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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님의 서재입니다.

서울에는 신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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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작품등록일 :
2024.04.1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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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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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DUMMY

007.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비록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일지라도, 우리는 선택의 노예이다.

매시간, 매분, 매초.

인간은 반드시 이것이 되거나, 혹은 저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책임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감당해야 하는가?

적어도 그 대가가 죽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날 갑자기 시후 엄마가 아침부터 약속이 생기지 않았다면.

하필 기가 막힐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면.

우연히 틀어놓았던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집에서 멀지 않았던 등산로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시후의 손을 잡은 정윤기가 사나이답게 탐험하자며 저 산길로 가 보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것이 저 부자(父子)의 비참한 죽음의 이유로 정당한가?


설령 그날의 모든 선택은 두 사람의 결정이었을 뿐이고, 그것이 인생의 종착역으로 향하는 운명의 레일을 깔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제기랄.


시후에게서 업경을 치우며 천태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참 곤란하게 만드는군.


악귀는 미쳐 날뛰어야 할 이유가 있었고, 악귀로부터 살(殺)을 맞은 이는 응당 그럴만한 자였다.


무엇보다도.

저 불쌍한 아이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구상의 80억 인구에서 가장 죽음과 가까운 이를 뽑으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태길이었다.

그런 천태길에조차도 어떤 죽음은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 너무 무서웠어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숨이 막히고, 배 있는 데가 너무 아팠어요.


시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랬겠구나.”


━ 그러다 너무 춥고 졸려서 눈이 감겼어요.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빠가 있었어요. 아빠도 나도 살아있는 줄 알고 너무 기뻤었는데···


시후가 둥근 얼굴을 들어 천태길을 바라보았다.

얼굴처럼 동그란 아이의 눈은 물기로 축축했다.


━ 역시 저랑 아빠는 죽은 게 맞죠?


“그래,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천태길이 어렵게 입을 뗐다.


━ 아저씨, 그럼 저는 어디로 가야 해요? 아빠는 원래 저렇지 않았어요. 어쩐 일인지 아빠는 저 할아버지만 계속 따라다녔는데··· 난 무섭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래. 알아. 아저씨도 알고 있다.”


악귀를 묶어둔 부적은 위태로웠다.


한때 이 아이의 아버지였던 악귀는 덫을 밟은 사나운 짐승처럼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털어댔고, 그 난리를 견디다 못한 부적은 끝부분부터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10분?

아니, 기껏해야 앞으로 5분 정도나 잡아둘 수 있을까?


아직도 저 악귀가 자기가 알던 아빠라고 믿는 시후에게는 악귀의 처절한 비명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후는 두 손을 들어 자기의 귀를 막았다.


━ 아빠가 왜 저렇게 된 걸까요, 아저씨, 제가 잘못한 건가요? 제가 너무 많이 울어서 아빠가 저렇게 된 건가요?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천태길은 몸을 숙여 아이와 키를 맞췄다.

태길은 시후의 눈을 감기고, 손을 아이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어떤 것도.”


━ 아저씨, 집에 가고 싶어요. 엄마 보고 싶어요.


고사리 같은 작은 두 손이 태길의 팔을 꼭 잡았다.


“미안하다.”


정시후, 정시후, 정시후.


천태길이 아이의 이름을 세 번 호명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구슬픈 무가(巫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혼령을 성불케 하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었다.


“넋이로다 넋이로다 넋인줄 몰랐더니 오날 보니 넋이로구나 신인줄 몰랐더니 오날 보니 신이로구나 저 넋이 뉘 넋인가 가련하다 인생 죽엄 넋일랑은 모셨으니 왕생극락을 가옵소서”


지금 천태길이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시후가 진작 갔어야 할 곳으로 보내주는 것.


시간이 없었다.


부적은 모두 타버려 금방이라도 그 힘을 잃고 악귀를 풀어주고 말 것이다.

묶인 발이 풀린 악귀는 단박에 천태길에게 달려들 것이고.


아이의 눈앞에서 한때 아버지였던 것을 소멸시키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태길은 자신이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무가가 부디 저 작은 것에게는 부디 자장가가 되기를 바랐다.


천태길의 손바닥이 닿은 부분부터 환한 빛이 퍼져나가더니 시후의 영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 킥! 킥!


시후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악귀의 발악이 점점 그 세를 더해갔다.


━ 아저씨, 나 또 죽는 거예요?


“··· 아니야. 처음 태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란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고작 아홉 살 인생에 업이 쌓여봐야 얼마나 쌓였겠는가.

더욱이 저리 비참하게 숨이 끊어졌으니 저승에서도 아이를 박하게 대하지는 않으리라.


━ 그럼 우리···


시후는 꺼냈던 말을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빛이 아이의 몸을 완전히 감싸고, 시후는 신들과 죽은 자들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태길은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 네 아빠는 너와 같이 갈 수 없어.”


파스스━


━ 끅, 끄윽, 끅, 끅!


악귀의 몸에 붙어있던 부적이 완전히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악귀의 눈에서 기름때처럼 시커멓고 끈적한 것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눈 아래 파여 있던 흉터의 흔적을 따라 마치 눈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퍽, 퍽━


악귀는 제 몸이 자유로워지자 박춘제의 명치께를 두어 번 세게 발로 내리찍었다.


“··· 컥!”


박춘제는 몸을 꿀렁대며 피를 토하듯 기침을 했다.


이제 고개를 돌려 천태길을 바라보는 악귀.

이제 악귀의 철천지원수는 천태길이었다.


침대 위에서 겅중 뛰어내린 악귀는 천태길의 전력을 가늠이라도 하는 듯 느리게 발을 움직였다.

악귀의 발이 닿는 곳마다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액체가 검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나는 네 아이를 해친 것이 아니다.”


악귀란 본디 이성이 없는 괴물이다.

마굴의 괴이(怪異)들보다 더 괴이한 모양새.

오로지 욕망과 원한의 덩어리일 뿐인 악의 피조물.


악귀에게서 그의 생전모습을 터럭만큼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금 저 악귀는 제 새끼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제 몸 안에 있었던 것을 빼앗겼다는 것에 화를 내고 있단 걸 천태길도 잘 알고 있었다.


━ 킥··· 킥··· 끅···


“하나 묻자. 악귀들의 그 비명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저 의미 없는 울부짖음일 뿐이냐?”


악귀는 아무런 대답 없이 한 발짝 더 천태길을 향해 뻗을 뿐이었다.


“그래. 네가 나와 대화를 원하지 않는 것만은 알겠다.”


태길은 사진검을 바로 잡았다.

어차피 벨 수밖에 없다.


이제 악귀의 원념은 박춘제가 죽는다고 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박춘제가 죽으면 이 집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살을 뿌릴 것이고, 가족들마저 잡아먹고 나면 이제는 집 밖으로 나가 자신과 아무런 은원이 없는 인간들을 해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억울한 죽음이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천태길은 베어야 한다면 단칼에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악귀와 태길의 거리는 불과 다섯 걸음 안.


악귀는 태길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다 일순, 악귀는 팔을 길게 늘여 태길의 머리를 향해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바로 목숨을 노리는, 스치기라도 했다간 생살이 바로 뜯어져 나갈 악의에 찬 공격이었다.


눈으로는 반응하기도 힘든 그 공격을 천태길은 허리를 숙이며 가까스로 피해냈다.


악귀의 일격에서 벗어난 태길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천태길은 몸을 숙인 채로 빠르게 악귀의 품 안으로 달음박질쳤다.


너무나 길어진 악귀의 팔은 제 몸을 보호하러 다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틈에 사진검이 악귀의 대가리와 몸의 연결부분을 깔끔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푸스스스━


악귀의 몸이 바싹 마른 모래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내, 악귀는 바닥에 혼주(魂珠) 하나만을 남긴 채 완전히 부서져 영멸해버렸다.


“네가 그렇게도 저주하던 저 영감은 조만간 반드시 대가를 치를 거라고 말해도, 네게 큰 위안은 되지 않았겠지.”


천태길은 바닥에 떨어진 혼주를 주워 들었다.


그의 눈은 이제 침대에 누워있는 박춘제 노인을 향했다.


악귀가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박춘제의 호흡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천태길은 잠시 침대 곁에서 늙고 추한 박춘제의 눈감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 컥··· 컥! 안돼! 그만해!”


흐리멍덩하던 박춘제의 눈이 빛을 찾더니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박춘제.

그렇게 눈깔을 굴리던 중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천태길을 발견했다.


“뭐야, 넌! 누구야!”


“영감. 좋은 꿈 꿨나?”


“누구냐고! 왜, 내 방에 들어와 있는 거야! 야, 장현아! 며늘아가!”


게거품을 무는 것처럼 고약하게 소리를 질러대는 박춘제.

어차피 그가 목청을 높인다고 해도 이 방에 들어올 사람은 없었다.


천태길은 박장현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나오기 전까지 방에 사람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생사람 죽여놓고 좋은 꿈을 꿨을 리가 있나.”


“이런 육시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천태길의 눈이 추상같이 무서운 빛을 띠었다.

태길은 사진검을 박춘제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이··· 이봐.”


“진짜 괴물은 네 놈이다. 내가 사정이 있어 산 사람을 목숨을 거둘 수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라.”


사진검을 거둬들인 천태길이 야차와 같이 무서운 표정으로 얼굴을 박춘제에게 바짝 가져다 대었다.


“하긴 영감, 내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오래 못 살아. 악귀에게 시달리는 동안 이미 혼도, 육신도 너무 쇠약해졌거든.”


그때 가까이 붙은 천태길을 뜯어보던 박춘제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사정없이 떨리는 그 눈은 조금 전 천태길로부터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박춘제의 기억이, 그를 막다른 곳에서 포식자를 만난 초식동물로 만들어버렸다.


“너, 너··· 어떻게···”


겁에 질린 박춘제가 어떻게든 천태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어대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던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따라와 주지 못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갑자기 정신이라도 나간 것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박춘제.

급기야 그의 입에서 우리 말이 아닌 것이 튀어나오기에 이르렀다.


“悪魔!あなたがどうやって生きているの?”


“악마? 내가 어떻게 살아있냐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길.


“옳아. 너 나를 본 적이 있구나.”


박춘제의 말이 천태길의 기억도 일깨워주었다.


악마, 악마가 온다.


아주 오래전 그렇게 말하며 천태길을 두려워하던 이들이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하나도 늙지를 않았어.”


침까지 흘려가며 바들바들 떠는 박춘제.


“악마가 어쩌고 떠드는 걸 보니 왜정 때 나를 봤구나. 너는 누구냐.”


박춘제는 천태길의 말에 이불을 덮어쓰며 얼굴을 가렸다.


“난 몰라···! 나는 그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야. 난 네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니야.”


태길은 이불을 억지로 걷어냈다.

박춘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천태길.


“그래. 이제 알겠다. 하도 추하게 늙어 얼굴을 몰라봤구나.”


“아니야. 난 너 몰라···”


“포수 덕삼이 아재. 자기가 마지막 백두산 호랑이를 잡은 사람이라고 허언을 늘어놓곤 했지. 마을에 쳐들어온 일본군에게 저항하다 붙잡혀 머리에 총알이 박혀 죽었다. 짱구 호승이. 12살이던 그놈은 식탐이 많아서 감자가 채 다 익기도 전에 제 입에 집어넣기 바빴다. 일본군이 집에 불을 지르자 그 안에 숨어있다 질식해 죽었고. 끝단이. 이쁘장하게 생겼던 그 처녀 아이는 끌려가서 모진 꼴을 당하게 칼에 베여 죽었지. 그리고···”


“난 모르는 일이야···”


“네가 독립운동을 했다니 컨셉 하나 참 더럽게 잡았구나.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너를 그 사람들은 모두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 착하고 가엾은 것들은 모두 죽어버렸는데, 네 놈은 아직도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구나.”


박춘제를 바라보는 천태길의 눈에 증오의 불길이 일었다.


“이 빌어처먹을 밀정 놈아. 그때 한번 살려주었는데, 나를 또 만나는 구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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