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Smoke on the water
막바지 서류 작업 중.
파병으로 인해 할 일이 적지 않았다. 이것저것 챙길 물품과 예산 그리고 사람까지. 레이나가 많은 부분 처리하고 있지만, 그래도 중요한 서류는 훑어보기라도 해야 한다.
나중에 서로 엉뚱한 소리 하면 안 되니까.
그 와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오~ 레이첼! 삐져서 가더니 정신 좀 차렸나?”
“언제 삐쪘다고 그래? 난 너처럼 얍삽한 인간 아니야.”
흠... 얍삽!
곧 전쟁터에 가는 판인데, 저게 누구 속을 긁으려고 와서 염장질인지.
“그럼 뭐하러 왔어?”
“볼 일 있으니까 왔지.”
“바쁘신 분께서 직접오시다니... 대신 아랫사람 보내면 되잖아.”
“흥~ 설마 니가 보고 싶어 왔겠냐!”
그때, 문이 열리며 나타난 새로운 인물들.
앞서 걸어오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 호위로 보이는 사내들은 놀랍게도 익스퍼트였다.
“캬륵!”
함께 있던 하프가 캬~륵거릴 정도로 범상치 않은 집단.
“쟈클 자작님, 반갑군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기와 함께 한 여인을 서류 따위나 뒤적이며 맞이하기가 내키지 않아서. 한편으론,
그녀 주위의 익스퍼트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여인의 방문은 갑작스러웠다.
“예카체리나 공주님?”
“흐흣, 아직도 제가 공주인가요?”
“제 기억엔 아직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처녀때를 기억해주는 외간 남자라... 아무튼, 고맙군요!”
·······.
“앉으시지요.”
레이첼과 예카체리나까지 함께했다. 레이나는 공주와 친하지 않은 듯. 다시 서류 작업에 몰두하는 중.
“장례에 늦으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날짜를 못 맞췄네요.”
“아기가 몇 개월?”
“이제 백일 지났어요.”
“흠·······, 갓난아기와 함께 오기엔 너무 거리가 멀군요.”
단순한 친정 나들이가 아님을, 장례 참여가 목적이 아닌 것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그랬으면 레이첼이 여기까지 데려왔을 리도 없겠지만,
추운 겨울. 젖먹이 아기까지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미친 엄마는 흔치 않다.
“역시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레이첼과 예카체리나가 눈빛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이첼 시(市)에 머무르고 싶어요.”
“·······.”
“자작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레이첼이 그러더군요.”
흐음!
역시 불행은 혼자 찾아오는 법이 없다.
그러잖아도 몇 가지 고민거리가 해결의 실마리도 없이 쌓여있는데, 그 위에 묵직한 덩어리가 하나 더 얹힌 셈.
허투루 처리했다가는 그 무게에 눌려 내장 파열이 생길지도 몰랐다.
“기약은 있습니까?”
“없어요. 언제까지 지속될지.”
“정치적인 의미는 아시는지?”
“망명쯤이라고 생각해요.”
“그에 맞는 부담도 이해하시겠군요.”
“어떤 식이든 레이첼 영지에 압박이 있을 거예요.”
공주와 함께 온 익스퍼트와 그 밖에 사람들을 훑어봤다.
무슨 관계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가신이나 가문의 아너(Honour)쯤으로 판단되는 이들. 그리고 그 부하들로 보였다.
“가진 전력은 저들이 전부인가요?”
“현재로는 그래요.”
“앞으로는 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지금은 흩어져 있다고 봐야 하는 상황이에요.”
떱! 떱!
배라도 고픈지, 예카체리나의 품에서 아이가 입을 달싹였다. 시선이 모아지며 자연스럽게 한숨만 더해지니, 저 어린 아기가 무슨 죄가 있겠나.
“보호 대상이 공주님?”
“네?”
“아니면 아이가 구심점입니까?”
“... 아이예요.”
휴우!
아직 중서부조차 안정되지 않았는데,
군식구까지 보살필 여력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회피할 방법부터.
“혹시 오빠들 중에·······.”
“모두 엄마를 싫어했어요. 일 왕자뿐만 아니라 이 왕자도.”
예카체리나도 엄마가 돼서인지, 아니면 그간 풍파를 겪어서인지 달라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말과 행동이 무겁고, 정치적인 눈도 조금은 트인 듯했다.
·······.
찾아온 손님을 내쫓을 수도 없고, 일단 에밀리에게 맡겼다.
밥이라도 먹여 보내든지 아니면 하소연이라도 더 들어줘야 하는지. 집무실에 레이첼과 둘만 남았다.
“내분? 공주가 뭐래?”
“누가 들고 일어났나 봐. 반역이겠지.”
“공주님 남편은?”
“알잖아. 이런 경우 어찌 되는지.”
·······.
“반역이 성공했으면, 이젠 거꾸로 공주가 반역자 신분이겠네.”
“아직 정리가 안 돼서... 싸우는 중인가 봐.”
“제국 놈들 짓인가?”
“그렇겠지. 뻔하잖아.”
제국이 쓰는 내부 분열책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들과 국경을 접한 나라들 모두가 겪는 고통. 이러다 국력이 쇠약해지면, 무혈 입성하듯 제국의 시비와 더불어 점령 전쟁이 시작된다.
망국의 길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형태.
“형편상 곤란하다는 거... 너도 알지?”
“쟈클, 어떻게 안 될까?”
“마쉬렌이 안정되면, 우리에게 압력을 넣을 거야.”
만약, 안정이 안 돼서 제국이 끼어들면 더 골치 아프다. 예카체리나를 빌미로 어떻게든 트집부터 잡을 테니까.
“버틸 수 없어?”
“우리가 무슨 힘으로? 작센도 마쉬렌이 찍어 누르면 꼼짝 못 할 텐데. 그럼 바로 카드리안 서부로 연결되는 판이야.”
“마쉬렌도 왕국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잖아.”
“나르치스나 스팅스를 이용하겠지. 마쉬렌에 머리 쓰는 놈 하나 없을까.”
“그렇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예카체리나를 당장 내쫓아?”
“흠·······.”
“코 앞에 닥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든지 할게.”
그렇겠지. 하나뿐인 친구를 무 자르듯 단칼에 쳐내기 힘들겠지.
내일 당장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다른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니 조금은 지켜볼 수밖에.
어쨌든 다른 문제도 꺼냈다.
“사촌 오빠들은 만나 봤어?”
“왕자들?”
“응.”
“잠깐씩 얼굴만 봤어.”
“특별한 말은 없고?”
“그냥 통상적인 인사뿐이던데.”
“너에게 접근하는 놈들은?”
“잔챙이 몇 정도.”
흠!
“할버른과 잘츠, 화이트, 그리고 타이콥 영주까지 불러들여 파티라도 한번 해.”
“바빠 죽겠는데, 무슨 파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놈들에게, 신경 쓰라고 옆구리라도 찔러야지.”
“왕자들 얘기야?”
“그래. 장례 중이니까 가벼운 식사 모임이 좋겠다.”
외에 몇 가지를 더 상의하고 헤어졌다. 마나석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을까 했던 예상은 빗나갔다. 며칠 사이에 정신 차렸을 리도 없을 텐데·······, 저것이 스톰 경(卿)에 대한 생각이라도 바꿨나.
*
레이첼의 의아한 표정.
“레이나, 너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어때서?”
“어떤 이상한 놈팽이 만나서 얻어맞고 사냐?”
“레이첼, 넌 꼭 공부 못한 티를 내더라.”
“응?”
“아름다움(美)에 대한 배움(學), 미학에 대한 이해 부족이야.”
“그 풀빛 초르스름한 얼굴이?”
“이년아, 부러우면 그냥 부럽다고 말해!”
***
기다리던 파병군이 출병했다.
북부 파병군 사령관에 이 왕자, 부사령관 찰스 레이먼드 그리고 병력 8천과 백여 명의 익스퍼트까지. 동시 출정은 아니지만, 대규모 확전에 따른 파병이라 단촐하지는 않았다.
“이 왕자님, 출발하시죠.”
게다가 왕의 장례는 한 달. 중요 행사는 끝났지만, 아직은 추도(追悼) 기간이라 화려한 출정식이나 시민들의 뜨거운 배웅은 없었다. 왕실의 후계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왕 대리인 일 왕자는 파견부대의 전송 행사를 어영부영... 대충 치뤘다.
“부사령관께서 지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병력은 2천씩 따로 움직였다.
지역에 따른 이동 경로도 문제지만, 2군단 2천 명은 완전한 독립 부대로 먼저 이동하고, 나머지 동부와 서부의 병력이 뒤따랐다.
거리가 가장 먼 남부는 수도를 지나쳐 가는 길도 하나의 방법이라, 본대인 지휘부 익스퍼트들과 함께 움직일 예정이었다.
“네. 그럼 왕자님을 대리하여 집행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찰스 레이먼드 부사령관이 권한대행을, 참모 역으로 라이넨 레이먼드, 나르치스와 스팅스의 아들들이 나와 더불어 지휘부에 합류했다. 6인(人) 중 이 왕자와 라이넨을 뺀 4인(人)이 실질적인 의사 결정권자인 셈.
“전군 출진!”
뿌우! 뿌우! 뿌우!
병사는 모두 영지의 상비군에서 뽑았다. 직업 군인이라 규율에 익숙하고 단체 행동에 기본은 갖춘 이들. 군기만 엄정하게 유지한다면 별다른 불상사는 없을 듯했다.
따그닥. 따그닥.
물자 보급은 왕실에서 맡았다. 근위대 출신 익스퍼트 다섯을 제외하고, 왕실 지배하의 각 영지에서 차출한 아너(Honour)와 병력만으로 병참을 포함한 후방을 책임졌다.
카라얀에서 지휘부를 비롯한 익스퍼트 부대가 나오자,
수도 외곽에서 대기 중이던 남부의 2천여 병력이 합류했다. 경계를 넘을 때마다 해당 영지의 병사들이 미리 나와 길을 트고, 주민을 통제하고, 야영지도 미리 마련해, 불필요한 마찰을 최소화했다.
행군 중 정찰은 필수.
하지만 접전 지역도 아닌 곳, 따로 정찰 부대를 운영하기보다, 기마대를 이용한 이동 경로만을 확인하는 상황.
정탐 보고나 연락을 위해 수시로 지휘부에 사람과 말이 들락거렸다.
·······.
해 질 무렵.
마른 몸에 보통 키. 이마에 눈썹 한 줄, 그 밑으로 갸름한 눈도 한 줄, 두 줄의 사나이가 말을 타고 다가왔다.
“오! 더프 경(卿)!”
“도련님, 왜 이러십니까?”
“상당히 오랜만이야.”
“뜬금없이 경(卿)이라니요?”
“너무 반가워서 그러지. 흐흣!”
“흠, 그리 웃으시니 왠지 불안합니다.”
“그림자 2대는?”
“적당히 나눠서 배치했습니다.”
스톰 영지를 받으며 헤어졌으니, 햇수로도 몇 년 만이다.
이곳저곳을 함께 다녔던 기억이 어제처럼, 자고 일어나 맞은 아침처럼 가까웠다.
해 지는 저녁에 아침 느낌이라니...
“왜 그림자에서 계속 버텨?”
“제가 남아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세요?”
“2대에 새로운 익스퍼트도 생겼다면서.”
“네, 쓸 만한 검입니다.”
“그럼 물려주고 나와도 되겠네.”
“뭐, 그만두고 따로 할 일도 없고 해서.”
“나랑 놀면 되지.”
“네?”
“내가 경(卿)이라고 존칭도 써 줄게.”
“흠·······, 절 꼬시려고 그림자 2대를 원하신 겁니까?”
“왜? 싫어?”
더프가 주위를 둘러봤다.
“사에드 경(卿)은 어디 있습니까?”
“위로 겸 장기 휴가를 보냈어.”
“호위는 어쩌고요?”
“나도 실력 많이 늘었어. 이제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돼.”
순간,
“큭!”
여자의 비웃는 소리가 대화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비웃음의 주인인 아줌마가 더프에게 눈길을 주더니.
“사에드 경(卿)을 아시네요.”
“아, 네.”
“그와 검도 섞으셨나요?”
“흠, 그런데 누구...신지?”
레이먼드 기사단 부단장을 깨뜨린 장본인이라고 말해주자,
“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저랑 한 판 해요. 아니면, 지금 할까요?”
스릉!
“아줌마! 지금 행군 중이잖아요!”
“크흠, 나중이 좋겠군요.”
불쑥 들어온 불청객을 물리치자, 더프의 의심이 그 자리를 메웠다.
“혹시 사에드 경(卿) 대신입니까?”
“대신은 무슨... 말도 안 돼. 더프는 더프고, 사에드는 사에드일 뿐.”
“이래 봬도, 저 아주 비싼 몸입니다.”
흐흣!
“덱스터는 미스릴 검을 받았고, 사에드는 그거보다 백배는 더 비싼 걸 챙겼거든. 내 스타일 알잖아!”
“백배요?”
“최소한의 가치가 그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세상에 미스릴보다 백배나 비싼 물건이 있기는 합니까?”
“알고 싶으면 나한테 와.”
“백작님에게 졸라봐야겠습니다.”
“할아버지?”
“비싼 제의를 받은 김에... 저도 노후대비를 해볼까 하고요. 몸값을 올려야죠!”
흣!
그와의 소소한 농담. 오랜만의 즐거운 한때가 저녁 햇살에 녹아 내렸다.
딥퍼플(deep purple)한 해질녘 황혼에 대지의 열기와 묘한 상승을 이루며, 전쟁 분위기를 은근히 달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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