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이다 8
“우리 당과 인민은 권 동지 내외분의 원산 방문을 언제든지 환영합네다.”
지난 구정 원산 방문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기 직전 강원도 당 위원장과 원산 시장이 순우를 깍듯이 대하며 건넨 화려한 금박 자개함 안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증서가 들어있었다. 웬만한 일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옆의 할아버지도 깜짝 놀랐다.
원산 명예 시민증!
특별한 업적을 쌓은 외국인에게 국가가 선정하여 부여하는 것이 명예 시민증이다. 사정에 따라 돈 찍어내듯 남발할 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고 싶다고 주고 받고 싶다고 받는 만만한 증서가 아니다.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다. 타당한 선정 이유는 물론 국가의 법률로 규정된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하고 의회의 승인과 최고 지도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원산 명예시민 권순우, 설지현>
커다란 붉은 별과 함께 순우 내외의 이름이 적힌 증서의 뒷면에는 공화국 인민과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내용과 함께 출입국 허가나 비자가 필요 없다는 글귀가 보였다. 순우에게도 뜻밖이었지만 ‘조국을 배반하고 원수님의 품을 떠난 반역자’ 딱지가 붙었던 지현에게는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언제든지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자 당황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반색을 하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 아내와는 달리 순우는 불안했다. 아직 젊었어도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진리를 일찌감치 깨우쳤기 때문이랄까.
“저, 고맙습니다만 이런 것을 부탁한 적이 없.......”
“우리 공화국의 명예시민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네다.”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보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길가에 버릴 수도 없는 일. 받아서 손해 볼 건 없지 않겠냐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일단 받아들었다.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철없는 아내와 함께 춘천으로 돌아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시민증을 보여주자 모두가 놀랐다.
“전에 듣자 하니 평양과학기술대학교 총장이 평양 명예 시민증을 받고 자유롭게 들락거린다던데 원산은 처음이구먼.”
굳이 이 총장의 보충 설명 없이도 원산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옆에서 곰곰이 생각하던 양 이사가 입을 열었다.
“북한의 행정 체계를 고려하면 도지사나 시장이 자기 마음대로 이런 것을 만들어 줄 수는 없지.”
“그럼 어떻게.......”
“자네 작년 말 평양 인근 숲속에서 지도자를 만났다고 했지?”
지금도 꿈이 아닐까 헷갈리는 그 한밤중의 해괴한 경험을 어찌 잊을까? 그리고 갑자기 불려간 자리에서 야구공을 잡을 줄은 또 누가 알았을까? 그걸로 겨냥하여 박살 낸 물건들이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당시 옆에 있던 내각 체육상 김일국은 경악으로 벌려진 입을 닫지 못했다. 그 당시 벌어진 일은 할아버지 외에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양 이사가 정색을 하며 묻는데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예. 그때 넓은 홀 맞은편 벽에 붙은 커다란 장식장에 가지런히 놓인 여러 기념품을 맞추었죠.”
“어떤 거?”
“우선, 사진 두 장이 있었습니다. 좌측은 자금성, 우측은 크렘린 궁전이었고요.”
“그래서?”
“자금성은 포심으로 크렘린은 너클볼로.......”
신성한 야구공으로 그런 물건을 맞추었다는 말을 하기 머쓱한지 순우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머리를 긁었다. 구종까지 기억하되 그 사진이 갖는 의미는 모른다니, 이 총장과 양 이사는 기가 막혔다.
“포심과 너클볼로! 장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그래, 또 어떤 것이 있나?”
“도자기도.......”
“무슨 도자기?”
“중국의 시 주석이 보냈다는......."
“뭐라고?”
“이산가족 상봉을 걸고 던진 겁니다.”
“그럼 그것도 산산조각냈겠군.”
“예. 지도자도 정확한 로케이션에 감탄을 금치 못하더군요.”
속에 백 년 묵은 능구렁이가 서너 마리 들어있어 보이던 노련한 순우,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철이 없어 보였다.
‘누구는 던지고 누구는 박수 치고! 참으로 볼 만 했겠군. 그건 그렇고, 중국과 러시아에 거리를 두겠다는 건가? 두 나라의 도움 없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특히, 중국에 등을 돌리다니 그 젊은 지도자가 제정신인가?’
잠시 틈을 두고 생각에 빠져있던 양 이사가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물론 다른 건 건드리지 않았겠지?”
“.......”
“더 있군.”
“그건 별거 아니었습니다. 두 노인이 담배를 자욱이 피워대며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흑백 사진을 맞춰보라고 해서.......”
“두 노인? 설마.......”
덩샤오핑-김일성 회담 기념사진은 결코 별 볼 일 없는 물건이 아니었다. 워낙 유명하여 북한 사람이 아니라 해도 아는 이들이 많았다. 북한으로서는 혈맹 관계를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반드시 중국의 양보를 받아내야 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써 온 국보 중의 국보다. 미사일을 펑펑 쏴대고 아무 때나 기분 내킬 때 지하 핵실험을 하면서도 중국이 끝까지 편들고 감싸줄 거로 믿는 이유가 이 사진 한 장에 담겨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엿듣는 귀가 없는지 경계의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던 이 총장이 톤을 최대한 낮춰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공으로 누굴 맞혔나?”
“에이, 저도 눈치가 있는데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눈치가 차고 넘쳐서 자금성과 크렘린궁을 허물고 시 주석이 보낸 도자기를 박살 냈냐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양 이사는 이어진 말에 결국 벌떡 일어났다.
“두 노인 가운데 있는 재떨이를 맞췄습니다.”
“.......”
“그걸 맞히면 저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겠다고 하길래.......”
“.......”
“무슨 구종으로 맞췄는지 궁금하시죠? 포크볼을 던졌는데 정확히 재떨이 중간으로 날아갔습니다.”
“....... 그럼, 그 사진은 어떻게 되었나?”
“부서진 액자를 보니 아마 사진도 못쓰게 되었을 겁니다.”
그 사진을 발기발기 찢어 놓고 구종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순우는 듣는 이들의 황당한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못쓰게 된 사진! 북한이 국보를 잃었다! 극비 중의 극비다. 중국이 알면 큰일 날 정보요 미국 측에 엄청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최고급 정보다. 더 놀랄 힘이 없는 건지, 양 이사의 질문은 맥이 빠져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포크볼을 던졌군. 그래서 뭘 요구했나?”
순우는 리틀야구 교류와 DMZ 평화 야구장 건립을 요구했고 지도자는 약속을 지켰다. 도자기를 깨부순 대가로 얻은 이산가족 상봉 또한 이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 팀 감독들이 올 때마다 먼저 자네를 찾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겠군.”
급조된 리틀야구단을 이끌고 춘천을 찾은 북한 측 감독과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순우를 만나는 것을 첫 번째 공식 업무로 여겼다. 만나서 하는 말도 별거 없었고 내용은 지겹도록 같았다.
“경외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권 동지와의 인연과 우정을 귀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었습네다.”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공화국을 다시 한번 방문해 주시면 당과 인민은 열렬히 환영 하갔습네다.”
<그르릉>
랜딩 기어 내리는 소리와 함께 회상에서 깨어난 순우는 여전히 그날 밤의 그를 생각했다.
액자와 함께 산산이 부서진 국보 잔해를 묵묵히 지켜보던 지도자! 마음먹은 대로 공을 날리는 순우가 부럽다며 태어나 한 번도 자기 마음대로 해본 것이 없다면서 울먹이던 그 사람. 이번 기회에 자신이 주체가 되어 전부 바꿔보고 싶다며 절규하던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조금 전 이 총장과 양 이사를 깜짝 놀라게 했던 원산 경제특구와 자유항 개방 소식은 입에 발린 소리로 자신을 꼭두각시 취급한 간부들을 싹 갈아버리고 어릴 때부터 꿈꾸던 거 실컷 해보고 싶다던 그의 첫 작품이리라.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여전히 궁금했다.
‘그날 밤 공 몇 번 던져 이것저것 깨뜨린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나와 어떻게 소중한 인연과 우정을 맺었다는 걸까? 원산 명예 시민증까지 선사한 그의 속셈은 무엇일까?’
평양 회상은 거기까지였다. 창밖으로 불 켜진 시카고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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