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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명운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1.02 02:58
최근연재일 :
2009.11.02 02:5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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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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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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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1

DUMMY

삿갓을 눌러쓴 한 남자가 한적한 소로(小路)를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흙색 옷자락이 펄럭거려 짐작할 수 있는 마른 몸매에도 그 발걸음에는 진중함과 침착함이 실려 있었다. 그의 주위의 바람이 이상했다. 몇 줄기의 바람들이 혼란스럽게 주위를 맴돌아 흙먼지가 일어났다. 그의 복색이 어찌 흙색이 되었는가 짐작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삿갓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정면에 보이는 산을 보았다. 저 곳에 그가 찾던 것이 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모습을 우연히 본 냉이를 캐던 아낙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여강은 산의 중턱에 내려앉았다. 눈앞에는 동굴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울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기 시작했음에도 그는 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쿠쾅!”

굉음과 함께 그는 동굴 벽에 처박혔다.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검붉은 피로 뒤덮인 맹수의 앞발이다. 날카로운 검은 발톱이 단련된 강함을 반지르르 흘려내고 있었다. 썩은 피비린내가 화악 올라왔고 그 앞발이 움직여 여강의 목을 가로로 날려버리려는 찰나 피보라가 일어났다.

무수한 바람의 칼날. 풍도(風刀)가 고기를 다지듯 순식간에 상대를 짓이겼기 때문이다. 물컹거리며 솟아나는 명수(冥水)를 응시하던 여강의 왼쪽 눈이 은빛으로 변했다. 그러자 생명체가 공포를 느끼듯 부르르 일순 떨고는 명수가 무음(無音)의 비명과 함께 그 속으로 빨려 들었다.

여강은 벽에 부딪친 충격으로 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삿갓을 주웠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흙먼지가 떨어지면 분명 여기 쓰러진, 명수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신체가 발달하고 흉포해졌던 그 곰의 털색과 마찬가지의 검붉은 색. 수많은 살생(殺生)을 행해왔다. 명수를 모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곤 하나 살생은 살생, 죄업은 죄업. 그러나 여강은 본래의 색이 돌아온 흑갈색 눈으로 무심히 비참한 곰의 최후를 흘깃 보았을 뿐이다.

진여가 회색 먼지로 스러져갔다. 그렇게 흘러드는 용암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영원한 죽음으로 흘러가버렸다. 그녀는 자신을 지키고 만족했다. 그녀는 자신을 따르기 위해 하늘의 규율을 어겼으므로 영혼 한 조각 남지 않았다. 바람처럼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의 오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 그걸 진여는 그와는 반대의 삶의 방식으로, 지나칠 정도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낭손을 찾아가 바람술사의 존재의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낭손은 모처럼 진지하게 답했다.

“인간 명수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고 세상을 지탱하는 사슬이다.”

여강은 이에 답했다.

“그러나 인간일 뿐이다.”

그의 무례한 말투에도 이미 질리도록 익숙해진 스승 낭손이다. 본래 그 자신이 그런 데 얽매이지 않는 성품이기도 해서 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손 안에 하얀 빛과 같은 기운을 모으더니 여강의 왼쪽 눈에 박아 넣었다. 그가 고통으로 굼벵이처럼 땅을 구르는 여강에게 말했다.

“바람술사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그릇, 네게 지금 전했다. 정말 사용하게 되리라곤. 니 진짜 운 없구나! 칼칼칼!”

한 차례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낭손은 사라져버렸다. 고통이 좀 가시자 여강은 뜨겁게 데이고 차갑게 얼은 마음으로 묵묵히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낭손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세상을 어찌 하려고 하는지.

신(神)이, 원시천존이 그 분신으로서 청유, 바람술사를 만들어 이 륜망이란 대륙에 주었다. 본래 천상의 뇌제(雷帝)이기도 하였던 그다. 그의 영혼은 신들 중에서도 존귀한 존재이다. 그런 그가 원시천존의 분신 역할을 순순히 감내하기란 누가 보아도 어려운 일. 결국 원시천존은 모든 것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한계라고, 더 이상 별개의 세상을 둘 수는 없다고 말이다. 마침내 세계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여강은 묵묵히 걸었다. 그는 그러한 것을 분명히 알지는 못한다. 그저 이젠 이대로 안 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뒤틀리고 있는 륜망. 미쳐가는 자연과 요괴와 짐승과 사람들. 세상은 제자리를 찾으러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이제 확신하고 있었다. 구부러진 검을 뜨겁게 달궈 망치질 하여 정련하듯이. 이에 명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 년이 지났다. 모든 명수가 그의 그릇에 담겨졌다. 이제 륜망이 준비가 되어야 하는 때였다.

“이제 만나러 가볼까.”

여강이 허리를 뒤로 젖혀 모처럼 하늘을 보았다. 미칠 것만 같은 사냥이 끝난 것이다. 푸른 하늘은 청명하여 그는 기가 막혀 웃었다. 정말로 인간은 작은 것이다.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낭손(浪遜)은 건조해진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 보았다. 인간으로서는 꽤 오래 살아온 편이다.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 그를 가만히 주시하던 동암(動暗)은 천천히 다가갔다. 기척을 죽였지만, 아니나 다를까 낭손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동암은 대요괴로서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를 구해주었다. 내가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뭐지?”

그러나 낭손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오십여 년. 종래 남은 건 썩고 단단해진 마음뿐이구나. 허나 곧 그 마음도 바람결 따라 흩어지겠지.”

동암은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유언임을 알아챈 것이다. 그의 제자라는 여강이란 자에게 ‘바람술사의 그릇’을 전해주고 난 이후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해가던 낭손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 그릇을 내어주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혼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도 한참 동암은 기다렸다. 그의 숨이 잦아지기를. 그렇게 낭손은 숨을 거두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쳤다. 낭손의 육체와 혼이 동시에 흩어져서 무(無)로 돌아갔다. 그러한 광경은 지극히 기이한 것이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석상처럼 굳은 채 허공을 노려보던 동암의 황금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확대되었다.

강대한 기운에 눌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역시 그는 그렇게 떠났군. 바람술사들이 언제나 그러하듯.”

녹음(綠陰)의 색으로 물들여진 은빛 광채의 순백 털을 보았다. 본신(本身)을 드러냄은 경의의 표시다. 응산(應山)의 주인은 바람술사이다. 그러나 북방 요계의 주인인 설여우의 거처 또한 응산이었다. 하나의 산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지 못한다는 격언이 무색하게 둘은 큰 충돌 없이 공존해왔다. 설여우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당신 같은 요선(妖仙)이 우오?”

동암은 크르렁 거리며 물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은 것은 공포심 때문이다. 설여우는 그를 물끄러미 빨려서 녹아들 것 같은 은빛 눈으로 쳐다보더니 답했다.

“삿된 추측은 말라. 헛된 인간 목숨. 이에 안타까워하는 것이니.”

동암은 고개를 돌려 황금빛 눈을 멀리 희미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 보름달에 두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당신뿐이오. 요계를 어쩌실 것이오? 민양태자라는 인간도 요괴도 아닌 자가 인간계뿐만 아니라 요계에서도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무사히 세력을 보존한 자는 당신뿐입니다.”

동암은 어깨를 낮추었다. 설여우의 은빛털이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발이 땅속에 파묻혀갔다.

“난 언제나 혼자였다. 그래서 바람술사와 싸울 일도 없었지. 둘 다 언제나 혼자였으니.”

영원히 혼자일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나는 바람술사와 고요괴(古妖怪)의 피를 받은 운서를 만나게 하고자 했던 것은 서로를 알아보리라는 희망이었다. 혼자라는 걸 숙명으로 받아들여도 자신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위안이 된다.

‘단 한 점의 미련도 갖고 있지 않던 니가! 하! 하! 하!’

낭손이 자신을 향해 조롱을 보냈을 때 설여우는 답했다.

‘하나의 약점쯤 가지고 있어야 마음의 고통이라는 것도 알 수 있으니까. 고통을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내게는.’

그러자 낭손은 웃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대한 폭포가 웅장한 기세로 말없이 떨어졌다. 동암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냉막한 은빛 눈으로 쳐다보며 설여우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요계의 여황(女皇)은 동료도 부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 혼자서 그 호칭에 족한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점점 짙어가는 녹음이 어둠을 드리우고 달빛은 그 사이를 꿈결처럼 맴돌았다. 눈을 감고 한 걸음 내딛자 그녀만의 결계 속이었다. 말린 향기로운 풀들 위에서 눈을 감고 상락황제가 잠들어 있었다.

“항상 괴로워했지. 호칭과는 정반대로. 태어나면서부터 동생을 파멸로 내몰 운명이었으며, 이미 이십여 년 전에 내 이빨에 죽을 운명이었던 인간. 죽고 싶다 해서 살려주었더니 결국 또 이 꼴인가?”

설여우는 차가운 눈으로 상략황제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주둥이를 갖다 대고 속삭였다.

“겁쟁이! 나를 보지 않을 것이냐! 약속대로 널 죽이겠다!”

마지막 순간은 절대로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화연공주(花演公主)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의 나이였지만, 그녀는 전부터 언제나 나이에 비해 무거운 짐을 져왔다. 육체적인 괴로움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물이 흐르는 발로 한 걸음 내딛었다.

“여자의 몸으로 그 행군을 견디겠다고?”

연화라는 이름으로 오라비를 따라 생활해온지도 오 년이 지났다. 황궁에 있을 때는 별도의 궁에 살아 말은 동기(同氣)라고 하나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으로 치자면 기실 남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 힘든 세월을 함께 버텨내면서 정이라는 것도 생겼다. 게다가 까다로운 그녀의 눈으로 보아도 운서는 존경할만한 사내였다.

민천군(旻天軍)이라는 조악한 집단에서 자신의 오라비는 반실성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생존을 넘어 존엄성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었던가. 말은 ‘하늘의 뜻을 따르는 군대’ 로 그럴 듯하였다. 그러나 그 구성원은 바로 갖가지 욕망으로 얼룩진 인간들이다.

운서는 넘어지지는 않았다.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상대보다도 미천하거나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는 미소를 만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이 말에 발을 걸었던 덩치 좋은 자가 입술을 한쪽으로 삐딱하게 끌어올리더니 손을 들었다. 그러자 굼실굼실 대여섯의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기생오라비처럼 얼굴만 희멀거니 맘에 안 들었지.”

모여든 자들 중에 하나가 둘째손가락을 내밀어 운서의 이마를 몇 번이고 밀며 덧붙였다.

“손에 굳은살도 없고 어리바리 헤매는 꼴을 보면 저도 모르게 밟아주고 싶거든. 쓴 맛을 모르는 도련님이 이런 부록까지 데리고 있으면 말야.”

운서는 화연을 감싸며 눈에 날을 세웠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입맛을 쩍쩍 다시고 있는 놈의 면상을 노려보았다. 화연은 어머니를 잃은 후 회복되지 않았다. 더욱이 자라면서 꽃봉오리가 피듯 미색(美色)이 피어나고 있다곤 하나 이제 겨우 열넷이다. 이런 노골적인 위협과 추파를 받기엔 아직 어리다.

인내에도 한계가 올 것 같았다. 신은 별도 부대라 전투에 나가고 없었다. 그는 압도적인 무용(武勇)과 진중해 보이는 외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책사인 현우(賢宇)의 눈에 들어 백부장(百夫長)이 된 상태였다. 백부장이라 하여도 크게 높은 지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의 도움이 음(陰)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약골로 분류되어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식의 말단에 배속되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는 의도였지만 이런 무법천지에 약육강식의 소굴인줄 알았더라면 자신의 힘을 사용하길 한 점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게다가 겁먹은, 호기심 어린, 재미있겠다는 식의 눈들이 슬금슬금 몰려들어 벌써 크게 원형을 그리고 있다. 운서는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확실히 눈에 띄었다. 몸에 배인 행동거지가 달랐다. 청수한 이목구비도 한몫을 하였고, 그 정신 나간 누이를 세세히 챙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운서는 상대의 검지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꺾어버렸다.

“우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제 어쩔 수 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상대를 부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참고 참았다.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이건 자신의 백성이다. 그러나 보듬는 데에는 한도가 있었다. 도대체 보듬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악을 악으로 벌하면 원망이 생긴다. 악을 선으로 대하면 악은 반드시 선을 침노한다.

“타협은 끝이다.”

어금니를 악물고 운서는 낮게 중얼거렸다. 시작한 이상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몇몇은 피를 보겠다는 흥분으로 자신들의 칼집을 챙챙 두드렸고, 몇몇은 창백해진 얼굴로 운서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냉소적인 표정으로 결과가 빤하다는 듯 쳐다보는 자들도 몇 있었다. 그 중 현우(賢宇)도 있었다. 그는 미간을 좁혔지만 말릴 생각은 않았다. 이질적인 것은 절로 배제되기 마련. 하지만 만약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저 누이는 구해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이런 식의 엉망인 분위기로는 명령체계가 잘 서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어떠하든 관계자를 엄벌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확장되었다.

문약(文弱)한 서생으로 보였던 자가 격분하여 동시에 덤벼드는 장정들의 사이를 파고들어 섬뜩한 소리를 우둑우드득 하고 냈기 때문이다. 다리와 팔이 모두 부러졌다. 서지도 못하고 누워 고통으로 꿈틀대며 끙끙대고 있는 자들을 향해 눈에 시퍼런 불을 내며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다시 한 번 내 누이에게 불순한 의도를 내보인다면.”

발을 들어 올려 처음 시비를 걸었던 - 대장인 듯 보이는 - 자의 갈비뼈를 지그시 누르며 말을 이었다.

“온몸의 뼈가 부러질 것이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 누이가 잠에서 깨듯 한 마디 내뱉었을 뿐이다.

“...오라버니?”

운서는 감격하여 화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선귀인(嬋貴人)의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의 회귀(回歸)였다. 마침내 입을 열고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화연은 사실 모든 걸 보고 듣고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마음이 닫혀 있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본래의 힘을 드러낸 운서를 보고서 더 이상 그의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한 발자국 벽 너머로 걸었다. 그 한 걸음을 걷는 데 이 년이 걸렸다.

선귀인은 죽을 때까지 화연을 원망했다. 사실을 말한 자신의 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본인도 무의식중에 자신의 행동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민양태자를 먹은 것은 그녀의 의지는 아니었다. 운 나쁘게 제회(諸懷)의 영에게 씌었던 것이다. 오손이 우연히 발견하여 잡아와 그 육체를 잃게 하여 죽은 병사들에게 씌워 전쟁에 썼던 그 무지하고 무죄인, 다만 먹이가 인간일 뿐인 그 짐승. 그 사실을, 자신의 죄를 선귀인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딸을 더더욱 탓했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그녀의 딸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녀의 딸은 그녀보다 자태가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웠으며 영리하고 현명하였으며 대범하였다. 그리고 오행술사의 하나로서 나무를 다스렸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황실의 금지옥엽이란 신분이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여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열등감과 패배감을 그 딸이 태어날 때부터 그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었고, 그걸 결코 벗어던지거나 변화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완고하고 욕심 많으며 자존심이 높은 여자였다. 모든 어머니가 어머니로 적합하게 변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여자였을 뿐 어머니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딸에게도 어머니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선귀인은 화연을 괴롭게 할 방법을 잘 알았다. 화연은 그녀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존재였지만, 화연만큼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또 세상에 없었다.

그녀는 감의 씨앗을 옷 속에 숨겼다. 그리고 화연보고 안마를 해달라고 청했다. 장갑을 벗어달라는 말이 이상했지만 어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준 것에 화연은 마냥 기뻤다. 운서와 신이 사냥하러 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옷깃이 벌어져 화연의 손끝에 닿은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자랐다. 그리고 선귀인은 순식간에 감나무의 뿌리에 관통되어 바싹 말라 흙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운서와 신이 돌아왔을 때 화연은 기절도 않고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거기에 크게 선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빨간 감이 맺혀 있었다.

과거 그 시비를 목격한 현우가 운서를 발탁했다. 그러나 그는 운서를 결코 신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터들 중에서도 하필 나흥으로 보내었다. 화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이를 물었다.

선두에 운서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서운’ 이라 불리지만. 이름을 거꾸로 한 것으로 가명을 한 것에서 운서의 고지식하고 단순한 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화연은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웃음을 지었다.

나흥은 요괴들의 소굴로 유명한 곳이다. 물론 현재 륜망에는 요괴들이 득시글거리지만, 나흥은 삼월(三月)이 있어 마치 다른 세상과 같아 차원이 다르다고, 특별하다고 한다. 그 개체 수는 물론이고, 그 강함에 있어서도. 그래서인지 행렬은 길되 평소의 기색이 아니었다.

‘지켜야 해.’

자신의 누이를 살짝 수레에 태울 정도의 융통성도 없는 오라비는 알아서 그 누이가 돌봐주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끔찍했던 자신의 힘을 자신의 의지로 사용하는 첫 번째 일이 될 것이다.


반쯤 미친 듯이 웃고 울고 먹고 배설한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자 자신이 누군지조차 흐릿해졌다. 붉은 달들이 각기 다른 세 개의 륜(輪)을 그리며 짙푸른 암흑 속에서 번뜩인다. 저 달을 보는 순간 온몸이 고통으로 오그라들더니 끔찍할 정도의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차가운 물속에서 숨도 쉬지 않고 스스로를 죽여 갔다.

광활한 세계를 달려온 이계(異界)의 공기가 요괴의 혈(血)을 끓게 한다. 원시로 돌아가라고 매일이고 속삭인다. 륜망을 사분(四分)하던 사룡(蛇龍)이 그러하다면 그 어떤 요괴가 제정신으로 버텨내겠는가.

삼월(三月)이 지배하는 이 나흥(羅興)에서.

사룡의 검은 비늘 덮인 산만한 몸이 움직이자 이에 휘말려 수많은 요괴들이 스러졌다. 그러나 그 무엇도 사룡에게 닿지 않았다. 사룡은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언제나 그를 위협하던 혼돈과 절망 속에 그 자신을 내맡기고 안심하고 있었다. 진정한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내어서 오히려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자아(自我)를 지운다.

인간과 요괴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던 자신 내부의 처참한 전쟁의 흔적도 서서히 어둠 속에서 지워지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징조’가 나타났다.

굉음이 세상을 두드린다. 하늘이 엷어져 또 다른 검푸른 하늘이 비치고 달의 붉은 빛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요괴들 중 그 누구도 달아나지 않았다. 홀린 듯 하늘을, 먼 이계의 하늘을 쳐다볼 뿐. 어둠은 같으나 그 본질은 달랐다. 륜망의 밤은 울타리고 수호자였다. 그러나 이계의 밤은 유혹이고 타락의 빛을 띠었다. 광망(狂妄)의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시연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와 흔들리는 수풀의 그림자를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이들과 양은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길이 보였다.”

낮게 중얼거렸다.

별안간 마치 어제 일어났던 것처럼 눈앞에 기린이 서 있었다. 그 황금빛 두 눈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너구나.’

‘네가 태어난 것은 네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천주국은 앞으로 연이은 환란을 겪을 것이다. 많은 인간과 요괴와 짐승과 륜망 자체가 죽고 파괴될 것이다. 네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인력(人力)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일도 있다. 다만 사람은 매일 노력할 뿐이다. 시연은 단호히 기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야할 길을 갈 뿐이야.”

기린이 물었다.

‘잘못된 길이라면, 그 끝에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면?’

시연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 또한 나의 몫.”

기린은 나타날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그제야 시연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식구들을 보았다.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막내인 아(兒)가 울먹이며 물었다.

“가는 거야? 장형?”

초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가슴이 뻐근해오는 걸 느꼈지만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은 이미 눈빛으로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일 영특하고 발 빠른 준언(俊彦)이 불쑥 내뱉었다. 산 채로 요괴에게 뜯긴 제 부모를 수습해 묻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열두 살 소년이었다.

“나도 따라갈래.”

갑자기 모두가 따라간다고 난리였지만 양이 완강하게 호통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달래면서 일은 일단락되었다.

“네가 기린선인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어. 중요한 일이겠지? 내가 따라가면 좋겠지만 준언이라면 도움이 될 거야.”

양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을 말하며 삶은 감자를 마구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싸는 것을 시연이 말리자, 양이 눈물을 비쳤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여자 혼자 몸으로.”

“..알고 있었어?”

양은 장난기 비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시연은 거리낌 없이 양을 껴안고 말했다.

“무사히 있어야 해.”

“너야말로.”

양이 우습다는 듯 시연의 어깨를 툭 치며 밀어냈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서쪽에서 붉은 기운이 슬금슬금 밤하늘을 잠식해오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시연이 준언에게 말했다.

“북쪽으로 가자.”

준언은 고개를 끄덕하고 시연의 뒤를 따랐다. 시연의 눈꺼풀 안쪽에 아직도 꿈속의 광경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바람이 불어 세상을 포용하고 더 멀리 우주를 향해 나아갔다. 륜망이 태어난, 천존(天尊)이 최초의 바람술사 청유, 천주국 개국시조 지의, 그리고 설여우의 뜻을 받아들여 계약을 행한 그 곳. 그 기한이 다 되었고, 당사자들이 모여야 했다. 기린(麒麟)이 먼저 장(場)을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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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운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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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명운기(明運記) 외전 설상화(雪常花) +5 09.11.02 504 2 18쪽
47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에필로그 +7 09.11.01 505 2 5쪽
46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5 09.11.01 453 12 9쪽
45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4 +1 09.11.01 437 3 18쪽
44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3 +2 09.11.01 464 3 28쪽
43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2 09.10.30 483 4 23쪽
42 명운기 3부 운상기담 - 1 09.10.29 444 2 14쪽
41 명운기(明運記) 3부 운상기담(雲上奇譚) - 프롤로그 +1 09.10.28 442 6 3쪽
40 명운기 2부 사비가 - 에필로그 +2 09.10.28 480 2 6쪽
39 명운기 2부 사비가 - 4 09.10.28 362 2 14쪽
38 명운기 2부 사비가 - 3 09.10.28 425 2 23쪽
37 명운기 2부 사비가 - 2 +1 09.10.27 294 2 19쪽
36 명운기 2부 사비가 - 1 09.10.27 423 2 17쪽
35 명운기(明運記) 2부 사비가(沙悲歌) - 프롤로그 +2 09.10.27 480 2 6쪽
34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에필로그 +7 09.10.27 514 2 4쪽
33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3 09.10.27 517 2 33쪽
32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2 +2 09.10.25 565 2 21쪽
»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1 09.10.24 540 3 23쪽
30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30 09.10.24 428 3 23쪽
29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9 09.10.23 418 2 10쪽
28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8 +1 09.10.22 540 2 23쪽
27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7 +1 09.10.22 521 3 15쪽
26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6 +2 09.10.20 489 2 25쪽
25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5 09.10.19 497 2 16쪽
24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4 +2 09.10.18 725 2 17쪽
23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3 +1 09.10.17 692 2 35쪽
22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2 +1 09.10.17 514 3 16쪽
21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1 +2 09.10.16 416 2 18쪽
20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20 +1 09.10.14 555 2 27쪽
19 명운기 1부 태진황제전 - 19 09.10.13 470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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