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이영. 그리고...
“후후. 영이가 오고 있다고 하네.”
“예. 소신도 들었습니다.”
소율기와 정이찬, 옥향, 무진, 진금이 같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세상을 많이 보았을라나?”
“아마도 그럴 겁니다.”
“영아는... 성군이 될 수 있을까?”
“그럴 것이옵니다. 이미 자질이 보이옵니다.”
“그렇지...”
잠시 하늘을 보던 소율기가 쓴 웃음을 지었다.
“영이가 양위를 받기 전 모든 일을 끝내고 싶었는데... 결국은 그 아이가 짐을 짊어지게 되었어.”
“차라리 양위를 좀 더 늦추시는 건...”
진금이 말하자 소율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그저 권력에 대한 탐욕이 될 뿐이야. 영이가 보위를 물려받은 후 어려울 때 자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면 도울 수는 있어도 계속 권력을 잡고 놓지 않는 것은... 그거야 말로 망국의 길이지.”
“맞는 말씀입니다.”
정이찬의 말이었다.
“놓을 때는 놓아야 하지요. 하아... 소신 또한 관직을 그만두어야 할 텐데...”
“그럴 수는 없지. 영상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지.”
“전 소가 아닙니다.”
“당연하지. 소는 늙어 일 못 하면 잡아먹지만 영상은...”
소율기가 정이찬의 위 아래를 훑어본다.
“몇 근 안 나오겠네. 먹을 게 없어.”
“무슨 소립니까? 제가 요즘 살이 얼마나 쪘는데.”
“살 빼.”
“싫습니다!”
한동안 소율기와 정이찬이 투닥거렸다.
“그나저나 영상은 요즘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예. 그 가극이란 것을 만들 수 있는 소설? 그걸 써 보고 싶습니다.”
“가극이라... 소설이라...”
얼마 전 조선 최초의 극장 국예원에서 열린 가극이 성황리에 끝났다. 소율기도 몰래 변복을 해서 봤던 것이었다.
“그것도 좋은 일이지.”
소율기는 자신도 왕위를 물려주며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며 살자는 생각을 했다.
‘그럼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미래 베끼기네.’
소율기는 가끔 자신이 대체역사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그건 아닌 현실이었지만... 어쟀든 대체역사소설 속 주인공들은 작가의 설정에 따라 별의 별 능력을 다 가졌다.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무공을 가지거나, 천재거나. 하다못해 능력이 없으면 양귀비 재배라도 잘 하던가. 하지만 그 어떤 능력을 가졌든 결국 대체역사소설 속 주인공들은 결국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역사를 바꾼다.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현실의 자신도 마찬가지.
‘그래... 내가 이리 역사를 바꿔놓았으니... 다시 되돌릴 수 없다면 최대한 미래의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 낫겠지.’
소율기도 책을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그건 양위룰 한 다음에 결정하자.”
‘예?“
“아, 아니야. 그나저나... 2년 뒤는... 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설레이는군.”
소율기의 말에 정이찬과 옥향, 무진, 진금도 미소를 지었다.
* * *
이영이 20세가 되었다. 아직 새로운 궁은 완공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군주는 새로운 궁에서 나오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경복궁이 아닌 아직 이름도 짓지 않아 신궁이라 불리는 궁에서 양위가 이루어졌다.
“세자서하 납시오!:”
무관의 큰 목소리. 아마도 이영이 마지막 듣게 될 세자저하란 말이 될 것이었다. 새로운 왕은 검은 색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는데 옷에는 금실로 사신이 수놓아져 있었으며 가슴 복판에는 붉은 비단을 둥글게 덧대고 삼족오를 수놓았다. 머리에는 신라 금관과 같은 형태의 금관을 썼으며 역시 요대도 금대로 화려하게 장식이 된 것이었다. 당당한 차림의 이영은 태극, 삼태극,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아래 쓰고 있는 금관보다 더 크고 화려한 금관 앞에 섰다, 이 금관은 직접 쓰는 것이 아닌 군주의 상징으로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될 것이었다. 그 금관 옆으로는 옥새와 청동거울, 청동 방울이 있었다. 이는 옛것을 따른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있었는데 바로 소율기의 무기인 너클이었다. 이 너클은 운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늘에서 온 돌. 이만한 군주를 나타내는 상징도 없기에 하나의 군주의 신물로 정한 것이었다. 양위의 상징으로 이 너클을 소율기가 직접 이영에게 전해 줄 계획이었다.
그렇게 양위와 등극식이 끝났다. 소율기가 이영에게 보위를 물려 줄 때 이영은 소율기에게 작게 말했다.
“어머님. 소자 이 나라를 제국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옵니다.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런 나라를 만들겠사옵니다.”
이영의 말에 소율기는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리고 양위를 한 날 밤...
“별이... 아름답구나.”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이 세상을 이끄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리 생각하니 조선에서의 삶이 정말 꿈과도 같았다. 그리고...
“장군님...”
이순신이 유독 더 생각나는 밤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 그때 가면 장군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때였다.
“아이고! 전하 아니 선장 아니 두목... 에라! 아무튼 무슨 벌써 고민이십니까? 앞으로 살 날이 구만리도 더 남으신 분이. 이젠 유유자적 살 날만 남으셨으면서요.”
돌아보니 복서단 사람들이었다.
“쯥! 왕 자리 내려놨다고 벌써 선장이니 두목이니 그러는 건가?”
소율기가 가볍게 책망하자 모두들 크게 웃었다.
“하하핫! 솔직히...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습니까요? 왕 노릇 하시느라. 우리도 팔자에 없는 벼슬아치 노릇 하느라 힘듭니다. 그나마 선장님? 두목님? 아무튼. 이젠 그런 놀음 내려놔서 홀가분해지셨지만 우린 아직입니다요. 그래도 오늘만이라도 복서단답게 놀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소율기도 크게 웃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아 그 놈의 왕 노릇 하느라 힘들었네. 놀아 보자!”
그 말에 모두들 환호하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의 웃음소리는 새로운 희망의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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