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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명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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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1.02 02:58
최근연재일 :
2009.11.02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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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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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글자수 :
383,723

작성
09.11.0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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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5

DUMMY

여강은 천천히 빛과 구름으로 휘감긴 대라천의 높디높은 옥경(玉京)을 따라 바람을 타고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마지막 시험…….’

속으로 중얼거렸다. 려는 뇌성(雷城)을 되찾은 것에 감격해했지만, 여강은 곧바로 뒤돌아섰다. 그에겐 한시가 급했다. 이제 결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연한 하늘빛과 연두빛 새싹의 중간빛을 띠어 그 옥빛이 아주 아름다웠다. 달과 별빛을 받아 고요히 빛나는 기둥을 따라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현을 뜯고 피리를 부르며 노닐고 있었다. 그 사이를 여강이 지나감에 모두가 소스라치며 흩어졌다. 그의 주위로 투기(鬪氣)가 흘러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점도 숨길 생각이 없는 여강이라, 이는 옥경 내부의 수많은 천신들, 신선들에게도 곧바로 전해졌다.

“뇌제가 옵니다.”

영보천존의 말에도 장막 뒤의 원시천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서왕모와 구천현녀, 옥황상제, 남극노인성, 삼계공 등 모두가 조용히, 그러나 긴장된 기색으로 단 하나의 창을 향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은청색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렸다. 검게 타서 얼룩덜룩하고 때로는 살갗이 보이는 누런 장유를 걸치고서 강청색(鋼靑色), 강철과 같은 검푸른 색의 눈동자로 뭇 신들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서왕모가 입을 벌렸다.

자신이 시험을 할 때와 또 달라져 있었다. 우주에 한 톨 먼지와 같이 보잘 것 없이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그를 자라게 하고 하계로 떨어져 무수한 전생을 거듭하고 이 자리에 서기까지, 그 기나긴 여정의 모든 것을 함축해 온몸에 담고 있는 듯한 뇌제는 아주 예전, 하계에 내쳐지기 전의 뇌제와도 완전히 달랐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여강은 태연한 태도로 영보천존을 향해, 정확히는 영보천존 뒤의 장막 속 원시천존을 향해 걸었다.

“마지막 시험이 무엇입니까?”

무시무시한 기운에 장막이 펄럭이고 하얀 장유를 걸친 백염의 노인이 걸어나왔다. 여강을 제외한 모두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어 존경을 표시한 가운데, 원시천존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죄를 저질렀다.”

숨을 멈추거나 들이마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너는 어찌할 것이냐, 이 나를.”

여강은 씩 웃고서 답했다.

“당연한 것은 묻는 게 아닙니다. 전 당신을 향해 번개를 내려칠 것입니다.”

“나에게?”

“한 번이 안 되면 열 번. 열 번이 안 되면 백 번. 그렇게 수천 번을 내려쳐서라도 죄를 벌할 것입니다.”

“그럼 해보거라.”

뇌제가 될 거라고 모여든, 혹은 그 외의 목적으로 모여든 모두가 비칠거리며 물러서는 가운데, 영보천존은 고요한 검은 눈으로 원시천존과 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강은 곧바로 짓쳐 들어갔다. 그의 날카로운 바람의 검이 원시천존의 옷깃을 자르고 번개가 옥경을 향해 굉음을 내며 내리치기 시작했다.

펄럭거리며 휘날리는 옷자락에서 먼지가 떨어져서 붉은 자국이 보였다. 그것은 모두 하계에서부터 그에게 따라붙던 살생의 증거, 핏자국이었다. 광기 어린 듯한 강청색 눈은 나부끼는 은청색 머리카락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주변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고 수십의 운신족들이 옥경을 둘러쌌다. 여강은 크게 외쳤다.

“죄인이 스스로 죄를 자인하였으니, 그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어찌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있겠느냐. 그 지위가 높은 바, 그 죄 더욱 막중하니!”

“예!”

운신족들은 크게 외쳐 주위 하늘을 진동시켰다.

여강은 저벅저벅 원시천존에게 다가섰다.

“복수를 위해선가? 뇌제!”

삼계공이 입을 모아 외쳤다. 그러자 여강은 크게 웃었다.

“뭘 그리 두려워하는가? 난 이미 모든 걸 떨쳤건만, 너희들이 어찌 이리 과거의 일에 사로잡혀 있는가? 난 뇌제다. 뇌제는 벌의 집행에 있어서 아무런 사심(私心)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옥의 망자이고, 인간계의 개미이고, 선계의 원시천존이고 내겐 모두가 같다.”

여강은 움직이지 않는 원시천존을 향해 내뱉었다.

“난 나다. 이 천계가 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지금의 나도, 후일의 나도 이럴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현천상제(玄天上帝)는 원시천존의 허울을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여강의 앞에 섰다. 영보천존을 제외한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그는 여강 주위로 날카롭게 솟아오르는 바람에 뺨을 베여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소매로 닦아내었다.

“변했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네는 자네로군. 없는 동안 심심했었지.”

“너 밖에 없겠지. 그 늙은이가 이런 도발적인 일을 벌일 리는 없으니까. 또 속다니.”

여강의 눈길이 남극노인성에게 향하자, 남극노인성이 얼른 헛기침을 하며 딴 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럼 원시천존께서는 어디에 계신 겁니까?”

웅성거리기 시작한 가운데 영보천존이 천천히 여강에게 말했다.

“당신께선 아실텐데요. 뇌제.”

여강은 이때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감(甘甘).”

그 뿐이었다. 왜 기억해내지 못했던가. 자신이 그 눈을 보아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의 신선, 천신이란 그 정도뿐이었다. 과거에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본시 우주는 혼란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세계가 성립하여 파멸에 이르기까지는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의 네 시기로 나눕니다. 이를 일러 사겁(四劫)이라 하는데, 성겁은 생성, 번영의 시기, 주겁은 생성되어 안주하는 시기, 괴겁은 온 세계가 괴멸해 가는 시기, 공겁은 소멸되어 공허로 돌아가는 시기를 이름이지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현천상제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심장이 불길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성겁에서 괴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우주가 끝나려 하고 있지요. 아직은 시간이 남아 있지만 말입니다. 원시천존은 이 우주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온 분. 운명 또한 같이 합니다.”

여강의 가슴 속에서 별안간 불이 치솟았다.

“그가 죽기라도 한다는 거야?”

영보천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여운을 남기듯 여강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감감이 서 있었다.

“너한테도 속다니.”

여강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자, 감감이 가까이 다가와 여강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러분께 고합니다. 난 백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전 우주의 섭리를 어기고 전의 우주를 버리지 못하고 제 속에 품고 있었지요. 이번 우주의 본(本)을 다른 이에게 맡겨둔 채.”

그 말과 함께 여강을 응시했다. 좌중의 모두가 어찌할 수도 없는 침묵 가운데 감감은 새로 드러난 사실에 완전히 놀라 기가 죽은 선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멸망을 향해 가속화하는 우주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선 제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원시천존이 이 우주를 품어야겠지요.”

그는 그 말과 함께 여강을 꽉 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복숭아 맛있었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감감이 다 사라지려고 할 때 여강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감감은, 원시천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여강에게 보내고 있었다.

가슴이 쪼개졌다. 자신을 벌한 원시천존이었지만, 자신에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도 원시천존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죽는 것도 아닌,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그를 대하여 여강은 울분을 토해낼 수도,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가슴의 통증이 존재할 뿐.

영보천존이 크게 선언했다.

“새로운 원시천존이 여기 우주의 본(本)으로 서다.”

모두가 당황 속에서도 예를 표하려 절을 하였을 때, 여강은 비릿한 조소로 외쳤다.

“난 언제까지나 뇌제(雷帝)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뇌제(雷帝)가 내 운명이야!”

경악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들을 향해 여강은 덧붙였다.

“그리고 온 우주를 감아 도는 팔풍(八風)의 주인, 바람술사 여강이다. 너희들이 뭐라 부르든 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그의 비뚤어진 웃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고개를 숙여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여강은 뚜벅뚜벅 걸어가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우주를 지탱하는 네 기둥, 사주(四柱)중 하나인 백룡(白龍) 유지(柳支)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하게 꿈틀대는 그 몸에 자신을 싣고 그는 까마득히 먼 우주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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