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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명운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1.02 02:58
최근연재일 :
2009.11.02 02:58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28,582
추천수 :
127
글자수 :
383,723

작성
09.10.24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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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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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3쪽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0

DUMMY

화산폭발이 시작되었다곤 하였으나, 그리 빨리 진행될 거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민양태자를 제외하곤. 그는 화연공주가 태자의 죽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를 마주한 순간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뚫어본다. 그러한 능력이 어디로부터 연유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러하였다. 인간으로서는 화(火)의 술사요, 요괴로서는 구렁이요, 명수(冥水)가 아니면 존재하지도 못하는 허깨비요. 그리하여 그는 존재하게 될 때부터 다급하였다. 구렁이로서 한 차례 죽음을 맞이하였고, 인간으로서도 태어나지도 못한 채 어미의 뱃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명수는 오랫동안 기산(基山)에 눌려있다, 마침내 빠져나왔으니 활개를 치고 싶어 했다. 자신을 구속하여 만든 이 인공적인 - 청유와 지의의 - 세상에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사고의 연결은 없었다. 감정과 본능이 그를 움직이는 주 원동력이었다.

붉은 용암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 운서는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황궁까지도 덮쳐오는 것을, 성유의 토룡들이 새까맣게 자신들의 몸을 태우며 방벽이 되어 막고 있었다.

“으아아아!”

사방에서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화산재로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네 목적이 뭐냐?”

운서가 재차 민양태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리듯 답했다.

“몰라.”

그 눈빛이 비웃는 것처럼 보였으나, 감추거나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운서는 갑자기 가슴이 옥죄어왔다. 알 수 없는 감각이다. 상대는 적이다. 그런데 증오를 일으키기엔 어딘가 부족했다. 그는 누이동생을 껴안은 채 뒤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지금은 여기서 지체할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혼란 속에서 살 길을 찾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심적인 이유인지, 물리적인 이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숨을 쉬기 어려워지고 있다. 하늘의 태양이 잘 보이지 않게 되기 시작했다. 황궁은 거대한 기둥과도 같은 지반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적 그 위치가 높았다. 따라서 이제 튀어나오기 보다는 흘러내리기 시작한 용암으로부터는 다소 안전할지도 모르지만, 우박처럼 쏟아지는 거대한 돌덩어리들에는 더더욱 가까웠다.

그 모순을 알아차린 것인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잘못하다간 흘러내리는 용암의 속도에 따라잡혀 뜨거운 돌 속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그것도 식은 것이라면 그 정도이나, 뜨거운 굵은 줄기를 만나면 뼛속까지 타버릴 것이다.

“콰창! 쾅!”

지붕의 기와들이 처참한 소리를 내며 깨져 파편을 사방으로 튀겼다. 그 바람에 여강의 뺨에 붉은 선이 생겼다. 진여의 한결같은 보살핌으로 얼굴에 남은 채찍자국은 희미하게 사라져 있었으나, 이번의 것은 꽤 깊어 사라지기 힘들 듯 하였다. 여강은 소매로 쓱 밀어 닦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 해가 지고도 한 시진은 지난 듯한 어둠이 되었다. 분명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황냄새가 심하여 콧등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온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팔풍(八風)은 내게 모이라.”

여강이 입을 열어 소리 내어 말하자 익히 그에게 닿은 바 있는 바람들뿐만 아니라 더 중심의 거대한 풍신(風神)들이 순식간에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모여들었다. 동북 염풍(炎風), 동방 조풍(條風), 동남 혜풍(惠風), 남방 거풍(巨風), 서남 양풍(凉風), 서방 요풍(飂風), 서북 여풍(麗風), 북방 한풍(寒風)의 팔풍의 각 우두머리들이 대령한 것이다.

허공에 떠 반쯤 허물어진 토룡(土龍)의 벽을 보며 다시 엄청난, 사람의 머리만한 돌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불러도 응하지 않던, 풍신 가운데서도 으뜸인 녀석들이 모인 것이 신기했다. 여강은 설여우의 속박을 끊어낸 일을 계기로 자신이 사람으로서도, 술사로서도 한층 성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무너져 내리는 토룡을 도우려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켰을 때였다. 저 아래, 지옥 혹은 명계로부터 솟아오르는 듯한 회오리바람이 방벽처럼 황궁을 휩쌌다. 이제 화산폭발로 인한 그 어느 것도 황궁을 범할 수 없었다. 여강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두려움으로 소름이 돋았다. 모였던 팔풍신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져버릴 정도의 강한 존재감. 여강은 경악하여 외쳤다.

“당신은……!”

흰 무명옷이 펄럭였다. 푸른 기 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무섭도록 휘날리고 있었다. 꿈에서와 같은 뒷모습. 최초의 바람술사 청유(靑由). 그제야 여강은 깨달았다. 황궁을 떠받치고 있던 그 거대한 지주(支柱) 옆으로 불어올라가던, 자신의 말이 도달하지 않던 그 바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여강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청유가 어떤 선택을 과거에 했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그 모든 소원, 노력의 결말. 몇 백 년을 기다려온 그녀의 마지막.

여강은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땅에 두 발을 딛고 섰다. 자신은 살아있다. 위를 쳐다보았다. 청유의 모습이 희미해지고 있다. 같은 바람술사로서 운명보다 더 질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일에 전력을 퍼부었다. 그게 청유에 대한 도리라 여겼던 것이다. 처음 용기 있는 자들이 여강의 도움으로 높은 황궁으로부터 멀리 솟은 산 중턱까지 도달하는 것을 지켜본 자들이 앞 다투어 나섰다. 힘이 소진되는 일이었지만, 뒤돌아볼 새가 없었다. 여강은 진여도 서룡하도 운서도 찾지 않았다. 하늘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날 것이다. 그게 바로 그가 뇌제(雷帝)였을 때와도 다를 바 없는 그의 성품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천벌의 집행관이었던 것이다.

시연은 기린을 불렀으나, 기린은 조용히 하늘 저 먼 곳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방해할 수 없는 엄숙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어느 순간 눈물을 흘려내었다. 그 눈물은 무색투명한 수정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내 미련이 다하였으니, 이로서 너와 작별이로다.’

목소리가 바뀌어있음을 알고 다시 눈을 떠 바라보았을 때 한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눈이 지극히 깊었다. 좌는 흑색, 우는 녹색의 빛깔이었다. 특이하여 시선을 빼앗긴 시연에게 남자는 다시 말했다. 검은 색 머리카락이 길게 등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내 힘을 남겨두고 가나니, 네 임무가 막중하구나.’

그는 허리를 숙여 주저앉아 있는 시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서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스르륵 천천히 사라져버렸다. 시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난 그를 알고 있어…….”

그러나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먼 과거 사랑했던 사람을 배신했던, 그러나 그로 인해 오히려 스스로에게 더욱 커다란 형벌을 주고 말았던, 어리석고 가련하고 못난 한 사람이 있었다. 이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어딘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어서 가요! 이러다 죽어!”

매캐한 연기 속에서 양이 시연의 팔목을 잡고 끌었다. 정신없이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달렸다. 손 안에 몇 알의 수정 - 기린의 눈물 - 이 있었다. 운서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현우(賢宇)는 소꿉친구인 당청산(撞廳散)이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호리호리한 글줄이나 꿰고 앉았을법한 샌님에게 나가떨어지는 것을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흰 피부나 나볏한 행동거지가 귀티가 나서 배척도 받고 숭앙도 받고 있는 자였다. 덤불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쓱 밀어 올리며 웃는 데에는 필시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력(引力)이 있음이었다. 겨우 팔 개월이나 되었을까, 그런데 벌써 주력부대 안에서도 핵심인물이 되어있었다.

“오라버니!”

땀을 닦으라 수건을 갖다 주는 소녀는 어지간히 똘박해 보였다. 그 반짝이는 눈빛은 얼핏 냉철한 데가 있었다. 열여섯의 소녀에게 흔히 나타날 것이 아니었다. 현우는 자꾸 그 오누이가 신경이 쓰였다.

처음은 당청산이 저지른 일을 뒷수습하느라 시작되었다. 오 년 전, 운상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거대한 폭발이어서 운상이란 글자는 이제 낡은 추억이 되어 기억속에서도 바래고 있을 정도였다. 정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처음엔 귀족들과 각 지방관들이 수도로 몰려와 집이 없어 추위와 더위를 피할 길 없는, 굶주린 백성들을 도와주는 듯 했다. 그러나 황제가 행방불명이 되고 민양태자를 받드는 파와 영강황자를 받드는 파가 나뉘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최악이었지.’

현우는 어금니를 물었다. 흘러내린 용암과 화산재 때문에 물이 오염되어 식수조차 마땅치 않았다. 지진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 불안을 부채질했다. 시체는 산더미에 약탈과 살인, 강간이 판을 쳤다. 불신으로 가득차 서로를 공격하려 호미와 낫을 부여 쥐었다. 게다가 관(官)에서는 병사징집을 하려 했다. 그 무슨 미친 짓인가! 그 와중에 다혈질인 당청산이 관(官)을 공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듣고 놀라기는 하였으되, 불만을 가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둘은 부부는 아니지만, 일심동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조용하고 문(文)에 치중하는 성향을 당청산이 막강한 행동력으로 보충해주고 있었고, 불만이 가득한 젊은이들이 영웅을 원하듯 당청산에게 모여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하여 현우는 당청산에게 말했다.

“좋은 나라를 만들자. 자기 권력만 탐하며 백성들을 개미취급도 하지 않는 녀석들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순 없어.”

항시 고인 물처럼 조용하던 자신이 그렇게 말함에 당청산은 무척 놀랐다. 그러나 곧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삼년, 천주국은 삼분(三分)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자신들, 민천군(旻天軍)인 것이다. 가장 거대한 영역은 별 강해보이지도 않던 민양태자측이 차지하고 있었고, 영강황자측은 외가인 재준을 중심으로 버티고 있었다. 둘째이고 가장 화제가 되어왔던 운서황자 또한 행방불명이다. 설여우란 요괴의 피를 이었다면 반드시 살아있을 터인데.

씨름판에서는 또 다른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현우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서운(瑞暈)!”

부르자 당청산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던 서운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손하다. 본래 관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며 글줄 몰래 읽던 자신이다. 비록 무성황제가 자신의 집안을 도륙하기 전에는 명가의 후손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은 명가의 자손답게 자라질 못했다. 그리하여 서운의 언행이 편히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 들어오게.”

막사에 데리고 들어가 지도를 펼쳤다. 지도 위에 붉은 색으로 몇 군데 표시를 해놓았다. 한 달 후면 출정할 예정이다. 군사 오천과 민심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해나가고 있었다. 그게 불길하게 느껴지는 현우였다. 민양태자나 영강황자나 어느 쪽도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나흥을 칠 생각이십니까!”

물론 그럴 거라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직 막사 안에 불을 밝히지 않았다. 어두워 보이지 않는 게 보통일 텐데. 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불을 밝혔다. 그리고서 서운을 향해 물었다.

“넌 인간인가?”

믿지 못할 괴력은 물론이요, 당청산에게 두려움 없이 다가가는 저 배짱. 당청산의 팔 안쪽에는 털이 어른 손바닥 정도로 자라있다. 호랑이의 무늬가 그려진 그 부분을 보면 그가 반인반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서운은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서운은 미미한 표정 변화를 보였다. 눈에 푸른 기운이 비쳤다.

“이 난세(亂世)에 저희 오누이를 받아주었으니,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묻는 이유를 꿰뚫고 있다. 권력을 탐하진 않으나, 이만큼 오는 데 흘린 피는, 눈물은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 나라를 세우겠다. 흉포한 권력욕의 화신이 되어버린 귀족, 관리, 황족에게 무고하게 희생되지 않을 것이다. 어린 날, 유모의 품에서 가족의 효수된 머리를 보았다. 용서할 수 없다.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

운서 - 서운 - 는 막사 밖으로 나왔다. 나흥을 치는 일에 자신이 선봉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흥은 그야말로 요괴소굴이다. 인간을 밀어내어버린 요괴들만의 땅이 천주국에 몇 곳이나 생겨났다. 인간의 신체적 약함 때문에 급격한 자연변화에 견딜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으나, 요계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사룡은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 말했었다.

“그대, 요계의 제왕이 되지 않겠는가?”

운서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쏟아질 듯 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 신이 다가왔다. 그는 운서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화산폭발 이후의 대혼란에서도 자신을 찾아내었다. 눈에 띠지 않게 모르는 이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나, 때때로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근처에 있었다. 한 번은 물었다.

“난 이제 황자가 아니다. 너에게 편안한 잠자리도 음식도 줄 수 없어. 그러니 떠나도.”

말이 끊겼다. 신이 격노하여 외쳤기 때문이다. 운서는 그 격렬한 반응에 굳어버렸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지도 않고 ‘난’ 이라 호칭한, 마치 천지(天地)에 고하듯 울려 퍼진 고함에는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한(恨)이 담겨 있었다. 이에 운서는 아무 말도 않고 그저 그의 어깨를 두드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이 신에게 격려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운서는 말없이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요괴들에 대적하려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 친숙해진 동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다. 요괴들의 목숨조차도 잃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귓가에서 울렸다.

‘그대, 요계의 제왕이 되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동암(動暗)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움직이는 어둠’ 이란 말은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이 넘치는 어깨와 매끄럽고 부드러운 허리의 곡선과 유연하나 강인한 꼬리. 무엇보다 그 새카만 털.

륜망(輪網)이란 대륙을 사분(四分)하는 대요선에는 동(東)의 동암(動暗), 서(西)의 청미랑(靑尾狼), 남(南)의 사룡(蛇龍), 북(北)의 설호(雪狐)가 있다. 그러나 청미랑은 등선(登仙)하였고, 서의 경계는 흐트러졌다. 후계를 다투던 호토삼요 중 송(松)만 살아남았다 전해지나, 그 또한 행방불명이다. 더구나 남의 요괴들이 과거 일시에 명계(冥界)와 현계(顯界) 사이에서 잠에 빠져들고, 그 우두머리인 사룡은 행적이 묘연해졌다. 현재 건재한 것은 동의 동암과 북의 설호뿐이다.

“그러나…….”

동암이 우아한 동작으로 앞발을 들어 동굴 벽에 짚자, 그의 몸으로부터 고대 문자가 흘러나와 벽에 깊이 새겨졌다. 자신은 그 글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내용만은 알고 있었다. 그건 강제적인 주입이자, 륜망의 존망을 건 계약이자, 주어진 권력에 대한 책임이었다.

‘성수(聖獸) 기린(麒麟)이 최초이자 최후로 정한 주인인 지의(地宜)가 우주의 테두리 안에 머무를 것을 맹서하였음에, 신(神)이 사랑한 분신(分身)이자 화신(化神)인 바람술사 청유(靑由)가 제 육체를 내어 소원을 빌었음에, 천존(天尊)은 지계(地界)의 팔족(八族) 중에서 가장 약한 인간과 멸족 위기에 있던 요선(妖仙)들에게 안전한 시공간을 한시적으로 허락하였다. 첫째, 기산(基山)의 주인은 혼돈의 근원인 명수(冥水)를 지켜야 한다. 둘째, 염산(炎山)의 주인은 그 몸에 천존의 계약을 새겨 보존해야 한다. 셋째, 오행술사의 명맥이 유지되어야 한다. 넷째, 인간과 요괴의 분별이 있어야 한다.’

사룡이 명수를 유출시킨 것이 분명하다. 명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렇지 않다면, 저런 괴물이 나타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천존의 계약도 그가 근처에 다가옴에 따라 두렵게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게다가 그 괴물은 인간도, 요괴도 아니었다. 이미 넷의 조약 중 셋이 이지러졌다.

“어디 있니?”

아이처럼 외치는 사내의 목소리를 듣고서 동암은 눈을 감았다. 절망적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은 비참하게 몰살당했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어쩌면 이 륜망이라는 세상이 감당 못할 힘일지도 모른다. 그의 존재 자체가 혼돈이었다. 동암은 동굴 속에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완전한 어둠에 다다르면 그의 모습을 감출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는 민양태자로 불리는 그 자는 본능처럼 자신을 찾았다. 천존과의 계약의 산 증거인 자신을. 어쩌면 그 또한 파괴자란 운명을 받은 것일 뿐일지도 몰랐다. 륜망은 한시적인 세상이니까. 하지만 도대체 왜 천존은 그러한 제한을 둔 것일까.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민양태자의 눈에 활활 타오르는 노란 두 눈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솟아오른 불로 상대의 몸 전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흑표범이 허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손을 앞으로 뻗었을 때 한바탕 광풍이 불었다. 불은 오히려 민양태자쪽을 향했다. 그가 분노하여 눈을 떠 다시 보았을 때 한 중늙은이가 허공에 뜬 채 고소하다는 듯 비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재차 공격하기도 전에 가뿐히 그는 동암을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산기슭 그늘에는 고사리가 어린아이의 손처럼 작게 웅크려 모여 있었다. 한참을 쭈그려 고사리를 꺾어 바구니에 담던 인영은 고개를 들었다. 갈대로 짠 챙이 넓은 모자가 오히려 시야를 가로막았다. 한 점 망설임 없이 모자를 벗고 한 걸음 나아가자 녹옥(綠玉) 같은 신록들 사이로 눈부신 햇살과 흰 뭉게구름이, 넓디넓은 깊은 물빛 하늘이 한가득 가슴 속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었다. 시연은 눈을 내려감았다. 때가 꼬질꼬질 묻어 있는 얼굴이었지만 기색은 밝았다.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모자를 벗는 바람에 흘러내린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삶은 항시 고단하다. 그렇기에 고해(苦海)라 누군가 일렀던가. 그러나 이미 그러한 것을 받아들이고 앞을 보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연은 바구니 가득 나물들이 자리하게 된 것에 대해 소소할지 몰라도 크나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배를 심히 곯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좀 나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과는 다를 것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부모가 죽어버린 아이들이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여 하나둘 거둬들이던 것이 벌써 아홉 식구다. 양은 투덜거렸지만, 근본 심성이 워낙 착한지라 결국 시연의 뜻을 따라주고 있었다. 양이 궁에서 챙겨 나온 재보와 자신이 걸치고 있던 의복이 도움이 되었다.

바구니를 품에 안고서 천천히 비탈을 조심스레 내려오던 시연은 마을 쪽을 보았다. 그래도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안정되었다. 밭과 논에서는 곡식이 연한 초록색 잎을 내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람들도 점차 그곳은 살만하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론 요괴들도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온순한 성격을 가진 것들뿐이다. 걸어서 겨우 이틀거리에 삼월(三月)로 유명한 나흥이 있지만 이곳은 마치 별천지처럼 그곳과는 달랐다. 그건 모두 시연의 목에 걸려 있는 기린의 눈물 때문이었다. 어쩐지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시연은 살아있는 것처럼 고동소리를 내는 무색투명한 수정과 같은 그 알을 손으로 버릇처럼 어루만졌다.

‘천주국의 개국시조 지의의 분신인 기린의 의지란 이러한 것이구나.’

시연은 어쩐지 먼 과거속의 지의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이란 권력을 잡고 벼슬을 만들고 차지하는 일보다는 주위와 자신이 평화로이 살아가려는 소망이 먼저였으리란 그런 생각.

이전과 같은 천주국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울타리가 필요하다. 새로운 나라, 이 모든 재앙과 불행을 모두 보듬어 안을 커다란 나라가. 기린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린의 눈물이, 그리고 미약하나 남은 힘이 자신에게 깃들어 있었다. 논둑길을 걸어가며 벼 잎을 만지자 생생히 그 빛이 살아나는 걸 보며 시연은 확신했다.

큰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너구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연은 속으로 외쳤다. 너구리는 싱싱한 물고기 몇 마리를 두고 갔다. 자신이 예전에 치료해 살려준 새끼에 대한 예를 표시한 것이다. 이런 소박한 요괴들을 배제할 것인가.

요괴라면 무조건 잡아 죽이고 있었다. 이 한여(閒濾)를 제외하고 그런 분위기가 주위 지역에 팽배해져 있었다. 나흥의 아수라장을 빠져나온 인간들은 요괴에 대한 지독한 복수심을 만만한 작은 요괴들에게, 심지어 요괴가 되지 않은 보통의 짐승들에게 풀고 있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인간으로 가장한 요괴로 몰아붙여 죽이기도 했다.

참극이었고, 비극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이대로는 안 되었다.

“큰 사람이 필요해. 인간과 요괴를 통합해서 이 나라를 안정시킬 누군가가 필요해.”

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확신 어린 어조로 홀로 내뱉었다. 시연은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는 작은 마을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보듬어 안으려 하고 있었다.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를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운서를, 그리고 여강을 떠올렸다.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설여우의 피를 이어받은 그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시연은 애써 믿었다.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볼 수 있으리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희망이 가장 잔혹하였다. 그러나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그녀를 또한 일깨우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소박하나 소중한 보금자리로 나물바구니를 들고 걷고 있었다. 그녀 주위를 맴돌던 바람이 어딘가로 멀리 흘러가기 시작했다. 산과 강과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 먼 창공으로, 그리고 그 주인인 누군가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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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2 09.10.30 482 4 23쪽
42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1 09.10.29 444 2 14쪽
41 명운기(明運記) 3부 운상기담(雲上奇譚) - 프롤로그 +1 09.10.28 441 6 3쪽
40 명운기 2부 사비가 - 에필로그 +2 09.10.28 480 2 6쪽
39 명운기 2부 사비가 - 4 09.10.28 361 2 14쪽
38 명운기 2부 사비가 - 3 09.10.28 425 2 23쪽
37 명운기 2부 사비가 - 2 +1 09.10.27 294 2 19쪽
36 명운기 2부 사비가 - 1 09.10.27 423 2 17쪽
35 명운기(明運記) 2부 사비가(沙悲歌) - 프롤로그 +2 09.10.27 480 2 6쪽
34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에필로그 +7 09.10.27 514 2 4쪽
33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3 09.10.27 517 2 33쪽
32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2 +2 09.10.25 565 2 21쪽
31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1 09.10.24 539 3 23쪽
»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0 09.10.24 428 3 23쪽
29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9 09.10.23 418 2 10쪽
28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8 +1 09.10.22 540 2 23쪽
27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7 +1 09.10.22 521 3 15쪽
26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6 +2 09.10.20 489 2 25쪽
25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5 09.10.19 497 2 16쪽
24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4 +2 09.10.18 725 2 17쪽
23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3 +1 09.10.17 692 2 35쪽
22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2 +1 09.10.17 514 3 16쪽
21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1 +2 09.10.16 416 2 18쪽
20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0 +1 09.10.14 555 2 27쪽
19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19 09.10.13 470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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