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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행 님의 서재입니다.

저번 생이 기억나버렸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군자행
작품등록일 :
2021.05.12 21:11
최근연재일 :
2022.03.20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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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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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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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맛있는 거 먹고 싶다

DUMMY

이 근방에서 가장 강하고 무리도 많은 놀 중에서 가장 크고 단단한 이빨을 가진 부족의 우두머리는 지독하리만치 진한 피비린내와 별미로 밖에 생각하지 않던 인간들의 날카로운 쇠붙이의 무서움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자욱하던 연기는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명한 일족의 피와 내장들... 그리고 짖이겨지고 잘린 팔다리들...


“이 녀석 맛이 갔는뎁쇼.”


핀의 껄렁껄렁한 목소리에 함께 있던 밀러가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긴장풀지 마라! 가서 살아있는 놈이 있는지 숨어서 기회를 노리는 놈이 있는지 확인해! 3인 1조로 움직이고 본인의 안전이 가장 우선이라는 공자님의 명이 있었다! 움직여! 어서!”


기사의 말에 병사들이 우르르 시체더미들 사이를 헤집었고, 기사들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뒤에서 받쳐주며 확인사살을 진행했다.

우두머리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일족의 전사 시체가 고기덩어리도 아닌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인간들의 발에 걷어 채이는 것을 보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오른팔은 잘려서 없는 상태이고 왼팔은 손목이 날아갔으며, 두 다리의 힘줄을 종아리쪽에서 모두 잘렸다. 게다가 배에는 검이 깊게 들어갔다 나왔는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움직이기는커녕 분노나 생각을 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정말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길 수도 있어. 대단해.”


우두머리 놀과 달리 감탄을 연발하는 밀러는 조금 전의 전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처음 연기만 피어오르는 방향으로 놀들은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한 동안 움직이는 와중에 ‘쾅!’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통나무가 뒤쪽의 놀 전사들의 행렬로 날아왔다.

물론 평소의 날렵한 놀 전사들이라면 충분히 피했을테지만 문제는 연기가 짙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것이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 뿐만 아니라 호흡도 어렵게 한다는 것이고, 호흡곤란이 지속될 경우 집중력 저하, 현기증, 심한 경우 산소부족으로 질식사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은 나무창과 돌덩이, 떨어진 돌덩이로 인해 땅으로 꺼지는 바닥, 그리고 바닥에 거꾸로 꽂혀있는 나무창들과 날카로운 쇠붙이들.


밀러는 처음 작전을 짤 때, 자신을 믿어달라는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저었던 행동이 미안해졌다. 그 때 작전을 듣고 놀들을 어떻게 함정으로 몰아 넣을 것인지 물었을 때 공자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 속은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 우리가 몰아 넣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발로 스스로 들어가게 해야 함정이죠. 우선 마을 근처까지 오게 만들고 근처에 불을 질러 발을 멈추게 만들어요. 물론 그 불이 거칠게 그리고 크게 보여야 하겠죠. 그리고 한쪽만 불이 제대로 붙지 않는 것처럼 해서 유인을 하는 거에요. 물론 연기를 아주 자욱하게 피워야 하죠. 그러려면 약간 젖은 지푸라기와 낙엽을 함께...


“공자님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있을지 정말... 모두가 공자님이 말씀하신대로 움직였어요. 우리도, 그리고 저 개머리들도! 보세요! 우리는 다친사람도 없다고요.”

“크하하하! 이게 전략이라는 거다! 음? 전술인가? 뭐 아무려면 어때!”

“크흐흐흐, 빈! 이제 복수했어! 이 개새끼들 전부 다 죽였다고!”


병사들과 마을 청년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밀러는 마지막으로 전장을 확인했다.


30마리의 놀들이 병사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이동했었고, 그 길에 설치된 각종 부비트랩에 대부분이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살아남은 놀들도 놀라 호흡이 흐트러지면서 호흡곤란으로 떨어진 전투력을 다시 올리지 못해 달려온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도륙당했다. 연기 때문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냄새를 맡고 미리 준비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한 이미 덫으로 인해 혼란상태였기에 날아오는 칼을 피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전장을 정리하고 놀들의 시체를 확인하는 마을 주민들의 눈에는 슬픔과 안도감이 함께 하였다. 죽어버린 가족들이도 이제는 편히 눈을 감을 것이라 믿으며 그들은 헤리오스와 기사들, 병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성에서 지원을 보내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쯧.”


헤리오스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덫을 설치할 때 하나하나 점검을 하였고, 기사들과 함께 지형을 확인하기를 반복하며 작전을 완성했다. 승리를 만끽하기에는 헤리오스의 신체 능력은 너무 저질이다. 결국 한쪽에 앉아 그대로 잠이 든 헤리오스를 보며, 기사들과 병사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3일 후 영주성에서 기사단과 함께 영지군이 도착하여 대대적인 토벌과 함께 마을의 방위를 위한 시설물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헤리오스 일행은 이제는 튼튼해진 두 다리가 아닌 말을 타고 성으로 돌아오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이번 일의 공을 인정받아 병사들도 수레에 앉아서 이동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받고 기뻐했지만...


“그냥 걸어가면 안될까? 계속 흔들거리고 움직이니까 엉덩이도 아프고 멀미도 나려고 해.”

“영주님 명이니까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있어.”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헤리오스가 뭐라고 하려 했으나 기사 밀러가 손을 내밀어 말리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영주의 권위 때문인 것 같았다.


말을 타고 이동한 지 하루만에 영주성에 도착했다. 저녁 노을이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모습을 보며 성으로 들어가 저택을 향해 간 헤리오스는 바로 공작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다녀왔어요.”

“그래. 바다까지는 못갔다고?”

“...네.”

“그래 고생했다. 놀 퇴치도 훌륭했고...”

“음... 죄송했어요. 괜히 잘난 척하며 혼자 떠들어대고 설쳐서...”


헤리오스의 사과에 공작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냐! 난 정말 기쁘단다. 내 아들이 단순히 검만 휘두르는 칼잡이가 아니라 영지를 이끌고 다스릴 줄 아는 현명한 군주가 될 인물이라는 것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실과 부딪히고 그러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겠니?”

“...네.”


발쟈크 공작의 호탕한 웃음이 멈추고 이제는 음흉한 것 같으면서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헤리오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헤리.”

“네.”

“나에게 미안해할 것은 전혀 없단다. 그리고 넌 이제 무척 힘들거야.”

“왜요?”

“왜냐하면...”


그 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공작부인이 들어왔다.


“네 엄마가 무척 화가 났거든...”

“...어...엄마?”


헤리오스는 굳어진 채로 뒤를 돌아보자 하얗게 질린 얼굴에 눈물자국이 선명한 부은 눈의 공작부인이 헤리오스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하려하다가 눈물이 터져버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헤리! 도대체 너는...”

“...”


그렇게 집무실에서 밝은 보름달이 저택의 꼭대기를 비출 때까지 공작부인의 설교 겸 걱정 겸 분노의 폭발을 헤리오스는 온 몸을 다해 맞아야 했다.


* * *


여행이 끝나고 다음 날부터 공작의 지시로 헤리오스는 기사들의 훈련장에서 검을 배우게 되었다. 영주라면 영지를 다스릴 지혜도 필요하지만 영지를 지킬 무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바퀴 더!”


기사단장의 고함소리에 헤리오스는 다시 훈련장의 가장자리를 뛰었다.


“이제 겨우 56바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빨리 뛰어야 체력이 붙습니다!”


기사단장 루크는 벨로시아 영지에서 태어나 기사가 되고, 또 기사단장이 될 때까지 오직 검술과, 기사단의 전술을 위해 살아온 남자답게 거대한 덩치와 언제봐도 불끈불끈한 근육이 터질 듯이 꿈틀거리는 괴물같은 모습으로 지금은 영지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만 훈련을 거르는 적이 단 한번도 없는 노력파이기도 하다.

이런 그에게 헤리오스가 투덜대지도 못하고 계속 훈령장을 뛰는 이유는 이 근육꿈틀 기사단장도 헤리오스 옆에서 같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사단장은 갑옷을 모두 착용한 상태였다.


“오크들의 공격은 이보다 더 길고 힘겹습니다. 이 정도 달리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가까스로 대답을 한 헤리오스의 호흡이 틀어졌다.


“컥!”

“그만!”


영지의 후계자지만 공작과는 다르게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헤리오스는 확실히 기사와 어울리는 그런 몸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체력의 한계까지 버티는 이 끈기와 집념에 기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중히 말했다.


“현재 공자님에게 필요한 것은 검을 휘두르는 방법이 아니라 저 무거운 철검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리도 허리도 팔도 모두 약합니다. 체력을 키우기 전까지는 검을 잡을 수 없습니다.”

“헉...헉... 알겠어. 결국 혼자 알아서 체력 단련하고 있으라는 소리지?”

“...너무 요점을 골라 말씀하시니 제가 너무 무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 좀 쓰러져도 될까?”


그리고 기절해버리는 헤리오스를 보고 훈련장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놀라 달려왔다.

이어지는 기사단장의 수난.


“도대체 내 아들이 그렇게 미웠나? 검도 쥐어보지 못하게 하고 하루종일 뛰기만 하는 벌을 받았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공작의 분노.


“흑...흑... 우리 아들이 그렇게도 미우신건가요?”


공작 부인의 슬픔.


“변태같아...”


딸의 욕설...


“응?”


저만치 휙 지나가버리는 딸 키사의 뒷모습에 멍해졌다가 욱 치밀어 오른 기사단장 루크가 소리쳤다.


“그래도 넌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물론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루크의 딸이다.


다음 날 침대에서 정신을 차린 헤리오스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였지만 온 몸에 욱씬거리는 통증에 다시 자리에 누웠다.


“크...!”


팔을 들어보니 얇고 하얗고 여리여리한 팔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다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아 상의를 들춰보았다.

마른 몸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튀어나온 갈비뼈들과 날씬한 배. 백옥같은 피부...


“나트륨 섭취가 적으니 비만도 없는건가? 아니면 음식 맛이 더럽게 없어서 조금 먹어 다이어트가 된 건가?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쯧.”


그러고보니 이 세상에서 뚱뚱하고 기름이 좔좔 흐르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일어나 옷을 벗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마르고 하얗고 여리여리한 얼굴만 봐줄만한 어린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뭐야. 난 수염도 안자라? 뭐지? 너무 남성성이 안 나타나잖아.”


거울에 비친 외모를 보고 투덜거리는데 노크소리가 들린다.


“잠깐.”


다시 잠옷을 입고 입실을 허락하자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시녀 제니였다.


“벌써 일어나셨네요. 손과 얼굴을 씻을 물을 가져왔어요.”

“그래. 수고했어.”


은으로 만든 큰 그릇에 담아 온 물로 손과 얼굴 목을 닦고 제니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다음은 식사시간.


“지금 식당으로 내려가시면 영주님과 부인께서도 당도하실거에요.”

“그래. 지금 갈게.”


식당으로 향하는 헤리오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누가 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날의 뜀박질로 움직일때마다 올라오는 통증에 땀까지 맺히고 두 눈썹 사이도 일그러졌다.

절뚝거리는 헤리오스의 모습을 보는 시녀들의 눈에는 연민과 동정이 가득했고, 하인들의 입에는 가혹한 기사단장에게로의 욕설이 담겨지고 있었지만 정작 헤리오스는 기사단장인 루크가 밉거나 싫지 않았다.

그저...


“아... 진짜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아무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중얼거리는 그의 마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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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정말 잘했다 +10 21.06.03 12,882 198 12쪽
23 오크들이 쳐들어왔어요 +12 21.06.02 13,086 193 13쪽
22 그럼 부탁하지 +7 21.06.01 12,902 202 12쪽
21 시간이 맞을 것 같군 +7 21.05.31 13,067 193 11쪽
20 믿는다 +8 21.05.30 13,134 20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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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심도있는 이야기 좀 하시죠 +7 21.05.27 14,057 20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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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슨 일이래 +11 21.05.18 17,460 217 13쪽
» 맛있는 거 먹고 싶다 +7 21.05.17 18,032 237 12쪽
6 신호다 +7 21.05.16 18,566 2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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