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기하겠소?
“빨리 갑시다, 고 감독. 한시가 급해요.”
“예? 지금요? 이 늦은 시간에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어디긴 어디겠소, 춘천이지.”
맑고 푸른 주말 3연전을 아쉬움이나 변명의 여지 없이 스윕으로 패한 KT 고동훈 감독은 일요일 3차전 경기가 끝나자마자 쌀쌀맞은 말투로 야반도주하던 빚쟁이 멱살 잡은 채권자처럼 자신의 팔을 끌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임종탁 사장을 보며 기가 막혔고 목적지를 확인하고는 황당했다.
“사장님, 이것 좀 놓고 진정하세요. 춘천은 내일 저 혼자 가기로 했잖습니까?”
이인석 총장이 추천하고 자신이 한마디로 퇴짜 놓은 그 둘을 다시 받으러 가기로 한 건 분명 자신이었고 경기가 없는 다음날로 잡지 않았던가. 바로 오늘 오전에 나눈 얘기였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정하라고? 이봐요, 감독. 받지 않겠다고 했던 그 둘 말이오. 투수는 김지철이고 타자는 박기홍 맞죠?”
“어, 어떻게 그 아이들 이름까지 알고 있습니까?”
“변화구에 능하다는 김지철은 원주 출신이고 동해의 박기홍은 5연속 홈런을 때린 아이가 맞죠?”
“예, 아마 그럴 겁니다만.......”
“아, 이런....... 이를 어쩌나. 가면서 설명할 테니 운전이나 해요. 과속 딱지 걱정 말고 있는 힘껏 밟으시오.”
“.......”
평소의 점잖던 사장이 아니었다. 고속도로에서도 90 이상을 넘지 않고 목적지까지 1차선에 들어서는 법이 없는 임 사장이 있는 힘껏 밟으라니!
“빨리, 좀 더 빨리 갑시다. 왜 이렇게 느려요?”
수원을 벗어난 차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북상하다가 춘천고속도로에 진입하자 한결 조용해진 도로 사정을 본 사장의 독촉은 더욱 심해졌다. 밤길에 이미 속도계는 130을 넘었는데 성화는 멈추지 않았다.
“사장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냐고? 오늘 오후 야구 스페셜 방송 봤소?”
꼴찌 팀 감독이 경기 포기하고 TV 앞에 앉아야 하냐고 따지려다 간신히 참은 고동훈 감독의 귓가에 다가온 말은 놀라웠다.
“이글스의 그 두 강원도 고졸 신인을 다룬 특집 방송이었소. 둘과 함께 강원도 리그에서 뛴 동료들이 모여 있는 강원 야구대학에서 여러 인터뷰가 이뤄졌고......."
정광국과 조원석에 초점을 맞춘 인터뷰에서 강원도 야구팬이라면 모를 수 없다는 ‘투수 4걸, 타자 3걸’이 거명되었고 고동훈 감독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김지철과 박기홍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김지철은 2차전 데뷔전을 완봉으로 장식하여 넥센을 졸도시킨 조원석과 동급이라 했고 8타수 5안타의 주인공 정광국은 동해의 박기홍이 포함된 타자 3걸에도 들지 못했다고 했다.
“박기홍이란 아이가 5연속 홈런에 타율, 출루율, 장타율, 홈런, 타점, 도루 톱을 도맡았다는 말은 못 들었소?”
“.......”
“그럼 지철이란 아이가 연초 클리닉 때 그 유명한 시카고 컵스의 티모시에게 변화구 특별 수업을 받았다는 말도 못 들었겠군.”
“.......”
오후 특집 방송을 보지 못한 고 감독으로서는 당연히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화 이글스가 이번에 스윕했소. 1차전은 K1의 퍼펙트로, 2차전은 조원석의 데뷔전 완봉으로.......”
“그건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끝까지 들어 보시오! 그리고 조금 전 3차전에는.......”
넥센의 마무리 김세현의 3구를 받아친 광국의 타구는 경쾌한 타구음과 함께 꼬리를 불태우며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구장을 가로질러 힘차게 날았고 공의 궤적을 쫓아 뒷걸음치던 우익수는 이내 멈춰섰다. 관중 모두가 벌떡 일어나 입을 벌린 채 낙하지점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고 공은 가볍게 우측 담장을 넘겼다.
“아!”
“아~”
“아.......”
발음은 같되 의미가 한참 다른 탄성이 구장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세 명의 주자는 힘차게 홈을 밟았다. 하지만 타자는 마치 아슬아슬한 내야 안타라도 친 듯 우직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날쌘 표범처럼 1루까지 전력 질주로 내달렸다. 곧 터져 나온 관중의 함성을 듣고서야 상황을 판단했는지 수줍은 색시처럼 차일목 바로 뒤에 붙어 들어왔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개선장군을 맞이하러 나온 동료들의 하이파이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만루 홈런!
이틀 전 전광판 윗부분을 맞힌 1호 싱글 홈런이 장타력을 갖춘 포수 인증포였다면 비거리 130m의 2호 만루포는 주전 굳히기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스코어 5-2가 순식간에 5-6이 되었고 구장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느긋하게 도망가며 최소한의 체면은 살렸다고 여유를 부리던 넥센은 광국의 방망이질 한번으로 숨 막히는 추격자가 되었고 더벅머리 촌놈이 순식간에 엎어버린 상황으로 얼떨결에 리드를 잡은 이글스는 어떻게든 승리를 지켜야 하기에 9회 초 좌완 마무리 정우람을 올렸다. 앞선 두 경기에서 퍼펙트와 완봉으로 마운드에 오를 일이 없어 심심했던 그가 이름만큼이나 우람한 어깨를 씩씩하게 흔들거리며 올라왔다.
“K1이 만든 만루를 그 고졸 포수가 몽땅 불러들였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오.”
정우람.
2014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이듬해 WBSC 프리미어 12 국가대표로 국위선양에 앞장서다가 무려 84억을 받고 이글스 유니폼을 입은 귀하신 몸이다. 2016시즌 마무리 투수 중 최다 이닝이터 기록을 세우고 불펜 투수 중에서는 WAR 기준 1위에 오르면서 최하위 팀 마무리라면 한 번쯤은 필연적으로 듣는 ‘먹튀’ 독설을 피해갈 만한 실력을 보여줬다.
평균 구속 140이 안되어도 묵직한 패스트볼과 정확한 로케이션으로 이를 만회하며 2할이 채 안 되는 정상급 피안타율을 자랑하는 클로저이기도 하다. 수직 무브먼트가 뛰어난 패스트볼에 우타자 바깥쪽으로 휘며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승부하는 수 싸움에 강한 데다 속구와 변화구 구사 동작이 거의 같아 타자들이 잘 속는다. 34세라는 나이에도 파워가 여전하고 구위가 뛰어나 탈삼진율이 높은 리그 정상급 기량을 갖추었기에 이기는 경기가 많지 않은 팀의 마무리로 3년 연속 16세이브를 올린 것이 당연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런 그가 넥센의 9번 타자 임병욱을 뜬공으로 처리할 때까지 우람한 어깨를 돌리며 자신감을 표출하더니 이어진 서건창, 고종욱에 3번 타자 김하성까지 줄줄이 볼넷으로 내보냈다. 상위 타선의 선구안은 보통이 아니었다. 만루홈런 한방으로 경기를 뒤집은 이글스가 곧바로 만루의 위기를 맞자 관중석에서 ‘과연 이글스’라는 자조 섞인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사 만루에서 4번 타자이자 이날 멀티 안타를 때린 넥센의 윤석민이 방망이를 흔들거리며 오르자 정우람을 이어 누가 나타난 줄 아시오?”
이글스의 ‘우리’ 그룹에 끼지 못한 외인 3인방 중 남은 하나인 조원석이 올랐다. 밀어내기로 경기를 내줄 것이 뻔한 정우람을 내린 이글스의 마지막 옵션이었다. 그가 ‘선생님과 친구가 올랐는데 나 혼자 앉아있을 수 없다’며 공을 들고 감독 앞에 시위하듯 서자 감독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떻게 바로 전날 95개를 던진 투수를 또 올릴 수 있냐며 혹사를 거론하는 팬들은 아무도 없었다. 완봉이란 단어가 충청도에서도 꿋꿋하게 존재함을 보여준 그를 향한 뜨거운 환호성만 구장을 가득 울렸을 뿐이다.
그리고 전날 이름도 모르는 강원도 고졸 촌놈에게 삼진과 땅볼로 수모를 충만히 겪은 윤석민은 바로 그 투수를 다시 만나 삼구 삼진이라는 더욱 낯뜨거운 기록을 남기며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5번 김민성은 조금 나았다. 사구 삼진이었으니까. 그렇게 경기가 끝났다.
“특집 방송 인터뷰에 응한 친구들이 다들 정광국보다 박기홍이 타격에서는 한 수 위라고 합디다. 9타수 6안타에 만루포 포함하여 2홈런을 기록한 그보다 낫다고 말입니다.”
“.......”
“김지철은 조원석과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고 하고.”
“.......”
“투수 4걸, 타자 3걸 중에 조원석 박기홍 김지철을 제외한 나머지는 야구대학에 진학했소.”
“.......”
“그중 둘이 우리 품으로 살포시 안겨 들어왔는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내다 버린 거지.”
“.......”
냉소가 풀풀 날리는 사장의 설명에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고 감독 또한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둘을 소개하며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총장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하지 않았던가. 강원도 고졸에게 무슨 기대가 있기에 실망을 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김지철은 데뷔전 완봉으로 영웅이 된 조원석과 동급이고 박기홍의 타력은 괴력의 정광국을 능가한다니. 이미 조원석과 정광국만으로도 KBO는 더 놀랄 힘이 없는데 말이다.
“문제는 말이오.......”
미사리를 지날 때쯤 장황하게 상황 설명을 마친 사장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오늘 특집 방송을 본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거요.”
“그러면?”
“가깝게는 서울에서, 멀게는 부산과 광주에서 이 둘을 잡아채러 곧 춘천으로 몰려들 거요.”
경기가 끝나자마자 냄새나는 유니폼 갈아입을 여유도 주지 않고 자신을 들들 볶아 운전대를 잡게 하여 악셀을 바닥까지 밟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시간에 이렇게 빨리 달려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 오늘 과속 카메라에 서너 번은 찍혔을 겁니다.”
“고 감독이 아직 상황 판단을 못 하는 모양인데, 나와 내기하겠소?”
“내기요?”
“그렇소. 오늘 밤 그 둘을 데려가기 위해 춘천을 찾는 구단이 우리 말고도 최소한 둘은 된다는 것에 말이요.”
“에이, 사장님. 아무래도 그건 좀.......”
마곡리와 군자리를 지나 동산면 나들목을 빠져나와 춘천 시내를 향하는 국도에 접어들었으나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의 고운 목소리만 고요한 차 안을 울렸다. 감독은 이 늦은 밤에 총장을 만나 석고대죄 드릴 생각에 속이 탔고 사장은 다른 구단이 머리를 들이밀기 전에 둘을 낚아챌 생각에 차만 타면 찾아오는 편두통 마저 잊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반이 조금 넘었다. 수원에서 춘천까지 한 시간 약간 더 걸렸다. 타이어에 연기 날 만큼 무식하게 빨리 왔다. 이 정도면 감독 그만두고 레이서로 나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드는 순간 저 멀리 호수가 눈에 들어왔고 그 옆으로 훤히 불 켜진 야구대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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