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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님의 서재입니다.

아들이 만든 창작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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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작품등록일 :
2021.02.11 16:25
최근연재일 :
2021.09.10 23:33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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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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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2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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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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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탁류 속으로 (1)

DUMMY

얼마 전이었다.


망루에서 온종일 도적들을 감시하던 감시병들은 그들이 널직한 나무판자를 대량으로 옮기는 것을 발견했다.


그 나무판자가 오두막을 짓고 마을을 형성해 도시와 평화로운 공존을 하기 위해 쓰일 일은 없으므로, 도시의 사람들은 마침내 도적들이 공성병기를 만들고 있다고 짐작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큰 위기는 큰 기회를 불러오는 법. 적들의 공성병기를 무력화시켰다는 공적을 쌓기 위해, 몇몇 이들은 은밀히 행동에 나섰다.


그것이 일루이스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였다.


“이런 니기미.”


일루이스는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우아한 엘프의 입에서 천박한 비속어가 들려오자 몇몇 병사들이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코앞에 적을 두고 뒤를 보는 바보들에게 소리질렀다.


“앞을 봐 이 새끼들아!”


그녀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의 몸이 괴수의 발톱에 찢겨졌다. 쏟아지는 동료의 피에 잔뜩 겁먹은 이들은 진형을 무너트리고 바닥에 웅크리거나···.


“으아아아! 살려줘어!”


···등을 보이며 도망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곳에서 가장 연약해보이고, 위협이 되지 않을 존재를 향해 도망쳤다.


다시말해, 엘프인 일루이스를 향해 뛰어갔다.


“얼레? 자리로 안돌아갈래?”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신참을 보며, 일루이스는 헛웃음지었다. 그토록 고생해서 뽑은 신입이 이꼴이라는 사실에 진이 빠진 게 틀림없었다.


“비켜! 비켜어!”


그는 손을 뒤흔들며 입에 거품을 문 채 외치고 있었다. 코 앞의 괴물보다 등 뒤의 엘프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얼마 전 용병단에 합류한 젊은이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일루이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나 진짜.”


그가 일루이스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이 가볍게 움직임과 동시에 청년의 목이 예리한 무언가에 잘린 듯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단 두 발자국을 가기도 전에 몸이 무너지고,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청년의 머리만이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일루이스가 바닥에 나뒹군 신참의 머리를 발로 밟으며 집씻듯 읊조렸다.


“허락 없는 자리이탈은 탈영으로 간주한다. 이 빌어먹을 단명종들. 계약서에 싸인은 무슨 생각으로 했냐?”


신입들의 눈에는 충격이, 고참들의 눈에는 익숙한 체념이 자리잡았다.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한 신참 한 명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런 씨바. 저년 지금 지 손으로 죽인거야?


“엘프니까 같이 일해볼만 하다 싶었냐? 밤이면 기회도 좀 올 것 같고 말이야. 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묵직한 방패를 들어올리며 고참이 낄낄거렸다. 자조와 후회가 섞인 웃음이었다. 엘프와 한번 엮여보겠다는 젊은 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왜 안도망가는지 알아? 저년이 더 무서워서야. 이제 준비해. 온다!”


그는 신입 앞에 웃어보이며 방패를 온몸으로 지탱했다. 그녀가 더 두렵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그는 코 앞까지 닥쳐온 야수의 공격을 받아내며 소리질렀다.


“우와아악!”


전쟁야수. 곰과 같은 덩치에 튼튼한 네 다리, 죽이기만을 위해 달려드는 호전성. 거기다 후려치면 성벽이 떨리는 앞발과 창칼로는 뚫을 수 없는 가죽까지.


이 땅에 두 발로 선 이들 중 전쟁야수와 마주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없다. 그것이 이 세상의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런 살아있는 악몽의 현현같은 존재를 마주하면서도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잃지 않았다.


괴수의 체온이 방패를 달구고 썩은내 풍기는 콧김이 그의 얼굴을 덮었지만, 그는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란 것을 아는 듯 했다.


“대장! 보여주소!”


경악하여 입을 벌린 신입의 눈 앞을 무언가가 나뭇잎처럼 가볍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고용주인 엘프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짐승의 목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으, 어?”


털썩. 땅에 떨어진 채로도 그 입을 움직이는 야수의 머리를 보고 신입은 놀라자빠졌다.


아직도 움직이는 야수의 머리를 바라보며, 신입은 제 뺨을 꼬집었다. 그 꼴을 본 고참은 혀를 차며 아직도 후끈거리는 방패를 들어올리며 외쳤다.


“니미, 그렇게 해서 꿈이 깨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으로 신참의 뺨을 후려갈겼다.


“억!”


매서운 주먹에 정신을 차린 신참은 허둥지둥 제 창을 챙기고 무엇을 할지도 모른 채 주변을 돌아봤다.


모두가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고 무언가를 외쳐댔다.


“뒤로 빼지 마라 신참들! 혼자 있으면 뒤진다! 모여!”

“모여, 모여! 아직 몇 마리 남았다! 밀어붙여!”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야수의 포효, 등 뒤에서 밀어붙이는 동료들의 기세. 그는 주변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으, 으아아아!”




.

.

.




“젠장! 팔다리를 묶어! 팔다리를 묶으라고! 이 멍청한 것들아!”


일루이스의 다급한 외침에 사방에서 갈고리가 날아들고 머지않아 야수의 기둥같은 네 발이 묶여 팽팽히 당겨졌다. 벽에 몰린 채 야수와 힘을 겨루고 있던 그녀는 그 틈을 타 간신히 빠져나오며 외쳤다.


“이··· 빌어먹을 짐승 새끼가!”


두 손으로 단단히 쥔 아밍소드를 턱 아래에 찔러넣자 야수의 턱이 꿰뚫리고 입천장에 칼날이 박혀들었다.


“쿠와아악!”


그러나 야수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에 가득 차 입천장에 꽂힌 칼을 무시하고 입을 미친듯이 움직이며 그녀의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 입이 닫길 때마다 칼날이 단단한 입천장을 찍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이거나 쳐먹어라 개색갸!”


그렇게 외치며 그녀는 무릎으로 검을 쳐올렸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칼날은 입천장을 뚫고 야수의 뇌를 헤집었다.


그제서야 거목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야수가 쓰러지고 여유를 되찾은 일루이스는 주변을 살폈다.


“이··· 씨!”


적들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었다.


기껏해야 야수 한둘 내지는 도적 몇놈을 상대하리라 기대했던 바, 그녀는 이를 갈며 후퇴를 명령했다.


“다들 들어라! 후퇴한다! 후퇴! 후퇴!”

“재창! 후퇴! 후퇴!”

““후퇴! 후퇴!””


그녀의 외침에 용병들은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갖추어 사방을 경계하며 온 길을 되짚어갔다. 그걸 보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잠시, 그녀는 엄습해오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젠장할! 분명 아무것도 없을거라더니! 그 썩을 갈보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몸이 반쯤 부서진 채 나무에 걸리거나, 벽에 부딪혀 아작이 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일루이스는 그 광경에 안타까움보다 분노를 느꼈다. 손실이었다. 안그래도 구하기 힘든 인력들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잃다니.


그녀는 자기 곁으로 다가온 작은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누구인지 뻔했기 때문이다.


“대장. 지금 후퇴하면···.”

“입 닥쳐, 난쟁이.”


돌린은 시키는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무는 것이 정답이라는 걸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 썩을 년. 정찰이라더니!”


그녀는 분노에 차 한참을 떠들었다. 주변의 인간들과 한 드워프가 뭐라고 생각하든, 그녀는 자신의 고용주를 미친듯이 씹어댔다.


성문 앞으로 후퇴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그녀는 자신의 고용주를 ‘전쟁야수 다섯 상대하는 걸 정찰이라고 부르는 기적의 전술가’, ‘엘프혐오자’, ‘그딴 게 정찰인 걸보니 떡은 다섯 놈이랑 치는 게 평범한거라고 말할 갈보년.’ 등으로 폄하했다.


500년동안 욕만 단련했는지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저급한 욕설에 용병들은 불쾌함을 넘어 경외감을 느꼈고, 난쟁이 돌린은 ‘설마 고용주 앞에서 저러지는 않겠지.’ 하고 무심히 흘려들었다.


그리고 일루이스는 고용주가 타고 있을 민트색 호박마차로 다가가며 외쳤다.


“야 이 어린년의 새끼야!”


그 순간 시공간이 뒤틀렸고, 돌린은 이마를 치며 단말마를 내뱉었다.


“아.”


그는 멀쩡한 엘프가 500살 먹도록 일터를 전전할 일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으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눈을 감았다.


그렇다. 멀쩡하다면, 적어도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를 가진 엘프라면 500년이 지나면 은행 이자만으로도 경제적 자유쯤은 쟁취하게 되는 것이다.


돌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호박마차의 문이 열렸다.


모두가 입을 다문 그 순간, 그 속에서 여인의 녹빛 눈동자가 빛나며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침 넘기는 소리가 흙 섞인 공기 중으로 들려왔다.


“오오···.”


소문으로만 듣던 검성의 딸을 직접 본 용병들은 할 말을 잃고 그 빛을 응시했다. 몇몇 이들은 손에 힘이 풀려 무기를 놓치기까지 했다.


그녀만한 딸이 있을만한 노병조차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고 다소곳해졌다.


존재의 무게감. 그것이 검성의 혈통이 소피아에게 부여한 특별함이었다.


“정보는?”


“말한 곳까지 닿지도 못했어! 야수만 해도 다섯이었다고, 다섯!”


“···배짱이 좋은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모르겠군. 일도 제대로 못해놓고 적반하장이라니.”


“분명 가는 길에 아무것도 없을거라 했잖아!”


“정확히는 ‘확인된 바에 의하면 아무것도 없다.’ 고 말했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자네를 보낸거고.”


“혹시 모를 사태라고? 이, 이! 그딴 것들이 있는 줄 알았으면 가지도 않았어, 이 사기꾼년아!”


“그래. 그래서 자네는 적들이 만들고 있는 공성병기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지. 인상깊군. 일루이스. 능히 혼자서도 이까짓 일 정도는 해낼 수 있다고 단언하지 않았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압감에 짓눌려있던 이들에게는 마치 그녀가 배는 커진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녀는 일어서도 호박마차의 문보다 작은 소녀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네는 혼자는 커녕 부하들을 이끌고도 실패하고 돌아왔군. 게다가··· 수도 꽤 줄었고.”


하지만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모두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제 누가 사기꾼이지?”


일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단거리 정찰이었다. 이곳이 평범한 전장이었다면, 엘프인 그녀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간단한 임무였다.


문제는 단 하나. 이곳이 톨레도였다는 것이었다.


“자네의 그 어처구니 없는 허세에 돈을 지불한 건 나라는 걸 명심하게.”


소피아가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녀가 내딛은 첫발에 일루이스는 긴장감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엘프에게도 그녀의 위압감은 생생히 다가왔다.


“그건···.”


밤길을 산책하듯, 느긋하게 그녀에게 다가온 소피아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돈을 받았으니, 계약을 이행해야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피아는 그대로 등을 돌려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마차가 일으킨 먼지와 소피아의 향수 냄새 속에서 일루이스는 우두커니 서서 사색에 잠겼다.


“대장?”


혹여나 먼지 속에 두었다고 발광하지 않을까 싶어 돌린이 일루이스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돌린을 무시한 채 무엇인가에 골똘히 몰입했다.


그래, 지랄 안하면 되는거지. 돌린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너른 공터에 걸터앉아 도끼를 손질했다.


소피아의 마차가 멀어지고 먼지가 가라앉을 때 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일루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두 손을 마주치며 소리질렀다.


“이런 요망한 년 같으니라고!”


“대장?”


“결국 해지는 하지 않았어.”


“뭐라고?”


“빌어먹을, 난쟁아! 그 수모를 당하고도 계약을 해지한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어! 결국 저년도 내가 필요한거라고! 당장 가서 화살받이들이나 구해 와. 경력은 상관없어. 그냥 머리수만 채워넣어.”


“잠깐, 설마 지금···.”


“덩치를 불려서, 저 앙큼한 년한테서 돈을 더 뜯어내야겠어.”


돌린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서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금 검성의 딸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겠다고?”


그의 머리 속에서는 앞으로 펼쳐질 고난과 역경이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다. 귀족을 우롱한 죄로 수감될 차갑고 축축한 지하감옥, 약식재판과 단두대, 공개처형···.


“망할거야. 우린 모두 망할거야.”


애지중지하는 도끼를 바닥에 떨어트린 줄도 모른 채, 돌린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소피아는 여느때와 같이 한숨지었다.


“하아.”


선조님의 존안을 바닥에 깔아놓는다는 경이로운 발상으로 인해 편안한 여행용 탈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문도구로 변해버린 마차 안에서, 그녀는 도무지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쉬는 대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떠올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짧지만 효과적인 추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가면, 망해. 나도, 도시도.”


그녀는 이제 현실이 되어가는 실패를 바라보며 힘없이 속삭였다. 해로의 해적들을 뚫기엔 함선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육로를 뚫자니 전쟁야수가 넘쳐난다.


도적이 성벽을 뚫을 순 없고, 해적도 도시에 상륙할 순 없기에 서로 견제만 하고 있지만 어느 한쪽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도시는 불길에 휩싸일 것이 뻔했다.


그 순간, 도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유일하게 확실히 도시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도시가 그녀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


“···아니, 실망하실거야.”


어머니를 떠올리며, 소피아는 울적하게 웅얼거렸다.


내가 도시를 구해오겠노라고. 내가 어머니의 딸, 곧 검성의 딸임을 증명해보이겠다며 진군한 지 벌써 세 달이 지났다. 그리고 도시는 그녀가 오거나 말거나, 그대로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그녀는 그저 힘 좀 있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 사실이 더욱 그녀를 괴롭혔다.


온 힘을 다해 세상에 나섰으나 결국 그녀는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에 지나지 않고, 그녀의 노력은 기껏해야 수면에 이는 파동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의 총지휘관이 되어 하나된 힘을 휘두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는 한낱 돌멩이가 아니라 물의 흐름을 바꾸는 주춧돌이 되리라.


그러려면 공적이 필요했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의 공적이.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 선조들의 초상화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볼티모어 가문의 선조들. 그들은 전쟁터에서 스스로를 증명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볼티모어다.


어릴 적부터 가정교육으로서 전쟁터에서 살다시피했고, 검성의 딸로서 자신감도 있었다.


도시를 둘러싼 적들이 평범한 도적떼였다면 분명 첫 출전 때 도시를 구해낼 수 있었으리라.


문제는 적들이 평범하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짧은 거리를 정찰하는데 전쟁야수 다섯··· 하핫.”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녀는 질문했다.


전쟁야수란 건 그렇게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마리로도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 야수를 얻는게 그리 간단할 리가 없다.


처음 이 도시를 찾아왔을 때, 그녀의 부대는 야수를 두 자릿수 이상 참살했다. 그럼에도 놈들은 끊임없이 몰려왔고 그녀는 도시의 성문 앞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그녀는 도시에 패배자로서 입성했다. 고개 숙인 채, 죄인마냥.


소피아는 쓰린 기억에 이를 악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우,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


복잡한 머리를 붙잡고 한참을 끙끙대던 소피아에게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혹시 이전에 회의장에서 만났던 분 기억하십니까? 넘어질뻔한 아가씨를 제 대신 붙잡아주셨던 그 신사분이요.”


“기억해. 그건 왜 묻지?”


“그분이···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뭐?”


소피아는 문이 열리길 기다리지도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문을 열러 다가오던 마부는 허둥지둥 모자를 벗으며 뒤로 물러났고, 소피아는 그에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숙소로 가는 길목에 표지판 곁에 서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어두웠지만 달빛 아래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너무나 특징적이어서, 이 한밤중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앙다물고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아나톨리. 늦은 밤에 예고도 없이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아무도 안가르쳐주던가요?”


“저도 만나뵈서 반갑습니다. 소피아 볼티모어 경.”


“전 반갑다 말한 적 없습니다. 못 뵌 사이 귀에 이상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오늘따라 힘 쓸 일이 많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위압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녹빛 머리카락이 조금씩 허공으로 떠오르고, 땅바닥에는 흙먼지가 일었다.


그러나 아나톨리는 천연덕스럽게 두 손을 들어올려 항복 제스쳐를 취하고는 입을 땠다. 마치 노래할 준비라도 하는 듯 묘한 운율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전 귀갓길에 잘 정돈된 잠옷을 기대하지, 불청객을 기대하지는 않아서요. 특히 이런 밤에는.”


“기분 푸시죠. 잠옷보다 더 좋은 게 찾아왔잖습니까.”


“하.”


소피아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 짓고는 가볍게 턱끝을 들어올리며,


“말해.”


하고 차갑게 대꾸했다. 아나톨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기회.”


소피아는 한쪽 눈을 치켜뜨며 눈가를 찌푸렸다. 아나톨리의 화법에 진저리가 난 듯, 그녀는 허리에 손을 짚으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말 돌리지 말고. 본론. 어서.”


“앞으로 하실 일에 저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 총지휘관이 되길 원치 않으니, 모든 공적을 드리지요.”


“···왜 나지?”


“백작 면전에 대놓고 지휘관을 다른 사람으로 뽑자고 말했는데, 그럼 제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뭐? 하. 아하하!”


그 당돌하도록 솔직한 대답에 소피아는 분노도 잊고 소리내어 웃었다. 한동안 맑은 웃음소리만이 반복되었고, 아나톨리는 철저한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마부는 그 사이에서 자기도 웃어야되나 싶어 멋적게 미소지었다.


“내가.”


그리고 그의 누런 이가 드러남과 동시에 소피아의 웃음이 멎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운이 엄습해왔다. 이전까지의 위압감이 서있기 힘든 급류였다면, 이제는 살을 뚫는 송곳 같았다.


“말 돌리지 말라고 했지.”


그 강렬한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마부는 거품을 흘리며 기절했다.


“읅, 컭···!”


그리고 누구도 그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나톨리는 단단한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만 보았고, 소피아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노를 담아 아나톨리를 노려보았다.


발산되던 기운이 잘 제련된 검처럼 뭉쳐듬에 따라, 일렁이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녹빛 머리카락 사이로 차갑게 내려앉은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뭘 바라는지 말해라. 장갑을 던지기 전에.”


퍽이나 난폭해진 말투였다. 게다가 장갑을 던지는 것은 곧 결투를 신청한다는 뜻.


아나톨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일이 끝나고나면, 검성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검성.


그 이름에 소피아는 호흡마저 멈춘 채 몸을 떨었다.


“하···.”


그녀는 한숨지으며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 결국 또 이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잠깐이나마 즐겁게 해주고, 그리고 진심으로 화나게 했던 사람조차.


결국은 어머니를 보고 다가온거야.


“그 모든게, 그걸 위해서였단 말이지.”


[ ···행복해라. 건강하고. 그리고 만약에 내가 네 행복에 방해가 되면, 그냥 날 잊어버려라. ]


그녀는 그날 아나톨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결국 그것조차 저 한마디를 위한 설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이나마 그를 염두하고 있던 자신에게 분노했다. 결국 그조차 그녀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를 보고 다가오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애처럼 화나 내고 있었다니.


결국 그녀는 어른으로서 그를 상대하기로 결정하고 익숙하게 미소지었다.


“계약으로 시작하지요. 인감은 챙겨오셨나요?”




.

.

.




“으··· 응···?”


마부는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흙먼지가 그대로 눈과 입에 들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윽! 아, 아가씨?”


그는 눈에 들어난 흙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싸울 듯 화내고 있던 그의 아가씨가, 언제나 보던 천사와도 같은 얼굴로 아나톨리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동업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나톨리님.”


아나톨리는 손을 마주잡으며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소피아를 향했지만, 그녀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 앞에 떠오른 문구를 보고 있었다.


[ 검성의 딸, 소피아가 당신을 믿지 못합니다. 호감도가 5 내립니다. 현재 호감도 : -35 ]


“···제 영광입니다. 소피아 양.”


아나톨리는 그렇게 말하고 조금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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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해주 (2) +6 21.08.22 174 15 20쪽
37 해주 (1) +6 21.08.19 165 16 15쪽
36 저주 (4) +5 21.08.17 156 13 12쪽
35 저주 (3) +5 21.08.16 166 17 17쪽
34 저주 (2) +4 21.08.10 224 18 14쪽
33 저주 (1) +8 21.08.09 172 21 17쪽
32 탁류 속으로 (4) +5 21.08.06 175 17 18쪽
31 탁류 속으로 (3) +6 21.08.05 213 18 20쪽
30 탁류 속으로 (2) +8 21.08.04 182 17 19쪽
» 탁류 속으로 (1) +3 21.08.03 191 19 21쪽
28 전조 (2) +4 21.08.02 181 18 17쪽
27 전조 (1) +7 21.08.01 219 23 21쪽
26 검성의 딸 (2) +9 21.05.21 363 38 20쪽
25 검성의 딸 (1) +9 21.05.19 347 38 23쪽
24 소금의 도시 (4) +15 21.05.02 436 44 17쪽
23 소금의 도시 (3) +18 21.04.14 645 49 17쪽
22 소금의 도시 (2) +24 21.03.30 841 74 13쪽
21 소금의 도시 (1) +23 21.03.25 1,021 91 17쪽
20 항구로 (6) +26 21.03.22 1,166 101 13쪽
19 항구로 (5) +20 21.03.21 1,150 80 19쪽
18 항구로 (4) +16 21.03.18 1,243 8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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