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조선의 여왕.
소율기는 고민했다. 일단 소율기는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지식을 되살려 여러 물건도 만들어 냈다. 물론 딱 의적 복서단 때 만든 물건이 그 한계였다. 그나마 전란 때 신기전처럼 화약을 넣은 대장군전 만든 것이 그 이상으로 한 일 정도일까.
“흐음... 이거 머리 좀 깨지도록 굴려봐야겠는 걸.”
결국 소율기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생각이 날 것이기에. 게다가 지금은 다른 일이 먼저였다.
“무엄하다!”
명의 사신 초섬은 길길이 날뛰었다. 원래 조선에서는 명의 사신이 오면 극진하게 대접했다. 국경에 들어서면서부터 극진하게 대접하며 영은문에서 조선의 대신들이 나와 맞이했다. 또한 궁에 이르면 조선왕이 나와서 절을 하며 맞이했다. 그런데 그게 전혀 없었다. 조선의 국경을 넘어서자 밥은 먹여줬고, 잠은 재워줬다. 하지만 그냥 밥에 간장 하나. 잠은 지방 관청의 쪽방. 그 전에 왔던 사신들이 말하던 가는 곳마다 산해진미에 밤마다 기생 끼고 자는 일은 없었다. 원체 살집이 있던 초섬이 한양에 오니 홀쭉해 질 정도였으니... 초섬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대명황제폐하의 사신이 왔는데 어디서 감히 앉아서 맞이하느냐!”
“그럼 누워서 맞이하나?”
소율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얏!”
초섬은 이를 갈며 주변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조선이야 왕이 바뀌었고, 그 왕이 해적출신 계집이라 그렇다지만 조선의 대신들은 계속 그대로일 테니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이라 여겨서였다. 하지만 모두들 눈을 돌려버렸다.
“이익!”
이젠 대놓고 이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이 없었다.
‘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당황스런운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선의 대신들이 저런 반응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건 조선의 탓이 아니었다. 바로 명나라의 탓이었다. 지금 초섬이 온 이유는 소율기가 양위를 받은 것을 꾸짖고, 다시 임해군에게 왕위를 돌려주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유가 그러니 아무도 초섬을 대하는 소율기의 태도에 뭐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초섬의 편에 서서 말을 한다면 그것은 소율기에게 왕좌에서 물러나라는 말이니 곧 반역인 것이었다. 이미 조선은 각지에서 작지만 반란들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나라였다. 그 말은 반역에 대해 아주 민감해진 상태란 것이었다. 물러나란다고 물러날 소율기라면 걱정없이 초섬의 편에 서겠는데 물러나란다고 물러난 소율기가 아니란 것이었다. 초섬의 편에 선 순간 목과 머리는 이별을 할 것이고, 3족은 노비로 떨어질 것이며 모든 가산이 몰수될 것이었다.
사실 명은 조선의 사태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그저 임해군이 폭정해서 잠시 들고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감히...”
초섬은 다시 한 번 이를 갈고 말 했다.
“조선이 이리 나온다면 앞으로 조선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할 것이다! 조선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이 있다는데 계집이 왕이 되더니 나라가 망하게 생겼구나!”
그 말에 소율기의 눈이 번뜩였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라!”
화적 시절부터 많은 싸움을 했고, 사람도 숱하게 죽인 소율기였다. 아무리 여인이라지만 그런 소율기의 기세는 그저 글이나 읽고 떠받들어지기나 하던 초섬이 당해낼 것이 아니었다. 소율기가 몇 걸음다가서자 그만 비칠비칠 뒤러 물러서다 오줌을 지려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남았다.
“무, 무엄... 무엄하다! 폐, 폐하겠옵서. 네게 높은 벼슬을 내려주셨는데 어찌 이리 불충한가!”
마지막 힘까지 짜내 한 말이었다.
“아! 그래 그거 잘 이용했지. 아주 유용했어.”
“그, 그런 은혜를 입고서 어디 감히...”
“그게 은혜였나? 명나라 쳐들어간다던 왜국이랑 대신 싸워준 은혜은 어떻게 할 건데? 감히 대신 싸워주는 나라에 군대보내 약탈한 것들이 누군데.”
“뭐야!”
초섬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실 소율기의 말은 상당히 억지였다. 하지만 일단 왜국이 조선을 침략한 명분은 명나라를 친다는 것이었고, 명군이 원군으로 와 조선 민가를 약탈한 것도 사실이니 어떻게 말을 하냐에 따라 반박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감히... 감히...”
초섬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감히... 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줌싸개 너! 나도 명나라에 은혜 베풀었어.”
“무, 무엇을 말인가!”
내가 꽤 이름 좀 날리던 해적인 것은 알고 있지?“
그말에 초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새삼 다시 기억이 났다. 상당한 악명을 날리던 해골해적 복서단의 선장이 소율기임을.
“그때 내가 명나라 제대로 약탈했다고 생각해봐.”
“그... 그건...”
“명나라 엄청 혼란스러워졌을 거야. 안 그래?”
“그, 그렇지 않다! 우리 대명은...”
물론 초섬이 말하려는 것처럼 복서단이 무슨 짓을 하던 명나라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소율기는 초섬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꺼져라! 꼴을 보아하니 오줌에 이어 똥 까지 싸겠구나! 난 얼마든지 네놈 목을 잘라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소율기의 호통과 무진이 슬쩍 빼 보이는 칼에 초섬은 그만 다시 오줌을 지리며 대전에서 도망쳤다.
“쯧쯧... 명나라도 국운이 다 되었군. 저런 자를 사신으로 보내다니.”
혀를 차는 소율기. 그런 소율기를 대신들은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대신들을 보며 소율기가 말했다.
“과인은 조선의 왕이다! 여왕이다! 잊지 마라! 너희가 충성을 바쳐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조선의 여왕인지 아니면 타국의 군주인지.”
소율기는 서늘한 눈으로 대전을 쓸어보았다.
* * *
명의 사신이 소율기를 추궁하고 왕좌에서 내리려 왔다면 왜국의 사신은 다시 통교를 하기 위해왔다.
“거 참... 얼굴가죽이 두껍고도 질기구나. 온 몸을 갑주투구로 가려도 얼굴은 안 가려도 되겠구나. 천하의 명검도 흡집하나 못 내겠어.”
왜국의 사신을 보며 소율기가 대놓고 한 말이었다. 침략을 해놓고는 다시 교류하자고 오다니... 하지만 어느 정도의 교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소율기였다. 우선 소율기가 전란 중에 열심히 끌려가는 조선인들을 구했지만 다 구하지는 못 했으니 그들을 돌려받아야 했다. 문제라면 이미 임해군이 끌려간 조선인을 돌려받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이면 문제없지만 어떤 영주가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임해군으로 인해 조선인을 돌려받는 것이 완전히 꼬여버린 상황.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기는 해야 했다. 또한 조선은 전란으로 많은 논밭이 유실이 되었다. 식량이 모자란 것이었다. 반면 왜국은 관서지방 아래는 기후가 좋아 2모작도 하는 상황이었다. 즉 쌀이 많이 생산된다는 것이니 그 쌀일도 사와야 했다. 그러니 명의 사신과는 맞이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고, 뻔뻔하게 다시 교유하자고 오는 것을 웃는 얼굴 꾸며가며 맞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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