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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님의 서재입니다.

아들이 만든 창작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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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TRO
작품등록일 :
2021.02.11 16:25
최근연재일 :
2021.09.1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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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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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해주 (4)

DUMMY

수석분석관.


검성의 따님이신 소피아 영애를 보좌하고 모든 결정에 조언하는, 명예로운 현자의 직책.


나이 지긋한 꼰대들이 맡던 현자와 차이가 있다면 이 자리는 나이를 가리지 않으며 또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결코 혼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수석분석관은 어디까지나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분석조의 지휘자일 뿐, 단독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는다.


혼자 책임질 일은 없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볼 때 상당히 안정적인 철밥통이라 할 수 있다.

덤으로 볼티모어 가문의 휘장 아래서 일한다는 점에서 직업 만족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고.


다시말해 결혼 시장의 일등 신랑감이요, 술자리의 인맥 자랑과 으스댐에 빠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직위다.


그리고 그 대단하신 수석분석관께서는, 책상에 쌓인 서류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분석조의 일원이 그런 그를 보고 물었다.


“일 안하고 뭐해요?”


침묵하던 수석분석관은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수석 이름 달면 너희한테 일 다 맡기고 쉴 수 있을 줄 알았어. 너희가 다 만들어놓은 보고서에 대충 내 의견 조금 첨삭해서 제출하면 끝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대체 왜 일이 더 많아졌을까?”


그는 진지했다. 그가 처음 취업했을 때, 수석분석관으로 있던 선배는 일이란 일은 전부 다 떠맡기고 어딘가로 출장가있는 게 일상이었다.


그 선배가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매일같이 관광지를 떠돈다는 이야기는 동료들 사이에 풍문처럼 번져있었다.


···몰랐지. 그게 전부 계획의 일환이고 거짓말이었을 줄은.


그런 모습을 바라고 수석분석관 자리에 적극적으로 지원했건만. 아뿔싸, 속고 만 것이다.


선배는 관광지를 떠돌며 출장이라는 이름의 휴양을 즐긴 게 아니라, 매일같이 검성을 따라 해외로 나가 현지 자료 수집과 정보망 개발을 하느라 갈리고 있었고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메꾸고자했다.


바로 그때 걸린 것이 어리버리한 신참이었던 지금의 수석분석관이었던 것이다.


마치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넣어야 성불하는 물귀신처럼 선배와 동료들은 손을 뻗쳐왔고, 결국 그는 수석분석관이 되고 말았다.


인생이란, 이토록 허무한 것인가.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와 후회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분석관은 그러거나 말거나 취합이 완료된 자료를 건넬 뿐이었다.


“그런 헛소리 할 시간 있으면 이거나 봐요. 그 쪽팔린 이름의 용병단에서 말하기로, 자기네한테 저주에 능통한 치유사가 있다면서 보내주겠다는데.”


수석분석관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온 자료를 대강 훑으며 중얼거렸다.


“이름이 뭐 이래? 이··· 이, 은우? 응우? 으누? 뭐라고 읽어야 돼?”


“발티카 사람이잖아요. 그쪽 지역 연음법칙 생각하면 이. 은. 우. 라고 적고 [이으누] 라고 발음하는 게 맞아요.”


“난 음성학같은 거 몰라. 그보다 신분은 확실해? ···발티카 대륙의 무슨 대학이야 이거. 뭐라 써졌는지도 모르겠네.”


“신분은 확실해요.”


“그렇다면야 뭐, 이런 건 어차피 경호팀의 허가가 필요하니 경호원장께 드려. 통과할 수 있는지 보자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쿵. 하고 도장을 찍었다. [입증] 이라고 찍혀진 서류는 이제 경호팀의 손에 낱낱이 해체되어 분석되리라.


적어도 내 손에 쥐어질 일은 아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



“제 아무리 우리와 함께하는 용병단이라 하나 아가씨가 저주로 쓰러지신 걸 콕 집어 알고 있는 걸 보니 보안에 구멍이 생겼다. 분석조는 지금 당장 예상가는 지점을 검토해 금일 19:00시까지 제출하도록.”


“예?”


“치유사의 신분은 확실해보인다. 도시입주허가서, 신분증, 대학졸업증까지 모두 갖춰져있다. 하지만 진위 여부가 확실치 않으니 분석조는 지금 당장 해당 서류들의 진위여부를 가려내어 금일 20:00시까지 제출하도록.”


“예?”


“그리고 이··· 이응우. 라는 이름의 치유사의 주변 인적사항을 모두 검토하고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금일 21:00시까지 제출하도록.”


“네?”


“그리고 이미 아가씨가 저주에 걸렸다는 정보가 흘러나갔으니 분석조는 흘러나간 정보를 회수하거나 오염시킬 방안을 작성해 금일 22:00시까지 제출하도록.”


“녜?”


“그리고 나가기 전에 여기 있는 쓰레기통이나 좀 비우고 금일 23:00시까지 되돌려놓도록.”


“···네?”


경호원장, 머피는 사납게 미소지었다.


“입감했는지?”


수석분석관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기적으로 전해져오던 마차의 떨림이 거칠고 불규칙적으로 변한다. 그 떨림에 얼굴에 뒤집어쓴 가면이 조금 흘러내린다.


“포장도로에서 벗어났다. 저택까지는 이제 금방이야.”


귓전을 울리는 돌린의 목소리에 나는 가면을 고쳐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대화에 마부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여기서도 느껴졌다.


목소리를 내서도, 얼굴을 보여서도 안됐다.


발티카에서 온 치유사, 이은우는 저주를 전문으로 다루기에 보복의 대상이 되는 걸 피하고 저주를 더 잘 다루기 위해 얼굴과 목소리를 내보이지 않는다.


그런 설정을 짠 이유는, 이 마차 안에서조차 목소리를 내는 순간 나라는 게 들통나기 때문이다.


접근 허가가 떨어진 순간부터, 나와 돌린에게는 감시의 눈이 붙었다.


하지만 예상한 바다.


“이건 귀쟁이한테는 비밀이란 것만 알아둬. 네가 없으면 온갖 지랄을 할테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나오자고.”


그렇게 말하며 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마주보며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누군가 이걸 훔쳐듣고 있을 터. 그 자에게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힘든 정보를 최대한 많이 던져 시간을 버는 것이 목표다.


내가 정말 이은우인지에 집중하지 못하게, ‘치유사는 현재 엘프 대장 몰래 일하는 중.’ 이라는 무언가 중요해보이는 정보를 던진다.


통칭 정보 오염, 혹은 역정보라 불리는 기술. 파악할 수 없는 거짓을 미친듯이 던져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가리는 것이다.


명예를 따질 것처럼 굴던 돌린은 생각외로 순순히 협조하며 이렇게 연기해주고 있었다.


계획은 아무 문제 없이 순항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바로 그때, 내 머리 위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 우읍! 토, 토할 것 같네···. ]


신드바드가 내 머리 위에서 작게 속삭였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모자를 톡톡 치며 의사를 전달했다.


‘제발 참아달라.’


[ 무리··· 무리. 마차는 도무지, 견딜 수가! 우으읍! ]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모자를 아주 살짝 들어올려 찬 공기가 들어가게 했다.

조금이나마 진정된 듯 안정된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 후우우··· 이제 좀 살겠군. 고맙네. ]


그의 목소리는 밖으로 세어나가지 않고 온전히 모자 속의 관을 통해 내게만 들려온다. 이제 그는 모자 속에서 소피아의 저주를 푸는 법을 내게 알려줄 것이다.


나는 가면과 모자를 점검하며 도착을 기다렸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흔들렸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덜컹덜컹.


“······.”


덜컹덜컹.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 밖만 바라보던 돌린이 낮게 읊조렸다.


“벌써 도착이야.”


문이 열리고, 이젠 익숙해진 저택의 모습이 날 맞이한다.


[ 아! 저곳이? ]


외출에 신났는지 신드바드는 조금 들뜬 목소리였다.




몇십년간 감옥에만 있었다 해도 그렇지, 저걸 보고 기뻐할 줄이야.


반쯤 무너진 벽, 누추한 외장, 흰개미가 먹었는지 속이 텅 빈 기둥.


그리고 저택의 입구를 지키는 살벌한 분위기의 장정들.

한 번 돌파당했던 경험을 반영한 것일까.

이전과 달리 모두가 갑옷을 입고 무기를 패용한 상태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와 손짓했다.


“가면, 모자. 모두 벗어.”


“저주를 푸는 데 중요한거라 가린거외다. 그녀석한테는 손 대지도, 말 걸지도 마쇼. 부정타기 싫으면.”


“저주를 푸는데 중요하다고? 으흐흐!”


돌린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경비는 비웃으며 우릴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찾아온 치유사라는 놈들 중에 이런 개지랄 떠는 놈은 한놈도 없었어. 지랄하지 말고, 벗어.”


“그래? 그럼 말던가. 누구는 돕고 싶어서 돕나. 야, 응우야. 가자! 지들 아가씨는 지들이 고친댄다! 그렇게 잘 지키는 것들이 왜 저주 따위에 당하게 뒀다냐? 에이, 퉷! 가자!”


[ 자네 난쟁이 친구, 참 마음에 드는구만! ]


난쟁이 특유의 가감없는 모욕.

꿈틀, 눈썹을 일렁이며 경비는 검손잡이 근처로 손을 가져갔다.

안그래도 예민하던 경비들은 순식간에 자세를 바꿔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 팽팽한 대치.


돌린은 배꼽도 안닿는 키로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얼레, 이새끼들 봐라? 그래, 해볼테냐? 도와주러 왔는데 문도 못넘어가게 하더니 이젠 칼까지 뽑으려고?”


“키는 좆만한 게 혀는 뱀같이 길구나. 입을 열때 닫을 때 구분을 잘 했어야지.”


“존만하긴 시발아. 넌 좆이 이렇게 크냐?”


그 말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하던 참이었다.


소란에 저택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거구의 사내가 걸어나왔다.


[ 호오··· 보기 드문 강골이군. ]


신드바드의 감탄에 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다.


호랑이를 닮은 덩치와 기운. 목덜미의 흉터와 사나운 웃음까지. 그는 ‘장수’ 라는 말이 의인화한 듯한 존재였다.


[ 실험체로 아주 좋겠어. ]


나는 머리를 흔들었고 신드바드는 비명을 지르며 정수리 위를 굴러다녔다.


“전원- 제 위치.”


그의 말에 경비들은 일순간에 자세를 풀고 명령을 이행하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떠한 의심도 없는 완벽한 절대복종.


그 엄격한 군율에 살이 베일 듯하다.


고개를 들어 계단을 내려오는 사내, 머피를 바라본다.


돌린은 그에 비하면 무릎께에나 올듯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난쟁이다운 품격으로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그를 올려보면서, 동시에 내려보았다.


“당신이 여기 책임자요?”


“먼저 사과드립니다. 경호원장, 머피입니다. 저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최근 들어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어서요. 돌린 푸앵카레님과 이 응우님 맞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한탄했다.


도무지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인간들이 없다.

응우가 뭐냐 응우가. 은우라고. 이 은우. 난 베트남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말할 수 없다. 말하는 순간 예의바르게 고개 숙이고 있던 경호원장이 ‘음? 이 목소리는! 돌아오다니 뻔뻔하구나!’ 하고 노호를 내지르며 내 머리를 내려찍어버릴테니까.


“이 응우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얼굴과 목소리를 가린다는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가면은 벗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이렇게 들여보내주는 걸 보니, 지금껏 성공한 놈들이 아무도 없는 모양이구만.”


그 말에 꿈틀, 머피의 이마에 혈관이 일그러지듯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사실인 모양이었다.


가면을 쓴 사람이라.

평소였다면 소피아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병상에 누운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다니.


이들이 얼마나 절박한 심정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필시 작은 희망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치유사라면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겠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저희는 치료에 진전이 있도록, 치유사님들께는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드리고 있습니다. 다만 치료 전에 무슨 시술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 미리 말씀을 듣고 다른 전문가들과 상의하여 결정합니다.”


“설마 그 최대한의 자유라는 게 저 좁은 방에 가둬놓는거요? 망할, 흐느끼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군.”


돌린은 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나도 그 방향을 향해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드바드가 쥐의 청력을 이용해 그 내용을 알려주었다.


[ 들리나? 보내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 여자인가? 수는 세 명정도. 단체로 항명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찾아온 치유사들을 풀어주지 않고 계속해서 소피아의 치료를 진행하는게 틀림없었다.


숨길 법도 하건만, 머피는 시원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역시 귀가 좋으시군요.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방금 말씀드린 전문가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자발적으로’ 남으셨죠. 선생님들께서도 보상을 들으신다면 남고 싶으실겁니다.”


“그건 모르겠고, 우리라고 시간이 무한히 있는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쇼.”


[ 나 저 친구 정말 맘에 들어. ]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흔들었고, 신드바드는 또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머피는 우리의 눈은 가리지도 않은 채 저택의 심장부로 우릴 안내했다.

딱히 비밀을 숨기지도 않는다면 둘 중 하나다. 정말 보잘 것 없거나, 아니면 우릴 보낼 생각이 없거나.


아마 후자일테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지키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중갑에 메이스, 단검에 롱소드를 비롯한 무기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도망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쓰러트릴 수도, 따돌릴 수도 없다. 도망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제서야 숨이 턱 막혀온다. 긴장감과 초조함이 손을 떨게 한다. 어쩌면, 이게 정말 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피는 굳게 잠긴 문을 열며 말했다.


“서른이 넘는 의료인들이 모여 머리를 맞댔지만, 저주라는 것만 알아냈습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참담한 심정에 놀라고 만다.


“전직 저주술사, 약초사, 사제에 심지어 양의학자까지 모았으나 해결법을 알아내지 못했죠.”


그는 지키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뒤에 무엇이 오는지, 나는 알고 있다.


어떻게든 되찾고,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각오.


“···부탁드립니다. 아가씨를, 소피아님을,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깊게 고개숙였다. 숙인 그의 등 너머로 하얀 침대보 위에 놓인 가녀린 소녀가 보였다.


그녀는 하얀 옷을 입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중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소피아의 몸 위에 작은 보석을 올렸다가, 빛을 쬐었다가, 떨리는 손으로 피부를 살살 문질렀다.


희망없는 공허한 시도들이었다.


누구도 이것으로 소피아가 치료되리라 믿고있지 않았다.


그저 죽은 아이의 불알을 만지듯 미련스럽게 반복하고, 또 반복할 뿐이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 사이로 얼핏얼핏 소피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 ···맙소사. ]


나는 그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제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린 의료인들의 눈에 무거운 허무함이 퍼져나갔다.


‘또 왔다.’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들. ‘이번에도 안될텐데.’ 라고 벌써 포기하는 사람들.


“···잠시 우리 치유사가 환자를 보게 해주시겠소?”


그 분위기에 돌린마저 공손히 두 손을 주먹쥐어 예의를 취했다.


그들은 일하던 노예들이 삽을 내리듯 온갖 약재와 도구들을 자리에 내려놓고 자포자기한듯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 이쪽으로 가세. 저건 설마···. ]


신드바드가 내 머리카락을 쥐고 조종하듯 나를 이끌었다. 텅 빈 소피아의 침대 곁으로 다가간 내 눈에, 소피아의 몸이 들어왔다.


[ ···맙소사. 썩었잖아. ]


마치 즉신불(卽身佛)이었다.


검게 변해 말라버린 듯 얇아진 오른팔과 오른 다리. 그리고 그곳에서 거미줄처럼 뻗어나오는 검은 핏줄.


턱끝까지 올라온 검은 핏줄은 얼굴에 이르러선 희미하게 피부 아래를 검게 물들였다. 생기없는 피부는 곳곳의 검은 선과 대조되어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시비를 걸 때는 그렇게 생기넘치던게. 여기서 뭐하고 있냐.


그렇게 뇌까리며 나는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소피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 오랜만도 아닌데, 오랜만인 듯 반가웠다.


인사조차 건네지 못해 입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손을 뻗어 그 뺨에 댄다.


이미 죽은 듯 차가웠으나, 그 속에 아주 희미한 온기와 맥박이 느껴졌다.


[ 저주가 상당히 망가졌군.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꼬인건지도 모를 지경이야··· 아, 걱정말게. 그렇다고해서 내가 해석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니까. 그저 조금만 더 가까이 가주겠나? ]


신드바드가 요청하기 전부터 나는 소피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가면 너머로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간 내게 소피아의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스흐······ 스······ 스흐······.”


그 가녀린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떨어지시오.”


오금이 저리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내 뒷목을 잡았다.


머피는 거친 발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께 손을 대는 건, 시술 계획을 말씀하신 다음으로 해주시지요.”


예의바르다. 그러나 위협적이다.


그는 내 코앞까지 다가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뼈를 으스러트릴 듯한 악력에 간신히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참는 사이였다.


내 손목을 단단히 잡은 채 머피가 읊조렸다.


“아니면 혹시, 진단할 시간이 더 필요하십니까?”


더 이상 견디기 힘든 통증에 입이 열리려 하는 찰나,


[ 아니, 그럴 필요 없네. ]


나는 손을 들어 까딱, 하고 움직였다.


[ 받아적을 종이를 가져오게. ]


이제, 고칠 시간이다.




.

.

.


작가의말

신드바드는 유능해오

쥐는 실제로 똑똑하고 귀엽기 때문이에오
생.쥐.좋.아.
설치류 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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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전조 (2) +4 21.08.02 174 18 17쪽
27 전조 (1) +7 21.08.01 210 23 21쪽
26 검성의 딸 (2) +9 21.05.21 332 38 20쪽
25 검성의 딸 (1) +9 21.05.19 339 38 23쪽
24 소금의 도시 (4) +15 21.05.02 426 44 17쪽
23 소금의 도시 (3) +18 21.04.14 619 49 17쪽
22 소금의 도시 (2) +24 21.03.30 833 74 13쪽
21 소금의 도시 (1) +23 21.03.25 1,011 91 17쪽
20 항구로 (6) +26 21.03.22 1,153 101 13쪽
19 항구로 (5) +20 21.03.21 1,138 8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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