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조회수 :
36,045
추천수 :
240
글자수 :
622,045

작성
09.10.19 23:53
조회
438
추천
2
글자
23쪽

천루 2부 산풍 - 4

DUMMY

월궁주는 잘못 알고 있었다. 파륜이나 나나 근본적으로, 실제적으로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뿌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포용이 아닌 당연한 수용이었다.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 자살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내가 여기 있기에 만물과 우주가 존재하는데 말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나를 보고도 진심으로 화내고 웃을 자는 파륜뿐인 것이다.

파륜인 얼굴이 허예져서 날 쫓아왔다.

“정말 저런 여자와 혼인할 거야?”

“왜, 싫으냐?”

긴 회랑을 걸으며 이죽거렸다. 그러나 파륜은 내 뒤에 있어 내 표정을 볼 수 없다.

“저렇게 알 수 없는 여자는 구역질난다구.”

우뚝 섰다. 휙 뒤돌아 파륜을 보고 물었다.

“네 적안으로도 알 수 없더냐?”

“그런 게 아냐. 저 여잔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어서, 본심이 가려지다 못해 흐려지고 이제 사라지려 하고 있어. 차라리 류허가 나아.”

“...난 어떤데?”

내가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들이밀며 파륜에게 묻자, 그 파륜도 겁이 나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음.. 아... 류허는... 그게... 아하하하하!”

그는 금제(禁制)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달아나려 하는 것을 손목을 붙잡고 질질 끌고 서고(書庫)로 향했다. 오랜만에 공부를 시켜야겠다. 무수한 금언과 격언들이 있지만, 그 진의(眞意)를 깨닫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게 번개가 치는 것과 같은 각성의 순간을 잠재시키거나 앞당길지도 모른다. 파륜에게는 필요한 일이었다.

“난사의(難思議)가 무슨 뜻이야?”

아무거나 짚고 물어본다.

“생각하기 어렵고, 말하기 어렵다는 거야. 즉, 말과 생각으로 미칠 수 없다는 거지.”

그냥 물어본 거지만 답을 듣고 나니 뭔가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바로 진리의 속성이라는 거야.”

“흐음.”

흐음 하긴 했지만 전혀 관심 없고 재미도 없는 눈치다. 저 멀리 두르르르 굴러가는 걸 잡고 있는 밧줄을 당기자 도르르 이쪽으로 다시 말려든다.

이에 발광한 파륜. 귀한 서책 두 권을 먹어치우다. 말 그대로 먹어치운 것이다. 빠대기 좋아하는 파륜을 잡아놓은 나름대로의 값을 치룬 셈이다. 살살 나름대로 달래가며 붙들어 놓았더니 그래도 오일이나 제석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슬슬 한계인 듯 하다.

“그러고 보니, 네가 검을 쥔 것을 처음 보았구나.”

“그러면 더 보여줄까?”

눈이 반짝거린다.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내가 보내줄 생각으로 꺼낸 말인데. 나는 웃음을 참고 몸을 일으켜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그럼 이 늙은이는 그저 파륜의 배려를 바랄 뿐이로다.”

내 과장된 어조에 파륜이 중얼거렸다.

“어리광은…….”

“이 놈!”

내가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파륜이 본신(本身)을 드러냈다. 성체가 아니라 그렇게 거대하지는 않지만, 나에 비해선 충분히 거대한 몸이다. 흑진주보다 더 깊은 광택에, 은하수의 별들을 뿌려놓은 듯 화려하게 반짝이는 비늘이 정교하게 온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그에 반해 갈기는 부드럽기 짝이 없이 허공을 유영하듯 유연하게 흔들리고 있다.

올라타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수많은 구름층을 뚫고 어디론가 멀리 간다. 가버린다. 난 갈기를 잡아당겼다. 파륜이 불만어린 붉은 눈으로 내게 머리를 들이밀었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게 그 거대한 콧구멍을 주먹으로 쑤셔주었을 뿐이었다.

인간형으로 돌아간 파륜이 머리에서 연기가 나는 환상이 보일 정도로 길길이 뛰었다.

“너 같은 제석천은 제석천이 아냐! 전무후무할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콧구멍을 쑤시다니! 쑤시다니이!”

“너무 빨리 가니까 그랬다.”

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파륜이 오히려 조용해져 고요한 눈길로 날 쳐다보았다.

구름이 허공을 메우고 저 끝까지. 난 한숨을 내쉬고 구름 위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파륜이 웬일로 조용하다. 갑자기 편안해져서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노곤하게 잠이 들려는 찰나에 검고 긴 물체가 날 감싸는 걸 알았다. 단단한 비늘의 감촉과 탄탄한 근육의 반탄력, 무엇보다도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온통 울려 퍼지는 고동소리가 든든하여 마음 놓고 잠이 들었다.

스르륵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스치는 감촉에 눈을 뜨니, 내 옆을 지키고 앉은 파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 것이다.

“류허는 제석천이 아니면 좋았을 텐데. 하긴 제석천이 아니면 바보밖에 더 되었겠어?”

귀신같이 내가 깬 걸 알아채고 또 시작이다. 저 거칠고 뾰족한 주둥아리.

“만날 손해 보는 짓만 하지. 피할 줄도 돌아갈 줄도 몰라. 누가 알아주겠어? 전생이고 후생이고 현생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치우면 될 걸.”

난 듣기 좋은 노랫소리를 듣는 양, 편히 노염도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신불(神佛)들이나 나에게 이용만 당하지. 자기가 진짜 뭐 고상한 거라도 되는 줄 알고 항상 끙끙거리다가는 언젠가는 폭발하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거야. 죽어도 누가 알아주는 줄 아냐? 니만 이기적인 게 아니라 다 이기적이야. 그러니 다 같이 이기적으로 살면 되는 거라고. 다 더러워. 더러워서 한시도 참기 어려워. 너도 마찬가지야. 뭘 바라고 그렇게 버티는지. 혼자 숭고해 빠져서 지랄.”

“하하하…….”

슬슬 끊어줘야겠다. 더하다가는 파륜이 상처 입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아소는 그럼 어떠하냐?”

아소에 관해서 파륜은 이례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에 관해 나불나불 거리는, 촉새 같다 싶을 정도로 입이 가벼운 녀석인데도 몇 번이나 만나놓고도 아소에 관해서만은 말하지 않았다. 예상외의 질문인지 당황해서 눈을 몇 번 끔벅거리더니 신중하게 답했다.

“무서워. 류허와는 또 달라.”

정말로 의외의 답변이었다. 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파륜의 검쥔 모습을 다시 본다는 핑계는 핑계답게 어영부영 넘어가버리고, 또 파륜은 무서운 기세로 도망쳐버려서 난 혼자 제석궁에 돌아와야만 했다. 파륜의 일도, 여란 자안일족 여인의 일도, 아소에 관한 파륜의 말도 신경이 쓰였지만,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오늘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아직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난 눈을 감고 평화로이 잠에 들었다.

아소가 오랜만에 방문했다.

“웬일인가?”

반가움과 놀라움에 벌떡 일어나 다가가 묻는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어 말했다.

“친우를 보러 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어깨를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많이도 능글맞아졌군.”

씩 웃는 모습에 나 또한 웃음을 크게 소리 내어 되돌렸다. 내 옆에서 천상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던 여가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 뜻밖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은 자안일족으로 여라고 하네.”

아소의 은빛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고개를 급히 돌린 걸로 보아서 나의 반려가 될 사람이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와 여의 눈이 마주치자, 아소가 기묘한 눈빛을 띠었다. 난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는 태연하게 아미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 답했다.

“여라고 합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내가 아소를 어깨로 툭툭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겨우 말한다.

“나후아수라왕입니다. 류허는 제 아명(兒名)인 아소로 절 부르곤 하지요.”

나후아수라왕이란 말에 여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고, 난 시녀를 불러 다과상을 새로 들이도록 명했다.

뜻밖으로 여가 먼저 입을 열어 대화를 시작했다.

“저는 제석천께서 이토록 격의 없이 대하는 자를 처음 봅니다.”

의미모를 엷은 미소를 짓고 있던 아소가 말했다.

“그와 저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가 마음 편히 대하는 자는 저 뿐만은 아닙니다. 파천흑룡 파륜 같은 말썽꾸러기도 그는 쾌히 받아들이지요.”

여의 미간에 살풋 주름이 졌다.

“아수라족은 천족과는 어떤 점이 다른지요? 지금 저는 공부중입니다.”

애교 섞인 목소리와 밝은 안색으로 여가 묻자, 난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 그녀는 내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쪽이 본래의 모습일까. 갑자기 이 자리가 흥미로워졌다. 게다가 아소 또한 낯을 가리지 않고, 처음 대한 여에게 말도 많이 하고 있었다. 더욱이 여도 아소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드문 경우였다.

“그건 쉽게 대답하기 힘들군요. 저 자신이 아수라족의 수장(首長)인지라.”

본 적 없는 능숙함으로 아소가 곤란해질지도 모르는 순간을 넘긴다. 나는 시녀가 갖다 놓은 차를 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권하지도 않고 나 홀로 조용히 마시고 있었다. 청량한 향기가 콧속에 퍼지자 기분이 가벼워졌다.

여를 적당히 아소에게 맡길 수 있다는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치 날 경쟁자나 적수로 취급하는 듯 했다. 그리고 처음 느끼는 소유욕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지고 있는 제석천으로서의 의무의 무게와는 또 다른 진득거리는 기이한 느낌의 것이었다.

“류허, 파륜이 보이지 않는군.”

“자네는 기실 나보다는 파륜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닌가.”

내 심술에 아소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여가 어쩐지 불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나와 아소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이유가 짐작가지 않는 바도 아니나, 모른척했다.

“그만큼 서툴고 보살펴주고 싶은 존재란 전 우주에서 찾기도 힘들 걸세.”

웃음을 그치고 말하는 아소의 표정은 진지했다. 흰소리를 하는 법이 없는 그임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난 침묵을 지켰다. 아소가 따끈하게 달아오른 찻잔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물었다.

“파륜이 아수라도에 가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군. 길 잃은 아수라족 아이를 하나 만나 데려다줬다고 하더군.”

아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흐음 하더니 그의 찻잔을 비웠다. 아수라족은 본시 미남, 미녀로 태어난다. 특히 그의 미모는 그의 진중한 성품과 더불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강인한 의지를 나타내는 꾹 다물린 입술, 곧은 성격을 나타내는 듯한 쭉 뻗은 콧대, 그의 영혼의 맑음을 보여주는 진푸른 눈동자. 은색의 수가 놓인 검은 장유에 한쪽 귀에서만 흔들리는 긴 은색 막대모양의 걸이. 은발은 길게 늘어져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매 동작마다 그의 밑도 끝도 없을 강함이 아무런 위장도 없이 자연스레 드러나고 있었다.

그가 아수라왕이 된 후 아수라도에서 잡음이 별로 들리지 않았다. 그건 천상도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물론 파륜의 일만 제외하고. 갑자기 골머리가 아파왔다.

“그럼 나후아수라왕께서 파륜을 데려가심은 어떠합니까?”

여의 예상외의 말에 아소가 생전 처음 보는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난 그대를 데려가고 싶소만.”

순간 내가 화내야하는가 고민했다. 그를 너무나 잘 아는 나로선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실지 그녀를 데려가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건 곤란하네.”

난 제석천이다. 어떤 순간에도 그걸 놓지 않아야 내 삶의 의미가 있다. 난 잔을 탁 내려놓았다. 냉기가 흐르자, 여가 슬쩍 핑계를 대며 물러난다. 단 둘이 남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겐 처자가 있네.”

“자네도 또한 알다시피 내겐 여보다는 자네가 중하고, 그보다는 제석천이란 입장이 중요하네.”

“...왕이란 그런 것이지.”

아소와 나는 함께 술을 마셨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맨 정신보다는 취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데 굳이 말로 얽혀 기분 상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붉은 비단에 금으로 수를 놓았다. 손목에서 짤랑거리는 건 푸른 곡옥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팔찌다. 여는 들어오자마자, 나의 배려가 필요 없을 정도로 스스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주위의 사람들을 포섭했으며 겨우 두 달이 지난 작금에 이르러, 제석궁의 최대세력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많은 천족들이 자안일족을 동경한다. 이는 자안일족 특유의 강한 술법과 내 아내가 될 것이라는 사실 외에도 뭔가가 있었다.

내 앞에서는 그런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었다. 타인의 마음을 귀신같이 읽어내어 흔들고, 자신에게 굽게 만드는 데에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파륜과는 극성이었다. 게다가 서로를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륜의 여에 대한 증오, 여의 파륜에 대한 증오는 어딘가 깊이 닮아 있다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괜찮을지요?”

아리야가 걱정스레 내게 물었다. 여의 주도로 열리는 이번 회의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파륜 또한 참여를 요구 당했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느냐?”

느긋하게 웃음지어 보였다. 난 그 때만해도 여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궁에서의 입지를 확장시켜준다는 의미에서 이 회의의 개최를 허가했으며, 파륜을 호출하고 나 또한 참석키로 한 것이다. 어쨌거나 평생의 반려로 정해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배려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 관여치 않고 의무만을 수행하며 태만하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호의였다. 그러나 내 착각이었다.

“파천흑룡 파륜을 처벌해야 할 줄로 압니다!”

내 눈앞에서 소매를 흔들어 두루마기를 던졌다. 어찌나 내용이 길었던지 바닥에 떨어지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이 걸렸다. 내가 왜 모르겠는가. 여태껏 그를 돌보아온 것은 나다. 그의 죄목은 그대들이, 네가 열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단 말이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공평성과 공정성을 잃은 처사임을 굳이 무수한 천인들을 동원하여 비난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주지하고 있었다.

여가 선두에 섰다. 무수한 인원을 동원하였다. 실지 파륜에게 피해를 입거나, 파륜에게 욕보이거나 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꼿꼿하고 맑은 이들까지 동원했다. 이게 더욱 내 심기를 건드렸다. 사욕(私慾)을 위하여 그들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누가 보아도 잘못한 것은 파륜이다. 그를 이용하여 나를 핍박하여 들어오는 여를 다시 보았다. 교묘하다. 예전에 형이 나에게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하지만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여만큼 영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륜은 지국천과 광목천을 시켜 바닥에 눌러놓은 지 오래였다. 이런 치욕은 그가 태어나 한 번도 겪지 않았다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에겐 견디기 어려운 일임은 틀림없었다.

내가 극히 혐오하는 일이, 그런 공기가 점점 수승전을 감싸고 있었다. 패거리를 만들어 제 뜻에 동조하지 않으면 명분을 내세워 배제한다. 저마다 맡은 임무가 있어 그에 충실하기만 하면 평화로울 것을, 이리 되면 자신의 주인을 찾거나 사람을 모으지 않으면 이익이나 제 당연한 자리조차도 잃게 될 거라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풍토 말이다.

“제석천! 부디 흐려진 심기를 바로 하소서!”

그는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 높은 천인이다. 다만 생전 처음으로 이러한 일을 당해 자신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어려운 역할을 우직하게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기실 여의 입은 몇 번 열리지 않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려고 하고 있었으나, 차마 그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는 무지하고 선량했다.

“..파천흑룡 파륜은 내 시종으로서 그의 행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던 책임은 온전히 내게 있다. 게다가 그대들 말대로 공정을 잃었으니, 이는 제석천의 위를 저버려도 될 중죄인 것을.”

모두가 놀라 날 쳐다보았다. 내 손아귀안의 옥좌의 손잡이 부분이 으스러져서 바닥으로 가루가 흘러내렸다. 무거운 침묵이 드리웠다.

“동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자를 거두신 제석천이시어요. 과연 높고도 결결한 성품이시지요.”

여였다. 파륜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만을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파륜을 내치는 일은 저희 어리석은 자의 몫이에요.”

계속 버둥거리던 파륜이 별안간 동작을 멈추고 죽은 듯이 바닥만 쳐다보았다. 자신을 버려도 된다는 듯한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 전에, 이미 여의 교활함에 구역질이 날 것 같이 되었다.

그렇게 나를 추켜세워 자신과 한뜻인양 회유, 가장하고 파륜을 공동의 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난 기꺼이 다수의 힘에 밀려 안전하게 져줄 생각은 없었다.

“파천흑룡 파륜은 자숙의 뜻으로 한 달간 천공(天空)에 거하도록 한다. 이로써 앞으로 이에 관한 일로 날 귀찮게 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파륜에게도 좋은 약이 될 것이다. 게다가 무조건 언로를 막는 건 자신이 없거나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티끌 하나도 내주면 안 되었다. 허나 만약 이와 같이 다수로 나를 압박하는 일이 한 번만 더 일어난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일어서자 바닥으로 깨진 옥좌의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긴장으로 좌중이 얼어붙었다. 여는 날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이 일로 파륜을 없애고자 한 것이었다. 이번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난 그녀를 아리야를 시켜 내 서재에 오게 했다.

“오늘 그대는 나를 언짢게 했소.”

죄송하단 말이 나올 줄 알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녀다운 일이었다.

“누군가 제석천의 허물을 짚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반려가 될 제 몫이라 생각했어요.”

“고마우신 말씀이오.”

내 말에 바싹 굳어있던 표정이 다소 풀렸다.

“그는 내 시종이요. 당신은 내 반려가 될 이고. 입장이 다르니 내가 대하는 것도 다름은 당연한 것이오.”

모욕감이 느껴지는지 고개를 바싹 쳐들었다.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난 단지 말씀드린 대로, 그의 존재가 해롭다 여겨졌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내게 말하면 될 뿐이오. 오늘과 같이 다수의 인원을 동원해 시위하듯 나를 핍박하지 않더라도 말이지!”

무의식중에 힘을 주었는지 찻잔이 깨져 뜨거운 찻물이 주룩 팔을 타고 팔꿈치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소매가 젖어 축 늘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난 못 박듯이 단호히 말했다.

“난 그대가 어떤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소. 내 위엄을 해치지 않는 일을 빼고는 말이요.”

야무딱진 얼굴이 굴욕감으로 일그러진다.

“한 가지 가르쳐 드리죠. 당신은 오늘 파륜이 자신의 약점이라고 공표한 것과 마찬가지의 꼴이었어요. 현명하신 분 같은데 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겠지요. 언젠가 파륜을 내치지 않은 것을 후회할 날이 올 거예요.”

나는 조용히 웃었다.

“난 그대를 존중하고 싶소.”

여는 눈물 맺힌 얼굴로 날 올려다보며 이를 갈 듯 내뱉었다.

“제석천 당신이 아무것도 없는 그 황량함을, 기형의 참혹함을 아실 리 없지요. 그러니 내 탐욕의 당연함도 모를 밖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는 여의 뒷모습을 보며 난 안색을 굳혔다. 내게 창칼을 들이댄 자들보다도 더 상대하기 어려운 자가 될 것이었다. 게다가 평생을 싸워야 한다.

다행히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천공이라는, 즉 감옥에 갇힌 파륜을 찾아가보았다.

“류허.”

날 부르고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만 숙이고 있다. 모처럼 기가 확실히 죽었음에 은근슬쩍 기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속에 있던 노기가 다소 사그라진 것이다.

“난 그 여자가 날 미워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나가면 복수해줄 테야.”

“아서라. 날 말려죽일 참이냐. 어찌되었든 내 반려가 될 사람이야. 네가 봐주려무나.”

파륜은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중엔 감옥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영문을 모르고 창살 밖에 서 있는 내게 파륜은 붉은 눈으로 말했다.

“류허, 그 여자는 너와 마찬가지로 평생 사랑을 얻지 못해. 그렇게 태어나고 자랐지.”

신이 난 듯한 광기어린 모습에 감옥을 지키고 섰던 나찰들이 슬슬 물러났다.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며 파륜은 무서운 말을 했다. 그런 그의 악의가 그의 순수에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걸 이해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자.”

“또 사탕? 지겹지도 않아?”

그렇지만 효과가 있는 걸. 벌써 그의 눈은 검은색으로 돌아갔고, 주위의 그 흉흉하던 기운도 사라졌다. 기분이 그래도 좀 괜찮아진 듯 한쪽 볼이 불룩한 개운해진 얼굴에 난 그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네 인내심이 콩알보다도 작은 걸 알고 있지만 잘 들어. 한 달이다. 그 동안을 참지 못하고 여기서 도망친다면 다시는 날 보지 못한다.”

침묵하는 그에게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넌 나만의 선타객(仙陀客)이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아마 그 의미도 모를 테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천공을 뒤로 하고 나오는 내 기분은 점차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는 파륜을 미워하고, 파륜은 여를 미워한다.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점점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제석천 당신이 아무것도 없는 그 황량함을, 기형의 참혹함을 아실 리 없지요. 그러니 내 탐욕의 당연함도 모를 밖에.’

난 그녀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파륜에 대한 이해가 깊은 반면, 그녀에 대해선 겨우 요 두 달의 것만을 알 뿐이다. 여의 눈에 맺혔던 눈물을 거짓이라 생각할 정도로 나는 막되어 먹지도 않았고, 또 그 정도로 여에 대해 크게 실망한 일도 없다. 실제 여는 제석궁의 안주인이 되어야 한다. 일개 시종인 파륜과는 다르다.

허공중에 우뚝 섰다.

‘그럼 나후아수라왕께서 파륜을 데려가심은 어떠합니까?’

‘난 그대를 데려가고 싶소만.’

그럼 난 누구를 데려가고 싶은 것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스운 생각이다. 도대체 어떻게 택한단 말인가. 하나는 둘도 없을 내 친우이자, 일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내가 되어 내 아이를 낳을 여자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파륜은 중성으로, 무성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여가 신경쓸만한 일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이유모를 이질감을 스스로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 때부터 운명은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파륵오륜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6 천루 3부 광천 - 에필로그 09.10.20 636 2 5쪽
85 천루 3부 광천 - 2 09.10.20 376 2 9쪽
84 천루(天淚) 3부 광천(廣天) - 1 09.10.20 272 2 16쪽
» 천루 2부 산풍 - 4 +1 09.10.19 439 2 23쪽
82 천루 2부 산풍 - 3 09.10.18 231 2 16쪽
81 천루 2부 산풍 - 2 09.10.17 228 2 14쪽
80 천루(天淚) 2부 산풍(散風) - 1 09.10.17 280 2 9쪽
79 천루 1부 몽운 - 4 09.10.17 134 2 7쪽
78 천루 1부 몽운 - 3 09.10.16 344 3 25쪽
77 천루 1부 몽운 - 2 09.10.14 357 3 20쪽
76 천루 1부 몽운 - 1 09.10.13 472 2 15쪽
75 천루(天淚) 1부 몽운(夢雲) - 프롤로그 09.10.11 451 2 6쪽
74 연(蓮) - 초야(初夜) 09.10.11 336 2 6쪽
73 연 - 15 09.10.11 336 2 21쪽
72 연 - 14 09.10.11 313 2 25쪽
71 연 - 13 +3 09.10.10 439 2 27쪽
70 연 - 12 09.10.10 370 2 15쪽
69 연 - 11 09.10.09 210 2 22쪽
68 연 - 10 09.10.09 329 2 15쪽
67 연 - 9 09.10.09 364 2 14쪽
66 연 - 8 +1 09.10.07 466 2 21쪽
65 연 - 7 09.10.07 348 2 18쪽
64 연 - 6 +1 09.10.07 432 2 8쪽
63 연 - 5 +2 09.10.07 428 2 9쪽
62 연 - 4 +1 09.10.05 350 2 12쪽
61 연 - 3 +1 09.10.05 424 2 15쪽
60 연 - 2 09.10.02 183 2 12쪽
59 연 - 1 09.10.01 427 2 13쪽
58 연(蓮) - 프롤로그 09.10.01 410 2 3쪽
57 파륵오륜담 외전 - 금란(金蘭) 09.09.29 273 3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