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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명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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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1.02 02:58
최근연재일 :
2009.11.02 02:58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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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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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3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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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2

DUMMY

“풍광이 실로 아름답구나.”

여강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건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리 여강이 멈춰선 덕분에 감감은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감감 또한 고함을 지르느라 헐떡거리는 선해를 털썩 내려놓고 눈을 크게 뜨고 한참을 보다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거대한 운해를 지나 마침내 연한 푸른 기를 띠는 보랏빛 산이 겹겹이 둘러친 곳에 이른 것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딸랑딸랑 옥방울이 흔들리는 소리마냥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고, 짙은 안개 속에서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 비늘은 오색찬란하여 그 주위의 안개와 바닥의 구름들도 그 색을 받아 천지가 환했다.

별안간 작은 물고기 떼가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굵고 구불구불한 것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현룡(玄龍)이라 불리는, 비늘이 얇고 그 색이 깊고 고우며 머리가 둥글고 몸체가 작아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흑룡과 구분되는 용이었다.

“영보천존(靈寶天尊)의 초대입니다. 가셔야 합니다.”

선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져 말했다.

“현룡은 영보천존의 분신(分身)과도 같은 존재이며, 여태까지 감히 영보천존의 초대를 거부한 자도 없었거니와, 받은 자도 손에 꼽을 정도이니. 당신은 뭡니까?”

선해는 처음 여강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눈빛에서 완연히 달라진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강은 묵묵히 현룡을 쳐다보고, 선해를 쳐다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보천존은 누구냐?”

선해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서는 한숨과 함께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말하지 않으면 여강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원시천존과 태상천존과 더불어 우주를 다스리는 세 분 중 하나이시죠. 존귀하신 분들 중에서도 존귀하신 분들이에요. 선계에 들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분의 초대를 받다니 영광인 줄 아셔야 한다구요! 아이 참, 저기 현룡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막판에는 불안한지 발을 마구 굴렀다. 여강은 그의 모습을 보는 주위의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실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선계로 올라온 이유는 하계에서 더 이상 자신의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말 그대로 인연이 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무엇을 자신이 해야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똥배짱으로 문을 강제 돌파하고 여기까지 이르렀으나, 설사 자신이 뇌제라는 것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난감했다. 그런데 그렇게 높으신 양반이 부른다 하니,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러나 곧 여강은 피식 웃었다.

‘언제 내가 이것저것 다 생각하며 가만히 한 곳에 붙어있던 성품이었던가? 바람을 닮고자 하였건만.’

그는 곧 서방 요풍(飂風)을 불러 옆구리에 끼고서 즐겁게 현룡의 등 위에 올랐다. 현룡이 덩치가 작다 하여도 다른 용에 비해서이다. 주위의 다른 물고기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보고 멍하니 선 선해와 감감을 보았다. 잠시 멍해졌던 그는 곧 현룡에게 속삭여 둘을 태웠다. 감감은 신이 났으나 선해는 멍한 상태로 한참 있다가 겨우 “아!” 하는 비명소리 혹은 탄식소리와 같은 것을 내었다. 그러나 이미 현룡은 무서운 속도로 안개를 헤치고 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귓가에서 계속 물소리가 맑게 흘러 정신을 노곤하게 헤쳐 놓았다.

현룡은 섬세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기실은 무덤덤한 성격인 듯 여강에게 그리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륜망의 모든 것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단 하나, 인간을 제외하곤.

그러므로 현룡의 담담한 검은 눈동자는 그에겐 다소 낯선 것이었다. 그런 현룡이 따르는 주인이라. 여강은 상대가 자신에게 버거우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현룡이 흑옥(黑玉)으로 된 윤기가 흐르는 대저택으로 들어서서도 한참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가 수시로 드나들게끔 현룡이 지나가도 부자유스럽지 않을 복도가 길게 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현묘하게 빛나는 넓은 터에 이르렀다. 여강과 선해, 감감이 내리자 현룡은 곧 단상 위의 한 인영에게로 달려들었다. 선해가

“앗!”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현룡은 순식간에 작아져서 그 사내의 어깨와 허리를 감았다. 편해 보이는 얼굴로 눈을 스르륵 감고서 영보천존일 것이 분명한 흑색 머리의 창백해 보이는 남자가 일어섰다.

“이제 모두 오셨군요.”

목소리의 울림이 차가웠다. 그러나 요동치게 만드는 한기가 아닌, 그저 평안히 모두를 진정시키는 느낌의 서늘함이었다. 모든 것의 근원인 혼돈이 저 한 몸에 집약되어 있다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의 안정감이었다. 그가 바로 원시천존의 오른팔, 영보천존이었다.

그는 천천히 단상 아래로 내려와 여강을 보았다. 무표정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봅니다. 이제 인간의 이름인 여강으로 불러야 합니까.”

물음이 아님을 여강은 즉시 알았다. 눈치나 어조로 안 것이 아니라, 영보천존의 의도가 직접 가슴에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선해는 이미 빳빳하게 얼어 있었고, 감감도 잠잠했다. 극락조는 날개를 퍼더덕 거렸다. 날아 도망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것 같았다. 가볍게 그 깃털을 검지로 쓸어주고는 여강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히익! 처, 천공(天公)!”

선해의 외침에 여강은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자를 보았다. 그저 주위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인심 좋은 아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공이라 함은…….’

여강도 그를 알고 있었다. 그만큼 하계에서 인기가 있는 신이 달리 또 있을까. 바로 천공(天公), 옥천대제(玉天大帝), 혹은 옥황상제(玉皇上帝)로 불리는, 인간의 한 해의 행동을 파악하여 다음해의 행운과 불행을 내려준다는 공과격(功過格)의 임무를 맡은 최고신들 중 하나인 것이다.

“당신의 부재 동안 옥황상제께서 그대의 임무까지 처리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영보천존의 말에도 여강은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고맙다고 하기에는 자신이 뇌제란 실감이 그리 나지 않고, 아무 말 않고 있기에는 뭔가 그랬다. 그러나 그를 전혀 아랑곳 않고 영보천존은 말을 이었다.

“이제 뇌제가 천계에 돌아왔으니, 공정한 시합이 되리라 생각하오만.”

이 말에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이 있었다. 이제 선해는 숨이 넘어갈 듯 했다.

“사, 삼관..대제.”

삼계공(三界公)이라고도 불리는 삼관대제(三官大帝)는 각기 하늘과 땅과 물을 관장하는 소소한 신들의 감독관으로 옥황상제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위치에 처해 있는 삼형제였다. 셋은 너무나 닮아 있어 어찌 보면 세쌍둥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날카롭게 치솟은 검미에 명민하게 반짝이는 눈빛, 굳게 다문 입술이 뛰어남과 완고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옥동자, 저는 보이지 않으신가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보인 것은 아름다운 선녀였다. 화려한 외모의, 그러나 귀티가 흐르는 얼굴이다. 분홍 진주의 광택이 흐르는 비단 옷감의 옷을 입고 홍옥의 머리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왕모(西王母)의 제자로 구천현녀(九天玄女)라 불렸다.

“이제 원시천존의 뜻에 따라 세 가지 과제를 내겠소. 과제의 결과들에 따라 새로운 뇌제를 정할 것이오.”

그 말에 여강의 뒤쪽에서 엄청난 함성이 울려퍼졌다. 여강은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굉장한 인파였다. 선해는 진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다가, 감감의 소매를 꽉 붙든 채로 여강에게 속삭였다.

“선계에는 직책을 갖지 못한 어중이떠중이 놀고먹는 신선들이 많아요.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영원을 그리 살기란 어려운 일이라, 더욱이 뇌제라면 그 강력한 힘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니, 저리들 몰려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절대 아니거든요.”

말을 마치고선 여강을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불쌍하다는 표정이라 여강은 꾹 치솟아오르는 걸 누르고는 멀뚱멀뚱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신을 향해 투지를 숨기지 않고 눈빛을 번쩍번쩍 빛내는 자들에 의해 속이 거북해졌다.

‘뭐랄까. 이거 나는 강제 참가인거야?’

영보천존이 ‘이제 뇌제가 천계에 돌아왔으니, 공정한 시합이 되리라 생각하오만.’ 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여강은 입을 열었다.

“참가하지 않으면 어찌 되오?”

그 말에 좌중이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설마 그가 그리 말하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듯 했다. 영보천존의 입술 한쪽 끝이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상관없소만, 뇌제의 힘은 결국 주인에게로 돌아가려 하니, 임시가 아닌 새로운 뇌제를 뽑으려면 본래의 주인이 죽어야 마땅할 것이오.”

주위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한참 멍하게 있던 여강이 선해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신선들이 산다는 선계가 맞는 거야?”

선해가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여긴 정말 생긴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뿐이거든요. 자제라는 것도 없고 욕망도 숨김이 없으니 완전 애들이지요.”

여강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진짜 무서운 동네로구먼.”

영보천존이 그를 면밀히 관찰하다가 다시 처음과 같은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첫번째 과제, 그것은 서왕모의 반도원(蟠桃園)의 가장 안쪽에 있는 복숭아를 하나 따서 오는 만월(滿月)까지 내게 가져오는 것이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대다수에 비해 구천현녀는 침착했다. 자신의 안마당과 같은 곳이 아닌가. 삼관대제와 옥황상제는 자신이 있는지 묘한 미소를 지었으되, 여강은 무지로 인해 태연했다.

‘죽기 싫으면 갖고 와야 하나. 그깟 것 가지고 오면 되지.’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법이었다. 물론 여강은 그런 것을 생각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영보천존은 속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기억하는 뇌제는 현재의 모습과 같지 않았다. 청백색 단발머리는 그가 휘두르는 벼락의 검과 아주 잘 어울렸다. 청년도 소년도 아닌, 미묘한 나이에 영원히 머무르는 미성숙자. 그래서 어여뻤으나 또한 위태로웠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랄 수 있는 존재.’

원시천존이 이른 그대로였다. 그러나 결과에 따라선 자신이 그의 자아를 무(無)로 흩어버릴 수도 있음이었다. 자신에겐 그럴 힘이 있었다. 설사 사주(四柱) 백룡(白龍) 유지(柳支)의 외아들이라고 해도. 그러므로 너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여강은 영보천존의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살기를 느끼고 안색이 굳었다.

“장난이 아냐.”

여강은 뒤돌아 휘휘 걸었다.

“도대체 전생에 내가 뭔 죄를 지었기에.”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펄쩍 근처의 조각구름을 향해 뛰어올랐다. 선해와 감감은 자신의 일에 휘말렸으니 어느 정도까지는 동행해야 마땅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뒤따라 올라타도록 종용하고 기다렸다. 한참 하늘을 날고 있을 때였다. 옆에 주저앉아 있던 감감이 여강의 등을 툭 손바닥으로 두드린 뒤 나직이 말했다.

“복숭아, 맛있겠다.”

여강이 씩 웃었다.

“그치?”

선해가 옆에서 기절하려 했다. 저 무식한 두 놈은 - 설사 여강이 전에 뇌제였다고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 나름 담대한 선해였다 - 서왕모의 복숭아가 어떤 것인지 절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여강이 코를 실룩거렸다. 짠내가 났다.

“바다?”

감감이 아래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선해도 구름 아래로 목을 빼고 내려다보았다. 실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거인이 하나 앉아서 엉엉 울고 있는데 그 눈물이 호수를 점점 이뤄가고 있었다.

여강이 구름을 아래로 내려, 거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거인은 세 개의 눈을 갖고 있었는데 이마의 눈은 황금색이었으며, 아래의 두 눈은 연한 갈색으로, 아주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가까이 가기가 두려웠다. 대충 거리를 유지한 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피하여 여강이 물었다.

“왜 우는데?”

거인이 실눈을 뜨고 여강 일행을 보더니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어헝!”

“으아아아!”

선해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들은 뜨거운 짠물에 홀딱 젖어버렸다. 감감의 표정조차 시큰둥해졌다. 여강은 이미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눈이 세 개면 뭐해! 주위를 보란 말이야! 너 때문에 주위가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안 보여?”

남방 거풍의 손을 거대하게 형체화시켜 거인의 머리를 철썩 때렸다. 그러자 눈을 번히 뜨더니 여강을 보며 입을 벌려 소리를 질러댔다.

“으악, 입 냄새! 그보다 귀청 떨어지겠어!”

선해의 말과 함께 여강은 속으로 ‘이러다 죽겠다.’ 하며 구름 아래로 뛰어내렸다. 혹시나 하였지만, 뒤돌아보니 선해나 감감이나 아무 저항 없이 물 - 정확히는 거인의 눈물 - 위에 서 있었다.

역시 이곳은 선계라는 실감을 했다. 전혀 특출하게 보이지 않던 그들조차 저런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선자(仙者)들과 신(神)들이 이곳에 가득하단 말인가.’

여강의 가슴이 이제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인의 울음을 멈추는 것이 먼저였다. 주위의 산들이 잠기기 시작했다. 온갖 기이한 동물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네가 울음을 그치면 내가 도와주지.”

거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더 크게 울었다. 이에 여강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래애! 백날천날 울기만 해라!”

그 말에 거인이 문득 울음을 멈추더니 으르렁거리며 번쩍거리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내 아이를 구해줄 거야?”

선해가 감감 뒤로 숨었다.

‘안 구해주면 저 거인한테 죽을 것 같잖아. 괜히 건드렸어, 여강.’

그러나 여강은 거침없었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줘야지.”

거인은 곧 고개를 숙여 여강을 향해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그 태도가 워낙 누그러져 있어 선해는 놀랐다. 자신은 저 커다란 덩치에 상대의 본질을 놓친 것이다. 여강과 감감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얼굴이 붉어졌다. 형체에 이끌려 본(本)을 놓치는 것만큼 창피스러운 일이 없다. 수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한참 뒤 정신을 차려 여강 쪽을 보니 분기탱천한 얼굴이다.

“당연히 구해줘야지! 넌 여기에 있어! 내가 데려올 테니!”

언제나 건성이고 건방져보이던 여강이 저런 표정과 어투로 말을 하다니. 그러다가 선해가 별안간 떠오른 생각에 외쳤다.

“서왕모의 거처는 곤륜산 꼭대기인데 한참 걸려요. 만월까지 복숭아를 가지고 돌아가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딴 짓을 하려고! 당신 목숨이 달렸다고요!”

여강은 들은 척도 않았다.

“복숭아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걱정 없어.”

그 무심한 태도에 기가 질려 선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에 감감이 달래듯 미소 지으며 선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선해는 소리 나지 않게 입으로만 중얼거렸다.

“자기 앞가림이나 잘할 것이지.”

그러나 여강은 거침없이 바람을 불러 달렸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궁금증을 못 이겨 선해는 그 뒤를 따랐다. 감감은 난감한 표정으로 “복숭아, 복숭아.” 라고 중얼거렸지만 선해가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얼른 뒤따랐다.

여강은 그 모충(募充)이라는 거인의 아들이 타단(打丹)이라는 도사에게 잡혀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 아들을 푹 고아 한단(寒丹)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연금술 혹은 연단술(煉丹術)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연마하여 신선이 된 자는 생각보다 그 숫자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타단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 이유는 신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금술을 그만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적과 수단이 주객전도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그 집착이 심오한 데가 있었다.

한단은 단화(丹華), 신부(神符), 신단(神丹), 환단(還丹), 이단(餌丹), 연단(練丹), 유단(柔丹), 복단(伏丹), 한단(寒丹)의 아홉 가지의 단약 중 마지막이다. 다른 단약들로 신선이 될 수는 있었지만, 그에 타단은 만족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거인의 아이를 재료로 하려고 마음을 먹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을 보면 보통이 아니다. 여강은 즉각적으로 분노했다. 그는 아직도 마음에 상처가 있었다. 만연한 굶주림에 가족과 이웃들에게, 믿었던 사람들에게 잡아먹힐 뻔한 일로, 그는 명확히 자신이 바람술사라는 것을 자각했었다. 그러나 이건 먹고 살자고 하는 절박하고 처절한 몸부림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이다. 그것을 위해 다른 이의 소중한 아들을 산채로 삶으려 하다니.

거인이 가르쳐 준 곳은 거인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입구를 가진 동굴이었다. 그 동굴이 있는 산은 쇠로 되어 있고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불타오르고 있어서 일견 지옥을 연상케 했다. 그곳이 바로 타단이 만든 그만의 거처였다. 그가 실험하고 버린 단약들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켜켜이 쌓여 기이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감감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신의 발 주위에 모인 구름 하나를 뚝 떼어 동굴 입구 근처의 불을 향해 던졌다.

“불, 위험해.”

불길이 반 정도로 사그라지자,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나왔다.

거미처럼 길고 가는 팔다리에 바닥에 질질 끌리는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이 탁 튀어나왔다.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발을 마구 굴렸다.

“감히 내 불을 건드리다니! 이게 어떤 불인데! 내가 이천년도 넘게 보존해 이제 드디어 조건에 맞게 되어가고 있는데, 어느 놈이 이 중대한 시점에!”

그러다 여강 일행을 보고서 소리를 쳤다.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그러자 여강이 외쳤다.

“모충의 아들을 내놓으시오!”

타단이 코웃음을 쳤다.

“어미의 죽음과 아비의 등선이 동시에 이루어져, 갓난아이인 채로 선계로 오게 되는 거인의 아이라는 것이 흔한 줄 아는가? 내 평생을 바칠 일에 방해를 할 셈인가?”

“그러게 왜 자충수를 두시오?”

여강이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그 기세가 흉흉해서 감감을 제외한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가만히 팔다리를 모으고 웅크리고 있던 타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가 자포자기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 단약으로 신선이 되어봤자 이 우주가 끝나는 날에도 지선(至仙)일 뿐이야!”

여강이 입을 딱 벌렸다가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신선이 되어 굶주림과 같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길고 긴 수명을 누리는 것에도 만족할 수 없단 말이요? 지선이든 원시천존이든 무슨 상관이야?”

선해가 옆에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강과 타단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물들인 것이다.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전혀 달랐다.

타단이 이른 대로, 신선이라고 다 똑같은 신선은 아니었다. 상선(上仙), 고선(高仙), 대선(大仙), 현선(玄仙), 천선(天仙), 진선(眞仙), 신선(神仙), 영선(靈仙), 지선(至仙)의 순으로 능력에 따라 등급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등급과는 별도로 단약으로 신선이 된 자는 가장 비천하게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막 선계로 올라온 여강이 무엇을 알겠는가.

더구나 그는 하계에서도 속계에 속하지 않은 도인(道人)이자, 그 중에서도 명산(名山)이라 일컬어지는 응산(應山)의 주인인 바람술사였다. 그런 그에게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같은 건 없었고, 무엇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의 무언가를 강하게 열망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그 강렬한 욕망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타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공명심과 같은 욕망을 깨치는 것이, 선계(仙界)에 오르는 일차적 요건일진대, 타단은 그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구천현녀나 삼계공 등 무수한 신선들 또한 뇌제(雷帝)의 자리를 노려 그처럼 모여든 것을 보면, 역시 신선이라는 존재들도 뜨거운 피가 그 속에 흐르는 생명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에 생각이 이르자, 여강은 역함을 느꼈다.

‘어딜 가나 똑같군.’

그는 크게 소리를 쳤다.

“그 아이를 내어놓으면 네 목숨을 살려주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은 없을 줄 알거라.”

그러자 타단이 눈을 붉게 부릅뜨고 여강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네가 누군데 남의 일에 간섭이냐?”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 네가 말하는 의(義)는 도대체 무엇인데 날 이리 귀찮게 하려는 것이냐! 내겐 이 아이로 한단을 만드는 것이 의(義)인데, 그럼 나의 의는 무시하는 것인가?”

이 말에 여강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부글부글 뜨겁고 거칠게 솟구치는 감정을 느꼈다.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였다. 그는 무심코 가슴을 부여잡았다.

‘네 정의(正義)로는 우주를 지킬 수 없다.’

우주의 깊이와 넓이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는 거룩한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서 울렸다.

‘누구야?’

여강은 눈을 크게 뜨고서 타단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실제 그는 타단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한참을 여강의 대답을 기다리던 타단은 여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불덩어리를 양손의 손가락 끝에서 만들어내어 열 개를 쐐액 빠르게 날렸다.

어어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선해는 이미 여강의 무용(武勇)을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보고 알고 있었기에 별 다른 걱정 없이 보고 있었고, 감감 또한 멍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은 보통의 불이 아닌 듯, 순식간에 엄청난 고열을 내며 여강의 옷깃과 피부를 태우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희미하게 머금은 타단의 얼굴을 불길 사이로 보면서, 선해의 비명소리와 감감의 어버버 소리를 마지막으로 여강의 의식이 순식간에 가맣게 흐려졌다. 지독한 고통에 정신을 먼저 잃으면서 오히려 감각이 없는 듯 느껴진 것이다.

순식간에 커진 극락조의 날갯짓으로 몰려든 구름을 선해와 감감이 허겁지겁 이겨 붙였으나 그 불은 너무나 강력했다. 한참의 시간이 가도 꺼지지 않았고, 여강의 얼굴은 누가 만들다 내버려둔 짓이겨진 찰흙 덩어리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서로 엉겨 붙었다. 선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 말은 독하게 하고 똑똑하다고 하다고 하여도 근본은 선량한 어린애였다 - 눈 쪽으로 집중적으로 구름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눈은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불이 모두 꺼졌을 때에는 인간의 몰골이라 말하기 힘들 정도의 모습이 거기 남아 있었다.

“말도 안 돼…….”

선해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래도 전 뇌제(雷帝)였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뇌제(雷帝)였던 이였다. 죄와 벌의 경중을 맞추어 벼락을 내리던 고위신이 이런 일을 당하다니. 살아날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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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명운기(明運記) 외전 설상화(雪常花) +5 09.11.02 504 2 18쪽
47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에필로그 +7 09.11.01 505 2 5쪽
46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5 09.11.01 453 12 9쪽
45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4 +1 09.11.01 437 3 18쪽
44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3 +2 09.11.01 464 3 28쪽
»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2 09.10.30 483 4 23쪽
42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1 09.10.29 444 2 14쪽
41 명운기(明運記) 3부 운상기담(雲上奇譚) - 프롤로그 +1 09.10.28 442 6 3쪽
40 명운기 2부 사비가 - 에필로그 +2 09.10.28 480 2 6쪽
39 명운기 2부 사비가 - 4 09.10.28 361 2 14쪽
38 명운기 2부 사비가 - 3 09.10.28 425 2 23쪽
37 명운기 2부 사비가 - 2 +1 09.10.27 294 2 19쪽
36 명운기 2부 사비가 - 1 09.10.27 423 2 17쪽
35 명운기(明運記) 2부 사비가(沙悲歌) - 프롤로그 +2 09.10.27 480 2 6쪽
34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에필로그 +7 09.10.27 514 2 4쪽
33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3 09.10.27 517 2 33쪽
32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2 +2 09.10.25 565 2 21쪽
31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1 09.10.24 539 3 23쪽
30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0 09.10.24 428 3 23쪽
29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9 09.10.23 418 2 10쪽
28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8 +1 09.10.22 540 2 23쪽
27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7 +1 09.10.22 521 3 15쪽
26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6 +2 09.10.20 489 2 25쪽
25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5 09.10.19 497 2 16쪽
24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4 +2 09.10.18 725 2 17쪽
23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3 +1 09.10.17 692 2 35쪽
22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2 +1 09.10.17 514 3 16쪽
21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1 +2 09.10.16 416 2 18쪽
20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0 +1 09.10.14 555 2 27쪽
19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19 09.10.13 470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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