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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명운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1.02 02:58
최근연재일 :
2009.11.02 02:58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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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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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8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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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0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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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4

DUMMY

“그를 경계하지 않으십니까?”

원시천존을 향해 그렇게 물은 것은 현천상제(玄天上帝)였다. 그런 도발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것도 섬약한 겉모습과 달리 그 속은 뜨겁게 끓어오르고 오르다 말라붙어버린 쇠칼 같은 그 정도였다. 그는 전투적인 기운을 조금도 숨기고 있지 않았다.

“악함을, 더러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의는 오만과 횡포, 우월감의 표출과 다름 아니요. 관대함과 자비로운 마음씨를 갖추었으되 기묘하게도 결벽증과 같은 정의를 앞세우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당황했던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으나, 무허진인(舞虛眞人)이 그를 만나기 전엔 그토록 커다란 흐름은 되지 못하였음이지요. 그 둘은 쌍둥이처럼 닮았고, 또 남극성과 북극성처럼 달랐으나, 그 대단한 화학작용은 하생(下生)하여 전생(轉生)을 반복한 내내 한결 같았지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거요?”

서왕모는 천천히 답했다.

“그를 가장 경계하는 자는 당신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는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납득할 수 없다면 직접 겪어보시는 건 어떨지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들을 대하여 장막 뒤의 원시천존을 대신해 영보천존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세 번째 시험은 현천상제께서 행하는 것은 어떨지.”

그 말에 현천상제와 서왕모의 안색 모두 일변하였다. 영보천존만큼 그 속을 알 수 없는 자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둘은 원시천존의 음성을 듣지 못했음을 깨닫지 못했다. 물론, 그 전부터도 원시천존은 과묵한 편이어서 이와 같은 경우도 흔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영보천존은 현룡 위에 올라탄 채 단숨에 우주로 유영했다. 인간의 허물을 벗고 예전의 모습보다 훨씬 자란 모습을 하고서 뇌제는 자신에게 자줏빛 반점이 가득한 복숭아를 내밀었었다. 그 강청색 눈빛이 여전히 강경했었지만, 이젠 전과 같이 순결하지는 않았다.

별들이 가득한 어둑한 곳에서 영보천존은 낮은 음성으로 현룡에게 말했다.

“이상한 일이지 않나. 과거의 혼돈이 오늘의 질서로 화할 지도 모른다니, 그리고 과거의 질서가 오늘의 혼돈으로 화할 수도 있다는 것 말이야.”

그는 복숭아를 손바닥 위에 두었다가 곧 천천히 아래로 떨어뜨렸다. 천운(天運)이 닿는 자가 그것을 가질 것이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와 같은 시공간의 왜곡들 속 누군가와 연이 닿는다면. 혹은 헛되이 썩어버릴 수도 있겠지. 이런 것이 재미있었다. 그는 그러한 존재였고, 자각도 확실히 하고 있었다.

현룡이 천천히 더 먼 우주로 날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좋아했다. 어디까지나 고독 속에서 관조하는 존재. 그의 주인은 그러한 소명을 받은, 이 세상에 있어서 영원히 이물질로 남을 운명이었다.

영보천존의 말을 듣고 현천상제는 다소는 불경한 생각을 해냈다. 이것이라면 다름 아닌 뇌제만이 자신에게 덤벼들 것이다. 온 우주에서 그와 자신 외에는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뇌제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해.’

그는 서왕모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자신이 그를 가장 경계하였다. 이는 혼자 착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며 제멋대로 굴었던 과거의 그가 무척이나 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력(武力)으로 그를 넘어서고 싶었던 그의 소망이 과거에 그가 하생함으로서 좌절되었기 때문에 이번엔 다소 초조해졌던 것이다. 서왕모는 알지 못했겠지만, 그가 돌아와서 가장 기쁜 것 또한 자신이었다. 그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는 여강이 짓던 그 장난기 어린 미소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여강은 한기를 느끼고 몸을 후드득 털며 눈을 떴다.

“추우십니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려는 물어왔다. 인간이 아닌 이상 이곳에서 추위를 느낄 턱이 없다. 그는 인간이었던 여강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여강은 고개를 묵묵히 저었다. 그런 기분이 든 것뿐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운신족을 보며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스승님께서 부담이 되신다면, 그들을 먼저 보내어 놓겠습니다.”

“어디로?”

여강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려는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답했다.

“본래 당신의 거처인 삼청경(三淸境)의 옥경(玉境)에 있는 뇌성(雷城)입니다.”

눈치를 보던 선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여강이 고개를 바로 끄덕이기나 할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곳은 현재 천공(天公)의 다스림 하에 있어요.”

여강은 곧 그 후덕해보이던 천공, 즉 옥황상제를 기억해내었다. 만만치 않을 것임을, 그리고 려가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순식간에 간파해내고 놀라 려를 쳐다보았다.

그 노려보는 것에 가까운 눈길을 받고도 려는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당신의 것을 되찾으십시오. 기억도 말입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잡은 것은 여강의 손목, 정확히 말하자면 모충이 주었던 목걸이였다.

“수노인(壽老人)의 신물입니다. 당신을 위해 안배된 것일 테지요. 그리 잔혹하게 당신을 배제했던 원시천존이 어째서 이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어진 것을 활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려는 일어서서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당신의 거처를 돌려받을 테니 기억이 돌아오시면 저를 거두러 돌아와 주십시오.”

한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인 려가 저리 말하다니. 선해는 마치 려의 말이 어버이를 찾는 어린아이의 말투와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건 흉하거나 한심하다기 보다는 어딘가 안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같은 것을 느꼈는지 청동자 우사 또한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타인의 감정에 그토록 둔한 여강조차도 자신의 기억이 없다는 것에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극락조도 려도, 이미 사라져버린 진여(眞如)도 과거의 인연으로 인해 만났을 터인데 자신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그들에게 받기만 한다.

“가지 마.”

여강은 처음으로 타인을 말려보았다. 언제나 타인은 관계 밖이었던 것을. 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곧 싱긋 웃고는 서룡하였던 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감히 옥황상제 따위가 삼청(三淸)의 하나를 지배하는 스승님의 거처를 침범하다니. 본래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운신족이 떠나고 난 뒤, 믿을 수 없지만, 선해는 여강이 의기소침해졌다고 생각했다. 축 늘어진 어깨를 보자니, 좀 안 된 기분이 들어 손을 들어 그 어깨에 얹으려던 찰나였다. 감감이 그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감감의 현숙한 눈빛에 놀란 선해가 다시 쳐다보았을 때 감감은 보통 때의 멍한 감감으로 돌아와 있었다. 선해는 잘못 보았나 생각하고 말았다. 만난 초기의 감감의 기행(奇行)이 하도 강렬하게 선해의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여강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노인이 누구지? 그가 내 기억을 돌려줄 수 있나?”

선해가 무거운 공기를 깨는 말에 반갑게 응했다.

“수노인(壽老人)은 수성인(壽星人)이라고도 불립니다. 정식 명칭은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으로, 인간의 행복과 장수를 주관하는 신이지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 할아버지 신이시라면 도와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특이한 분이라고 소문이 나 있으니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선해에 반해 여강은 깊은 생각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잠시 뒤, 여강은 바람에게 속삭여 남쪽으로 향했다. 구름 위는 폭신했지만, 여강의 마음은 고뇌 속에 머물렀다.

인간계에 있을 때는 스스로 움직이기보다는 되어가는 대로, 제멋대로 날뛰어보고 조롱하고 그랬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무 것도 몰랐을 때이다. 여강은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보아 고소(苦笑)를 지었다. 지금은 다르다.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만큼 두려웠다. 최초의 친우(親友)인 ‘그’가 곁에 없고, ‘그’의 삶의 여정에 동행했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강은 답답해졌다. 한 번에 해결되는 일 따위, 제 맘대로 되는 일 따위 세상엔 거의 없었다. 특히 선계와 같이 잘 알지 못하는 곳에서는 더욱 더.

조그마한 조각구름 위에 사람 한 명 거하면 족할 자그마한 초가집이 보였다. 오며 가며 보았던 기가 막힐 정도의 호화롭고 신비한 풍광에 비해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비범한 거처였다.

“올 줄 알았지.”

말라비틀어진 지팡이를 짚고 선 노인이 주름진 얼굴로 묘하게 웃음 지으며 여강을 향해 말했다. 여강은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당신이 수노인(壽老人)이오? 내 기억을 돌려주겠소?”

그 말에 노인이 껄껄 웃었다.

“그래! 내가 그렇다고 남들이 그러더구나. 그나저나 네 놈은 현실도 환상도 꿈도 분간 못하는 얼간이로다! 내게 원시천존이 맡겨놓은 네 한 조각, 이제 돌려주라 하니 돌려주겠다만, 넌 그럼 보관료로 무엇을 주겠느냐?”

여강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무엇을 원하지?”

수노인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수상한 미소를 짓더니 답했다.

“네 손목에 감고 있는 목걸이를 다오.”

이에 여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색투명한 수정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손목에서 풀어냈다. 그것을 돌려주려 힘껏 던지려던 참에, 가슴 한 군데가 꾹 눌리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묵중한 무게였다. 손에 쥐고 망설이는 여강을 살피듯 뚫어져라 응시하던 수노인이 손을 내밀어 까딱거리며 재촉했다.

여강은 하는 수 없이, 무서운 기분이 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수노인을 향해 던졌다. 그 순간 목걸이의 알들이 눈부신 빛을 내며 폭발하듯 흩어졌다. 마치 유성우와 같이 무서운 속도로 사방으로 날아갔다.

“하하하하하!”

수노인이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어찌 네 기억을 내가 가지고 있으리. 흩어진 알알이 모두 네 기억인 것을.”

여강의 눈에 시퍼런 불이 일었다.

“날 속이다니!”

청백색 섬광이 우르릉 여강의 주위로 내리쳤다. 순식간에 사위는 밤처럼 깜깜해졌고 여강이 부리는 팔풍(八風) 모두가 형체 화되어 압박하듯 수노인을 둘러쌌다.

“이미 되돌릴 수 없어. 네 기억은 네가 버렸다. 넌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야. 그러나 넌 날 향해 던졌지. 그게 무얼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혈기방장한 젊은이여.”

여강은 망설였다.

“그렇지. 자넨 알고 있구먼. 지금의 자네에게 과거는 아무 소용없으며,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거야. 하나하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하네. 어느 시간의 공간인지도 알 수가 없어. 그것들을 찾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자네는 헤맬 텐가?”

여강은 단호하나 열띤 어조로 수노인의 말을 잘라내듯 질문을 던졌다.

“하나만 답해주시오. 난 왜 천상에서 내쳐진 것이오?”

수노인은 별안간 일변하여 현숙한 눈빛으로 여강을 바라보았다.

“네 미숙함 때문이다. 네 자신의 정의를 모두에게 강요한 탓이다. 네가 뇌제가 되려면 과거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 만약 과거의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면 넌 네게 이미 돌아와버린 뇌제의 힘 때문에 죽게 되지. 그리고 이미 네 기억을 찾기란 요원해졌다. 어떻게 할 것이냐?”

여강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왜 만나는 사람마다 날 시험하려 드는지 알 수가 없군. 이 모든 것이 원시천존이라는 작자의 작품이오? 내 답은 바로 이것이요.”

여강의 위로 고였던 먹구름이 걷히고 다시 빛이 몇 줄기 내려쬐기 시작했다.

“난 내 과거에 대해 연연하길 본래 바라지 않았소. 애초부터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지. 이제 와 어떤 원한도 분노도 날 어지럽히길 원하지 않아. 하지만 내 주위의 날 도와주고 따르는 이들과의 인연은 모르는 게 미안했어. 그게 다야.”

여강은 숨을 골랐다.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덧붙여, 난 뇌제가 되어도 안 되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죽고 싶진 않아.”

수노인이 빙긋 웃었다. 순식간에 주위가 환해졌다. 그 자신이 뿜어내는 빛이었다. 그는 수성인(壽星人)이기도 했다. 어느새 그의 손엔 지팡이 대신 술병이 들려 있었다. 그 마개를 뽕 뽑더니, 여강을 향해 획 부렸다.

“무욕(無慾)한 뇌제(雷帝)여, 잠을 깨게나.”

무색투명한 알알이 모두 낯이 익었다. 여강이 눈을 크게 떴다.

“또 날 속였어!”

그의 고함소리와 함께 술처럼 보였던 알알이 모두 여강의 몸에 눈부신 빛과 함께 스며들었다.

‘난 죄가 없어! 어찌 옳은 일을 하는 자를 이리 괄시하고 억압하는가! 선계라 한들, 이 오욕(汚辱)은 어찌할 것인가!’

‘과연 네 기준으로 무죄(無罪)인 자는 어디에 있을꼬?’

‘네 순수함이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수많은 어리석은 자를 단죄하였구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이 외쳤다.

‘더럽다! 더러워! 모두 더럽구나! 다 정화해야 할 것이야!’

바로 그 때 원시천존이 -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이 우주를 멸(滅)할 것이냐. 네겐 그만한 힘이 스며들어있음이다.’

‘필요하다면.’

그 말에 원시천존은 자신을 밀어내었다.

‘으아아악!’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끝도 없이.


발치에 푸른 새가 떨어져 있었다.

‘이것은 무슨 새냐?’

‘극락조라 하옵니다. 그런데 색이 이상하군요.’

자신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낮게 읊조렸다.

‘색이 달라 배척받은 것이냐. 그래서 이리 몸을 다친 것이냐.’

‘저와 같습니다. 이리 구함을 받음도 저와 같지요.’

자신과 대화를 주고받던 이는 려였다. 태어날 때부터 보통의 운신족을 한참 뛰어넘는 괴력을 가져 불길하게 취급되었고 죽음에 가깝도록 맞아 내쳐졌었던 3세 어린 아이였던 그.

새에게 갈색 짙은 약을 발라주며 진여는 려의 말에 옅은 미소를 보였다. 여강이 알고 있던 진여와는 확연히 달랐다. 젊고 아름다웠다.

작은 진주 한 알 때문에 누명을 써 문초 받고 죽음 당한 언니를 위해 복수를 저지르고, 판결에 대항하여 난동을 부려 나풍산의 무간지옥에 떨어졌던 진여를 지옥까지 가서 데려온 것은 그가 뇌제가 되고 제일 먼저 한 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는 곁에 없었다. 선계의 구름과 바람, 우박과 비와 번개만이 그와 함께였다. 그가 천계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그 압도적인 위용과 선천적인 품격에 모두가 고개를 수그리고 복종하였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숭앙하였다. 그리하여 원시천존이 그를 향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뇌제(雷帝)’라 일컬었다.

‘넌 재미있군.’

보통의 신선들처럼 자애롭거나 인자한 미소가 아닌, 냉소적인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말한 사내가 있었다. 무허진인(舞虛眞人)이라고 스스로를 일컬었던, 지독히 그 눈에 아무 것도 담으려 하지 않았던 무딘 칼 같던 지기(知己).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자신에 대해 전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에 하나 갖기도 어려운 진정한 친구였으며, 또한 둘 다 외골수에 거침없었다.

‘난 망설이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무허진인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두 눈에서 운서를 기억해내고 여강은 눈을 떴다.

“나보다 전엔 네가 더했었잖아.”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혼자서 중얼거리곤 여강은 희미하게 웃었다.

“려가 부르고 있구나.”

큰 소리로 외치고 여강은 조용히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즉 수노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에 수노인은 안온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아직 멀었구먼.”

이미 한참 멀어졌을 터인데 귓가에 바로 대고 속삭이는 듯한 수노인의 목소리에 놀라 뒤돌아보았을 때 그 초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중 나와 주신 거예요. 배려해주신 거로군요.”

선해의 목소리에 다소의 존경과 감탄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여강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옛 거처인 삼청경(三淸境)의 옥경(玉境)에 있는 뇌성(雷城)으로 세찬 바람을 타고 거세게 날아올랐다.

욕망의 세계인 욕계(欲界), 탐욕은 여의었으나 물질을 완전히 여의지 못한 세계인 색계(色界), 그리고 물질마저 완전히 초월한 순수한 정신의 세계인 무색계(無色界)를 지나 사범천(四梵天) 위에 바로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천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 천계 중의 천계인 최상층, 대라천(大羅天)이 있다. 그곳에 현도(玄都)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 중심부에 옥경(玉京)이라는 궁전이 존재한다.

그는 그 중에서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삼청경(三淸境)으로 향해가는 것이다. 그는 려의 기운이 점차 쇠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들어온 광경은 참혹했다. 수천의 천병(天兵)들과 비등한 승부를 겨루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결국 운신족의 수장인 려를 사로잡은 것은 옥황상제였다.

“늦었습니다.”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란 느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상황파악이 다 된 여강의 눈에 그는 실로 무섭게 비춰졌다.

“내 제자를 돌려주시오. 옥천대제(玉天大帝).”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 호칭으로 날 부르는 걸 보니 기억을 되찾은 모양이로군요. 후일 내 병사들에게 보상이 있기를 기대하겠소.”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을 것이니, 그쪽도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길 바라오.”

경악을 숨기지 않으며, 옥천대제는 여강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분노하지 않고,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소? 타협이란 모르던 분이 말이오.”

여강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곳은 내 거처요. 이제 물러가주셨으면 하오만.”

옥천대제, 즉 옥황상제는 입을 꾹 다물고 려와 다른 운신족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병력을 추슬러 뒤로 물러났다.

“이제 마지막 시험이 남았군요.”

옥황상제는 여강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과연 당신이…….”

그 뒷말을 애써 삼키고 마지막으로 그는 말했다.

“대라천(大羅天)에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소.”

여강은 안색을 굳히고 위를 쳐다보았다. 감감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

여강이 어깨에서 힘을 빼며 활짝 웃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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