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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님의 서재입니다.

아들이 만든 창작물 속으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BISTRO
작품등록일 :
2021.02.11 16:25
최근연재일 :
2021.09.10 23:33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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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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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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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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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탁류 속으로 (2)

DUMMY

눈을 감으면, 별처럼 빛나는 것들이 어두운 와중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건 사람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조각이다.


항상 곁에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세상 뒷편의 존재들.


그리고 그들은 제법 말이 많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 선생에게 존경을 보이지도 않고, 재깍재깍 인사하지도 않아. 수업이 끝났는데 집으로 오지도 않고 밖을 나돌아다니질 않나, 부모한테도 대들고 음식은 있는대로 다 쳐먹고 밤에 나가 술먹고 토나 하고 말야! ”


“그 이야기는 이미 했잖아. 다른 이야기를 해봐.”


“쯧, 쯧··· 요즘 젊은 것들이란······.”


그리고 그들은 아주··· 고집스럽다.


나는 눈가를 문지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역시 안되는 군.”


키아라 건을 통해 영혼들이 훌륭한 정보원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건 알아냈으니, 이제 그들을 활용할 방법을 알아낼 차례다.


살아있는 사람들과 달리 죽은 사람들은 설득하기가 까다롭다. 삶에 대한 불안이 없으니 자연스레 보상으로 제시할 것도 마땅찮다.


본디 훌륭한 설득이란 굶어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빵 한조각을 댓가로 영혼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죽은 사람은 어떻게 설득하겠는가. 이미 죽었으니 굶을 걱정도 없는데.


결국 그들은 누구의 말에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필요 없기에.


그렇다 해서 그들과 대화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들조차 마력이 담긴 내 목소리에는 반응하니까. 그렇게 대화하거나, 아니면···.


"으음."


침음성을 숨기지 못하고 나는 얼마 전 새로이 발견한 스킬을 살폈다.


> ‘영혼 흡혈’ - [ 영혼을 흡혈해 영혼이 가진 기억과 능력을 빼앗아옵니다. 이걸 선택한 시점에서 당신이 그걸 신경쓸 것 같지는 않지만··· 남은 껍데기는 어떻게 될까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사람의 몸은 여러 기억을 담기엔 너무 작습니다! ···흡수에 요구되는 기억력 : 10 (현재 기억력 : 14) ]


>> 사용하시겠습니까? [ 네 / 아니오 ]


잠시 갈등한다.


기억력 스텟은 충분하다. 한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기술인 만큼 실험을 해야하는데······.


고민 끝에 창을 닫는다. 기억과 능력의 흡수라니. 혹시나 내 정체성이 흐려지면, 그리고 이상한 능력을 흡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면 요실금이라던가.


실없는 생각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이제 익숙해진 감각을 따라 목에 힘을 주었다.


> 발동 - [ 마력 서린 노래 ] :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매우 큰’ 보정이 붙습니다.


“원하는 걸 말해.”


“···젊은 놈들은 안돼.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집 밖으로 나가 떠돌기나 하고 말야.”


이제까지 홀로 투덜거리던 늙은 영혼은 뒷짐 진 채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날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게 말하고 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뒷짐진 그 손과, 죽는 날 입고 있었을 낡은 울 스웨터의 주름이 눈에 밟혔다.


“그러니까, 돌아왔으면 좋겠어. 이제 늦었다고 혼내지 않을테니까. 다시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어. 그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


나는 의자 손받이의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그 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길고 단단하면서 흠집 하나 없다. 주름살도 보이지 않는 조각같은 손이었다.


문득 그 손이 내 손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정말 갑작스럽게도,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건 아마 아들의 유작을 쥐고 놓아주지 못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아니었을까.


“후우.”


‘다시 한 번 봤으면 좋겠다.’ 라. 이것 참 우연이다. 나도 그걸,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 있는데.


갑작스레 본래의 나이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피로와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의 빈 자리를 느끼면서 나는 입을 뗐다.


“어쩌면··· 아이들은 둥지를 떠나는 게 본능일지도 모르겠어. 언제까지고 품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정신차려보면 어느새 저 밖에서 제 발로 열심히 뛰고 있지. 그런 녀석들을 다시 데려오는 건 어쩌면 욕심일지도 몰라.”


모두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뇌까리며 고개를 숙였다.


“···떠나보내고, 녀석들 뒤통수에 손 흔들고, 문을 닫고, 집에서 홀로 썩어가는 게 우리 일일지도 몰라.”


늙은 영혼은 침묵으로 답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아.”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땅 속 깊은 곳에서 맥동하는 거대한 별빛을 바라보았다.


“난 놓아주지 않을거다.”


그 말을 들은 것마냥, 별빛이 조금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최종보스께서 비웃고 계신 모양이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저 아래에까지 닿을 수 있도록.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보자.”


눈을 감고 다시 뜨자 내 눈에는 요정이나 정령, 땅 속 깊은 곳의 악신 따위가 아닌 오래된 나무바닥과 익숙한 먼지, 그리고 내 두 다리가 보였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나는 두 눈을 마사지했다. 너무 오랫동안 바라본 모양인지 눈이 피로했다.


나는 걸어두었던 코트를 걸치며 문손잡이를 당겼다. 커피냄새와 아침 공기가 뒤섞여 얼굴에 와 닿았고,


“아나톨리, 좋은 아침.”


루시가 문이 열린 걸 알아채고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앞에 놓인 커피가 두 잔인 걸 보니 하나는 나를 위해 만든 것 같았다.


밤새 영혼들과 떠들어 목이 아픈지라, 나는 가볍게 목례로 답했다. 그리고 아가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루시의 대각선 맞은 편에 앉아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 위에 수란을 올려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아가리타. 지금 만들고 있는 거. 최대로 생산하려면 얼마가 필요하지?”


내 질문에 아가리타는 크게 한입 문 토스트를 그대로 내려놓았다. 아직 김이 올라오는 수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가리타는 대답했다.


“임대비로 10닢, 재료비로 40닢, 인건비로 20닢, 시설비로 50닢···”


“만약 아무도 모르게 만든다면?”


그녀는 비로소 잇자국이 선명한 토스트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먹기 가장 적절한 온도와 때를 계산하고 있었으리라. 가장 맛있는 첫 입을 놓친 오팔색 눈동자에 원망이 깃들어있었다.


“···재료비 10닢, 시설비 20닢.”


“잠깐, 잠깐잠깐.”


대화를 듣고 있던 루시가 끼어들며 물었다. 그녀의 몸짓에는 자신만 소외되었다는 불안함이 섞여있었다.


“저기, 방해해서 미안한데. 대체 무슨 소리야? 그리고 뭘 사겠다는건지는 몰라도 아가리타, 네 장난감 살 돈은 우리한테 없어. 선금으로 받은 현금은 월급으로 나가기에도 벅차. 계약금으로 받은 수표는 현금화하려면 은행을 통해야하고. 당장 돈을 그렇게 쓸 수는 없다구.”


씻고 왔는지 살짝 물기가 묻은 머리카락을 소매자락으로 털어내며, 나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마요. 다녀와서 설명해줄테니.”


“그치만··· 잠깐, 다녀와서? 다녀오다니, 어디를?”


그때였다.


쿵- 쿵-


“으힉!?”


누군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던 나와 다르게, 루시는 깜짝 놀라 힉소리를 냈다.


“흐음.”


시계는 아침 7시 2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피아는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까지 단련하고, 6시 30분까지 아침식사를 끝마친다. 그리고 7시에 곧바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나는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다. 그녀가 직접 말해줬으니까.


“조금 늦었군.”


중얼거리며 문을 열자 보인 것은 후드를 뒤집어 쓴 음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아침 7시에 책상 앞에 앉음과 동시에 무슨 명령을 내렸을지. 그리고 그녀를 보필하는 충성스런 부하들이 얼마나 유능한지.


“···타라. 아가씨께서 기다리신다.”


가장 앞에 서있던 남자가 턱끝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소피아가 애용하는 민트색 마차가 아닌, 흔하고 추적되지 않을 마차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

.

.





마리아 볼티모어.


한때는 그 검의 재능을 높이 사 ‘샛별’, 왕국 정벌에 참가해서는 ‘파괴자’ 라는 살짝 유치한 별명으로 불렸지만 이제는 모두가 그녀를 검성이라 부른다.


그녀는 이 시대가 목격하고 있는 전설이다.


서쪽 산맥의 무역로를 틀어막고 조공을 요구하던 히드라의 목을 재생이 안될 때까지 잘라서 죽였다거나, 기사를 베었는데 그가 진영으로 돌아가자 그제서야 몸이 갈라져 죽었다던가, 산을 넘기가 귀찮아 산을 반으로 갈랐다던가.


이 모든 것이 담담한 사실적시라는 담백한 진실을 아마 후대의 역사가들은 믿지 못하리라 예측한 역사학계에서 그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물을 출간했다.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껏해야 유망한 지방 호족 중 하나였던 볼티모어 가를 단 10년만에 중앙의 귀족 가문으로 끌어올렸다.


개인의 무력으로 정치력을 행사한다는 전례없는 사건이었지만,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단지 검 한자루를 든 그녀가 단지 너무나도 강했기에.


본디 검성이란 그 시대에 가장 유명한 검객을 뜻했지만, 그녀가 검성에 등극한 후로 히드라는 커녕 와이번도 못죽여본 선대 검성들을 검성이라 불러야하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천하를 두고 다투는 왕들조차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단 한사람.


그렇다면 그런 대단하신 검성의 딸은 대체 어떤 집에 살 것인가. 하는 궁금증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조금 당혹스럽기 마련이라,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내게 소피아가 눈총을 보내왔다.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하신 분을 모시게 되서 실망이 크네요.”


나는 반쯤 뜯어져 윗층이 그대로 보이는 천장과, 복도와 경계를 허문 신세계적이고 전위적인 설계의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건물의 기본 원리인 공간의 격리 라는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방이 뚫린 건물이었다.


맙소사. 복도에 꽃가루까지 날아들었잖아.


“···귀한 곳이요?”


나는 황망한 기분으로 소피아에게 대답했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잘댔다.


“아직 정리가 덜 되긴 했지만. 유서 깊은 톨레도 유지의 옛 저택이랍니다. 당신과 같은 불한당이 발을 들이기엔 과분한 장소죠.”


그러니까,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몰락한 가문의 폐저택이란 말이군.


그런 진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기에, 소피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귓볼을 조금 붉게 물들였다. 일부러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며 그녀가 말했다.


“흠흠. 제가 왜 당신을 불러들였는지는 알고 있나요?”


“제가 쓸모있는지 확인하시려는거겠죠. 전날 밤 저의 제안에 대해 생각해보셨을테고, 그것 때문에 오늘 조금 늦잠을 자셨을겁니다. 절 불러오라고 결정하셨을 때는 아마 평소와는 달리 7시 10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 소름돋습니다. 호감도가 1 떨어집니다. 현재 호감도 : -36 ]


손등에 솟아오른 닭살을 비비며, 그녀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어떻게.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후우우.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고는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저를 돕고, 저는 당신을 어머님께 연결시켜드린다. 그것이 계약의 골조였습니다. 헌데 제가 주는 것은 명확한데, 당신이 줄 것은 모호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제 용병단으로는 부족하십니까?”


“이미 경비 업무에 투입되어서 다른 덴 쓸 수도 없는 걸 인력이라 부를 순 없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문서를 꺼내들었다. 다섯 저택과 맺은 계약서의 복사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알고 계셨군요.”


“모를거라 생각했나요. 생각보다 순진하네요. 혹, 그 용병단이 당신이 가진 전부라면 이야기는 이쯤에서···.”


“항생제입니다.”


“네?”


내 말에 소피아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꼬리를 내리깔았다.


“항생제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아주 약간의 비용으로, 최고의 품질을 약속드리죠.”


“···아직까지 이 도시에 역병이 번지지 않은 이유를 아나요? 톨레도의 의약품 재고는 넘쳐나요."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먹히지 않을 공격이니, 적들도 역병을 퍼트리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죠. 게다가, 항생제를 만들 연금술사가 당신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뜬금없는 제안에 제가 혹할거라 생각한거죠?”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어째선지 의기양양한 눈길을 보내왔다.


“어이가 없네.”


나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치는 어린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듯이.


그녀의 자신감을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아가리타를 높게 평가한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집 한구석에서 하얀곰팡이를 옥수수 달인 단물에 배양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곰팡이는 페니실린, 즉 항생제의 단초다.


만약 그녀가 항생제를 만들고 있다면, 곧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소피아에게 설명할 것인가?


내가 아는 호문쿨루스 하나가 있는데, 그녀석이 항생제를 만들고 있으니 투자하면 대박이 날거라고?


이 상황에 필요한 건 그녀에게 믿음을 안겨주거나, 아니면···.


“내기를 하죠.”


“내기?”


“제가 도움이 된다는 걸 입증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입증하지 못하면 지난 밤의 이야기는 없는 걸로 하지요. 하지만 입증한다면···.”


그렇게 말끝을 흐렸지만 소피아는 눈웃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윗자리에 앉은 자 특유의 거만한 자비였다.


“항생제인지 뭔지, 까짓 거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무엇을 시킬까. 이 자리에서 그 엘프년이 실패한 정찰을 명할까, 아니면 경쟁자의 비밀을 알아오라고 시킬까.


아냐, 아냐. 정말 아무도 몰랐던, 그리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임무. 그런 건 없을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얼마나 똑똑한지 한번 볼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계획한 대로 말이다.





.

.

.






덩치가 크고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던 거한 하나가 내 눈을 가릴 안대를 가져왔지만, 소피아는 가볍게 손짓하며 만류했다.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말하길,


“믿는 건 아니에요. 알죠?”


“실패하면 죽일 생각이시군요. 어쩌면 성공하더라도.”


소피아는 입가를 손등으로 가리고 작게 웃었다. 듣기좋은 미성이었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그리 곱지는 않았다.


“약속하죠. 실패해도 죽이지는 않을거라고. 다만 죽는 것보다 더할거에요. 전부 다 망쳐드리죠. 당신이 가진 모든 것. 용병단, 그 항생제 사업, 얼굴, 목소리까지. 전부 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피부가 저릿한 적대감을 느끼며, 나는 그녀가 나를 정말로 싫어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래. 상관없다. 싫어하든 말든. 그녀는 날 돕게 될테니까.


내 대답에 소피아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작게 미소를 흘리며 벽 앞에 섰다. 녹빛 머리카락이 조금 빛을 머금는가 싶더니, 공간에 묘한 향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건 인위적인 향수향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고도로 응축된 마력의 향기였다.


“아르히 베클리흐.”


그녀의 입에서는 노래에 가까운 음색과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오묘하지만 뜻이 담긴 문자들이 벽면에 새겨졌다.


마치 음표를 보면 음악을 모르는 사람도 멜로디가 들리듯이, 난생 처음 본 문자임에도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아르히, 술취한. 베클리흐, 손 짚는 곳.


그리고 소피아가 손을 댐과 동시에 벽이 물결치더니, 결국엔 허공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그 뒤로는 지하로 향하는 수상쩍은 계단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환상벽은 아니고, 벽 그 자체를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린 듯 했다. 그 광경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비밀 지하실이라. 너무 고전적인데.”


“소설을 너무 많이 보셨네요.”


그리고 우리는 계단을 내려 지하실로 향했다. 한 단 한 단 내려갈 때마다 짙어지는 음침하고 건조한 공기에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본디 지하실은 습하기 마련. 하지만 이곳은 피부가 푸석해질 정도로 건조했다. 마치 무언가를 저장하려는 듯이.


그리고 그곳에 ‘저장’된 것의 정체는 이내 드러났고, 나는 경악했다.


“이런, 맙소사.”


나조차도 살면서 본 적 없는 광경을 소피아는 옅은 미소를 띄운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그것들은 소금으로 뒤덮어 부패를 막은 시신이었다. 팔이 없는 것도 있었고, 다리가 없는 것도 있었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욕조같은 통에 담겨진 시신들이 정렬되어있다. 그 길의 끝에는 특히나 거대한 소금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괴수의 머리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괴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네 다리가 소금통 밖으로 튀어나왔고 몸 전체는 사람의 머리카락과 같이 얇고 낭창한 털로 밀도있게 덮여있었다. 크기는 거대한 회색곰에 비견되고 네 다리는 기린만큼 길되 두께는 통나무 같았다. 각 다리 끝에 달린 발톱은 각각이 롱소드를 연상시킬 정도로 길고 예리했다.


그것은 자연의 손에 빚어지기엔 너무 끔찍했다. 표정을 나타내는 근육조차 팔다리에 심었는지 표정없는 머리에는 개와 같이 물기 좋게 튀어나온 입이 달려있었다. 눈동자에는 흰자가 없어 죽어서나 살아서나 소름돋도록 검었다.


넋을 놓고 그 괴물을 바라보는 아나톨리에게 소피아가 다가와 속삭였다.


“인상적이죠. 그렇지 않나요?”


“···예.”


소피아는 그 표정 없는 괴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꿈꾸듯 속삭였다.


“전쟁야수. 여기 보관된 것은 이 한 마리를 잡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에요. 발톱이 철보다 강해서, 기사를 힘으로 때려죽이는 게 아니라 베어죽였죠. 장정 열 명이 갈고리를 걸었지만 실패했고, 방패는 팔 째로 씹어먹었어요.”


“그리고 이런 것들이 셀 수도 없어요. 못해도 세 자리수는 있다고 봐야할거에요.”


“아나톨리. 당신은 이 괴물에 대항할 방법을 찾을 수 있나요?”


소피아의 말이 끝날 때 즈음, 아나톨리의 눈에는 기이한 광채가 발해지고 있었다. 그는 그 생물에 완전히 몰입한 채 인간의 인지 너머의 것과 접촉하고 있었다.


소피아는 확신에 찬 눈으로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놀랐군요?”


아나톨리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예.”


[ 이름 : 전쟁야수 보리스 ]


“···정말로.”


[ 힘 : 43(+20) ]


“놀랍군요.”


[ 상태 : 저주받음. ]


“이건.”


[ 종족 : 인간 ]


“사람이잖아.”


[ 소피아가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호감도가 3 내립니다. 현재 호감도 : -39 ]




.

.

.


작가의말

드디어 생긴 여유시간에 지난 시간 써온 녀석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일기, 논술, 그리고 아들이 만든 창작물 속으로 까지.


언제나 저였지만, 언제나 새로웠습니다.


문득 뒤돌아보니, 반 년이 지났습니다.


전 아마 2021이라는 숫자를 잊지 못할겁니다.


올해가 가고 점점 늙어가도 아마 제 마음 한구석은 지금 이 순간에 남아있겠죠.


정말 많은 것을 배운 한 해입니다.


막연히 상상만하던 직장생활을 체험하고 냉혹한 사회의 면모와 싱글벙글 사람사는 이야기를 살로 느껴보았습니다.


지금껏 단 한번도 단편적인 이야기 이상을 해본 적 없던 이 초보가 마침내 이 이야기를 30화까지 쌓아올렸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치열하게 배웠던 지난 세월도 보람찹니다만 직접 일어나 이야기를 만들고, 전날 플롯을 쓴 저에게 욕하고 내일 글을 쓸 제게 사과하는 경험이란.


그런데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이 제게 보내주신 관심과 응원 덕분이라는 사실을.


이야기는 관심과 응원으로 자라나고 냉혹한 비판으로 단단해집니다.


혼자 쓴 이야기는 저의 관심과 응원 만큼만 자라나고, 저의 비판 만큼만 단단해집니다.


다시 말해 이 글이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여러분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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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검성의 딸 (2) +9 21.05.21 332 38 20쪽
25 검성의 딸 (1) +9 21.05.19 339 38 23쪽
24 소금의 도시 (4) +15 21.05.02 426 44 17쪽
23 소금의 도시 (3) +18 21.04.14 619 49 17쪽
22 소금의 도시 (2) +24 21.03.30 833 74 13쪽
21 소금의 도시 (1) +23 21.03.25 1,011 91 17쪽
20 항구로 (6) +26 21.03.22 1,153 101 13쪽
19 항구로 (5) +20 21.03.21 1,138 80 19쪽
18 항구로 (4) +16 21.03.18 1,231 8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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