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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님의 서재입니다.

아들이 만든 창작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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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작품등록일 :
2021.02.11 16:25
최근연재일 :
2021.09.1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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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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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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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소금의 도시 (4)

DUMMY

“아나톨리, 아나톨리! 이거 좀 봐. 어울려?”


그날 아침, 머리가 붉고 순박한 인상의 아가씨가 톨레도의 고급양장점에서 초록 드레스를 입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정중한 몸놀림과 맑고 깨끗한 피부, 빛 아래선 제 색을 되찾는 진남색의 검은머리는 어디서든 그를 눈에 띄게 만들었다.


그는 죄송스러운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인의 주변을 돌았고 이내 공손히,


“아주 어울립니다.”


하고 대답했다.


“아하하!”


그 대답에 가슴이 부푼 루시가 명랑한 웃음을 터트리며 몇 발자국 걷는 순간.

그녀를 가로막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어긋납니다. 복식예절에.”


기이한 도치법과 평탄한 어조, 마치 유리가 굴러가듯 조용하지만 아름다운 음색.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쏘아보았다..


“붉은 머리와 초록 드레스는 보색 조합이고, 보색 조합은 과도한 자기주장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만 머리와 같은 붉은 드레스는 주최자에게만 허가되니, 푸른색을 추천드립니다. 양식은 동일하게, 장식이 적은 것으로.”


루시는 뚱한 표정으로 다시 벽면에 걸린 푸른 드레스 몇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양장점의 직원은 더할나위없이 정중한 태도로 피팅룸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의 얼굴은 대우받는다는 충족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리타에게 조언을 구해야한다는 수치심이 뒤섞여있었다.


아나톨리는 그 모든 감정을 훤히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온 경험 덕분이었을까?


아니.


[ 루시의 현재 심리 : ‘잘난 척 하기는.’ ]


그는 눈 앞에 떠오른 창을 보고는 쓰게 웃었다.


문이 닫히고 아가리타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아나톨리의 복장을 점검했다. 그의 옷 위로도 예리한 눈길이 박히는 게 느껴졌다.


[ 아가리타의 현재 심리 : 확인하려면 호감도를 최소 ‘10’ 이상으로 올리십시오. 현재 호감도 : 1 ]


“···회의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눈 앞에 떠오른 글에 집중하고 있던 아나톨리는 잠시 놀랐지만, 평정을 되찾았다.


“우리를 통제하려는거겠지. 아마 백작이 가진 힘을 과시할거고, 도시는 건재하다고 허세부릴거야.”


“어떻게?”


“나도 그게 궁금해.”


단순히 근위대를 세워놓고 군기가 바짝 든 군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시는 이미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상황이고 백작이 유력가들을 끌어모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확고부동한 자기증명이 필요하다.


다시말해, 실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동안 백작은 문을 걸어잠그고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은 채 성 안에 틀어박혀있었다. 군대는 조용히 성벽을 지켰고 그러는 동안 도시 내부는 점점 혼란스러워 졌다.


매일같이 울려퍼지는 경계의 종소리. 해안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해적들, 밤이면 성 밖 곡창지대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울음소리와 도적떼들의 고함···.


도시는, 말라죽고 있었다.


“모임의 파트너는. 연인관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혼자 오면 무례고 함께 오면 연인. 이 기이한 예법은, 과거 귀족들 사이에 혼연했던 약혼 문화의 연장선입니다. 함께 입장하지 않을 때는 같은 색의 손수건을 들고 나타나거나···. 그런 암시를 통해 고대 귀족들은 약혼자와의 관계를 드러냈습니다.”


상념에 빠져들어있던 그는 아가리타가 하는 이야기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나톨리가 그녀를 바라본 것은 무의식 중에 이뤄진 일이었다. ‘말을 할 때는 상대를 봐라.’ 내지는 ‘소변을 누고 난 다음엔 손을 닦아라.’ 와 같이 상식적인 이유로 행해진 일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아가리타의 눈을 보고는 잠시 숨을 멈췄다.


“어떤 느낌입니까? 결혼이란 건.”


단순히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그런 얼굴이 눈 앞에 놓인다는건, 그 자체로 일상 속에 녹아든 비일상이었다.


때마침 아침이었고, 해는 비스듬히 비추고, 그녀는 젊었다.


“···죄송합니다. 결혼은 해보신 적 없으실텐데. 잊으셔도 좋습니다.”


아가리타는 그렇게 말하고는 부드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제서야 일상으로 돌아온 아나톨리의 정신은 오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것처럼 약간 지쳐있었다.


맙소사. 잠깐 홀린 모양이군. 아나톨리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죽는거야. 깔끔하게.”


그녀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호기심, 의아함, 흥미.

그런 아가리타를 바라보는 아나톨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인생의 마침표야. 아들로서의 나는 죽고 아버지로서의 내가 시작되지.”


“자식 부양의 의무에 종속된, 노예로서의 삶 말씀이시군요.”


“하하하!”


그 날선 대답에 아나톨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책으로만 사랑과 결혼을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었고, 그것이 그에게는 귀엽게만 보였다.


경쾌한 웃음소리가 양장점에 듣기 좋게 울려퍼지고, 그는 눈꼬리를 접은 채 아가리타를 바라보았다.


“하! 나는 생존과 자기만족의 의무에 종속된 채 살았지. 아버지가 된 이후로는, 마침내 그 의무에서 자유로워졌어. 이제 난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신경쓰지 않아. 결혼이라는 건 내게서 자유로워지는거야.”


“···.”


“자유의 대가가 왼손약지에 묶을 작은 사슬 하나라니. 안할 이유가 어디있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잠시 허공에 떠오른 먼지들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먼지 하나조차 아들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벅차오르는 자랑스러움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상실감.

새벽 서리와 낮의 햇살처럼 상반되는 감정 속에서 그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을 포기한다면, 그건 죽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죽는 걸 두려워하는데, 왜 결혼하는겁니까?”


“남기지 않는 것이야 말로 죽음이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몰라도 괜찮아. 너도 상대를 만나면 알게 될테니까. 그냥··· 그렇게 삶을 물려주는거야.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리고 내가 그러려고 했듯이.”


그녀는 아나톨리가 알려준 것이 신기하다는 듯, 혹은 그 생생함에 매혹된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상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상상을 끝마치고 현실로 돌아왔다.


“마치 자식을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혹시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 중에?”


아나톨리는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청자색 드레스를 감은 루시가 뛰쳐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 뒤로 종업원이 다급히 따라와 톨레도 진주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계산서에 은화 여러개가 추가되었으리라. 가벼워지기만 하는 주머니에 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아나톨리! 나 어때?”


“완벽하네요. 그 이상가는 옷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그는 짝짝, 박수치며 루시에게 웃음지었고, 아가리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이었다.


“옷은 숙소로 보내게. 내일 정오까지 보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여러분께 봉사하는 것이 저희의 기쁨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점장은 태연스레 가격표를 내밀었다.


“그래, 언제 내놓나 했네.”


가볍게 한숨짓고 아나톨리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이었다.


금화 두 장이 허공을 날았고, 점장의 속물적인 손은 그 중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날렵하게 낚아챘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어르신.”


흰머리가 난 점장이 새파랗게 어린 자신에게 ‘어르신’ 이라며 고개 숙이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허공에서 금화가 날아온 것이 더 놀라웠다.


그는 금화가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값입니다. 알려주신 것에 대한.”


그리고 감동한 아나톨리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알려줘? 뭐를?”


아나톨리의 등에 한 줄기 식은 땀이 흘렀다.




.

.

.




“뭐야, 결혼의 이유? 그런 거였어?”


루시는 시원스레 말하며 뒤돌았다. 겉보기에는 정말 아무 거리낌도, 불쾌함도 없이 시원시원한 동작이었다.


“돈까지 오가길래 나 빼고 뭐 엄청난 걸 가르쳐줬나 싶었잖아. 무역 레이스 같은 건 있으면 나 빼고 혼자 하면 안되는 거, 알지?”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잖아.”


그렇게 속삭이며 밝게 웃어보이는 루시에게는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미소조차 머금게하는 힘이 있었다.

젊은 아가씨의 붉은 머리칼에서 뿜어지는 생명력은, 톨레도의 햇살에 익숙한 바다사람들에게도 눈부셨던 것이다.


“비밀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괜찮대두! ”


그리고 그들은 루시에게 어딘가 모르게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며 사과하는 남자를 보고 일제히 혀를 차며 쑥덕거렸다.


-’저 기생오라비놈이 계집질을 하다 걸린 모양이군! 저 아가씨는 관대하기도 하지!’


요컨대 그녀는 겉모습만큼은, 남자친구의 외도마저 용서해주는 살아있는 성녀와 같았다.


“겨우 그런 이야기 나누는 것도 막을 정도로 내가 꽉 막혀보여?”


팔락팔락. 손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나름 신세대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루시는 더없이 귀여웠지만, 그 웃음을 바라보며 나는 도무지 미소지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어떻게 여자랑 말 한번 안섞고 생활하겠어.”


[ 루시의 현재심리 : ‘물론 막을거야. 할 수만 있다면.’ ]


“나, 그런 구식 아니야. 서로 구속하지 않는 관계를 추구한다구.”


[ 루시의 현재심리 : ‘물론 할거야. 할 수만 있다면.’ ]


“난 심지어 손 잡는 것도 허용해줄 수 있어! 음, 아니, 그것까진 아닌가···?”


[ 루시의 현재심리 : ‘그건. 절대. 안돼.’ ]


“뭐, 그래도 이해해야지. 내가 연상이잖아?”


[ 루시의 현재심리 :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지. 그래야 안질릴테니까···.’ ]


그녀는 초조함과 질투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밀어낼 뿐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녀의 심리를 볼 수 없었다면, 차라리 저 미소에 마음을 놓고 함께 웃기라도 했으리라. 적어도 이렇게 작두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일은 없었겠지.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꿈뻑꿈뻑 과장되게 눈을 움직인 루시는 곧 그녀 앞에 들이민 내 손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자리에 함께 갈때는, 그러니까··· 우리 관계를 조금 ‘공고히’ 드러낼 때는.”


절대 ‘연인 관계’ 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그녀의 손 위에 작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같은 색깔의 손수건을 들고 간다더군요.”


그녀는 상자 속에 든 손수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장자리가 금색 실로 수놓아진 붉은 손수건.

그녀가 양장점을 먼저 빠져나간 직후 다급히 구입한 일종의 뇌물이었다.


어쩔 수 없다. 맞춰주는 수밖에.


주머니에서 같은 손수건을 꺼내 살살 흔들면서, 나는 가능한한 곱게 웃어보였다.


“재미있는 문화죠. 결혼에 대해서도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건··· 음,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중요한 건 그녀에게 여지를 주는 것이다. 확신이 아니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를 가질 수 있다는 착각.


아주 약간의 노력만 더 기울이면, 어쩌면 ‘결혼’ 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거라는 착각.


“루시. 전 루시가 구식이어도, 꽉 막혀도 상관없어요. 그도 그럴게··· 음, 저흰, 동지잖아요. 영원한 동지.”


결코 연인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으면서, 나는 그렇게 루시에게 일말의 희망을 남겨놓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좋다.’, ‘당신이 무슨 사람이든 신경쓰지 않는다.’, ‘너와는 영원토록 함께하고 싶다.’ 따위의 말들.


거짓말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이걸 듣고 싶어하느냐가 중요할 따름이지.


“아가리타에 대한 일은··· 제게 맡겨주세요. 신경쓰지마요. 그래도 저녀석 덕분에 이렇게 손수건까지 맞췄잖아요.”


“으, 응··· 아니, 나 원래 신경 안썼는데에헤헤···.”


손수건을 받고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어떻게든 억누르면서, 루시는 기쁜 마음을 숨기려 했다. 그럴테지. 여기서 지나치게 좋아했다간 방금 보인 모습이 연기라는 게 들통날테니까.


“신경 안쓰기는··· 어휴, 이리와요.”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나는 눈 앞에 떠오르는 창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 루시의 현재심리 : ‘신경 안쓰는 척 해야되는데에헤헤···.’ ]


연기, 연기라.


나는 대체 언제쯤 이 연기를 그만둘 수 있을까.




.

.

.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도시의 유력가들이 백작의 성으로 몰려오는 와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마차가 하나 있었다.


민트색의 호박마차.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여인이 벽에 쓰인 글귀를 읽고 있었다.


-전쟁은 말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명예는 말한다. 네가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지 떠올려라.


-양심은 말한다. 전쟁과 명예 사이에서, 너는 어디에 서있느냐?


- 마리 볼티모어 5세


“마리 할머니, 제발···.”


자랑스러운 선조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검성의 딸은 힘없이 마차 창가에 기댔다.


마차 안에는 선조들의 초상화와 그들이 후손에게 남기는 한 마디 교훈이 벽과 천장, 심지어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선조의 얼굴을 더럽힐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의자에 앉아 발을 허공에 띄웠다.

대체 여행용 마차에 선조님들의 초상화를 둔다는 비상식적인 발상이 누구에게서 나왔단 말인가.


“하아아.”


원망과 투정을 담아, 그녀는 선조들에게 한숨지었다.


“곧 도착합니다. 아가씨.”


그러나 이내 마부석과 이어진 황동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세를 바로했다.


이번 회의에서도 빈틈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했다.


그녀는 검성의 딸이니까. 이 도시를 구해낼.


그렇게 다짐하고 가볍게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


그녀는 발판 위에서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이유는 셀 수도 없다.


어색한 드레스, 높은 구두, 쓸데없이 좁은 마차 발판, 손도 건네지 않는 마부, 허공에 띄우느라 피곤해진 발.


그 모든 요인이 그녀의 발목을 낚아챘다.


“아아아그아아아씨이이이······.”


깜짝 놀란 마부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지만, 그녀에게는 터무니없이 느리게만 보였다. 목소리도, 움직임도.


단순히 집중한 것만으로도 느리게 흘러가는 그 시간동안 그녀는 갖가지 방식으로 어떻게하면 깔끔하게 착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도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걸 막을 수 없는 상황.


순간을 무한으로 쪼개는 반사신경을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소피아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더러워진 드레스를 입고 회의장에서 들을 비웃음들이었다.

‘저딴게 검성의 딸? 우스워.’ 내지는 ‘그래도 소피아 양은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니 이번엔 어머님께 연통을 드리는게···.’ 같은 소리들.


정말로. 다 때려치고 싶었다.


호기롭게 도시를 구하겠다며 찾아와놓고 도적놈들한테 진 것도 모자라서, 이젠 흙바닥에 뒹군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몸을 지탱했고, 그녀는 구두 바닥에 흙만 조금 묻힌 채 제자리에 설 수 있었다.


“이런, 제 부주의함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키가 컸고, 어두운 와중에도 주변이 빛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었다.


“급하게 지나가느라 내리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도시의 명사들이 모인 대문 앞에서 그녀에게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어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대신, 말 없이 어깨로 그녀를 지탱하고는 능청스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물론 괜찮습니다, 경.”


그렇게 말하며 소피아는 상대를 훑었다.

이제보니 그의 품 안에는 푸른색 드레스에 휘감긴 여인이 안겨 있었는데, 흔히 볼 수 없는 붉은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시골처녀의 상징인 그 붉은머리를 파티에서 숨기지 않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더욱 보기 드문 것은 그의 배려였다. 그는 여인의 두 발을 자신의 발등 위에 올려놓고는, 그녀의 신발에 흙이 묻지 않게 걷고 있었다.


“보기 드문 신사시군요.”


그는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러갔다.

마치 왈츠를 추듯 파트너의 발을 제 발위에 올린 채 재주좋게 카펫을 밟은 그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카펫 위를 걸었다.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마부는 다급히 무릎 꿇고 신발의 흙을 털었지만 소피아는 가볍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세웠다.


사치를 부리는 것으로 보여선 안됐다.


그녀는 오늘, 이곳에서 가능한 훌륭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으니까.


“정말로 괜찮아요. 요즘들어 돌아다닐 일이 많아 피곤할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오히려 제가 미안한걸요.”


언제나처럼 익숙한 겸손과 자애의 가면을 덮어쓰며, 소피아는 웃음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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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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