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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그릴라 님의 서재입니다.

백작가와 맞서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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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그릴라
작품등록일 :
2018.12.09 16:08
최근연재일 :
2019.06.20 13:55
연재수 :
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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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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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697

작성
19.06.1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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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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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글자
12쪽

제138화 호우(好雨)

DUMMY

카드리안 국왕의 죽음.


파병이라는 중대한 일은 앞둔 상황, 내부적으로는 조문 사절단을 맞이하며 장례식을 준비하고, 왕자들은 세력 불리기에 바쁜 시점이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파병과 지배자 가문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멍하니 시간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반대로


“좋은 점도 있네.”


용의자 중에 만나지 못했던 이 왕자를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생겼다.


·······.


“이 왕자님, 국왕 전하의 서거에 애도를 표합니다.”

“쟈클 자작님. 고맙소이다.”

“왕국을 단단한 기반 위에 올려놓으신 분이셨습니다. 다스렸던 세월은 평화의 시대로 기록될 것입니다.”


국왕의 죽음으로 인해 예의상 오가는 말이 길어졌다.


·······.


백 살 가까이 살다 죽었으면 괜찮은 죽음이다. 유족에겐 고인의 존재가 특별한 의미겠지만, 사실 죽기에 좋은 때(時). 죽음에도 적절한 시점은 있다. 비(雨)와 비슷하다고 할까. 좋은 비(雨)는 때를 알고 내린다. 죽음도 알맞은 시간에 온 손님처럼, 그렇게 찾아와야 한다. 아무런 쓸모가 없더라도 말이다.


·······.


“그리고 감축합니다. 왕자님!”

“흐흣, 애도 다음은 감축이로군요.”

“파병군 사령관을 맡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결정된 일이라,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좀 묘하게 흘러갔다.


국왕의 죽음이야 예정된 일이지만, 시기가 시기인 관계로, 아너(Honour) 다섯과 2군단이라는 병력의 통솔권을 이 왕자가 손에 쥐게 되는 결과. 일 왕자의 무력 기반인 근위대 20명 중에서 다섯을 잘라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마치 누군가는 이런 사태를 노렸다는 듯이.


“왕실 근위대 4분의 1을 이끌게 되셨군요.”

“겨우 반절도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중앙군에도 군단마다 두세 명의 아너(Honour)가 있으니, 더하면 작은 수는 아닌듯합니다.”

“하하! 자작님의 셈법이 일반인과는 다르군요.”

“·······.”

“엄연한 규율이 있는데, 근위대는 근위대, 중앙군은 중앙군일 뿐입니다.”


이 왕자의 양 갈래 수염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자기 뜻대로 그린 미래가, 손에 잡힐 듯이 펼쳐진다고 느끼는 걸까. 사소한 돌멩이 하나로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알고는 있으려나.


“저도 이번에 참전하게 됐습니다.”

“하하! 북부에서 자작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더군요.”

“그렇습니까?”

“호아킨의 해전, 스팅스와의 전투. 그리고 마쉬렌으로 예카체리나를 데려다준 무용담은 저도 귀가 솔깃하더군요.”

“북부에서 그 모든 것을 알고 조사했다는 뜻이네요.”

“하하하! 조사뿐이겠습니까! 쟈클 자작님의 위명이 카드리안 곳곳에 쟁쟁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


과도한 칭찬과 부푼 그의 광대뼈. 이 왕자도 이번 파병에 여러 가지를 걸었을 터, 굳이 나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뭘까. 자신과 손잡지 않더라도, 일 왕자 편에 서는 것은 막자는 것인가.


“일 왕자님 측에서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더군요.”


그저 웃음만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왕자. 결과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첫 만남의 의미를 알려드렸습니다.”

“저도 배웠던 그 이야기인가요?”

“비슷합니다.”

“격(格)과 품(品), 급(級)에 관한 이야기는 인상 깊었습니다.”


타스메랄다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올해는 제때 비(雨)가 내리지 않아 포도 농사가 엉망이라 들었습니다.”

“이런! 품격이 떨어지는 하급 포도주가 생산되는 해(年)로 기록되겠군요.”

“중서부도 이제 수확할 시기인데, 사람도 부족한 농번기에 꼭 일을 만드는 사람이 있으니, 희한한 일입니다.”


“그게 어디 사람 때문이겠습니까? 시절이 문제겠죠.”


·······.


흐음! 때가 때이니만큼, 같이 가자는 건가. 왕자도 용의자로 추가됐다.


*


“캬륵!”


히오크 암컷 하프에게 지낼 곳을 마련해줬다.

쓸데없는 짓이었나. 눈만 뜨면 옆에 와서 떠나질 않으니, 차라리 한 침대에서 먹고 자는 것이 나을 듯.

최소 천 년은 넘게 살았을 텐데,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캬륵!”

“하프, 입 열지 마!”

“캬륵!”

“도통 말을 들어 처먹어야 대화를 하지.”


레이나가 끼어들었다.


“쟈클 왜 심통이야?”

“보고 있으면 속 터져서 그런다.”

“하프는 착하기만 한데.”

“그래, 너는 대화가 통해서 좋겠다.”


레이나에게는 하프-오크(Half-Orc)라고 속였다. 암컷 히오크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녀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고. 피부색이 좀 짙은 거 빼면, 사실 하프-오크와 비슷하기도 하고, 머리도 노란색으로 염색했다.


레이나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노란색! 녹색 피부에 노랑머리 여자 용병으로 거듭났다.


“레이나, 이거 받아.”

“이게 그거야?”

“그래, 엘프가 쓰는 신비의 가루.”


“오!”


“엘프 특유의 분위기 알지?”

“하얗고 초록 냄새나는?”

“그래, 내가 특별히 너만 주는 거니까 아껴서 써.”

“고마워, 쟈클!”


좋다고 돌아가는 레이나의 뒷모습에서 초록의 풀 냄새가 풀풀 풍겼다.


·······.


[멍드는 약을 왜 레이나에게?]

‘바르는 약이니까, 바르라고 줬죠.’

[그러니까 왜?]

‘하프하고 머리색이랑 복장도 맞췄잖아요.’


“캬륵!”


[헙! 설마 피부색까지 맞추려고·······.]

‘깊게 멍들면 밑바닥에서 연두색이 올라와요.’

[이, 이런! 미친놈!]

‘·······.’

[여자애한테 할 짓이 있고, 못할 짓이 있지!]


‘제가 자매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아시잖아요.’

[설마, 너?]

‘저는 밖에 나가서 그렇게 고생하는데, 그깟 피부 좀 양보한다고 안 죽습니다.’

[화이트가 챙긴 돌멩이 때문이냐?]


·······.


부인하는 나와 믿지 못하는 아저씨. 둘 다 시간을 들여 흥분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휴우!


[그래서 정확한 목적이 뭐야?]

‘눈속임이죠. 하프와 레이나를 붙여 놓으려고요.’

[아무리 그래도 멍이 녹색 피부와는 다르잖아.]

‘정서를 자극하는 스토리를 끼워 넣어야죠.’

[무슨 이야기?]

‘암컷은 하프-오크(Half-Orc), 레이나는 쿼터-오크(Quarter-Orc)!’

[모녀지간?]

‘거기까지만 말해도 사람들은 비슷한 색깔 때문에 머릿속으로 살을 붙이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겠죠.’

[흠·······.]

‘그럼 저절로 하프가 혹시 몬스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사라지게 되고.’


아저씨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 피부라는 것이 멍들고 복구되고, 계속 반복하다 보면 최소한 자생력이라도 갖추겠지. 뭐 아니면 할 수 없고.


[그래서 이름을 하프로 지은 거야?]

‘그건 귀속임이에요.’

[귀속임?]

‘색으로 눈속임했으니, 이름으로 귀속임을 곁들인 거죠.’

[흠·······.]

‘이름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르잖아요.’


하프 오크?


‘인간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습성이 있어요.’

[자문자답한다는 거구나.]

‘네, 누가 그 질문에 답해 주지 않아도 무의식은 이미 답을 정하고 이유까지 붙여 판단하죠.’


그리고


‘그 이유가 논리적일 필요도 없거든요. 간단한 정서 자극이나 오감(五感)에 사소한 영향만 있어도, 자신만의 근거로 삼기에는 충분하니까요.’


크흠!


[저주까지 걸어서 멍이 오래갈 텐데.]


*


국왕의 장례는 지루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특히 형식을 중요시해, 돈과 시간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개의치 않고, 시대 변화와 관계없이 예전 그대로를 고집했다.


시끌벅적.


왕국 곳곳에서 영주와 귀족, 친인척, 그리고 생전에 국왕과 인연이 있던 이들까지 모여들었다. 국외에서도 속속 조문 사절단이 도착해, 수도 카라얀 내에 웬만한 규모의 숙박시설은 이미 손님으로 가득 찼다.


도로에 마차도 가득하니,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것이 나을 정도, 가까운 곳의 볼 일은 걷기를 택했다.


“자작, 이러다가 국경에 먼저 문제 생기는 거 아냐?”

“핫센 왕국도 조문단을 보냈으니, 그 정도 치사한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전쟁에 치사가 어디 있어?”

“하다 보면 양상이 바뀔 수도 있지만, 이번 전쟁이 상대국을 없애려는 것은 아니거든요.”


카드리안보다 조금 더 큰 핫센 왕국. 같이 죽자고 막무가내로 달려들 바보는 아니다. 총력전도 아닌데, 아직 바닥까지 지저분해지지는 않았다.


“전쟁은 믿을 게 못 돼.”


·······.


집으로 가는 고급 주택가는 그나마 한가했다. 비싼 저택뿐이라, 마차도 띄엄띄엄. 가벼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아줌마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요?”


아줌마의 시선이 멈춘 곳. 집 근처의 한 저택 앞에서 사내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밖으로 나가려고 채비 중인지, 왔다 갔다 하는 실력자들,

그중 셋이나 익스퍼트, 주택가에서 마주치기 어려운 전력인데.


어느 이름 있는 가문인가 떠올려봤지만 마땅한 집안도 없고, 그중 눈에 확 띄는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 역시 아줌마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화이트 경(卿)! 맞군요!”


반가워하는 사내의 목소리와 구겨지는 아줌마의 표정이 엇갈리는 가운데


“역시, 전쟁은 믿을 게 못 돼.”


아줌마가 뜻 모를 말을 주절댔다.

중년의 사내, 50은 넘었으리라. 나이 때문인지 색바랜 붉은

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었다.

흐음! 게다가 레이나와 흡사해 보이는 마나의 흐름, 자매들처럼 정령사인가.


“하핫! 오랜만입니다. 화이트 경(卿)!”

“그렇군요. 아이작 경(卿).”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는 체를 하는 두 사람.


“카드리안에 계신 줄 몰랐습니다.”

“제국이 지겨워서요.”

“세상 어디를 가도 제국만큼 요란한 곳도 없을 텐데요.”

“그곳에 보기 싫은 인간들도 있고·······.”


평범할 것 같은 일상이었는데, 갑자기 새로운 인물, 우연한 만남으로 특별해졌다.

가벼운 인사가 끝나고, 주변 지인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하핫, 스톰 경(卿)은 잘 계십니까?”

“음·······, 그 가벼운 주둥아리는 여전하군요.”

“제가 묻지 못할 것이라도 물었나요?”

“스톰 경(卿)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군요.”


·······.


생각보다 더 불편한 관계인 듯.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외출채비를 하던 붉은 머리 사내의 동료들까지 우르르 주위로 몰려들고.


“아이작 교수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 일도 아닙니다. 옛 전우를 만나서 인사 중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아줌마의 비웃음.


“큭! 전우(戰友)?”

“·······.”

“동료를 사지(死地)로 내모는 인간이 전우?”

“흐흣, 화이트 경(卿)은 아직도 전장에서의 작전 개념을 이해 못 하는군요.”


“캬하하핫! 크큭, 캬하하핫!”

“·······.”

“그렇겠죠. 당신 주위에 이런 떨거지들쯤이야, 작전상 죽어도 괜찮겠지.”


“·······.”

“·······.”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것도 상대를 완전히 깔아뭉개는 발언. 갑자기 싸~한 분위기와 함께 아줌마 특유의 웃음소리에 쏠렸던 호기심이 전혀 다른 사나운 눈빛으로 변했다.


“뭐? 저런! 썅!”

“이런 미친 것이!”


주변 떨거지들이 화났다. 보이는 익스퍼트만 붉은 머리를 제외하고 둘. 안에서 더 나올지도 모르는데, 상황이 갑자기 변한 것만은 확실하고.


-스릉!


“카드리안 촌년이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붉은 머리는 말리기는커녕 미소를 띤 채, 아줌마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부추기는 모양새로. 칼을 빼는 익스퍼트를 지켜만 봤다.

마주 선 아줌마, 허공에 얼음칼이 형체를 드러냈다.


“너희들 내가 누군지 모르지? 캬하하핫!”


살벌한 분위기. 곧 칼질이 오갈 판인데.


·······.


분위기를 눈치 챈 레이나와 하프-오크. 두 녹색 생명체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입만 바라보며 대기 중이었다.


흠, 어떻게 하지?


상대는 제국 출신, 게다가 이 정도 인원과 함께 있다면 보통 신분이 아닐 텐데. 지난날의 좋지 않은 추억이야 알 바 아니지만, 지금은 아줌마를 부리는 입장에서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나서는 수밖에.


“제국, 이 새끼들이 미쳤나!”


·······.


지켜보기만 하던 붉은 머리는 물론 익스퍼트의 고개도 내게로 돌아섰다.


“하프!”

“캬륵!”


“저 붉은 머리부터 없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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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140화 두 번째 부인 +14 19.06.14 2,211 61 12쪽
3 제139화 아이작 뉴튼 +6 19.06.13 2,181 63 13쪽
» 제138화 호우(好雨) +14 19.06.12 2,479 58 12쪽
1 제137화 노(老) 가주의 당부 +22 19.06.09 2,968 6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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