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과 아우
“예, 야구대학 이인석입니다.”
“여보세요....... 총장님, 저 고동훈입니다. KT 고동훈요.”
대학 정문 근처에 차를 세운 고 감독은 잠시 망설였다. 먼 길을 쏜살같이 달려오긴 왔는데 막상 와 보니 난감했다. 통화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인 데다 대화할 내용을 떠올리니 숨이 막혔다. 하지만 옆의 임 사장이 길게 째진 눈초리로 날카롭게 쏘아보며 옆구리를 찌르자 더 물러날 데가 없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번호를 눌렀다.
“아니, 고 감독. 이 시간에 웬일인가?”
“그게, 그러니까, 총장님, 만나 뵙고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언제 만나자는 건가?”
“실은, 지금 대학 앞에 와 있습니다.”
“대학? 어느 대학? 우리 대학?”
“....... 예.......”
지성이면 감천일까, 한밤중에 무작정 달려온 강원 야구대학이었는데 다행히 총장은 학교 안에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여 직진하니 야간 조명등이 켜진 구장이 보였다. 일요일 밤 11시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적지 않은 청년들이 팀을 짜 시합을 벌이고 있었다. 총장은 구장 옆 자판기 근처에서 일행을 맞이했다.
“이 늦은 시간에도 운동을 합니까?”
“휴일엔 보통 이렇게 하네. 9시까지는 TV로 경기를 지켜본 다음 다들 이곳에 모이지. 젊은 아이들이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한가 봐. 그건 그렇고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인가?”
“그게요, 총장님. 실은.......”
<삐링 삐리링>
그 순간 총장의 전화가 울렸다.
“아, 최 감독. 반갑네. 나야 뭐 늘 잘 지내지. 오늘 경기 잘 봤어. 요즘 아주 잘하고 있더구먼. 자네가 맡은 이후 SK가 확 달라졌어.”
고 감독 옆에 꾸어다 놓은 빗자루처럼 뻘쭘하게 서 있던 임 사장의 눈매가 순간 송골매처럼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이건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오후의 그 특집방송? 별로 대단한 것도 없는데 괜히 야단을 떨더구먼. 뭐? 김지철과 박기홍이 여기 있냐고? 그건 왜? 어허, 이 사람,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지금 몇 시인데 온다는 거야?”
통화를 마친 총장의 눈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 감독이 들어왔다. 하지만 눈치 없는 총장은 한술 더 떴다.
“아니, 다들 오늘 왜 이러지? 한 시간 전에는 광주에서, 30분 전에는 대구에서 전화하더니 이젠 인천에서까지.”
광주, 대구, 인천! 내기하자며 큰소리치던 임 사장이 예언한 그 전쟁이 정말 시작된 것이다. 경기를 마친 각 팀의 감독들이 특집 방송을 보고 놀란 구단주나 사장의 독촉에 못 이겨 ‘과속 딱지 걱정 말고 있는 힘껏 밟으라’는 잔소리를 들어가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물을 데려오라는 특명을 받아 타이어에 연기를 뿜어대면서 눈부신 속도로 총장을 찾아오는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이런!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판단한 고 감독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총장의 두 손을 잡는가 싶더니 풀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는 그의 두 다리를 감싸 안았다. 주도면밀한 임 사장은 어떤 구단이 홀연히 나타나 총장을 납치하고는 두 보물을 보쌈하듯 채어 갈까 싶어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주위를 살폈다. 누가 봐도 총장의 보디가드였다.
“총장님, 아니 선배님! 제가, 무식한 제가 선배님께서 저희 구단에 베푸신 고귀한 호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고 신생 구단, 꼴찌 구단 감독 한번 살려 주십시오.”
“아니 자네 갑자기 왜 이러나?”
“김지철, 박기홍! 이 둘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지금 당장 주세요.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지금 곧바로 차에 태워 수원으로 가겠습니다. 절대로 섭섭지 않게 대우하겠습니다. 믿어 주십.......”
<삐링 삐리링>
“여보세요. 오, 김 감독. 오랜만이요. 요즘 두산이 너무 잘 나가던데, 아주 보기 좋아요.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어, 그 방송? 그거 그냥 철없는 애들이 얘기한 거요. 정말이라니까. 박기홍과 김지철 말이요? 그 아이들은 왜? 둘은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니까 그러네. 지금 온다고? 이 시간에? 뭐? 이미 오고 있다고? 허, 이런.......”
헉! 두산! 두산이라니! 분명 두산이라 했다. 이미 출발했단다. 두산이라면 서울.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아닌가. 어디쯤 오고 있을까? 혹시 거의 다 온 건 아닐까? 무릎 꿇고 총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감독과 가드를 서던 사장이 동시에 어둠 속에 잠긴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아직은.
두산은 탈꼴찌를 지상목표로 하는 KT와 차원이 다른 팀이다. 수년째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고 있는 드림 팀이다. 부족함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원래 잘 나가는 팀일수록 욕심이 많은 법. 조원석급이라는 김지철과 정광국을 능가한다는 박기홍을 다른 팀에 빼앗기면 선두권 고수에 문제가 생긴다고 여기리라. 그래서 더 악착같이 쟁탈전에 끼어들 것이다.
“KT 갈래 두산 갈래?”
만약 둘을 불러 세워놓고 이렇게 물으며 선택권을 준다면 스카우트 전쟁은 끝이다. 잘 나가는 팀에 있어야 배울 것도 많다. 연봉을 두산의 더블로 준다 해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더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두산 김 감독과의 통화가 끝날 때쯤 보디가드 임 사장이 총장의 한쪽 팔을 잡고 늘어졌다. 얼핏 보면 야구대학 총장이 학교 안에서 2인조 강도를 만난 것으로 오해할 만한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총장님, 우리 KT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아니, 이제는 임 사장까지. 도대체 왜들 이러시오? 그리고 말이 났으니 한마디 합시다. 그때 없던 일로 하자고 했으면 그걸로 끝인 거지, 인제 와서 이 무슨 추태요?”
“선배님, 저 오늘 둘 데려가지 못하면 여기서 죽습니다. 이렇게 못났으니 꼴찌 하는 거 아닙니까, 선배님. 불쌍히 여겨 주세요. 옛날부터 저를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신 형님이시잖습니까, 흑흑흑.......”
아~ 실로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신파극이었다. 앞뒤로 둘러싸여 포위된 총장의 눈에 고 감독의 유니폼이 들어왔다. 며칠 세탁을 안 했는지 푹 젖은 땀 내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위로 까칠한 턱선이 보였다. 오랫동안 면도할 여유가 없는 티가 났다. 최하위 팀을 맡아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으리라.
볼에 흐르는 눈물을 보니 과거 함께 고생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둘이 누우면 몸 하나 돌리기 힘든 좁은 자취방에서 형제처럼 지내며 밥 깁슨과 드와이트 구든 그리고 그렉 매덕스를 꿈꾸던 그 시절을. 찌그러진 누런 양은 냄비에 라면 하나 끓여 둘이 나눠 먹으면서도 야무진 꿈을 버리지 않던 그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총장의 약점은 끝까지 모질지 못하다는 것. 물론 고 감독이 잘 알고 어려울 때 즐겨 애용하는 약점이기도 했다. 눈물 앞에 매정하게 돌아서는 자취방 형님을 이제껏 보지 못했다. 예상대로 총장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 참. 이 보게, 고 감독. 그 둘은 K1 권순우의 부탁을 받고 자네에게 갔던 걸세. 없던 거로 하기로 했다니까 알겠다면서 그 이후 아무런 말이 없었고.”
“아니, 형님. 그럼 혹시 다른 팀으로 가게 된 거 아닙니까? 그럼 전 여기서 혀 깨물고 죽을 겁니다.”
총장에서 선배로, 그리고 이내 형님으로 수직 격하된 이인석은 못된 룸메이트 아우 때문에 진땀을 빼기 시작했고 옆의 임 사장은 혀를 날름 내어놓고 어금니로 깨무는 시늉까지 하는 그의 뛰어난 연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보게, 그런 마음 약한 소리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전 어쩌란 말입니까?”
“이럴 거면 그때 왜 거절했는가?”
“아, 형님. 이런 절박하고 딱한 형편에 처한 동생에게 지금 와서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드디어 아우가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야구계에서는 큰소리치는 쪽이 이긴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에휴~ 둘이 어떻게 될 건지는 나도 몰라. 기홍이와 지철은 K1의 말만 듣는 아이들일세. 내가 어디로 가라고 해서 갈 애들이 아니란 말이지.”
“난 몰라요, 형님. 어떻게든 되도록 도와줘요.”
“지금 K1이 대전에서 원석과 광국을 데리고 이리로 오고 있네.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오늘 경기 끝나자마자 출발한다고 했으니 곧 올 걸세. 그를 만나 얘기해 보게.”
“그가 이 시간에 그런 일로 우리를 만나 줄까요?”
“으음....... 글쎄....... 시간을 보니 오늘은 아무래도 힘들겠지.”
“형님!”
“에구, 내 팔자야. 알겠네. 한번 힘써 볼 테니 좀 기다려 보게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힘써 보는 거로는 안 돼요. 형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셔.......”
<삐링 삐리링>
또 울렸다. 이번엔 부산이란다. 서울 경쟁자보다는 거리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둘의 속은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고 감독이 말도 안 되는 앙탈을 부려가며 총장을 움직였으나 그 둘은 선생님 말 외에는 듣지 않는다고 하니 앞이 캄캄했다. 게다가 전국의 모든 구단이 시시각각 이곳 춘천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이었다. 계엄령이라도 내려 춘천을 수호해야 할 판이다.
기다려 보라는 총장의 말만 믿고 있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두산의 김 감독이 나타날 것만 같아 안절부절못하던 임 사장이 이젠 몇 잔째인지도 모를 자판기 커피를 누르고 있었다. 그윽한 향이 나는 원두커피 외에는 손도 대지 않고 노란 커피 믹스를 야만인의 유산으로 보던 그의 타는 속을 달달하고 진한 다방 커피 향이 달래주고 있었다. 눈물의 신파극을 연출하며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가던 고 감독은 여전히 대낮처럼 환하게 조명등이 켜진 구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이봐요, 고 감독. 총장님이 왜 이리 늦을까요?”
“.......”
“전화 한 번 더 해봐야 하지 않겠소?”
“.......”
“고 감독! 뭘 그리 뚫어지게 보는 거요?”
사장의 고성에 고개를 돌린 감독은 마치 귀신을 본 듯 얼이 빠져 있었다.
“세상에....... 저기 저 대학생들 말입니다.......”
“그들이 왜요?”
어느덧 자체 청백전이 끝나고 대부분 기숙사로 돌아갔으나 열 명 정도의 적은 인원은 여전히 그라운드 여기저기에 흩어져 공을 던지거나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 지금....... 저는....... 도저히 제 눈을....... 믿을 수 없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요?”
임 사장이 영문을 몰라 되물을 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총장이 졸린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그 옆에 눈에 익은 청년이 서 있었다.
“대화 이글스의 권순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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