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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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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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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글자수 :
62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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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17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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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천루(天淚) 2부 산풍(散風) - 1

DUMMY

천루(天淚)


2부 산풍(散風)



그건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아무런 기대도 실망도 없는 그런 평범하고 지겨울 정도로 안온한 한 때. 나는 선관(仙官)들이 써서 올린 보고서들을 한 장 두 장 읽고 분류하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자, 죽은 자와 수행의 성과가 특출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 가는 자 등, 기본적인 사항들이었다. 내가 구체적인 것을 챙기기로, 일 또한 많았다.

사실 그들은 그만한 업을 닦아 그 자리에 오른 자들이다. 고로 여간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나, 나 또한 내 일을 게을리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다스리는 곳은 욕계다. 요괴들이 사라지지 않듯이, 오욕(汚辱) 또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이곳에선 진리.

맑고 고운 기운으로 가득한 청정한 천상도라 하여 방심할 수 없었다. 제석천인 나조차 이렇게 불안과 의심으로 흔들릴 때가 있는 데 말이다.

“묘당(妙幢)이라는 분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아리야가 달려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 때와 다를 것 없는 것처럼 들렸으나, 목소리의 울림이 조금 더 깊었다.

“무슨 일이냐.”

보던 서류를 놓고 아리야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젊은 선관으로 내 사무를 보조한 지 꽤 되었건만, 단정한 외모에 언제나 조용히 고인 물인 것 마냥 지금까지 조금도 동요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이상했다.

“제석천께서도 아시다시피, 선견성은 도리천 중앙에 위치하고 천개의 문을 오백청의야차신이 지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허락받지 못한 자가 성밖의 4원을 밟게 되면 견로지신(堅窂地神)이 그자의 발밑을 받쳐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시 선견성 안의 땅은 진금(眞金)으로 되고 닿으면 도라면과 같이 부드럽습니다. 하지만 묘당이라는 자는 아무렇지 않게 문이 아닌 벽으로 통과하고 또 그가 밟는 곳에서부터 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물고기가 노닐고 있습니다. 동시에 서남쪽의 선법당(善法堂)에서 광휘가 뿜어져 나와 도리천을 널리 비추고 있습니다.”

나는 놀라는 것과 더불어 씁쓸해졌다. 어째서 그러한 변화를 내가 모른단 말인가. 노력해도 널리 살피고 있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수승전의 깊숙하고 내밀한 곳에 앉아 우주와 만사를 논함은 역시 무리던가.

“내가 직접 갈 것이다.”

벌떡 일어나 아리야의 안내를 받아 수승전의 입구에 이르렀다. 선법당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광휘로 본래 무색투명한 제석궁 전체가 찬란하게 여러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묘당이란 자는 기적을 행하였으나, 그 차림새는 허름했다. 호리병을 허리에 매고 굵은 밧줄로 스스로를 감았다.

다가가서 그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무릎을 꿇었다.

“귀한 분께서 왕림하셨습니다.”

아리야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난 읍을 하고 응답을 기다렸다.

“제일의 하늘을 시험하려 한 것을 용서해주시오.”

“그만한 일이지 않으신지요.”

“허허... 총명한 제석천을 어찌 속이랴.”

모두가 경외하는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건 모든 이를 보살펴야할 아해로 여기는 보살들뿐일 것이다.

“귀여우나 말썽이 심한 아이가 있는데 제석천께서 맡아주셨으면 하오.”

그 깊고 넓은 눈에서 철렁거리며 무언가 움직였다. 몇 겹의 숨은 뜻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는 먼 하늘로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자, 코앞에 거대한 백룡이 검은 눈을 뚜룩뚜룩 굴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본체는 저 속에 보이는 여의주이다. 그제야 그 자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걱정 말거라.”

아리야에게 말하고 용의 등위로 오르자, 스르르 허공을 깨치고 태양을 향해 날기 시작한다. 어느 장소에 닿자 용은 나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어쩐지 낯익은 곳이다. 천천히 긴 통로를 걷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벽에 박힌 야명주가 차례로 눈부신 눈을 떴다.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한 번에 베어버릴 망정, 저렇게 잔인하게 봉인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내가 모르는 일이 저렇게 엄연히 존재한다.

벽에 높게 양손과 발목을 흑수정의 날카로운 조각으로 박아놓았다. 인간으로 치자면 겨우 열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중성(中性)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세계의 법칙일 터였다.

어깨가 조금 넘는 흑발 사이 창백한 얼굴은 오랜 고통으로 찌들어서, 새근발딱 숨 쉬고 있었다. 은은히 흐르는 기운은 용 특유의 것이다. 지장이 몸소 부탁하러 왔다면 몇 겁 전의 그 사건의 그 아이임이 틀림없다. 자신은 나설 틈도 없이, 신불들이 직접 처리하여 잘 되었다 하고 그냥 잊고 넘겼던 그 사건의 그 아이.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나선 데에는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고 하자 파직 하는 검은 번개가 일어났다. 거부가 상당하다.

차가운 검은 눈이 그 순간 스르륵 드러났다. 보통의 눈이 아니라는 것을 그 빨려들 것 같은 요기(妖氣)로 감지했다. 그러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한다.

“네가 파천흑룡(破天黑龍) 파륜(破輪)이라 불리는 그 꼬마용인가.”

묵묵부답으로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낮게 중얼거렸다.

“늙은이들이 지독하게도 해놓았군.”

스스로 알았는지 모르지만 옅은 웃음기가 그 순간 그 꼬마의 얼굴에 어렸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박혀 있던 못을 뽑아내자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읏!”

앞으로 엎어지는 파륜의 몸을 받치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제석천 류허(流虛)이다. 너를 내 시종으로 두라는 청이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파륜을 향해 툭 던졌다.

“..정말 귀찮다.”

그제야 날 제대로 쳐다본다. 나는 거짓말처럼 변하는 눈동자의 다채로움에 시선을 빼앗겼다.

“검은 눈인 줄만 알았더니 때로는 황금빛으로, 붉은색으로 잘도 변하는구나. 재미있군.”

미묘한 반감과 호기심이 어려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난 무거운 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의 품속에 있는 약병을 보았을 때 기묘한 운명을 느꼈다. 그건 내가 예전에 색계로 향할시, 건달바에게 받았던 예신약병이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서 기어이 인연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난 일부러 냉소를 짓고 그를 품에 안은 채 저 아래 아직 보이지도 않는 나의 거처, 수승전, 즉 제석궁을 향해 수직으로 거침없이 낙하했다.

내 침상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파륜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한다?’

하던 일을 미뤄두고 새하얀 붕대로 양손과 발을 감은 채 세상모르게 잠자고 있는 녀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려운 과제였다. 일단은 교육이란 걸 시켜야 할지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뭐 하나 키워본 적이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밝았지만, 실제는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자면서도 누구든 거부해 결국 그 거부에 견딜 수 있는 자신이 직접 옷을 갈아입히고 붕대를 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손이 찌릿했다. 그런 녀석을 어떻게 조련할 것인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찾아낸 기록을 들춰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기록은 말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된 연유와 그로 인한 용족 내에서의 엄청난 불화와 시공을 찢어 요괴들을 끌어들이게 된 사정. 아마 더 깊은 것은 파륜 자신이 알고 있을 것이다.

골이 멍해지자 스스로도 놀랐다. 이렇게 고민하기는 오랜만이었다. 깨어나면 일단 저 거부부터 풀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나를 결정하자, 마음이 다소 평온해졌다. 어찌 생각하면 손발이 해어지고 그렇게 오랫동안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것은 자닝스러운 데가 있었다. 고로 마음이 유연해졌다. 아마 조금은 저 녀석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착각이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별안간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도 용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함으로. 방안에 있던 침상이고 휘장이고 산산이 부서지고 갈가리 찢겨진지 오래였다. 제석궁 상공에 새까만 구름이 스멀스멀 모여들어 엄청난 검은 벼락이 내려쳤다. 그리하여 그 뾰족한 꼭대기에 서서 하얀 얼굴로 사약한 웃음을 짓는 모양이 악귀가 따로 없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옷이 바람에 휘날렸고 가늘고 치켜 올라간 눈은 기이한 광채를 띠고 번개를 반사해냈다.

제석궁에 머무르던 천녀들과 천관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 와중에 난 뭘 하고 있었는가.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습니까!”

성자(聖者)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아리야조차 내 옆에서 그렇게 분개하여 외치고 있을 즈음, 난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나중엔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내 옷도 몇 군데 베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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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천루 3부 광천 - 에필로그 09.10.20 636 2 5쪽
85 천루 3부 광천 - 2 09.10.20 376 2 9쪽
84 천루(天淚) 3부 광천(廣天) - 1 09.10.20 272 2 16쪽
83 천루 2부 산풍 - 4 +1 09.10.19 438 2 23쪽
82 천루 2부 산풍 - 3 09.10.18 231 2 16쪽
81 천루 2부 산풍 - 2 09.10.17 227 2 14쪽
» 천루(天淚) 2부 산풍(散風) - 1 09.10.17 280 2 9쪽
79 천루 1부 몽운 - 4 09.10.17 134 2 7쪽
78 천루 1부 몽운 - 3 09.10.16 344 3 25쪽
77 천루 1부 몽운 - 2 09.10.14 357 3 20쪽
76 천루 1부 몽운 - 1 09.10.13 472 2 15쪽
75 천루(天淚) 1부 몽운(夢雲) - 프롤로그 09.10.11 451 2 6쪽
74 연(蓮) - 초야(初夜) 09.10.11 336 2 6쪽
73 연 - 15 09.10.11 336 2 21쪽
72 연 - 14 09.10.11 313 2 25쪽
71 연 - 13 +3 09.10.10 439 2 27쪽
70 연 - 12 09.10.10 370 2 15쪽
69 연 - 11 09.10.09 210 2 22쪽
68 연 - 10 09.10.09 329 2 15쪽
67 연 - 9 09.10.09 364 2 14쪽
66 연 - 8 +1 09.10.07 466 2 21쪽
65 연 - 7 09.10.07 348 2 18쪽
64 연 - 6 +1 09.10.07 432 2 8쪽
63 연 - 5 +2 09.10.07 428 2 9쪽
62 연 - 4 +1 09.10.05 350 2 12쪽
61 연 - 3 +1 09.10.05 424 2 15쪽
60 연 - 2 09.10.02 183 2 12쪽
59 연 - 1 09.10.01 427 2 13쪽
58 연(蓮) - 프롤로그 09.10.01 410 2 3쪽
57 파륵오륜담 외전 - 금란(金蘭) 09.09.29 273 3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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