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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행 님의 서재입니다.

저번 생이 기억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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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행
작품등록일 :
2021.05.12 21:11
최근연재일 :
2022.03.20 00:50
연재수 :
14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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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14,085

작성
21.05.19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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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한번 들어볼까

DUMMY

주방에서 살아온 지 벌써 30년이다. 그간 만든 빵으로 집을 지어도 몇 채는 지을 정도로 이 주방에서 만들어 온 경력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의 반도 살아보지 못한 이 어린아이가 감히 주방에서 칼을 달라고 한다. 도마 위에서 자신도 아까워서 함부로 꺼내지 못한 재료를 직접 만져보겠다고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다.

큰 소리를 지르고 쫓아내고 싶지만 그러면 안된다.

그 꼬맹이는 바로 이 땅의 주인의 아들이니까. 그리고 후에 이 땅의 주인이 될테니까.

계급이 깡패라는 말이 진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느끼면서 그 말에 굴복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후퍼.


“여기 밀가루와 물입니다. 어떤 요리를 만드시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후퍼가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럼 감자 껍질을 까줘.”

“...으득!”

“응? 이를 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닙니다! 이를 가는 게 아니라 감자껍질을 깎아내려고 칼을 갈았습죠.”

“그래. 어서 해! 저기 식당에서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그런데 생각보다 많네.”


헤리오스는 몰려온 사람들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식당에서 기다리라고 한 후 직접 요리를 만들어 맛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대다수가 헤리오스의 성의를 진심을 담아 사양했지만 이 땅 주인의 아들래미는


“하~아! 내가 주는 것이 그렇게도 먹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아... 나중에 내가 주는 월급도 싫어하려나?”


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바람에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서로를 힐끔거리며 식당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니. 그... 공자님께서 요리를 잘 하시는 편이니?”


집사의 물음에 제니는 고개를 저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주방에 들어가신 적이 없을걸요.”

“신이시여...”


식당 분위기는 어떻든 주방은 주방 나름대로 살벌했다.


“밀가루 반죽을 더 얇게 펴란 말이야! 아니! 아니! 에잇! 이리 내!”


헤리오스가 직접 반죽을 하고 그 반죽을 따뜻한 곳에서 발효시키는 동안 후퍼가 다듬은 각종 야채를 가져다 직접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슥!

다다다다다다다닥!


양파와 감자 호박이 썰리는 속도와 소리. 그리고 멍해지는 주방의 책임자 후퍼와 기타등등.


“물 끓여! 물도 제대로 못 끓이기만 해봐! 아주 작살을 내겠어!”


후퍼는 지금 소리를 치는 공작가의 아들이 정말 귀족인지 요리사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할 정도로 칼질과 사람을 다루는 실력이 너무도 능숙했다.


“이제 닭이야. 응? 야! 너! 물을 겨우 그 정도로... 더 퍼와! 지금 있는거에 두배만큼!”


칼을 들고 닭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솜씨는 정말 신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밀가루 반죽을 펴서 돌돌 말더니 칼질을 시작한다.


“요리는 말이야. 재료도 중요하고 실력도 중요하고 양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청결이야. 이 닭 깨끗이 씻고 저 솥에 넣어.”


일은 일대로 시키면서 칼질은 멈추지 않는다.

‘ 고귀한 핏줄은 다른 것인가? 이런 요리는 그냥 하면 되는 정도로 능력이 다른 사람인가? 후퍼는 멍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헤리오스의 말을 충실히 따르기 시작했다.


솥에 닭이 들어가고 마늘과 몇가지 약초가 들어가 냄새를 잡게 했다. 이윽고 칼로 썰어놓은 밀가루 반죽들이 들어가고 야채가 들어가서 계속 끓는다.

후퍼는 그리고 인생의 좌절을 맛보고 태어나서 처음보는 천상의 맛도 보았다.


“그 동안 내가 한 요리보다 더 맛이... 있어.”


식당에서 요리를 맛본 사람들의 반응 역시 난리였다.


“이것이 무슨 요리인가?”

“처음 맛보지만 정말...!”

“먹어도 먹어도 정말 새롭고... 맛있어!”

“신이시여...!”


늦은 시간에 성의 식당에는 헤리오스가 만든 칼국수의 시식회가 열렸고, 이 요리는 공작과 공작부인에게도 전해져 저택의 모든 이들이 경악과 행복을 동시에 맛보았다.


“에이 씨! 그냥 나만 조금 먹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40인분이나... 아그그그! 산에서 뭉친 다리 근육보다 밀대로 반죽 밀어서 생긴 팔 근육통이 더 아프네...”

“어머! 공자님 많이 아프세요? 제가 어깨를 주물러 드릴까요?”

“아~ 괜찮으니까 입가에 그 면 부스러기 떼고 와줄래?”

“아이 참! 공자님께서 먼저 올라오시니까 제가 빨리 따라오려고 그랬죠. 냠. 저는 공자님의 시녀니까 꼭 옆에 붙어있어야 하잖아요.”


제니의 말에 괜히 부담스러워지는 헤리오스.


“말하던 중에 냠은... 그런데 너도 15살이 되니까 은근히 변한다.”

“어머? 정말요? 사실 요즘 슬슬 나오기 시작하죠. 에헴!”


괜히 가슴을 앞으로 쑥 내미는 제니.


“...나와? 어디...?”

“...잘 보면 나왔다구요. 쳇!”


* * *


아침 일찍 산행을 위해 저택을 나서는 헤리오스의 뒤에 어느 새 키사가 말없이 따라 붙어 걷고 있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활기차게 인사하고 걸음을 옮기는 헤리오스 뒤에 음울한 분위기의 키사가 따라갔다.


“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안 좋은 일 있어? 기분이 별로인 것 같은데?”


성 뒤의 산 초입에서 왠지 신경쓰이는 키사의 분위기가 느껴져 물어본 헤리오스의 질문에 키사가 대답했다.


“요리... 먹고 싶습니다.”

“...아...”


좀 암담해지는 헤리오스...


키사가 알고 있다면 기사단도 알고 있을 것이고, 또 기사단이 알면 경비대도 영지군도... 결국 영주성의 모두가 다 알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럼 이 사람들이 다 어제 먹은 칼국수를 먹겠다고 한다면...?


“그걸 왜 내가 만들어. 후퍼였나? 요리가 직업이잖아?”


고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헤리오스가 큰 소리쳤다.


“걱정 마. 내가 후퍼에게 다 알려줬어. 후퍼가 아주 맛있게 만들어 줄거야. 오늘 저녁에 먹도록 하자.”


충실한 산행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헤리오스를 반기는 것은 놀랍게도 후퍼였다.


“훈련을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후퍼의 진심이 가득담긴 인사에 불안함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무시를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 그런데 이 시간에 주방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있어?”

“아... 그것이...”


우물쭈물하는 후퍼의 뒤로 기사단장과 경비대장이 나타났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호오...?”


두 사람의 등장으로 감이 잡히는 헤리오스.


“저... 어제 만드신 요리가 그... 맛이... ”


후퍼의 말에 결국 지금의 상황이 다 파악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어제 먹었던 요리를 만들었는데 맛이 없다는 거 아냐?”

“맛이 없다기 보다는... 그... 좀 무언가 부족한 듯 하면서도...”


헤리오스가 경비대장을 쳐다보고 물었다.


“먹어봤지? 어때?”

“더럽게 맛 없었습니다.”


그리고 헤리오스는 깨달았다. 그 동안 자신이 식당에서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은 이 세계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능력이 한참이나 부족한 주방장이 요리를 더럽게 못해서 음식이 먹기 싫어서 였다는 것을.


“그래... 뭐 이해는 해. 그렇게 잠깐 보고 어떻게 반만년 한민족의 음식혼을 따라가겠어.”

“에? 반만년이요?”

“그래! 후퍼! 너 짤리기 싫지?”

“물론입니다! 전 먹여살려야 할 자식이 넷이나 있습니다요.”

“좋아! 이제부터 특훈이다!”


후퍼의 안색이 노랗게 변해갔지만 헤리오스는 주먹을 불끈쥐고 어떻게 하면 이 주방장에게 한식의 깊은 맛과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운 손맛을 뽑을 수 있게 할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옆에서 따라해봐. 그리고 뒤에서 기사단장하고 경비대장, 키사경까지 맛을 보고 평가를 해줄거야.”

“예...예...”


헤리오스는 전날 만들었던 칼국수를 다시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있었고, 후퍼는 그 옆에서 헤리오스가 하는 것을 따라하고 있었다.


“알지? 나 여기 있으면 우리 아빠가 상당히 싫어하게 될거야.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정말 열심히 해야해. 맛이 나보다 없거나 이상하면 기사단장이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시험한다고 했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말고 최고... 오케이?”

“예? 오...케이?”

“시끄럽고 잘 봐!”


헤리오스는 칼국수를 만드는 방법을 단계별로 차근차근 알려주고 야채를 넣는 시간, 닭으로 뽑아내는 육수와 그 외 면을 넣고 얼마나 익혀야 하는지, 그 탄력이나 면의 익힘 정도도 꼼꼼하게 다 알려주었다.

그 때마다 후퍼는 중얼거리며 외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고 결국 헤리오스가 버럭 소리쳤다.


“아씨! 글 몰라? 좀 적어! 천재야? 딱 들으며 다 외울 수 있어?”


헤리오스의 말에 주방 안이 고요해졌다.


“어? 분위기 왜이래?”

“저... 공자님... 글자는 귀족들만 익힐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여기서 글자를 아는 사람은... 공자님을 빼면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아... 문제네. 그럼 다시 말해줄테니 외워.”


결국 세 번에서 네 번정도 설명을 다시 해주며 후퍼에게 조리법을 알려주었고, 헤리오스가 만든 칼국수와 맛이 비슷하다는 평가에 후퍼는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 * *


아침 식사시간 공작과 공작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주방에서 나온 요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뒤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 또한 좋은 냄새에 미소를 띤 얼굴로 수건과 물을 들고 서 있었지만 헤리오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니... 헤리.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는 것 같구나.”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럼 왜 식사를 하지 않는 거니?”


공작부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결국 헤리오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엄마. 정말 이러면 음식투정하는 것 같아서 안하려고 했는데... 3일 내내 칼국수는 너무한거 아니에요?”

“어머? 이 음식이 맛이 없니? 게다가 이 음식은 헤리 니가...”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칼국수만... 하아... 먹을 수는 없잖아요.”


헤리오스의 말에 눈이 반짝이는 공작과 공작부인, 그리고 시녀들.


“아차...!”


말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은 헤리오스에게 공작부인이 더 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살벌한 소리를 했다.


“어떤 음식들이 있는지 한번 들어볼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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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찌 설득할 생각이냐 +8 21.05.20 16,022 222 10쪽
» 한번 들어볼까 +14 21.05.19 16,482 248 11쪽
8 무슨 일이래 +11 21.05.18 17,460 2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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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호다 +7 21.05.16 18,566 2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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