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조회수 :
36,047
추천수 :
240
글자수 :
622,045

작성
09.10.07 23:29
조회
348
추천
2
글자
18쪽

연 - 7

DUMMY

새나는 예상치 못한 풍경에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그 중에 자신의 동생인 해솔과 어떤 애살이 넘치는 소녀 하나가 딱 그 옆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 귀기(貴氣)가 뚜렷한 두 남녀가 절박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남자는 포박되어 있었는데 눈빛은 전혀 굴복하지 않고 있었다.

뒤따라 온 가온대 내외가 눈살을 노골적으로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 생구(生口)를 숨겨주려고 하다니.”

휙 돌아보았다.

“척 하면 딱 아니겠습니까.”

가온대가 처인 치리를 거들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허나 그 미소에는 한 톨의 동정심도 없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그건 자신의 남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불편해하며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어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울 노인의 엄격한 눈빛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규칙이다. 이 자를 방목장으로 데려가라.”

한울의 냉엄한 명령에 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믿기지 않게도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미친 듯이 단야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외쳤다.

“제 등을 고쳐주었습니다!”

한울과 다른 사람들이 움찔했다. 치리의 눈빛이 새파랗게 기이하게 빛났다. 그리고 옆의 이름모를 아낙네를 붙잡아 속삭이기 시작했다.

연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토해냈다.

“제 서방입니다!”

순간 단야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했다. 연 또한 자신이 한 말에 입을 쩍 벌리고 움직이질 못했다. 하지만 그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새나 외에는 없었다. 모두들 연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어린 아이 하나가 튀어나와 그 작은 손으로 연의 등을 만졌다. 놀라고 약간은 당황하는 듯한 표정에 사람들의 안색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때였다.

하늘과 땅을 울리는 듯한 포효가 있었다. 사람들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호랑이였다. 결국 남은 건 어느 사이엔가 연과 단야, 한울, 새나 뿐이었다. 새나는 등에 메고 있던 단궁을 들어 호랑이를 겨눴다. 허나 호랑이는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단야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단야가 그 굵은 밧줄을 아무렇지 않게 힘주어 끊어내고는 호랑이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새나의 경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 오만한 짐승을 길들인 자를 보질 못했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본 허름하나 고아한 차림새의 여인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눈이 젖었으되,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흑백이 뚜렷한 눈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울은 꼿꼿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찌 보면 용기가 넘쳐흐르는 것처럼 보였고, 어찌 보면 너무 겁이 많아 도망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죄가 없는 자를 호랑이가 해칠 리 없다.”

그 순간 새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폭소를 억지로 삼켰다. 역시 고리타분한 한울이다. 정이 많아 동생의 그릇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또한 고리타분하다. 서리가 내려앉는 듯 표정이 절로 굳는 것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이 광경을 봤다면, 앞으로 너희들을 괴롭힐 일은 없겠지.”

새나는 연에게 한발 다가서며 말했다. 연은 자신만만하나 어딘가 한숨이 섞여 있는 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자인데도 전형적인 사냥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나 그 맵시가 아리따웠다. 현명한 눈빛을 하고, 의미모를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내밀었다. 망설였으나 새나 쪽에서 연의 손을 끌어 잡아 당겼다.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새나가 자신의 소개를 했다. 그야말로 거침없었다.

“너희를 끌고 온 듯싶은 해솔의 누이인 새나라고 한다.”

말의 도중에 한울을 흘끗 보았다. 자신의 말이 맞는 듯 했다. 문득 그 눈동자가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대의 반응 또한 그렇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진 듯하니 말에 태워 너의 집에 데려다주마.”

그러나 순간 단야가 연을 막아섰다. 그 뜨거운 눈에 놀랐다. 단야의 속은 분노와 굴욕감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상대불문 시비가 붙으면 가만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혹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는 상태였다. 스스로도 자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야는 화가 나 있었다.

“이제 곱사등이라고 부르지 못하겠구나.”

“연(蓮)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한울은 단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파장은 컸다.

“든든한 남편을 얻었구나.”

쩍 얼어붙은 연을 단야가 마찬가지로 경직된 상태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새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방긋방긋 웃는다.

“네게 전할 말과 물건이 있다. 따라오너라.”

몸놀림이 느렸다. 어딘가 착잡한 듯한 기색이 있었다. 호랑이는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단야의 다리에 몸을 부비며 재회를 기뻐했다.

“자네도 따라오게.”

단야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호랑이가 마치 그의 분신인양 어슬렁거리며 따라왔다. 새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주욱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도망친 길들이었다. 저마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몽둥이라도 들었는지 이상한 정적이 내려앉아있었다. 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을의 경계를 넘은 자는 생구, 살아있는 입, 노비가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규칙을 어긴 자의 가족이 곡식이나 소 등의 가축으로 보상을 해야 한다. 그 풍습이 동예를 아직도 존속시킨 힘이었다. 허나 마을마다의 배타성이 전체적으로 그들의 힘을 모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크게 보아 없어져야 할 풍습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몫만 챙기다 지리멸렬 구려에게 흡수당하고 만다. 단궁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울이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어냈다. 그 속에 있는 것은 피가 묻어 있는 누렇게 바랜 천이었다. 그리고 한울이 주름진 손으로 속을 뒤지자 안에서 황금빛으로 수놓아져 있는 흰 비단으로 만들어진 찢겨진 소매가 나왔다. 자세히 보면 용 세 마리가 얽혀 꿈틀거리고 있었다. 비범해 보이기도 하나 한편으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한울이 미간을 좁히고 책상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았다.

“고구려의 장수였다. 자신을 그렇게 밝히고, 널 자신의 딸이라 말했다.”

연의 눈망울이 심하게 흔들렸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표범에게 당한 것이라 했다.”

드디어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치마 위로 회색 원이 툭툭 번졌다. 허나 단야와 한울의 표정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단야는 정황의 앞뒤가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어찌 되었든 연은 버림받았던 것이다.

“잘 들어라. 난 너를 가엽게 여겼다. 그래서 이렇게 보관을 해두었다만, 밝히지 않으려 했다.”

연은 의아함에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었다. 한울은 왠지 피로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가 병신인한, 찾아가도 받아주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단야는 일부러 한울이 저런 풍으로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떨리는 연의 어깨를 보고도 모른 척했다.

“..그래도 이것을 받을 것이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울은 꿇어앉은 연의 무릎에 꾸러미를 올려주고 있었다.

“이제 넌 이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게다. 나도 도와주마.”

연은 한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을 향한 안타까움, 자상한 동정심, 오랜 정(情)이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생각해 볼게요.”

비척거리며 일어나 걸어 나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한울은 기이한 상실감에 휘청했다.

그러나 감상에 잠길 겨를도 없이, 차가운 물이 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셨다. 엄청난 기세로 들어붓고는 안찬은 벼락같이 소리를 내지른다.

“아무리 그래도 천한 것이 대접받고 살 줄 알아? 니가 꼽추가 아니면 뭐야? 뭬야?”

꼬집고 머리채를 잡아 흔들기 시작한다. 단야는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진짜 놀랐다. 저렇게 악다구니 쓰는 여자, 아니 사람을 처음 봤다. 멍하니 서 있다가, 한줌 후드득 소리를 내며 연의 머리카락이 빠지고 바닥에 흩어지는 걸 보고 기겁을 했다. 그리고 연을 안찬으로부터 떼어냈다. 반항도 일절 하지 않고 멍하니 당하기만 하는 연이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

“뭐하는 거야!”

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참 허공을 헤매다가 자신을 담는 순간, 울컥해서 꽉 끌어안았다. 단야가 연을 업고 호랑이와 함께 그곳을 떠나는 순간 안찬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가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안찬의 옆에 느릿느릿 걸어와 동작과 똑같이 느린 말투로 재바우가 말했다.

“왜 그리 마음에도 없는 짓해서 밤에 잠도 못자고 우는가…….”

그 말에 안찬이 버럭 울며 재바우의 품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울은 가슴이 싸해옴을 느꼈다. 겉으로는 어지간히 성질을 부리는 듯 보이나, 마음은 그렇지 않은 안찬이다. 연에게 자신의 젖을 주었다. 제 자식은 곧 죽고, 결국 그 후로 자식은 없다. 그 후 연에게 애틋한 마음 더욱 깊어졌음을. 그러나 제가 마구 구박하고 업신여겨야 그 서슬에 다른 이가 연을 건들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야 연이 한울이, 안찬 자신이 없어도 험한 세상풍파 이겨낸다고 했다. 커지는 울음소리에 간간히 섞여 들리는 말이 있었다.

“흐...부귀한..제.. 아비.. 찾아..가야…….”

한울노인은 말없이 뒤돌아섰다.

‘세상사 부귀공명 있는 곳에 진실로 칼날 같은 바람이 몰아치는 법이거늘. 허나 어미의 자식을 위한 마음을 어찌 탓하랴. 저 순진한 무지는 착한 심성 탓인 것을.’

그리고 해솔은 또 어찌할 것인가. 그 때 해솔은 어느 집의 뒷마당 구석에서 나예를 끌어안고 말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있지 않느냐. 내가 너를 지켜주마.”

나예는 황홀하여 해솔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해솔 또한 처음으로 자신이 강하다, 힘이 있는 대장부라 여겨져 가슴 한 편이 뿌듯하여 흐뭇하였다.


귓가에서 쉬걱쉭걱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치리는 굳은살이 박인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을 버릇처럼 어루만졌다. 아직도 손바닥의 다른 부분처럼 말랑해지지 않았다. 부엌칼을 쥐지 않게 된 지 벌써 오년도 넘게 지났다. 하지만 재료들을 써느라 칼등에 부대꼈던 부분이, 지난 비천했던 세월이 아직도 자신의 몸에는 분명 남아있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왔고, 기어이 삼로중 하나의 아내가 되었다. 가온대의 먼젓번 처는 고생만 하다가 병으로 일찍 죽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가온대는 자신의 거친 손을 붙잡고 처음 한 이불을 덮던 날 맹세했었다.

드디어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

‘그 아해가 살아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등을 고쳤다고.’

가슴을 부여잡고 가만히 서서 숨을 죽였다. 주위의 집과 우거진 잡초, 작은 나무들이 자신을 향해 쏠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거칠게 떨치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걸었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하녀가 아니다.

증인과 물품도 어찌해서 확보했다. 이제 남은 건 그 고약하고 밉살스러운 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는 것뿐이다. 그년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젊은 시절 머리채도 반드시 되찾으리라.

이를 으득 깨물었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울었다. 순하고 순했던 어린 자신의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채를 싹둑 잘라 스스로의 머리를 장식했다. 돌려달라고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도 전과 같이, 마치 햇살에 발버둥치는 지렁이를 쳐다보는 듯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본다.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세월은 무심치 않다.

검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에 낮게 소리죽여 웃었다.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 아니겠습니까. 한울님.”

출신성분이 한울과 비교가 되지 않았으므로, 같은 지위에 있음에도 가온대는 한울에게 높임말을 썼다.

“그러면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뭐겠는가.”

가온대는 마치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거침없이 내뱉었다.

“당신을 존경하나 가까이 할 수 없는 까닭은 당신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니. 이는 당신의 복이나 장차 화가 될는지 알 수가 없소.”

한울은 무심한 눈길로 가온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가온대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무표정하게 던졌을 뿐이었다.

“고구려에 공물을 바치는 일에 차질이 없길 바랍니다. 그리고 해솔님에게 불온한 사상을 심어주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별안간 한울이 옆에 있던 부지깽이를 집어던졌다. 정적을 깨는 명료한 소리가 스산한 울림을 남겼다.

“네가 정녕 예의 백성이더냐!”

그러나 가온대는 희미한 웃음을 잃지 않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멀어져 가는 가온대의 뒷모습에 씩씩거리던 한울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분김인지 홧김인지 원통함인지 서러움인지 알지 못할 눈물이 눈앞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가온대는 가슴에 바위를 하나 매단 것처럼 걷기가 어려웠다. 한울은 알지 못한다. 배고픔과 굴욕이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리는지를. 그래서 저리 결백하고 꼿꼿하고 자신의 이상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삶의 고단함에 목매어 울어본 적이나 있을까. 하릴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죽을 것 같이 홀로 저 지하로 꺼져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가져 본 적이나 있을까. 죽으려고 목을 매거나, 살려고 다른 사람의 것을 앗는 짓을 해본 적이나 있을까. 불끈 커다란 주먹을 쥐었다.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당신이 한없이 부럽고 또 한없이 밉다.’

한울의 굴욕이 코앞이다. 자신의 눈에는 분명히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자신은 그와 같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그를 질시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론 거들먹거릴 것이다. 이제 다시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라서고야 만다. 한 점 망설임도 없다. 창공으로 검은 제비가 재빠르게 난다. 내일도 맑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앞날이라 여겨져 가온대는 어깨를 쭉 폈다.


“너 자신을 버릴 생각이냐!”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해솔이 뒤로 쓰러졌다. 해솔은 피 섞인 침을 내뱉고 성을 벌컥 내었으나, 누이인 새나의 기세에 당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리 힘이 센 사내라 할지라도 누이 앞에서는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누이가 항시 옳았으며, 결정적인 순간엔 반드시 자신의 편이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보라. 붉어진 주먹을 슬그머니 감추며 따지고 든다. 아무리 왈가닥에 남자 같아도 뼈가 그만큼 여물지 못한데 멀쩡할 리 있으랴. 언제부터인가 완력으로 누이를 이길 수 있음에도 계속해서 맞아주고 있는 자신이 조금은 괜찮다 여겨져 숨을 크게 내쉬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누이는 그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한 예이다. 너는 현실이 보이지 않느냐. 구려는 장성해가는 나라이다. 그 왕이 죽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게다가 만약 왕을 죽인 게 너, 아니 예의 사람이란 걸 알면 예의 백성들은 그들의 사나운 말발굽에 짓밟히고, 집은 모두 태워질 것이며 밭은 시체로 뒤덮일 것이다. 재건할 여지도 주지 않을 독한 족속들이란 말이다. 요즈음의 구려는 참으로 무섭다. 그리고...넌 전장의 참혹함을 모른다.”

대담하기 짝이 없는 새나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넌 언제나 네 자리를 지켜야 해. 언제 누가 널 해치려 할지 모른다. 예의 등잔불은 바로 너다!”

손을 잡아 일으키며 새나는 이어 말했다.

“정신을 차려. 네가 죽으면 예는 끝이다.”

“..구려가 싫어?”

탐색하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해솔에게 새나는 태연하게 내뱉었다.

“싫다. 하지만 예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난 그들에게 기꺼이 아부할 것이다.”

멍하니 선 동생을 흘끗 보고는 발걸음 가볍게 걸었다.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볼이 부어오른 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눈 속에 남아있었다. 입술을 악물었다.


연은 휘장을 걷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단야는 그런 연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집의 바깥에 나와 있었다. 친부모와 다시 만나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연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문득 하늘이 너무나 그리워져 높은 나무의 가는 가지에 아슬아슬 버티고 섰다.

연은 기이한 두근거림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하였으나, 마침내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지붕이, 버팀목이 되어줄 아비가 계신단다. 설사 자신이 버려진 자식이라도, 반갑지 않는 손님 취급을 받을지라도 한번 그 모습을 확인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홀로 비척거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꼿꼿이 서 있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어떤 설움과 상처를 받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입을 벌려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부르려 했으나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그 때였다. 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단야일리 없었다. 단야라면 그 동작이 언제나 의젓하여 자신의 눈에 명확했다. 도망치듯 후다닥거리는 품새가 불길하여 얼른 문밖으로 나와 보았다. 그리고 의아하여 고개를 갸우뚱했다.

곡식과 옷가지, 새빨갛게 익은 홍시와 냉이와 쑥 등의 나물 등 소박한 것들이 정성스레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새로 지은 명주옷이 풀 먹인 듯 빳빳하여 연은 그것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들어올려 고개를 묻자, 낯익은 냄새가 난다. 제 머리를 쥐어뜯던, 오늘도 물 뿌린 안찬이다. 순간 눈물이 뜨겁게 샘솟듯이 흘러내렸다.

“왜 도망가요…….”

스스로도 우는 지 웃는 지 알 수가 없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파륵오륜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6 천루 3부 광천 - 에필로그 09.10.20 636 2 5쪽
85 천루 3부 광천 - 2 09.10.20 376 2 9쪽
84 천루(天淚) 3부 광천(廣天) - 1 09.10.20 272 2 16쪽
83 천루 2부 산풍 - 4 +1 09.10.19 439 2 23쪽
82 천루 2부 산풍 - 3 09.10.18 231 2 16쪽
81 천루 2부 산풍 - 2 09.10.17 228 2 14쪽
80 천루(天淚) 2부 산풍(散風) - 1 09.10.17 280 2 9쪽
79 천루 1부 몽운 - 4 09.10.17 134 2 7쪽
78 천루 1부 몽운 - 3 09.10.16 344 3 25쪽
77 천루 1부 몽운 - 2 09.10.14 358 3 20쪽
76 천루 1부 몽운 - 1 09.10.13 472 2 15쪽
75 천루(天淚) 1부 몽운(夢雲) - 프롤로그 09.10.11 451 2 6쪽
74 연(蓮) - 초야(初夜) 09.10.11 336 2 6쪽
73 연 - 15 09.10.11 336 2 21쪽
72 연 - 14 09.10.11 313 2 25쪽
71 연 - 13 +3 09.10.10 439 2 27쪽
70 연 - 12 09.10.10 370 2 15쪽
69 연 - 11 09.10.09 210 2 22쪽
68 연 - 10 09.10.09 329 2 15쪽
67 연 - 9 09.10.09 364 2 14쪽
66 연 - 8 +1 09.10.07 466 2 21쪽
» 연 - 7 09.10.07 349 2 18쪽
64 연 - 6 +1 09.10.07 432 2 8쪽
63 연 - 5 +2 09.10.07 428 2 9쪽
62 연 - 4 +1 09.10.05 350 2 12쪽
61 연 - 3 +1 09.10.05 424 2 15쪽
60 연 - 2 09.10.02 183 2 12쪽
59 연 - 1 09.10.01 427 2 13쪽
58 연(蓮) - 프롤로그 09.10.01 410 2 3쪽
57 파륵오륜담 외전 - 금란(金蘭) 09.09.29 273 3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