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건너며 1
“자네....... 아이싱 하는 것을 못 봤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한계 투구 수에 맞춰 훈련하던 대니의 눈에 어느 날 이상한 것 한 가지가 들어왔다. 완봉을 밥 먹듯 하는 순우가 마운드에서 내려와서는 다른 선수들처럼 얼음주머니로 어깨를 감지 않는 것이었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으로 따진다면 죤을 뛰어넘는 그가 질문을 쏟아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명상으로 아이싱을 대신하고 있어요.”
“명상?”
“예. 처음에는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배웠는데 공을 던지는 데에도 쓸모가 많더군요.”
“그래? 어떻게?”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1m쯤 떨어진 곳에 야구공 하나가 있다고 상상하며 시작한 집중력 훈련은 자기 최면을 통해 기분 좋고 따뜻한 기운을 느끼게 해주었고 신체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는 경지까지 발전했다.
“다리로 보낸 기운은 뜀박질로 뭉쳐진 허벅지와 장딴지의 근육을 풀어주더군요.”
“오~ 그럼 그걸 어깨로 보내면 더 좋겠군그래.”
“맞습니다. 공을 던질 때 부담이 가장 큰 곳이 어깨인데 기운을 보내면 어깨 주변으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뻐근하던 느낌과 뭉쳐진 근육이 천천히 풀어져요.”
“그걸 이리저리 힘든 곳에 보내면 풀어지지 않는 근육이 없겠네.”
“처음에는 감이 멀고 시간도 오래 걸렸는데 능숙해지니 풀리는 속도가 높아지고 나중에는 가만히 선 상태에서도 기운을 움직일 수 있더군요. 아무리 많이 뛰고 던져도 그 날의 피로는 그 날에 풉니다.”
“햐, 기가 막히는군. 그러니까 아이싱을 할 필요가 없지.”
너스레를 떨던 대니가 뭔가를 떠올리더니 음성을 낮추고는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런데 말이야, 마운드에 선 상태에서도 근육을 풀 수 있나?”
“있습니다. 제 몸을 보세요. 선배의 우람한 하드웨어가 부러워지는 체격이죠. 특히 제 어깨는 그리 튼튼하지 않거든요. 100개를 던지며 완투하는 것도 그 기운이 수시로 어깨 근육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어림도 없죠.”
“얼마나 풀 수 있나?”
“뭉쳐진 어깨와 팔 근육을 그 자리에서 다 풀 수는 없죠. 하지만 피칭 간격을 조절하면서 기운을 돌리면 구위의 저하 없이 스무 개 정도는 너끈히 더 던질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단 말이지?”
대답이 필요 없었다. K1의 명성을 뒷받침하는 성적으로 충분했다. 선발로 올라 웬만하면 끝까지 던지기에 컵스는 그의 등판일을 불펜 휴식일로 삼고 있지 않던가. 순우에게 스무 개라면 어깨 내구성이 떨어지는 자신도 열 개 정도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대니는 골똘한 상념에 잠겼고 선배의 속마음을 읽은 순우는 미소를 지었다.
“대니 선배. 명상은 끈기만 있다면 누구나 배울 수 있습니다.”
“죤과 론도 배웠나?”
“죤은 배워 수면제로 사용하고 있고 론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더군요.”
더블A 시절 녹스빌에서 한방을 쓰던 죤은 순우의 명상에 진한 호기심을 보이며 몇 번 따라 하더니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괴롭혀온 불면증에 특효약이라며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뛸 듯이 기뻐하는 천진난만한 친구의 모습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귀한 명상을 취침 보조제로 쓰다니, 춘천의 할아버지가 들으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했다. 정신력 하나는 순우를 가볍게 뛰어넘는 론에게 명상은 그다지 큰 매력이 되지 않았다. 같은 동양인이라 그럴까, 대니는 대충 듣고 감을 잡았다.
“자네가 느꼈다는 그 기운 말이야. 그거 우리 중국에서는 기(氣)라고 표현하지. 기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다니, 대단해. 가르쳐 주면 열심히 배워 볼게.”
시간이 흘러 빅리그에 데뷔하고 컵스의 뒷문을 책임지며 블론을 모르는 절정의 클로저로 명성을 날려 양대 리그 세이브 지존 보좌에 등극한 대니에게 아무도 모르는 목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마운드에서 어깨 풀기’였다. 아무리 9회에 올라 승리를 지켜내는 마무리라 해도 25구 한계는 공을 든 투수에게 자존심 문제였다. 어쩌다 한 번이라지만, 질 수 없는 경기에서 동점 상황의 9회에 올라 실점 없이 막아내고 연장전에 들어가도 대니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아무도 그에게 두 이닝을 기대하지 않았다. 한 이닝을 확실히 책임지고 기립박수를 받으며 내려가는 클로저에게도 가슴을 콕콕 찌르는 콤플렉스는 존재했다.
끈기만 있다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순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끈기가 엄청난 인내력을 의미했지만, 끼니는 걸러도 명상과 자기 최면 훈련은 쉬는 법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3년이 흘렀다.
“아, 스윙! 15회 마지막 타자 우찌무라, 풀 카운트에서 크게 휘둘러봤지만 결국 삼진으로 물러나며 흥미진진했던 K1 이벤트의 막이 내렸습니다. 구정한 위원, 어떻게 보셨나요?”
“우찌무라가 그냥 끝낼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파울을 만들며 투수를 물고 늘어졌죠. 한가지 이상한 점은 대니가 자신의 성명 절기라고 할 수 있는 체인지업과 커터를 아끼고 투구 폼이나 구종이 비교적 많이 노출되는 슬라이더와 속구로 상대했다는 건데요. 슬라이더는 당겨치고 포심 패스트볼은 밀어치며 타자는 이미 한계 투구 수를 넘은 대니의 약점을 계속 파고들었습니다.”
“오늘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계 수를 훌쩍 넘겨 34개를 던진 대니의 공은 어떠했나요?”
“저를 포함하여 모두 25개를 그의 한계 투구 수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대니는 일본 마운드에서 그게 잘못된 것임을 만방에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체인지업과 커터로 쉽게 잡을 수 있는 타자를 굳이 슬라이더와 포심으로 잡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하고요.”
“무슨 뜻이죠?”
“슬로 모션을 보세요. 믿기 어렵지만, 초반 구위보다 25구 이후의 구위가 더 뛰어납니다. 속도는 말할 것도 없고 회전수나 볼 끝의 매서움도 후반의 공이 좋거든요. 어깨 근육의 일부가 겹친 부상으로 영구 손상되어 길게 던질 수 없다는 그가 메이저리그 끝판 왕좌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더니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군요. 대니 웡! 대단해요. 존경스럽습니다.”
심야에 출발한 도쿄-시카고 항공편 일등석은 조용했다. 좌석은 비싼 만큼 넓고 아늑했으며 창으로 유입되는 은은한 비행 소음도 수면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담당 승무원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뉴스와 석간신문을 도배한 주인공들을 승객으로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16석으로 구성된 일등석에는 10명이 앉아 있었다. 손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벤트 주최 측의 배려이자 이벤트 계약의 일부였다. 사무장급 책임 승무원이 커튼 뒤에 서서 동료들과 속삭였다.
“맨 앞줄에 앉은 동양인 승객이 바로 K1이야. 들었지? 오늘 경기 소식 말이야.”
“그럼요. 즐겨 보던 드라마까지 중단하고 그 재미없는 경기만 보여준 덕분에 야구를 모르는 저까지 투수들 이름을 외울 정도라니까요. 우리 일본이 처참하게 깨졌다면서요?”
“응. 그렇게 퍼펙트로 지기도 어렵다던데 어떻게 이럴 수가....... 당분간 일본 손님 앞에서 야구 얘기는 꺼내지 말어. 다들 알았지?”
“잘 알고 있다니까요. 가만 보자, K1의 왼쪽은 부인이고 우측의 두 금발은 죤과 론이죠?”
“맞아. 그 뒷줄에 나란히 앉은 투수는 대니와 티모시야.”
“그 옆의 둘은 모르겠는데요.”
“에이전트를 맡은 모리스 사장 그리고 기자 대표로 따라붙은 구정한이래.”
“맨 뒤의 두 노신사는요?”
“한국의 야구대학 총장과 이사라더군.”
15이닝 내내 마스크를 쓴 죤은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더위를 먹어서가 아니라 별난 네 투수를 리드하느라 뇌가 타들어 갔기 때문이다. 특히, 변화구란 변화구는 모조리 던지게 해달라는 티모시의 요구에 맞추느라 오른 손가락 다섯 개를 온갖 모양으로 펴고 접는 것으로도 모자라 손바닥까지 동원하여 이리저리 뒤집으면서 혹시라도 사인이 엇갈릴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잘하면 투수 덕, 못하면 포수 탓’이 기본 철학으로 자리 잡은 별난 집에 얹혀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뒷마당 투수 모두 안타를 맞지 않고 일본을 뜰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무서운 노인들의 지팡이질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고 옆의 동갑내기 절친이 반응을 보였다.
“죤, 오늘 고생 많았어.”
“괜찮다, 친구야.”
단 두 마디였지만 그의 기차 화통급 목소리에 잠잠하던 일등석이 진동했고 잠에 빠져들던 나머지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눈을 떴다.
“좀 작게 얘기하라고. 비행기가 벼락 맞은 줄 알았네.”
“그러게 말이야. 비행기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여긴 경찰 없나?”
“오늘도 그 넓은 구장에 저 친구 목소리밖에 안 들리더군.”
“방망이 대신 목소리로 배팅을 하면 분명 홈런을 칠 텐데.”
눕혔던 좌석을 올리며 다들 한마디씩 하자 죤의 입에서 정말로 무시무시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 다들 왜 이래? 좋아, 오늘 밤새워 얘기 좀 해볼까? 1회부터 15까지 한바탕 해설 들려줘?”
협박은 즉각 효력을 나타냈다. 죤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절정의 기량을 보이는 종목이 ‘볼륨의 저하 없이 쉬지 않고 말하기’였기 때문이다. 그 넓은 태평양 상공을 그 큰 목소리를 들으며 건넌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던 동료들은 눈길을 피하며 딴전을 피웠다. 대니와 티모시는 콜 버튼을 눌러 와인을 주문했고 모리스는 영화를 골랐으며 구정한은 신문을 폈다. 완벽한 백기 투항이었다. 그제야 만족한 승자는 친구와의 대화를 계속했다.
“참, 축하해.”
“뭘?”
“6개월째라며?”
순간 점잖던 일등석은 다시 시끌벅적대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말?”
“대학 강의하고 한국 프로무대에서 뛰느라 정신 없었을 텐데, 언제 그런.......”
“오, 대단해 순우. 그래도 할 건 다 하네.”
“축하해요, 지현 씨. 입덧은 다 끝났나요?”
순우 옆 지현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아들이래 딸이래?”
“아들 같다더군.”
“그래? 그럼....... 이봐, 친구. 우리.......”
잠시 머뭇거리던 죤이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꺼낸 한마디에 일행 모두는 뒤집어졌다.
“사돈 맺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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