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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님의 서재입니다.

아들이 만든 창작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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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작품등록일 :
2021.02.11 16:25
최근연재일 :
2021.09.10 23:33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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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36
추천수 :
2,745
글자수 :
323,679

작성
21.03.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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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항구로 (5)

DUMMY

가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우리는 어떻게 살았나 떠올려보곤 한다.


그땐 어떻게 연애를 했더라?


차는 밀리고 연락은 안 되고, 그러니 늦는 이는 늦는 대로 발을 동동 굴리고 기다리는 이는 기다리는 대로 하늘의 구름만 본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다가도 슬슬 화가 난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화는 걱정이 된다.


장소나 시간을 내가 착각한걸까, 오다가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그렇게 불안이 엄습해오곤 했다.


책을 읽다가, 개미집을 밟다가, 길가의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그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던 그 숱한 기다림의 시간들.


기다림은 길다. 짧은 건 기다림이 아니다.


어쩌면, 기다리는 시간이 없어지는 바람에 요즘 우리의 하루가 짧아진 게 아닐련지.


아무튼 그런 귀중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며, 루시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제 아무리 거친 해적들이라 해도 아나톨리를 당해내지는 못하겠지. 키도 크고, 힘도 세잖아. 그 튼튼한 팔을 한 번 휘두르면 해적 쯤이야 한방에 열 놈도 날려버릴거야.


루시는 그렇게 믿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선 장난감 병정같은 해적들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된 아나톨리의 콧바람에 훌렁훌렁 날아가는 장면들이 그려졌다.


심지어 해적들은, ‘으아아악! 너무 강하다아!’ 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말하며 바닥에 넙죽 엎드리기까지 했다.


그 유치하고 조금은 묘사하기 쪽팔린 상상은, 어두워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통 안이라는 환경에서 기인했다.


물론 통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는 전적으로 동화를 읽으며 키워온 루시의 유치한 상상력 때문이다.


-’이··· 개자식들아, 당장 치우지 못해! 같은 편이라고, 같은 편!’


방 밖에서 아나톨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들으면서,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며 긴장했다.


가히 마법적이라 할 수 있을 목소리였다. 그러나 상상이 끊어지고 현실의 냉기가 엄습하자, 그 목소리가 끊기고 끔찍한 비명이 들려오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어찌됐든 해적들은 허약한 장난감 병정이 아니고, 아나톨리는 상처입지 않는 무적의 기사가 아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루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길했다.


만에 하나, 정말 만 번에 한 번 있을 일이겠지만, 아나톨리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루시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서 따라와! 금고가 어디 숨겨져있는 지 내가 봐뒀으니까!’


-’···꼰···질···어?’


-’걱정···난, 선···따까리··· 서.’


아나톨리의 외침 이후로 조곤조곤 들려오던 대화가 끝나고, 비명도 없이 발소리들은 멀어진다.


“휴우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루시는 방 밖에서 멀어지는 발소리에 귀기울였다.


그는 이번에도 재치로 위기를 넘겼다.


그래, 아나톨리는 그런 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결국 이겨내니까. 언제나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신기하군요.”


“히익! 아가리타! 조용히!”


쉬이잇. 어차피 보이지도 않을테지만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세워대며 옆 통에 들어있을 아가리타를 향해 난리를 피운다.


그러나 아가리타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긴장하시더군요. 왜?”


분명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 라고 아나톨리가 엄포를 놓고 나간 지 몇 분도 안되서 저렇게 입을 열다니!


루시는 이 무책임할정도로 자유로운 소녀에게 조금 화가 날 지경이었다. 애시당초, 아나톨리가 밖으로 나선 것도 숨을 수 있는 통이 두 개 뿐이라 그랬을 터.


물론 아나톨리가 방을 나선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지만, 루시는 아가리타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그녀에게는 아가리타가 그저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아나톨리와 나 사이에 끼어든 방해물.


그런 주제에 왜 긴장하냐고, 그것이 신기하다고 태연스레 말을 걸어온다.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소녀.


루시는 이를 악물었다.


“왜냐니, 그야 걱정되니까.”


“무엇이?”


“뭐긴! 당연히 아나톨리가 다칠까봐지!”


“본인이 아니라?”


루시는 놀라 입을 벌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문득 차라리 통 안에 숨어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이 없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뺨을 후려쳤을테니.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남을 걱정하기 전에 본인부터 걱정해야한다는 건 흔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 그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루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판단했다는 사실. 그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너, 너···! 사람들이 다 너처럼 굴지는 않아!”


“신기하군요. 그건.”


아가리타는 아무 의도 없이 담백한 의사표현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루시를,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해적이 습격한 상황에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인 건 당연한 상식 아니었나?


아가리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깥 세상 사람처럼 생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통 안쪽 벽에 붙어 열변을 토했다.


“도대체, 넌 뭣때문에 아나톨리한테 붙어있는거니?”


그녀는 통 안에서 그 말을 들으며, 이토록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 누구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임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갈 길이 바빠. 너처럼 구해준 걸 고마워하지도 않는 꼬맹이를 달고 다닐 수는 없어! 배에서 내리면, 네 갈길 알아서 찾아가!”


루시는 우리. 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은근한 표현이었다. ‘너와 달리 나는 아나톨리와 언제까지고 함께할 것이다.’ 라는.


아가리타에게는 그것 또한 신기했다.


다른 사람과 언제까지고 함께 있겠다고 말하는 바깥 세상의 사람들. 그 어떤 명시적 이득 없이 서로의 인생을 나누는 사람들······.


“···함께한다니. 우연찮게 만난 두 사람이. 신기하군요.”


“우연찮게가 아니야! 아니, 우연이어도 괜찮아. 이제부터 운명으로 만들면 되는거니까!”


스스로의 감정에 취한 탓에 루시는 그 말이 얼마나 쪽팔리고 오글거리는 말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는 아직 스무살에 꿈 많은 시골처녀, 아직도 머리맡에 동화를 두고 자는 아가씨였으니까.


“운명같은 만남이란 건, 너같은 부잣집 아가씨한테만 허락된 게 아니라구! 나도, 나도···!”


루시의 가슴에서 많은 것이 벅차올랐다.


아가리타에 대한 열등감, 질투, 아나톨리를 향한 애정, 사랑, 의존, 그리고 결핍에 대한 공포.


“나도······!!”


그 수많은 감정을 한 데 뭉친 말 한마디가 루시의 입술 끝에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분명 계집 목소리가 들렸어!


—쾅!


잔뜩 흥분한 해적의 외침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헙, 루시는 입을 다물었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다!


눈물이 찔끔 흐른다. 아나톨리 말을 잘 들었어야 했는데. 저 꼬맹이가 뭐라 하든 난 어른답게 입을 다물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녀의 풍부하고 조금은 유치한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상상 속에서 그녀는 해적 수백마리를 무찌른 용맹한 아나톨리 앞에서 인질로 잡힌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나톨리! 난 신경쓰지 말고, 맞서싸워!'

-'음하하하, 네 공주님을 되찾고 싶거든 당장 무기를 버리고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이 비겁한 놈들! 루시! 조금만 견디시오! 내가 지금 구해주겠소!'


만약 그녀의 상상에 소리가 있었다면 이 배에 있는 모두가 그 요란스런 연극을 감상했으리라.


하지만 다행히도 상상은 음향효과가 없다. 해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안을 둘러볼 뿐이었다.


“흐으응··· 잘못들었나? 어이! 여기도 옮길 물건 있다! 이리로들 와봐!”


해적의 손이 통 위로 드리운다······.




.

.

.





나는 오른 주먹에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날리며 외쳤다.


“그냥 자라!”


“꾸아악!”


근력 스텟 15의 펀치를 관자놀이에 얻어맞은 선원은 기이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미안해, 하지만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 하며 날 뒤따르는 해적들을 살폈다. 짜릿한 승리와 확실한 보상에 눈이 돌아간 놈들은 내 주먹에 기절한 선원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주변을 약탈하고 있었다.


“니미···.”


내가 갑판으로 나섰을 때, 이미 전투의 기세는 확실히 해적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우아아아!”

“끄아악!”

“싹 다 죽여! 죽여어!”


갑판 곳곳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수와 기세에서 선원 측이 밀린 지 오래였다. 조금 싸울 줄 아는 선원이 해적 몇 놈을 베어넘긴다 싶으면, 어느새 화살이 날아와 그를 쓰러트렸다.


일교차가 크고 습한 바다에서 습기와 온도에 약한 활은 쓸 수 없었기에, 호두파이 호는 활을 싣지 않았다.


그 결과 선원들은 궁수를 상대로 응사도 못한 채 화살들을 일방적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마치 벌을 사냥하는 개미떼처럼, 해적들은 조직적이고 집요하게 배를 공격했다.


“씨, 씨팔! 물러서지 말고 막아, 막, 끄아악!”


있는 힘껏 소리치며 도끼를 휘두르던 갑판장의 어깨에 화살이 돋아났다. 그리고 뒤이어 정강이에도, 팔뚝에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에도.


“그륵···.”


제 피에 질식해가는 그를 보며 나는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아아!”


그곳에선 젊은 선원이 커틀러스를 미친듯이 휘두르며 거렁뱅이같은 해적 두 놈의 가슴팍을 베어내고 있었다.


“저 새끼 조져!”


누군가의 외침에 해적의 활시위가 당겨지는 순간, 내가 먼저 선원에게 달려든다.


“이야아아아··· 아, 당신! 무사했, 커어억!”


“잠 좀 자라!”


빠각, 소리와 함께 그의 두 다리가 허공에 뜨고 몸이 옆으로 날아가 갑판 바닥에 쓰러진다. 끝났다. 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끄으으··· 왜, 왜···?”


[ 선원 로랑이 배신감을 느낍니다. 호감도가 초기화됩니다. 현재 호감도 : 0 ]


로랑. 그래, 로랑. 분명 이 배에 타던 날 보초를 서고 있던 선원이었다.


마치 자기 일처럼 열성적으로 날 변호해주고, 입을 옷까지 가져다주었던 그 젊은이.


“···자라니까!”


나는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로랑의 머리를 걷어차 기절시켰다.


로랑. 일어나면, 자넨 내게 고마워할거야.


로랑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었던 해적이 이번엔 날 겨누며 외쳤다.


“저 새끼는 뭐야?”


“선장이 심어놓은 끄나풀이래! 쏘지 마!”


“젠장, 미리 좀 말하지! 다들 들어! 저 기생오라비는 아군이다! 같은 편이야! 공격하지 마!”


[ 해적 리베르가 당신을 흠모합니다. 호감도가 15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 16 ]

[ 해적 루크가 당신을 재수없게 생각합니다. 호감도가 3 내립니다. 현재 호감도 : - 2 ]

[ 해적 디마가 당신을 좆같다고 생각합니다. 호감도가 4 내립니다. 현재 호감도 : - 14 ]


흠모하는 새끼 누구냐.


나는 훽 뒤돌아 내 뒤를 졸졸 따르던 해적 병단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묘하게 수줍어하는 눈빛. 그래, 너구나. 넌 나중에 꼭 죽여준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돌리는데, 아까부터 날 의심하고 개같이 굴던 해적 한놈과 눈이 마주친다.


뭐, 어쩔건데.


그런 의미를 담아 눈으로 비웃어주니,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사납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 새끼야, 그렇게 쳐서 죽기야 하겠어?”


“뭐···?”


놈은 기절한 로랑의 곁으로 가더니, 이미 피가 잔뜩 늘러붙은 그 단창을 들고 소리질렀다.


“이렇게! 해야지! 흐리야아압!”


창이 내려찍히고, 살점이 뜯기고 뚫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확실하게 끝을 내려며는, 이렇게!”


로랑의 머리에 단창을 꽂고는 휘적휘적 휘저으며 뽑아낸다. 투둑거리며 회색빛의 무언가가 갑판에 떨어지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액체와 피가 엉겨 흐른다.


“응? 잘 배워두라고. 알겠어?”


비릿하게 입가를 끌어올리며 건들건들 짝다리를 짚고는 날 건방지게 쏘아본다.


···이 새끼가.


정말, 죽여달라고 애원을 하는구나.


“이 개새끼가 남이 잡아놓은 걸 후려···?”


나는 내 분노를 로랑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빼앗긴 공적에 대한 분노로 가장했다.


가능한 많은 포로를 잡은 자에게 많은 포상이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이야기.


명분은 충분했다. 다른 해적들도 말릴 기세가 없는 걸 보니 이정도의 다툼은 녀석들 사이에서도 일상다반사임이 분명하다.


로랑이 놓친 커틀러스를 쥐어든다. 주인의 피에 젖어 엉망이지만, 그의 복수를 한다는 의미에서는 아주 적합하지.


훙훙 휘두르며 손에 무게감을 익힌다. 그 궤적에 달빛이 부서지며 남긴 잔해가 남는다.


손잡이와 날이 일체형인 저가형이지만 세심하게 분배된 무게와 편안한 그립감이 일품이다.


과연, 전(前) 군함 호두파이 호에 걸맞게 상등품이다.


“하, 어린 새끼가 벌써 디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네.”


“가는 데 순서 없다는 말, 알아? 이 무식한 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놈은 해적 특유의 집요하고 야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창을 요란하게 흔들며 날 현혹시키려 했다.


창술의 기본이지만, 저 기본을 파훼하지 못하고 죽는 검사가 9할이다.


하지만 내겐 통하지 않아.


유학 시절 내 룸메이트는 스피어와 쿼터스태프 어뎁트를 딴 진짜배기 스위스 랜서였고, 나는 그와 대련하며 검으로 창을 상대하는 법을 신물나게 익혔다.


기껏해야 길이 1미터도 안되는 단창따위.


“후- 하! 흐후! 후!”


놈이 단창을 내밀고 요란하게 허공을 찌르고, 창끝을 빙글빙글 돌리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칼로 슬쩍슬쩍 단창을 쳐내며, 나도 놈에게 파고들 기회를 엿보았다. 몇 차례의 긴장감 넘치는 탐색전이 끝나고 공격의 방향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진지한 싸움터 옆을, 다른 해적이 열심히 통을 굴리며 지나갔다.


“···응?”


그건 보여선 안될 통이었다.


표식을 새겨넣은, 루시와 아가리타가 숨어있는 통.


“빌어먹을!”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는다.


다행히 뚜껑을 열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자신들이 타고온 배로 옮기고 나면 분명 뚜껑을 열게 될거고, 그렇게 되면···.


“후! 하! 왜 그러냐! 마주해보니 안되겠다 싶으냐?”


생각해라, 생각해. 지금 상황에 어떻게 하면 저 통을 해적들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 있지?


어차피 배가 나포되면 아가리타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그리고 녀석이 없으면 당장 3년 후 찾아올 멸망을 막을 수 없어.


호두파이 호를 빼앗기지 않으면서 해적들을 몰아낼 수 있는, 그런 방법. 그런 방법이···.


젠장. 젠장. 젠장. 생각해!


“오냐,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가마!”


놈이 단창을 뒤로 당기는 순간이었다. 훅 당겨진 팔 틈 사이로, 저 멀리 지평선에 있는 섬 하나가 보였다.


분명 섬이지만, 이 어두운 밤 중에는 어찌보면 함선 같기도 했다.


함선.


그래, 저거다.


나는 이젠 익숙해진 감각을 느끼며 목에 힘을 주었다.


[ 발동 : ‘마력서린 노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매우 큰’ 보정이 붙습니다. ]


“저걸 봐!”


“후··· 어?”


그 목소리 앞에서 사람의 마음은 강풍 앞의 갈대와 다를 바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굽이치고 방향을 강제하는 목소리. 내 싸움에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고 있던 해적들 모두가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긴 듯 나를 돌아본다.


심지어 내 앞에서 창을 내지르려 하던 놈조차.


후우웁. 있는 힘껏 숨을 들이키고, 내지른다.


“군함이 온—다—!! 해군이다—!!”


커틀러스의 칼날을 들어 섬을 가리킨다. 칼날에 부딪혀 부서지는 달빛에 이끌린 해적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밤바다에 고요히 떠있는 섬을 향한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구, 군함··· 군함이다!”


끝이었다.


들뜨고 달아오른 해적들의 마음은, 그대로 꺾이고 말았다.


“해, 해군이다! 해군이 온다! 도망쳐!”

“도망, 도망쳐어!”

“밀지 마 이새끼야! 죽여버린다!”


서로를 밀치고 약탈품을 집어던지고 자신들이 타고 온 배로 달려든다. 해적과 반대로, 수세에 몰린 채 간신히 선장실로 가는 길을 막고 있던 호두파이 호의 선원들은 희망으로 차올랐다.


“구원이 왔다! 놈들을 몰아내!”

“이 씨팔놈들! 원수를 갚아라아!”

“으아아아!”


승리를 목전에 두고 도망가기 아쉬웠던지 선원들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 해적들도 몇 있었지만, 기세를 되찾은 선원들의 공격에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이, 썩을! 이 새끼야, 배에서 두고보자!”


내 앞에서 자세를 잡고 있던 놈도, 단창을 내리고 꽁무니를 내빼려 들었다.


놈의 왜소하고 땀띠 가득한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겐 안되지.”


“잠, 뭔!? 놔, 놔!”


어딜 도망가려고.


제대로 먹지 못해 비루먹은 해적놈의 손목을 비틀고 그대로 들어올린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팔이 빠진다.


“끄으아아아아악!”


놈의 비명에 선원들이 나를 눈에 담은 순간, 나는 커틀러스를 들어올렸다.



푸욱.



그대로 콩팥이 있는 위치를 찌른다. 젊은 선원 로랑의 피 위에 뜨겁고 더러운, 해적의 피가 덧칠해진다.


“끍, 끄륽! 그르륵—!”


[ 해적 디마가 당신을 증오합니다. 호감도가 50 내립니다. 현재 호감도 : - 64 ]


나는 바닥에 떨어지는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피가 로랑의 시체에 가 닿는 순간까지.


부디, 내게 느낀 배신감이 조금은 해소되었기를. 로랑.


등에 박아넣은 커틀러스를 뒤튼다. 칼날이 내장을 헤집고 복막의 질긴 부분을 갈라내는 감각이 손끝으로 생생히 전해진다.


“···.”


해적은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버르적거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직 쓸모가 있지.


뒤튼 커틀러스를 그대로 휘두른다. 살을 두부처럼 가르고 빠져나온 칼날이 피에 젖어 번들거리고, 해적의 내장이 바닥에 쏟아지며 끔찍한 소리를 낸다.


백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강렬한 법.


나는 그것으로 달려오던 선원들에게 내가 아군임을 보였다.


칼을 한바퀴 돌려 피를 털어낸다. 그런 내 곁으로 선원들이 도열한다.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한데 모인 우리는 상처 투성이에, 지쳤지만 그 눈에는 굳은 의지가 가득했다.


“몰아내라!”


칼을 들어 해적들을 가리키며 내가 외쳤다.


“으아아아아!”

“가자아아!”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선원들이 일제히 달려든다. 마치 하나의 파도가 된 것처럼, 뱃사람들의 물결이 해적들을 덮친다.


“끄아악!”

“사, 살려, 끄억!”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다. 칼이 날아들고 곳곳에서 해적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거기, 너!”


내 목소리에 놀란 해적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그의 얼굴이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지만, 그러면서도 끝까지 표식이 새겨진 통을 끌고가려 끙끙댄다.


그래, 욕심 하나는 인정해주지.


녀석을 향해 달려들면서, 나는 기합을 내질렀다.


“덤—벼—라—!!”





.

.

.


작가의말

이번 주가 끝나듯이, 항구로 에피소드도 다음화면 끝날 것 같네요.


다음화는 내일 저녁 여러분이 주무시기 전에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번 주의 마지막 하루, 행복하게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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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금의 도시 (2) +24 21.03.30 841 74 13쪽
21 소금의 도시 (1) +23 21.03.25 1,021 91 17쪽
20 항구로 (6) +26 21.03.22 1,166 101 13쪽
» 항구로 (5) +20 21.03.21 1,151 80 19쪽
18 항구로 (4) +16 21.03.18 1,243 8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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