지. 스무 살이 되면 봉인이 풀리니 지금이 그때가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담담한 척하면서 긴 소매 아래 감춰진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여라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을 따라 옅은 안개와 은은한 향기가 뒤따랐다.

해밀은 종종걸음으로 마로를 제치고 여라함에게 다가갔다.

“암흑성단을 도울 수 있는 분은 여라함님 뿐입니다.”


여라함은 해밀을 돌아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지나갔다.

“그런데, 한울은 오지 않았나? 꽤 오래 못 보았는데.”


한울의 이름이 나오자 해밀은 입술을 안으로 말아 꾹 다물었다. 말을 고르느라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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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로잔_소명장군 22.05.11 160 4 11쪽
3 선계_회상 22.05.11 203 6 10쪽
» 선계_영진성단 22.05.11 348 9 10쪽
1 프롤로그_대분성전투 22.05.11 760 1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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