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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님의 서재입니다.

서울에는 신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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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작품등록일 :
2024.04.1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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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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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011

DUMMY

011.


수락산 아래, 그러니까 옛적에는 양주목에 속했던 상계동에는 작은 공원이 있다.


그 역사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공원이다.

이 주변에서 평생을 살은 노인이 증언하길, 자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공원이 여기에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비록 크다고 할 수는 없는 공원이었지만, 봄이면 개나리가 예쁘게 피는 이곳은 인근 주민들의 쉼터가 되어 주고 있었다.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에도 공원은 여전히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소박하지만 마음을 절로 편안하게 해주는 조경(造景)에, 365일 청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입소문을 탔는지 일부러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공원은 누구라도 편하게 오갈 수 있게 개방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원이 시에서 운영된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이 공원은 천태길, 한 사람의 소유였다.


지금 지상이 새 신부처럼 홍조를 띠고 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을 때, 천태길은 쓸쓸한 얼굴로 이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천태길이 지금 밟고 있는 땅은 아주 오래전 그가 불가사의한 힘을 개화하기 전, 그러니까 자신이 보통의 인간이던 때 살던 집터이다.


세상에 던져진 이상, 우리가 누군가의 피를 받아 태어날 수밖에 없듯이, 천태길 역시 한 때 그의 핏줄들이 있었다.


아버지와 그의 누이.


오늘은 천태길에게 단둘밖에 없었던 그 가족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날이었다.


처음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와, 발에 챈 돌멩이처럼 여기저기 구르던 천태길이 가장 먼저 한 의미 있는 행동은 자신이 살던 집터를 중심으로 인근 땅들을 모조리 사들인 것이었다.


태길의 아버지와 누이가 죽고 나서 어디에 매장이 되었는지 천태길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을 기리기 위한 애도의 공간이 태길에게는 필요했다.


마침내 해가 떨어지고 공원에는 불이 켜졌다.

하루의 마감을 앞에 두고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제법 행복들이 걸려있었다.


천태길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길은 이 공원에는 편안과 휴식만이 있기를 바랐으니까.


··· 봄아.


사람들을 바라보던 천태길의 시야가 흐려지더니, 그의 눈앞에 어떤 여인의 실루엣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자의 모습에 태길의 눈동자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애는 여전히 천태길에게는 뼈저린 아픔이었다.


천태길은 자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다가오는 밤에게 감추고 싶었다.

그래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는다고 어찌 생각까지 멈출 수 있으랴.


여인의 모습은 오히려 더 선명해져만 갔다.


··· 봄아, 천봄이.


태길은 그녀의 이름을 소리 없이 불렀다.

그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여자가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드러낸 그녀는 그 이름처럼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그저 봄에 태어났으니 태길이 봄아, 봄아, 하다가 영영 붙어버린 이름.

그래도 그 이름이 개똥이, 막년이, 갓난이 이런 이름보다 훨씬 예쁘지 않냐던.

아니, 마을에는 이름조차 없는 여자애들도 태반인데, 애초에 자기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 얼마냐 다행이냐고 환하게 웃던 그 아이.


남루한 입성에도 숨길 수 없는 어여쁨이 흘러나오던 아이.


실없는 작은 일에도 세상 즐거워하던 그 아이는 바로 태길의 여동생이었다.


··· 오라비!


천태길의 귓가에 동생의 환청이 맴돌았다.


그의 아버지와 누이는 이미 몇 번이고 환생을 거듭했으리라.

그리고 그 생과 사의 사이에 귀인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마고가 천태길과 했던 약속이니까.


전생의 기억은 현생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이 법도.

따라서 모든 기억과 추모는 오로지 단 한 사람, 천태길의 몫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때, 백마신군이 말했던 것처럼 마고는 왜 저승의 규칙을 깨면서까지 한낱 인간인 자신과 거래를 했던 것일까?


마고가 특별히 천태길을 동정했을 리가 없다.

저마다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다른 신들이라면 몰라도 마고는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인과율의 관장자인 대모신인 마고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마고가 인간인 태길에게 모종의 거래를 제안했다는 그 자체가 괴이한 일.


너의 힘은 원래 지금 깨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일어날 일들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리고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일 또한 있으니, 너는 가만히 때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마고가 천태길에게 살짝 던진 힌트는 그저 모호하기만 할 뿐이었다.


“··· 거기, 오빠!”


그때 천태길의 등 뒤에서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길의 귓가를 정확히 때리는 것이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천태길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빵야━


고개를 돌린 태길을 향해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는 여자.


“안녕? 잘생긴 오빠.”


묘하다.


참으로 오묘한 외모의 그녀였다.

동양적이면서도 서구적이었고, 천진난만한 소녀 같으면서도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단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지금 스스럼없이 천태길에게 장난을 치는 저 여자.

그녀는 백 명, 아니 천 명에게 물어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단한 미녀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영문인가?


천태길은 그녀의 미모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그저 한쪽 눈을 슬쩍 찌푸릴 뿐이었다.


그러자 오빠, 오빠 하며 사근거리던 여자의 말투도 딱딱해졌다.


“··· 이것 봐라? 인상 안 피지?”


그랬다.


그녀는 천태길이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말이 사람이지 그 지칭은 그녀에게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풍요의 신’ 자청비.


그녀는 다름 아닌 서천국의 신들 중 한 명이었다.


“··· 자청비.”


저승에서도 왈가닥으로 소문난 그녀의 이름을 천태길이 작게 읊조렸다.


“야차야! 그렇게 얼굴 좀 구기지 말아줄래?”


본인이 마음대로 정한 별명으로 자청비는 천태길을 불렀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태길의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입이라도 맞출 듯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랜만이오.”


태길의 인사는 무뚝뚝했다.

하지만 그것도 익숙하다는 듯, 풍요의 신은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와··· 찬 바람 부는 것 좀 봐. 오랜만이라면서 놀라는 기색 하나 없고··· 너 그거 아니? 여자들은 너 같은 애들은 딱 질색이라는 거. 너 정인도 없지?”


자청비는 천태길을 향해 붉은 혀를 살짝 내밀었다.


“···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감정은 사치요. 아무튼 그 정도는 나한테 악담도 못 되오. 장소가 장소 아닙니까. 그런데 이승에는 왜?”


천태길은 하오체와 존대를 되는대로 적당히 섞어서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하오체를 쓰는 것은 천태길의 사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대가 신이라면 상식선에서 적절하지는 않았다.


“신한테 말하는 본새 좀 봐라. 그래··· 야차, 너 예나 지금이나 안 변하는 건 좋다. 어떻게 오기는. 노각성자부줄을 붙잡고 왔지.”


“그 말이 아니잖소.”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다는 식으로 말한다? 흥···”


자청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염왕의 수하들은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승에 내가 못 올 것은 뭐야.”


자청비가 말하는 염왕이란 명부의 염라를, 염왕의 수하들이란 그의 권속인 저승차사들을 말하는 것.


“차사들이야, 그게 그들의 일 아니오. 그것도 옛말이지. 이제 차사들이 망자를 인도하러 직접 이승에 오는 것조차도 드문 일 아닙니까.”


“드물기는 뭘. 흑운이라는 놈은 뻔질나게 이승을 드나들던걸.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그렇군요.”


“응? 너 흑운을 알아?”


“아니요. 모르오.”


“그런데 뭘 그렇습니까야. 그게 누구냐고 먼저 묻는 게 순서지.”


“꼭 알아야만 할 것이면 이미 알았겠지요. 굳이 몰라도 되는 걸 알게 되면 그 또한 언젠가 짐이 되기 마련이오.”


“진짜 한마디를 안 져요. 아주··· 그래도 흑운의 이름쯤은 기억해두는 게 좋을걸. 염왕의 위세와 총애를 등에 업고 요즘 저승, 특히 명부 안에서는 아주 기세가 등등한 자니까.”


“자청비께서 그리 말 하시니 이름 정도는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래서··· 진짜 이승에는 왜 온 거요.”


“너! 진짜! 자꾸 뭐, 귀찮은 거 봤다는 말투야! 그래, 야차 얼굴 좀 보려고 왔다. 왜.”


“그거야말로 공연한 거짓말이로군요.”


“뭐?”


천태길은 자청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나 뿐이 아니오. 속마음을 숨기는 데는 영 재능이 없으시지 않소. 자청비께서는.”


못 당하겠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는 자청비.


“그래. 태길아. 우리 좀 걷자. 걸으면서 내 할 말이 있으니.”


자청비는 태길에게 팔짱을 껴왔다.


할 말이 있다던 자청비는 걷는 동안 내내 말이 없었다.

그저 아주 느린 걸음으로 이곳 인간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필 뿐이었다.


오랜만의 인간세계가 신기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일까.

풍요의 신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지고 수심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게 묵묵히 걷고 있을 때, 한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웬 꼬마 숙녀 하나가 불쑥 천태길과 자청비 앞에 와 섰다.

그 꼬마 아가씨는 자청비에게 말을 걸어왔다.


“언니, 안녕하세요.”


자청비를 향해 대뜸 꾸벅 배꼽 인사를 하는 아이.


“언니, 너무 예뻐요. 혹시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유튜브에서 방송해요?”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에 자청비의 입에서 탄성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청비는 태길에게서 팔을 빼 아이의 시선에 맞춰 몸을 낮추더니 그 꼬마 숙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눈에는 언니가 예쁘니?”


“네. 우리 반 선생님도 정말 예쁘시거든요? 선생님보다 언니가 이만큼 더 예뻐요.”


아이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감정으로 두 손바닥을 쫙 펴 보였다.


“고마워.”


그때, 젊은 부부 한 쌍이 황급히 아이 쪽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이 아이의 부모가 되는 모양.


“어머, 죄송합니다. 우주야. 모르는 분들한테 그렇게 말 걸고 그러면 실례야.”


우주라는 아이는 얼른 제 엄마의 손을 잡았다.


아이 엄마는 태길과 자청비를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는데, 그렇게 자리를 뜨려다 얼굴이 벌게진 채 자청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제 남편을 보곤 야! 앙칼진 소리를 냈다.


그렇게 멀어져가던 가족을 바라보던 자청비가 입을 열었다.


“인간은 참 신기한 존재야.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찰나와 같은 짧은 삶을 살면서 어떻게 그 많은 감정을 모두 쏟아낼 수 있는 걸까?”


‘짧으니까. 자신들이 폭죽처럼 아주 짧게 빛나고 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지.’


그럴듯한 대답은 준비되어 있었으나 천태길은 말을 아꼈다.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자신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게 짧고, 가련한 존재이니까 바리 언니가 그토록 인간들을 사랑하는 거겠지.”


자청비는 태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런데 자청비의 입에서 새로운 인물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그 역시도 천태길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자애의 신’ 바리.

바리데기, 혹은 바리공주로 알려진.


자청비와 같은 서천국의 신들 중 하나이자 인간의 윤회를 관장하는 그녀의 권세는 염왕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었다.


이 강대한 두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치 대척점과 다름이 없었다.

비단 바리는 서천국의, 염라는 지옥을 관장하는 명부의 신인 까닭 때문만은 아니었다.


염라가 인간을 재판하지만, 바리는 인간의 죄를 씻긴다.

또한 염라는 영혼을 용암 같은 지옥불로 태우지만, 바리는 영혼을 천도한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는 것처럼 바리와 염라는 서로의 방식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저승을 굴러왔다.


그리고 바리 그녀는, 천태길의 스승이기도 했다.


“바리께서는 안녕하시오?”


천태길은 바리에게 빚이 있었다.


만약 바리가 아니었다면, 천태길은 자청비의 말처럼 정말 한 마리 야차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자청비는 바리의 안부에 대해 태길에게 쉬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쭈그렸던 몸을 일으킨 자청비의 안색은 신이라는 존재답지 않게 새하얗게 질려있기까지 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천태길이 아니었다.


“저승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입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해?”


“여태껏 온갖 사납다는 것들은 다 봤지만, 오만하리만치 겁이 없는 자청비 님의 지금 같은 얼굴은 처음 보니까요.”


“신 앞에서 나이 먹었다고 유세 부리는 거야? 그리고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자청비가 쓸쓸하게 웃었다.


애초에 자청비가 자기 얼굴 한번 보겠다고 여기에 왔을 리 없다고 짐작하고 있던 태길이었다.

천태길은 가만히 자청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길아. 아까 네가 그랬지?”


“뭐 말이오.”


“몰라도 되는 일을 알게 되면 언젠가 그게 짐이 되어버린다고.”


“자청비께서 이리 나타나신 걸 보니, 모르고 싶다고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요.”


“그래. 일이 생겼어. 그것도 아주 큰 일이.”


잠시 뜸을 들이던 자청비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거렸다.


“··· 태길아. 언니가, 바리 언니가 사라졌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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