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잘 지켜봅시다
“그래서 그냥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런 중요한 일은 나에게 미리 귀띔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오?”
상쾌한 토요일 이른 오전 고동훈 감독과 임종탁 사장이 마주 앉은 KT 구단 사장실 분위기는 그리 상쾌하지 않았다. 전날 경기에서 큰 점수 차로 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며칠 전 이인석 총장이 직접 찾아와 K1의 추천을 받은 두 명의 고졸 신인 영입을 제안했는데 고 감독이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을 두고 사장의 심기가 불편했다.
“물론 타당한 이유가 있었겠죠?”
정색하며 말을 이어간 사장은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각오하라는 눈빛을 쏘아 댔다.
“사장님.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는 1승이 아쉬운 형편입니다. 하루하루를 승률에 목매고 사는 저도 힘들고요. 이런 상황에서 2군도 거치지 않은 고졸 신인을 어떻게 주전으로 올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검증도 안 된 강원도 산골 아이들을 말입니다. 지난번 초고교급이니 뭐니 하며 이름깨나 날리던 고졸 아이들을 드래프트에서 큰돈 들여 붙잡았는데 지금 전부 2군에서 죽을 쑤고 있습니다.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이 이 모양인데 강원도 촌놈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타당한 이유였다. 하지만 감독의 설명에 사장의 눈은 더욱 가늘어졌다.
“그럼 바로 어젯밤 K1의 공을 받은 그 고졸 포수는 어떻게 설명할 거요? 그 아이도 감독이 말하는 강원도 촌놈 아니오?”
“그건.......”
지난 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첫 퍼펙트게임이 나왔고 그 중심에는 가공할 구위를 보인 투수와 그 투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 있게 리드한 포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수년째 우승 후보를 놓치지 않던 넥센은 삼진 18개를 헌납하며 27명의 타자가 한결같이 고개를 숙였다. 창단 이래 처음으로 구장 주변은 밤새도록 축제 분위기였고 감격을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시민들을 위해 구단은 시청 앞에서 늦은 밤 불꽃놀이 이벤트까지 열었다. 그야말로 불타는 금요일이었다. 하지만 임 사장의 포인트는 퍼펙트를 달성한 투수도, 불꽃놀이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 강원도 산골 아이가 주전 포수도 흘린다는 K1의 공을, 그것도 그 무시무시한 너클볼까지 척척 받아낸 거요?”
“그거야 뭐 그냥 포수로서.......”
“그러면 데뷔전 4타수 3안타는 뭐요?”
“그 아이만 잘한 것은 아닙니다. 어제 대화가 모처럼 신이 나서 선발 전원 안타를 기록했.......”
“다 잘했는데 어째서 그 아이만 홈런을 때려냈소?”
“그건.......”
고동훈 감독의 설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데뷔전에서 홈런 포함 4타수 3안타. 고졸 신인 주제에 잘해도 너무 잘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평가절하할 타당한 근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불붙기 시작한 사장의 점잖은 질타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가 우리 팀에 추천한 두 명 말이오. 하나는 변화구에 능한 투수고 다른 하나는 5연속 홈런을 기록했다면서요?”
“강원도 리그에서나 통할 기록입니다.”
“그래요? 좋소. 그럼 K1이 대화에 데리고 들어간 또 다른 아이가 있지 않소. 조 원석이라 하던데.”
“예.”
“그가 오늘 2차전 선발로 예고된 것은 들었소?”
K1의 퍼펙트게임만큼이나 뜨거운 화제로 떠오른 뉴스를 같은 리그의 감독이 모를 리가 없었다. 광국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은 팬들은 또 다른 고졸 신인의 선발 예고에 진한 호기심을 나타냈지만, 뉴스를 본 대부분 감독과 코치진은 무모한 결정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장의 시각은 달랐다.
“그건 K1이 감독에게 특별히 부탁했다고 해서.......”
“대화 감독이 설마 오늘 2차전에 밴헤켄이 오를 것을 모르지는 않았겠죠?”
“뭐, 그야 그렇겠죠.”
“고 감독. 그러면 감독도 누가 부탁한다고 검증도 안 된 강원도 고졸 신인을, 그것도 선발로, 다른 투수도 아닌 밴헤켄의 상대로 올릴 거요?”
사장의 음성은 점점 작아졌으나 힘이 넘쳤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감독의 변명은 갈수록 힘을 잃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럼 대화 감독이 왜 말도 안 되는 짓을 했겠소?”
“.......”
“좋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오늘 저녁 잘 지켜봅시다.”
나란히 바닥을 기어 동병상련을 느끼는 KT 사장실에 무거운 얘기가 오고 갈 때 대화 이글스의 구단 작전실에는 전날의 감격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평소보다 일찍 모인 코치진들의 유쾌한 음성이 여기저기 들려왔다.
“난 어젯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세상에, 함께 연습할 때도 그런 공은 못 봤는데. 마운드에 오르니 사람이 확 바뀌더군.”
“연습 피칭 마치고 첫 공을 던지기 직전 수비진을 돌아보며 선량하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고개를 돌려 타자를 바라보던 눈빛을 봤나? 먹이를 앞에 둔 맹수더군. 그 눈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
“어떻게 9회까지 포심 속도나 회전이 줄어들지 않을까? 제구력도 전혀 잃지 않고 말이야.”
“난 너클볼이 가장 신기하더군. 말 그대로 나비처럼 방향을 바꾸면서 너풀대며 들어오는데, 정말 환상적이었어.”
“그런 공을 다 받아낸 신참도 대단하지. 곰처럼 떡 버티고 앉은 폼이 아주 노련해 보이더군. 데뷔전에서 홈런까지 때리고. 나중에는 K1보다 그 아이를 응원하는 팬들이 더 많더라고.”
“그렇게 따진다면 오늘 선발로 오를 원석에 대한 관심이 더 클 걸.”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던 코치들의 포커스가 광국에 이어 원석으로 모이자 한쪽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강철한 감독이 평생 잊지 못할 전날 경기를 떠올렸다. 지난해 13패 3승으로 이겨 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이날 아직 1루를 밟지 못하고 K1에 처참하게 눌리고 있는 넥센을 화풀이하듯 매회 두들기던 대화의 8회 공격이 한참 신나게 이어지던 때였다.
“저, 감독님. K1의 부탁입니다. 내일 원석이가 공을 던질 기회를 주시면 좋겠다면서.......”
“원석? 조 원석? 신참 말이요?”
덕아웃에 있던 투수 코치가 벤치로 와서 나지막히 속삭였다. 감독은 K1이 아무리 빅리그 최정상에 올랐어도 오설리반이 완봉하고 그가 한두 점 잃게 되면 KBO 데뷔전에서 쓴맛을 볼 수도 있겠다며 져도 좋으니 완투로 가주면 다행이라는 자신의 예상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 그런 망발을 다른 누군가에게 꺼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직 한 회가 남았지만 지금 누가 봐도 퍼펙트 분위기였다. 말로만 듣던 퍼펙트, 이론으로만 존재했을 뿐 아직 KBO 36년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대역사가 오늘 이곳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자기 팀 선수임에도 감독과 동료들이 공포감을 느끼는 그가 깍두기로 끼어 들어온 시골뜨기 고졸 투수를 선발로 제안했다. 압승을 자신하고 여유가 생긴 감독의 머리가 재빨리 돌았다.
‘K1의 공은 연습 때와는 다르다. 실전 마운드에 올라야 자기 공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런 그가 태백산 골짜기에서 공으로 토끼 사냥이나 하던 아이를 아무 생각 없이 데려올 리는 없을 테고. 광국이란 아이만 해도 오늘 처음 1군에 올라 포수 잘 본 거로도 모자라 무려 3안타를 때렸다. 그중 하나는 홈런. 전광판 윗부분을 맞혔으니.......’
이글스 파크의 중앙 펜스는 122미터. 장애물 없이 날아갔다면 장외 홈런이었다. 이미 여러 번 퍼펙트를 달성한 K1보다 데뷔전 홈런을 터뜨린 새내기 포수가 더 많은 환호를 받은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럼 원석이라는 촌뜨기도 한 가닥 한다는 얘긴가? 비장의 무기가 있나? 던지는 거 보니 제구 하나 빼면 별거 없던데. 깍두기든 파김치든 어차피 받았으니 한 번은 써먹어 봐야겠지.’
하지만 이어진 코치의 말에 감독은 다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넥센은 로테이션대로 한다면 내일 밴헤켄을 올릴 겁니다. 오늘 이런 상황이니 로테이션대로 안 해도 그가 던지겠죠.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고 퍼펙트 분풀이를 하려고 총력전으로 나올 게 뻔합니다.”
‘앉아서 삼천리 서서 구만리’라고 상대 팀의 전략을 훤히 꿰뚫고 서너 수를 내다보는 반백의 코치가 신중하게 꺼낸 말에 감독은 흠칫했다. 분풀이나 총력전 보다 감독의 마음을 더 강하게 짓누른 단어가 있었다.
밴헤켄!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