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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파륵오륜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10.20 17:47
최근연재일 :
2009.10.20 17:4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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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2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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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1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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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천루 1부 몽운 - 2

DUMMY

내가 사는 선견성이 있는 도리천부터 도솔천까지는 익숙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화락천과 타화자재천은 알지 못하였다. 화락천은 도솔천과 타화자재천의 중간자적인 느낌으로 그 성질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화자재천은 달랐다. 욕계의 가장 높은 곳의 하늘인, 타화천(他化天)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곳엔 욕계의 천주(天主) 대마왕(大魔王)이 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타화자재천은 마천(魔天)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지국천이 걱정스러운지 다급하게 설명하였다.

“마천은 제석천께서 다스리는 공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남을 변하게 하거나, 없던 것을 생기게 하여 자신의 쾌락으로 삼는 곳입니다.”

“지국천께서는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맨몸으로 류허님을 낯선 곳에 보내겠습니까.”

“이 놈…….”

지국천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백룡 같은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자, 건달바가 얼른 작은 병을 내밀었다.

“뭐냐?”

“예신약(翳身藥)입니다. 한 모금에 한 시진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간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제 공능(功能)을 믿으십시오.”

“널... 믿으란 말이냐.”

여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가루라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뒤돌아 참으려 해보아도 떨리는 어깨와 날개로는 어쩔 수 없었다. 건달바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 참 보기 좋았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으나 한번 내뱉은 말을 물리는 일을 이 내가 참을 수 있을 리 없다. 따라오겠다는 지국천을 말리고, 정확히는 따돌리고서 위로 향했다.

마천에 이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풍신과 운신의 기색이 좋지 않음을 느꼈으나, 무언가 필사적으로 참는 듯 했다. 그 긴장감이 나에게도 슬슬 전해지고 있었다. 지옥도도 이와 같진 않을 것이다. 마장(魔障)이 쳐져 있는 듯한 강한 위화감이 전신을 감쌌다.

욕계의 모든 욕(欲)을 모은 듯한 암흑의 장막이 색계로의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 속에 마치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것이 바로 대마왕의 왕궁이다. 광택도 없는 흑색의 건물은 건드리면 마치 연기처럼 흩어질 것 같았다.

“귀한 손이 오셨구나.”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소리의 파장에 살갗이 뜨거워지며 불안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구리가라를 뽑아들자, 얇은 얼음이 파삭하고 깨지는 소리가 나며 주위를 얼려갔다. 분노한 듯 휘파람 같은 소리를 은근히 흘려내는 구리가라를 잡고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허상도 실재도 분별없다.’

자신이 이 시간, 여기에 존재함을 확신한다면.

대마왕이 공격의 의사를 갖고 있지는 않으나, 언제든지 그 뜻이 변화할 수 있음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천(天)의 성질이다. 아직 하늘이 되지 못한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다. 허나 뚫고 가리라.

‘뚫고 가리라!’

맹렬히 솟는 투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하던 것이었다. 맥락을 잃고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의지는 나 자신에 대한 긍정, 즉 희열(喜悅)로 이어졌다. 그 순간 맑은 물방울이 하나 떨어지며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분명 허공이었을 공간에 파문(波文)이 그려진 것이다. 나 자신이 그 중심에 처하고 있었다.

‘허하노라.’

구리가라가, 부동명왕(不動明王)의 모습을 빌어 현신(現身)한 것이다. 분노한 형상을 하고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장엄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잿빛 머리칼은 이마를 덮어 왼쪽 어깨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흘겨보는 듯한 왼쪽 눈이 무섭게 올올이 펼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견삭(羂索)을 쥐어 악마(惡魔)를 굴복시키기 위한 채비를 항시 끝내고 있는 대일여래의 여러 모습 중 하나.

거구인 그의 어깨에 오르자, 나를 불뚝한 눈으로 흘깃 보고는 전음으로 말하였다.

‘꼭 잡으시오. 일시에 솟아오를 것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검은 장막 속으로 겁도 없이 스며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나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대마왕은 야차의 형상을 하고서 서 있었다. 하늘에서 그 겉모습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의 본모습은 그 정도가 아닐 것을 알고 있었다. 상대에 따라 모습을 변화시키는 건 여러 신불(神佛)들의 장기이다.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삼천도를 들고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새하얗게 독이 서린 입김을 내뿜었다.

부동명왕이 들고 있던 견삭으로 야차를 후려치자 야차가 이등분이 되며 기이한 녹색의 피를 흘려냈다. 그러나 히죽 웃으며 야차는 말했다.

‘부동명왕은 사지를 잃을지어다.’

그 순간 부동명왕의 사지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눈에 불이 치솟았다.

“구리가라!”

‘마천은 제석천께서 다스리는 공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남을 변하게 하거나, 없던 것을 생기게 하여 자신의 쾌락으로 삼는 곳입니다.’

지국천의 말이 뇌리 속에서 재생되었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구리가라를 잡고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야차를 노려보았다.

“난도해(難度海)로 마천(魔天)을 채우라!”

야차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난도해는 미계(迷界)를 의미한다. 중생이 깊이 빠져서 오랫동안 벗어나기 어려운 생사의 경계를 가리킨 말이다. 죽은 자가 반드시 천상과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더욱더 무서운 것이 바로 저 미계이다. 그 어느 곳으로도 향하지 못하고 영원히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하는 것이 저 난도해이다. 그건 지옥의 형벌과도 달랐다. 윤회에서 유예되어 있다는 것은 지독한 것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바닷물과 퉁퉁 부어오른 몸을 한 사람들이 한데 섞여 쓸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런 일이!’

야차는 어느덧 사라지고, 검은 갑주와 포를 갖추어 입은 흑색 피부의 대마왕이 놀라 나를 하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타화자재천을, 하나의 하늘을 넌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이냐. 이미 넌 하늘의 영역에서 벗어났구나. 그러나 어서 물리지 않으면 너 또한 휩쓸릴 것이다.’

‘난 색계로 갈 것이오.’

‘...제석천은 무애(無礙)하다.’

저 멀리 되돌아가는 바다를, 비명과 함께 버둥거리며 빨려 들어가는 영원을 헤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난 멍청히 섰다. 나중엔 대마왕도, 난도해도, 암흑의 장막도 아무것도 없는, 오로지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 공간 속에 결국 나 혼자 남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양 주먹을 피가 나도록 쥐고 두려움에 몸부림치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난 제석천이 아냐!”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극도의 공포.

그건 어쩌면 예감이었는지도 몰랐다.

대범왕궁(大梵王宮)은 대범천왕의 거처로, 그 높은 보대(寶臺) 위에 지어진 화려한 누각들은 아름답다고 명성이 자자하였다. 색계는 식욕, 음욕을 여읜 곳으로, 물질 또한 욕계와 비교하여 많이 여읜 곳이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세차고도 생동하는 기세로 눈부신 빛 속을, 그 빛이 나의 육체를 지워버릴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오랜 시간을 견뎌온 나에게 신기루처럼 홀연히 나타난 것이 바로 대범왕궁이었다. 그건 그 자리에 본래 존재하고 있었다기보다는, 때가 되어 그 곳에 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안정화되어 있는 건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일그러지고 사라지고 혹은 더 생장할 것 같았다.

생물도 아니고 객체화된 물질도 아니었다.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특히 이런 미지의 것에 관해서는. 금방이라도 동화되어 그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충동을 꾹 참고 입구에 섰다. 청록색의 거대한 대문을 양팔로 힘껏 밀어젖히자 그 속은 어두웠다. 지쳐 무거워진 몸을 그 속에 들이자 끼이익 하는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육중한 문이 닫혔다. 안의 공기는 오랫동안 누구도 살지 않은 듯 홀로 조용히 멈춰 있었다. 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벽에 박혀 있는 야명주가 잠에서 깨어나듯 차례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저 안에 있어.’

대범천왕일까. 그러나 대마왕조차도 야차의 모습으로 나를 쫓아내려 하지 않았나.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내 발걸음은 호기심의 인도를 받아 생각 도중에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나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마침내 도달한 곳의 작은 제단의 문이 스스로 열렸다.

둥근 거울이 그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심코 들여다보자 속에서 언뜻 붉은 무언가가 번뜩였다. 눈을 재차 깜빡여보았으나, 다시 보이는 일은 없었다. 손을 들어 가볍게 표면을 만지자, 별안간 거울에 금이 갔다.

“포박하라!”

어디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을 대범천왕의 권속들이 서슬이 퍼래서 나타나 나를 포위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생김새는 천인들과 다를 바 없었으나, 덩치가 세 배는 될 것 같았다. 검을 몇 합 주고받았을 때였다. 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나를 비롯해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들도 양 귀를 틀어막고 괴로움에 몸부림쳐야만 할 정도의 괴음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아…….”

거울로부터 새까만 무언가가 튀어나와 내 가슴 속에 들어왔다. 너무나 빠른 속도라 착각으로 치부해도 좋을 정도였으나, 내 몸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드디어 자유다.’

순간 대범왕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공격하던 병사들도 사라지고 있었다. 퍼뜩 깨달은 것은 이대로 있다간 나 또한 육체를 잃게 될 것이란 것이었다. 정신없이 뛰어가던 나의 앞에 끝없이 문과 방이 나타났다. 그 속엔 정체를 모를 여러 가지가 쌓여 있었다. 그렇게 다급하던 와중에도 건달바의 얼굴이 떠오르자, 무언가 집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색계까지 왔다는 것을 코웃음 한 방으로 무시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얀 것을 하나 집어 품속에 넣었다.


“정신이 드세요? 류허님, 류허님!”

맨 처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울상이 되어 날 내려다보는 낯익은 시녀였다.

“여기는?”

“제석궁입니다. 한 달 동안 잠들어 계셨어요. 건달바님께서 모시고 오셨는데 도대체 어디에 가셨던 건지요?”

“색계... 대범왕궁에.”

경악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시녀는 벌린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그녀는 신경 쓰지도 않고 난 무엇이 어떻게 된 건가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꿈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 일은. 내 몸 속에 들어왔던 그 흑색의 조그만 덩어리는 무엇인가. 가슴팍을 만져보았으나, 몸 자체가 전과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러나 곧 한 구석에 딱딱한 것이 잡혔다. 꺼내어보니 백색의 옥으로 만들어진 듯한 부채다. 펼치니 구름문양이 은은하게 고아하였다.

‘그럼 예신약은?’

예신약병은 없었다. 그럼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이란 말인가.

지국천은 고개를 기우뚱하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몸이 허하신 것이 아닌지요?”

그 눈동자를 진지하게 바라보았으나, 그의 것 또한 진지하였다. 게다가 그는 거짓을 말할 줄 모른다. 그가 이렇다면 건달바와 가루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가릉빈가의 꽃은 어찌 되는 것인가.

“가릉빈가님이요? 유안님의 생신연에 참석하시지 않으셨는데요.”

난 혼란에 빠졌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가.

내가 여기 있는 것 또한 사실인가.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난 안정을 찾아갔고, 소문 또한 무성해졌다. 색계에까지 다녀왔다는 나에 대한 소문은 서서히 기이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류허님이 현 제석천님보다 훨씬 높다는 이야기 아니야?”

“쉬잇, 입 조심 하게.”

“아니, 할 말은 해야지. 사실 유약한 유안님보다는 류허님이 제석천이 되시기에 나으신 분이 아닌가. 태어난 순서야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욕계의 그 누구도 가지 못하는 색계에 닿으셨다니.”

“뭐,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네만, 그래도 하늘님들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이런 대화를 내가 직접 듣게 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내 생각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 당시 난 매일 밤 기이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게 꿈이란 걸 확신한 것은 내가 전혀 모르는 자들이, 장소가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소가 오랜만에 날 찾아왔다. 구실은 병문안이었지만, 그의 안색이 다소 어두운 걸 봐서 아수라도로부터의 도피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그답지 않게 약간은 격하게 나에게 물었다.

“제석천이 되고 싶은가?”

여러 가지 소문을 그도 들었음이 틀림없었다.

“형이 있잖은가.”

“형이 없으면?”

난 화를 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그게 너다워.”

어리둥절해진 나를 보고 스러질 것 같은 미소를 띠었다. 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린 시절과 같이 되진 않았다. 나에게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뒤돌아선 그는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제 내 손으로 내 동생을 죽였다. 더 이상은 가릴 수 없었어.”

바위처럼 굳은 나를 내버려두고 아소는 다시 아수라도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귓가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더 이상은 가릴 수 없었어.’

그건 이제 내게도 마찬가지일까. 난 내가 제석천이 되길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하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주위는 다르다. 내 주위의 물결이 날 흔들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싫었지만, 이젠 그렇게 어린 척 유예하는 건 통하지 않을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아니, 이번 사건으로 확실히 납득해버린 건지도 몰랐다. 타화자재천이나 색계나 어디로 간들, 설사 꿈이었더라도 그 속에서 난 나였다. 나라는 것에는 내 주관이나 성격, 선호뿐만 아니라, 현 제석천의 둘째 아들, 유안이라는 형을 가졌고, 선경성에 살며, 많은 사람들이 날 꺼려하고 또 좋아한다는 그 모든 사실들이 속해 있었다.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다시 이 꿈이다. 욕계라 색계완 다르다고 해도, 천상도에선 음욕과 식욕을 여의었을 터인데. 이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과 머리를 뜨겁게 마비시키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긴 진정으로 여의었다면 욕계에 머물진 않았으리라.

나이자, 내가 아닌 내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양손을 들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구나라(拘那羅)!’

그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두 눈을 대하여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달콤한 벌꿀이 가득 들어있는 듯, 또 그 광채는 차갑게 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거부하였다. 내가 다른 자의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자가 구나라보다 더 높은 위치에 처했음에.

별안간 광경이 바뀌었다. 실내에서 등잔불을 켜놓고 홀로 앉아 있던 그녀가 어느새 초록색 벌판에 서 있었다. 광활하기 그지없고 미풍이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즐거이 노래하는.

‘뭐?’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은 형인 유안이었다.

‘뭐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건 꿈이 아니었나?’

‘꿈이라면 내게 보일 리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음습하고 또 장난스러워서 묘하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드디어 자유다.’ 라고 말했던.

갑자기 울컥거리는 혐오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는 유안을 미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구나라로부터 외면 받는 자신을, 구나라의 자신에 대한 무정(無情)을 감추려 하는 것이었다. 그 비틀어진, 사랑의 열기에 오히려 말라버린 나무는 이제 한계에 달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달빛에 비치는 검붉은 액체. 새하얀 손에 묻은 뜨거운 피. 양 손바닥 위에는 새하얀 안구가 놓여 있었다.

“헉!”

눈을 부릅떴다. 숨이 한 동안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지독한 열망과 절망을 난 알지 못했다. 아니, 알지 못했어야만 했다. 그건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의 마음도, 경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꿈이 아니라고 내게 말했다. 그는 그렇다면 거울 속에 머무르던. 게다가 이번 꿈에는 유안이 관련되어 있다. 바보 같이 여자의 마음도 모르고 한결같이 충실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급히 옷을 걸치다 갑자기 힘이 빠져 축 옷자락을 늘어뜨렸다.

“왜...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왜 모두의 마음이 한 가지로 같지 않은 것이야…….”

조용히 중얼거렸다. 넓은 창으로 보이는 운해는 태양을 맞이하며 자신에게 드리운 푸른 장막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매일 그런 식의 꿈을 꾸었으나, 이번엔 달랐다. 유안이 사랑하는 여인의 일이었다. 게다가 구나라는 평범한 천인이 아니다. 그는 전륜왕의 먼 친척뻘에 해당하며, 전륜왕의 총애가 깊었다. 그 고결한 성품과 맑은 눈으로. 허나 그 고결한 성품이 여인에겐 지독(至毒)에 지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제 눈을 뽑아간 자가 누군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제석천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하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 미사락기다(微沙落起多)는 가늘고 긴 눈에 혼란과 뜨거운 눈물을 담고 허망한 구멍이 두 개 얼굴에 난 구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몸을 단순히 잔혹한 사건에 대한 충격 정도로 생각하는 듯, 유안이 그녀의 팔을 잡고 등에 팔을 둘러 부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 터이다. 구나라가 범인이 자신임을 알고 있음을.

군중이 충격과 구나라의 진술에 대한 반향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평화로만 가득했던 천상도에 이토록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음에 경악하여 이토록 모인 것이다.

구나라가 미사락기다를 감싸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참 골몰하던 나는 유안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미사락기다가 유안의 사랑을 받는 것을 모르는 자가 천상에는 없다. 그녀를 흠집 내는 것은 미래의 제석천을 흠집 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저 여자는 어떻게 되지? 사랑하는 자를 해쳤고, 그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저 여자는?’

‘그보다 구나라는 평생 맹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옳지 않았다. 옳지 않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고 입이 열렸다. 강렬한 충동이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여인, 미사락기다의 품을 살펴보십시오.”

“무슨 말이냐?”

제석천의 불쾌한 반문과 유안의 당황한 얼굴.

“제가 보았나이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미사락기다가 풀썩 주저앉자, 그 바람에 품에서 유리병 하나가 굴러 나왔다.

좌중에서 비명소리와 놀라움의 한숨이 크게 터져 나왔다.

“저럴 수가…….”

유리병 속에는 구나라의 두 눈알이 들어 있었다. 소중한 듯 감로와 함께. 유안이 나를 보았다. 평소의 억누른 듯 잔잔한 미소가 들어가지 않은, 그렇다고 해서 원망도 없는, 표정이 없는 눈동자였다. 순간 칼에 찔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유안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병에서 눈알을 꺼내 구나라의 텅 빈 구멍에 각기 넣었다. 감로 덕분에 아무 이상 없이 구나라는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아름다운 눈으로 주저앉아 벌벌 떠는 미사락기다를 바라보았는데, 이상했다.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고요함이었다. 그제야 미사락기다는 눈물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미사락기다여, 널 욕계로부터 추방하여 저 하계로 떨어뜨리리라.”

제석천은 당황스러운 것보다도 분노한 듯한 어조로 단언하였다. 한참의 침묵 후, 미사락기다는 겨우 답하였다.

“..예.”

좌중의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난 기분이 이상해졌다. 난 옳은 행위를 한 것이다. 누가 봐도 타당한 행위를.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가. 저 여자는 가증스럽다. 자신을 저토록 사랑해주는 정인을, 형을 두고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품었고, 그걸 거절당했다고 해서 제멋대로 원망하여 해쳤다. 그런데 어째서 구나라와 유안은 화내지 않는가, 원망하지 않는가. 어째서 저토록 담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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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연 - 2 09.10.02 183 2 12쪽
59 연 - 1 09.10.01 427 2 13쪽
58 연(蓮) - 프롤로그 09.10.01 410 2 3쪽
57 파륵오륜담 외전 - 금란(金蘭) 09.09.29 273 3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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