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신음하는 조선.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주상전하 천세. 천세!”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 선조가 죽고 세자인 임해군이 등극한 것이었다.
“역사가... 바뀐 건가?”
소율기는 중얼거렸다. 원래는 선조는 임진왜란 후 10년 동안 더 살았다. 그리고 그 사이 중전이 죽자 새로 왕후를 들이고 아들까지 보았다.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원래의 역사보다 일찍 죽었다. 당연히 인목대비도 없고 영창대군도 태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오래 살지...”
소율기는 한숨을 쉬었다. 최소한 임해군보다는 선조가 낫기 때문이었다. 전란 중에도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킨 자가 임해군이었다. 오죽하면 조선의 백성이 임해군 때문에 왜군에 붙기까지 했을까... 광해군이 살아있어 세자가 아닐 때도 그랬다. 세자가 된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 위에 선조가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야말로 조선 안에서는 위에 아무도 없는 위치에 서게 되었으니...
“큰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이순신의 피로 지킨 나라였기에 소율기의 걱정은 더 컸다.
* * *
소율기의 일상은 보통 사람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조금 달랐다. 우선 소율기는 여인으로서 애매한 위치였다. 본디 같으면 소율기는 이순신의 측실이었다. 하지만 소율기의 위치가 문제였다. 전란이 끝난 후 진린은 명황제에게 상주를 하여 소율기에게 관직을 내리게 했다. 남해백 조선수군도독. 이것이 소율기에게 내려진 관직이었다. 조선도 그렇고 명나라도 그렇고 여인에게 이런 관직과 관작을 내린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사실 이건 어느 정도 소율기를 달래는 목적도 있었다. 소율기는 유명한 해적이었다. 그런데 두 가지 일. 즉 전란과 이순신과의 만남이 해적활동을 그만두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란은 끝났고, 이순신은 죽었다. 그러니 다시 해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었다. 더욱이 이번 전란을 통해 큰 싸움의 경험을 많이 쌓았다. 가뜩이나 무서운 해적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경험인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해적활동을 하지 말라달라는 달래기용인 것이었다.
명황제의 이런 관작과 전란 중 이순신과 소율기의 특별한 관계를 인정해 이순신의 가문에서도 소율기를 인정했다. 그렇다고 있던 조강지처를 내칠 수도 없고, 그것은 소율기가 원하지 않았다. 결국 이씨 문중은 소율기를 또 하나의 정실로 인정했다. 이것은 선조가 권유한 것이었다. 그야 말로 선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순신에게 해 준 일 두 가지 중 하나인 것이었다.
“영아.”
소율기가 어린 이영을 불렀다. 소율기는 한양 변두리의 작은 기와집에서 아들인 이영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양 근교나 좀 더 멀리 간 곳에서 조용히 살 생각이었지만 이영의 교육 때문에 한양에 사는 것이었다. 물론 20세기와 16세기가 다르다는 것을 잠시 간과한 소율기의 실수였기만... 조선에 오래 살면서 대한민국에서의 기억은 많이 잊을 만 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전생 회귀한 영향인 듯 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소율기는 지금 한 아이의 어머니라는 것.
“어머님!”
이영이 뛰어왔다.
“하하핫! 도련님이 선장님을 쏙 빼닮았습니다.”
무진이 껄껄 거리며 웃었다.
“무슨 소리! 나리를 닮았지.”
소율기의 말에 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영은 누가 봐도 소율기를 쏙 빼닮았지만 소율기는 항상 이순신을 닮았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거 참... 말은 바로 합시다요. 도련님 다 크시면 계집들이 침을 흘리고 볼 겁니다요. 기방에라도 가봐. 기생들이 다른 손 다 제쳐두고 달려들게 분명하지.”
“이놈! 애 듣는 앞에서!”
무진을 혼내는 소율기였지만 이영이 잘 생겼다는 말이 기분좋은지 크게 화는 내지는 않았다.
“에이... 아직 들어도 .모르실 나이입니다. 아무튼 통제사 나리 닮았으면 어디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 나리야 말로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잘 생기신 분이신데. 금동에 반안이 와봐라. 나리만 할까.”
금동과 반안은 중국의 전설이 미남이었다.
“아니 그... 에고 그만둡시다.”
결국 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소율기가 처음 이순신을 만나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장군님 정도로 생겨야 하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콩깍지가 씌운 것이었다. 다만 그때는 사내 행세를 하던 때라 이미 넘어간 마음을 그렇게 말한 것이었으리라.
“그만두긴 뭘... 그래그래. 영아. 왜?”
이영이 소율기에게 매달리자 함박 웃으며 이영을 안아주는 소율기였다. 소율기는 자신의 전생이 여인이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여인이 된 것을 절망하고 부정했지만 만약에 사내였다면 이순신을 만나고, 이렇게 아이를 얻지 못 했을 것이었다.
“그리 좋으십니까?”
“너도 애 낳아봐라.”
“또 왜 그러십니까? 사내가 무슨 애를 낳습니까?”
그렇게 소소하게 투닥거릴 때였다. 문으로 정이찬이 들어섰다.
“아니 이찬형님? 왜...”
무진은 막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정이찬의 표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란 중에 복서단의 사람들이 큰 공을 세웠지만 관직을 받은 사람은 정이찬 혼자였다. 소윩야 여인이라 당연히 관직을 받지 못 했다. 비록 명황제가 관직과 관작을 내려주었지만 그건 말 그래도 명예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출신이 미천하다하여 받지 못 했다. 다만 정이찬만이 반가의 후손이라 관직을 받은 것이었다. 처음에 정이찬은 관직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조정의 일을 알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율기의 설득으로 관직에 나선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소율기도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놈의 나라 왜 전란 중에 망하지 않은 건지...”
정이찬이 계집종이 가져다 준 물을 한 사발 들이켜고는 말했다.
“전에 선장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통제가 나라께서 이 조선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셨으면 좋겠다고.”
“뭐... 그런 말은 한 적 있지. 하도 답답해서. 물론 나리께서는 절대 안 하실 일이지만.”
“아무튼 그 심정이 제 심정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군.”
“무슨 일은... 그냥 매양 벌어지는 일이지요.”
“임해군 그자가 또 뭔 짓을 저질렀나?”
소율기는 임해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광해군이 왕이 되었다면 어떻게든 힘을 보태줬을 것이었지만 임해군은 말 그대로 인간 말종이었다.
“뭔 짓을 안 저지르면 임해군이 아니지요.”
정이찬도 집에서는 왕을 임해군이라고 불렀다. 소율기나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누가 들으면 큰 일을 당할 말을 하는 할 수 있는 것은 소율기의 집 안의 사람들이 모두 복서단이기 때문이었다. 집 안의 종들도 사실은 진짜 종이 아닌 복서단 사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임해군이 왕이 된 지금의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 임해군 그 놈이 이번에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데?”
“그 망할 놈이 글쎄 연산군 시절에 있던 채홍사를 다시 만들겠다고 하지 뭡니까.”
“채홍사? 미친 거 아냐?”
소율기가 어이없어 한마디 했다.
“어머님. 채홍사가 뭔가요?”
이영이 묻자 소율기가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란다.”
그리고는 눈짓을 하니 저 멀리서 지켜보던 진금이 급히 달려와 이영을 안았다.
“자자. 도련님 오늘은 저랑 놀아요.”
이영을 안고 가는 진금을 보며 정이찬이 물었다.
“자네 부부는 애 안 생기나?”
“글쎄올시다... 매일 애는 쓰는데 애는 안 생깁니다만...”
“허... 자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아니 이차 형님! 무슨 그런 말씀을?”
무진이 펄쩍 뛰었다.
“그럼 금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가?”
정이찬이 짐짓 놀란 표정을 하자 무진이 허둥댔다.
“아, 아니 그것도 아니고요...”
“정군사. 무진이 그만 놀리고... 대체 이 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소율기는 한숨을 쉬었다.
- 작가의말
실제로 이순신 장군은 미남은 아니라고 하네요. 관상이 복이 없게 생겼다고... 지금 우리가 아는 현충사에 걸린 영정은 화가가 상상으로 그린 거죠.
사실... 젊어서부터 갖은 풍상 다 겪고, 평생 토사곽란 등으로 고생하신 분의 풍채가 좋을 리는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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