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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님의 서재입니다.

아들이 만든 창작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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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작품등록일 :
2021.02.11 16:25
최근연재일 :
2021.09.1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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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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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증명 (1)

DUMMY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엉망이 된 방안이었다.


의사들이 두고간 진귀한 약재와 수술도구들, 그리고 방금 빨아낸 옷가지들이 낙엽처럼 흩뿌려져있었다.


그 난장판 속에 한 소녀가 서있었다.


녹빛 머리카락이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고 큰 보름달은 그 머리카락 사이로 부서지듯 빛났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내가 꿈에서 깨어난건지 헷갈리던 순간이었다.


“이상한 기분이네요. 갑자기 미래로 날아온 느낌.”


소피아는 금방이라도 달을 잡을 듯 손을 뻗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손끝은 달에 닿지 못하고 힘없이 창틀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본 달은 더 작았는데. 제가 여기 누워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돌아갔군요.”


소피아의 목소리에는 알게 모르게 조금 진이 빠진 듯한 기색이 있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그저 세상을 돌리는 부품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


저 나이대의 흔한 고민이다.


“그러지 마. 기껏 일어났는데 울상이면, 고친 내가 죄지은 것 같잖냐.”


“글쎄요. 저희는 그걸 병주고 약준다고 부르곤 합니다.”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결백을 주장하시나요? 신드바드를 죽이면 저주받는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으면 제가 쓰러질 일도 없었을텐데요.”


“믿을 생각이었나?”


“아니요.”


“그럴 줄 알았어.”


짧은 문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복잡한 변명도, 추궁도 없이 후련하게.


우리는 말 없이 창가에 기대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톨레도는 해안도시답게 해안에 가까운 쪽은 낮고, 멀어질수록 높아진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이 저택은 적당한 고지대에 있어서, 바다와 도시의 정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언젠가 세상이 절 우러러보게 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러면 어머니도 인정해주실테니까.”


아직 잠들지 않은 도시를 눈에 담으며, 소피아가 중얼거렸다.


“···바보같죠.”


조금 싸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문득 답답해 가면을 벗는다.

신드바드는 가면과 연결된 모자 속에서 아직도 잠에 빠져있었다.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레 가면을 내려놓은 다음, 밤바람에 코를 박고 힘껏 들이켰다.

바다, 소금기를 머금은 땅, 사람들이 사는 집과 들의 냄새가 났다.


후하아- 하고 숨을 내뱉고, 나는 소피아에게 말했다.


“바보같긴. 전혀 그렇지 않아. 멋진 꿈이야.”


“고맙지만 거짓말은 그리 기쁘지 않네요.”


[ 검성의 딸, 소피아가 허튼소리라고 생각합니다.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 1 ]


말과는 달리 조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바라보며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이 아냐.”


소피아는 창틀에 턱을 괸 채 나를 올려보며 눈짓했다.

어서 말해보라는 뜻인 게 틀림없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꿈이란 게 없었거든. 원하는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한테는 부럽게만 느껴져.”


괜스레 손끝을 꼬아대며 창틀에 몸을 기댔다. 나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 앞에서 이런 말을 하자니 낯간지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음, 나는 되는 대로 살았어. 남들이 제시해준 길을 따라 걸었지만, 그중에 내가 선택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


내 인생은 ‘어쩌다보니.’ 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이 진실이다. 어쩌다보니 태어났고, 어쩌다보니 살아왔다.


“타고난 건 있어서 대학도 갔고, 남들은 가지지 못한 기술이 있어서 돈도 벌었지. 하지만 그중에 내가 정말로 원했던 건 없었어. 하고 싶은 건 없고, 의무만 있는 삶. 지루하지.”


“정말요? 그런 것 치고는 아주 열심히 사시던데요.”


그 말에 곁을 돌아보자 말똥말똥한 눈동자가 날 마주본다.

휘으뜸 긴 속눈썹 아래로 살짝 그늘진 눈매가 곱게 접히며 미소짓고 있었다.

보고 있자면 편안해지는 눈웃음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후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해야 할 일.

그렇게 말하고나니 무언가 잘못말한 듯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마지못해 세상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


말을 고치며 나는 창가에서 떨어졌다.

소피아는 창틀에 턱을 괸 채 눈동자만 또르르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절 돕는거요?”


“널 돕는 게 궁극적으로 그 일의 일부야. 그러니 믿어줘. 네게 해가 될 일은 절대 없으니까.”


“흐응.”


그렇게 말하며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소피아는 한참을 침묵하다 문득 입을 열었다.


“왜 이 도시인가요?”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는데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스피드퀴즈를 맞추기 위해 돌아선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스무고개 할 바에는 그냥 직접 묻는 게 나을텐데.”


“재미없잖아요.”


“뭐?”


문득, 지난 번 감옥에서도 간수의 가족사항에 대해 추리하던 소피아의 모습이 떠오른다. 생각보다 그런 지적 유희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울려줘야지.


나는 가볍게 팔짱끼며 운을 땠다.


“먼저, 난 도시를 구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으음···.”


침음성을 삼킨 소피아는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한 무리의 빛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럼 구하려는 건 혹시, 사람인가요?”


“그래.”


“현재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인가요?”


“아니. 언제고 떠날 수 있지. 하지만 떠나지는 않을거야.”


“군인입니까?”


“군대를 이끌지.”


“도시에서 유명합니까?”


“흠, 적어도 시장바닥 아줌마가 이름을 말하는 건 들어봤어.”


“음흠. 도시를 떠날 수는 없으니 이곳에 기반을 둔 사람이고, 군인은 아니지만 군대를 이끄니 군대의 지휘관이 아니라 소유자고, 이 도시에서 유명하다라.”


소피아는 창틀에 걸터앉으며 뒤돌아섰다.


“몽고메리 백작이군요.”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백작이라. 하긴, 이 도시의 주인이니 도시를 떠날리도 없고, 군대를 이끌고, 도시에서 모두가 아는 유명인사긴 하지.


소피아는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었다. 갓 회복한 피부는 창백해 달빛 아래 도자기처럼 하얬고 하지만 선명한 얼굴 선은 보기좋게 기울어져 보기 좋았다.


유감이다. 저 미소를 망치게 되서.


“틀렸어.”


그 말 한마디에 그 보기좋던 미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소피아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뒤에서도 얼굴이 읽히는 게, 어지간히 뚱해진 모양이었다.


“최소한의 질문으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 이상 질문하는 건 의미가 없어서 안한거라구요.”


그녀는 그렇게 툴툴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미소를 띄고 그녀 곁으로 다가가 창 밖을 함께 바라보았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다급히 몰려오고 있었다. 분노한 기색은 없고, 당황과 놀람만이 보일 뿐이다.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그들을 바라보는 소피아의 표정도 온화했다.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소피아는 나를 슬쩍 곁눈질하고는 아예 고개를 홱 돌려버리며,


“눈치가 있으면 이제 정답을 말해줄 때 아닌가요?”


하고 말했다.


옆으로 돌린 얼굴에는 삐쭉 튀어나온 입술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미소지었다.

알 법도 한데 왜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너야. 소피아.”


반항심 있게 오뚝이처럼 흔들거리던 고개가 멈추고, 끼긱거리며 나를 돌아보는 눈은 경련하듯 깜빡인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던가.


“나는 널 구하러 왔다.”


방에는 침묵이 찾아들고 문 너머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온다.

무언가를 집어던지고 치우는 굉음, 그리고 머피의 고함.


-치유사님! 치유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소피아는 얼굴을 굳힌 채 운을 뗐다.


“저를 구한다구요. 당신이?”


-치유사님! 문을 열겠습니다!


“나도 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


-하나, 둘!


“나같은 것 따위가 널 도울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겠지.”


“치유사님, 치유사···!”


문을 부숴버리고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온 머피의 눈이 격렬히 흔들렸다.

두 다리로 일어선 소피아. 그리고 그 앞에 선 나.


“···증명해보이마.”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머피의 억센 손에 내 몸을 맡겼다.


바닥에 쳐박힌 채 두 손이 묶이고 장정 서너 명이 날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눈으로 소피아를 쫓았다.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소피아가 손을 들자, 거칠게 날 제압하던 경호원들의 손길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다.


오직 머피만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의 아가씨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입꼬리로 고운 곡선을 그리며,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어디, 있는 힘껏 해봐요.”


[ 검성의 딸, 소피아가 도전을 반깁니다. 호감도가 2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 3 ]





.

.

.





아직도 쓰라린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구름이 휩쓸고 가는 바람에, 안그래도 허름하던 저택은 한결 더 허름해졌다.

도시에서 찾아온 사람들과 경비들은 설명을 요구하며 경호팀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누군가는 진실을 규명하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맨 꼭대기층의 창가에 얼핏 녹색 머리카락이 스쳐지나간 듯도 했다.


“하. 녀석도 참.”


‘있는 힘껏 해보라’ 니. 이 얼마나 귀여운 자신감인지.


등에 멘 가방을 다시 고쳐잡으니, 가방의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 가방 속에는 소피아의 선물들이 들어있었다.

볼티모어 가문의 관계자임을 뜻하는 명패와 기초자금으로 쓸 금화들, 비상시 연락할 수 있는 수정구까지.


같이 일하게 된 것만으로 이런 지원이 들어온다니. 역시 노비가 되도 대감집 노비가 되는 게 좋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길을 옮기던 와중이었다. 저택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 사이에 낯이 익은 붉은머리가 드러났다가, 다시 묻히고, 다시 드러나기를 반복하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으하! 아나톨리!”


고생 끝에 인파를 뚫고 나온 것은 익숙한 사람이었다.


“···루시? 여기서 뭐해요?”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루시는 엉망이 된 머리를 손질하지도 않은 채 숨을 헐떡였다.


“저주를 풀러간다더니, 그 이상한 구름은 또 뭐야? 대체 뭘 했길래 그런 게 나와!? 이상한 저주같은 거 걸린 거 아니지? 응? 그렇지?”


“어, 하. 아하하! 뭐예요, 걱정해주는거에요?”


나는 적잖이 감동해 한 말인데, 루시는 속이 터진다는 듯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트려댔다.


“으으으! 도대체가, 도대체가!”


그렇게 한참을 열불을 내던 루시는 발개진 얼굴로 대뜸 나를 끌어안고는, 내 가슴팍 고개를 파묻고 중얼거렸다.


“···제발, 부탁이야. 무사히 있어줘. 아나톨리.”


그 물기어린 목소리에 나는 말 없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루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차라리 다른 요구였다면 매정하게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을.

다른 무엇보다 내 안전을 빌어주는 그녀에게, 나는 도무지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음, 이것 좀 봐요. 루시.”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건?”


“별 건 아니고···.”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속에는 볼티모어의 휘장이 새겨진 웅장한 은색 명패가 세 개 놓여있었다.


아나톨리, 아가리타, 루시.


성씨도 없는 평민들인 바람에, 이름이 새겨진 곳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볼티모어의 명패였다.


“용병 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제한되잖아요. 정착도 못하고, 금지사항도 많고.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어딜가든 신분이 발목잡힐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음···.”


뭐라고 말을 끝맺어야할지, 이런 때는 뭐라고 말해야하는지. 난 아직 배우지 못했다.

결국 나는 말하는 대신, 명패를 꺼내 루시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루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습기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런 것보다 네가 있어줬으면 해.”


그 한마디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한마디 내뱉었다.


“···곁에 있을겁니다.”


그제서야 루시는 머뭇거리는 손길을 뻗어왔다.

명패를 받아들기 직전, 그녀는 다시금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이지?”


“···그럼요.”


오늘은, 어째선지 거짓말이 조금 힘들다.





.

.

.


작가의말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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