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맨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았다.
여태껏 한 게 아까웠고, 7번부터 8번까지의 미션이 별로 나쁜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10번, 남을 칼로 찌르는 거다. 엄마에게 욕하는 미션도 쩔쩔맨 내가, 과연 남을 칼로 찌를 수 있을까.
목요일 알바 친구 혁수가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관뒀어. 관두기로 했어.”
주어는 없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알 거 같았다. 돼지게임이다. 내게 게임을 추천한 혁수는 5단계를 앞두고 진척이 없었다. 다섯 번째는 부모님께 욕하는 미션이다.
“못하겠어······. 지금 단계가 이 정도인데, 나중엔 더 어렵겠지”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난 아직 게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말없이 다가가 그저 혁수의 등을 몇 번 두드릴 뿐이었다.
“넌···. 계속하고 있어?”
난 대답 대신 눈을 감고 살며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가게로 들어가는 나를 향해 혁수가 소리쳤다.
“대단해, 진짜! 끝판까지 깨보라고!!”
마라톤은 일종의 오래달리기라고 봐도 된다.
대신 10분, 30분을 달리는 게 아니라 최소 두 시간 이상 쉬지 않고 뛰어야 한다.
가장 최근 오래달리기를 한 건 역시 군대. 공군의 훈련 중 ‘경무장’이란 게 있는데, 총을 앞에 세운 채 수 킬로미터를 달리는 내용이다. 총 무게는 불과 몇 kg 나가지 않았지만 난 1km 정도를 남기고 포기했다. 오기로 버티는 화생방, 암기하기만 하면 되는 총검술과 차원이 달랐다.
“교관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담당 교관이 그날 저녁 연병장에 우릴 모아놓고 말했다.
낙오자가 내무반 동기 중에도 20%가량이나 돼 약간 마음이 놓였으나, 마냥 어질기만 해 보이던 담당 교관의 차가워진 표정을 보곤 다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낙오자들은 체련복을 입고 30분이나 운동장을 돌았다.
그런 내가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을까?
물론 내 체력이 엄청 안 좋은 건 아니다. 축구할 때도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녀 ‘악바리’라는 별명도 종종 들었다. 체력 좋은 축구 선수들은 경기 중 20km 정도를 달린다고 들었다. 물론 그건 프로 선수의 얘기다.
밥을 샌드위치로 때운 후 집 근처 안양천으로 나갔다. 바로 풀코스를 도전하는 건 무리고 차츰 단계를 올려보기로 했다. 처음 도전 코스는 10km. 10km가 체감 가지 않는 사람은 신도림에서 신촌 정도라고 가늠하면 된다.
“10km······. 일단 천천히 완주하는 걸 목표로”
반바지에 가벼운 운동화, 암밴드까지 매고 시계 버튼을 눌렀다.
시작은 경쾌했다. 처음부터 체력이 고갈될 것 같았으나 왕년의 ‘악바리’ 별명이 금세 사라지진 않은 거 같았다. 1km를 6분 정도에 통과하고 페이스를 조금씩 올렸다.
그러나 벌써 조금씩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살짝씩 헐떡이고 있는데 옆에서 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호흡하면 안 돼. 코로만 쉬니까 힘들지”
나시에 모자를 쓴 한 아저씨가 나란히 달리며 호흡법을 지도했다.
“코는 숨이 오고 가는 양이 적으니까. 효율적이지 못해. 보통은 이렇게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고. 다시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는 걸 반복하지”
그리고 아저씨가 제안한 호흡법은 네 걸음에 들이쉬고 다시 네 걸음에 뱉는 패턴이었다. 무질서하게 하는 것보단 이렇게 나름의 규칙을 정하고 하는 게 훨씬 쉽다고 했다.
“그럼 잘 해보라고”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린 아저씨가 앞으로 멀어져 갔다. 분명 쉰도 넘어 보였지만 체력만큼은 분명 나보다 위였다.
그렇게 달리고 시계를 보자 1시간 5분이나 됐다. 검색해보니 여자 평균 기록이 그 정도라고 했다. 전력으로 뛰진 않았으나 무릎이 후덜덜 떨렸다. 신기하게 중간 정도부터는 배가 고팠다.
동시에 난 8번 미션도 준비했다. 8번은 복싱 라이센스다.
“계세요?”
토요일 낮 복싱 체육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계세요?”
사무실을 들여다봐도, 화장실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만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특급 사랑이야.~”
귀에 익은 트로트 멜로디를 따라 링 뒤쪽으로 돌아가자 빨간 구식 카세트 하나가 보였다. 분명 초등학교 시절 저런 물건이 집에 있었다.
“뭐야?”
갑자기 발아래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랐다.
“등록하게?”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목침을 베고 링 바로 옆에 누워 있었다.
“네? 네···.”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알 수 없는 냄새가 풍겼다. 그러고 보니 체육관 곳곳에선 쩐내가 깊게 배 있었다.
“가자, 사무실로. 난 조칠수 관장이니까, 조 관장님~ 부르면 돼”
“네···.”
볼펜으로 정보를 기재하는데 계속 관장이 킥킥 웃었다.
“오, 권 씨네. 권투를 할 팔자구먼?”
“독산3동? 야~ 기어서도 올 거리네. 맨날 와”
관장은 지원 동기를 적을 때 살짝 진지하게 변했다.
“프로가 되고 싶어?”
“네, 프로 라이센스요...”
“프로 아무나 하는 거 아닌데···. 너 주먹 꽉 쥐어 봐”
관장의 말에 오른 주먹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아···. 주먹이 좀 작은데···. 뭐 작은 주먹이 매운맛은 있지. 너클 부분이 평평한 게 때리기엔 좋네”
입단 서류를 다 작성하자 관장이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줄넘기였다.
“일단 천 개”
“천 개요?!”
처음 각오는 엄청났다.
매일매일 체육관을 나가고, 달리기 10km를 하려 했다.
그러나 줄넘기 1,000개를 간신히 하고 나자, 종아리에 알이 배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뭐야, 너네 돌아가면서 왜 그렇게 죽어 가?”
가게에서 점장 누나가 혀를 채며 혁수와 나를 바라봤다. 게임을 관둔 혁수는 그나마 표정이 좀 나아져 있었다.
첫 주엔 마라톤 두 번, 체육관엔 세 번 나갔다.
두 번째 주엔 마라톤을 세 번, 체육관에 두 번 나갔다.
“너 인마, 프로 하겠다는 놈이 주에 두 번 나와? 다음 주부터 최소 네 번이야. 알았지? 안 나오면 너 여기 못 다녀”
그런 관장을 바라보는 내게 코치 형이 한마디 던졌다.
“프로 하겠다고 쓰는 사람 거의 없거든. 넌 죽었어.”
코치 형은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올랐었는데, 어느 날 범죄에 잘못 엮여서 꿈을 접어야 했다. 소매치기를 쫓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한참 도망가던 소매치기가 핸드백을 코치 형 쪽으로 던졌다.
“저 사람이에요!”
여자의 말 한마디에 코치 형은 범죄자가 돼버렸다. 카메라가 없던 곳이라는 게 문제였다.
다행히 초범 판명을 받아 집행유예 1년에 그쳤지만, 그래도 상비군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3주가 되자 마라톤도 줄넘기도 조금씩 할만해 졌다. 체육관에선 줄넘기와 잽 연습만 했다.
3주가 끝나는 주말엔 15km 달리기에 성공했다.
8월 중순엔 동호회에서 하는 마라톤에 참가했다. 야간에 하는 10km 대회였다.
“준비···. 출발!!”
30명 정도가 출전했는데 내 순위는 그중에서도 하위권이었다. 그중 10명은 풀코스 완주자였다.
“오수야, 나만 따라와!”
“네? 부탁해요!”
아저씨의 등만 바라보며 달렸으나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내게 호흡법을 알려준 아저씨가 이 동호회였다.
선배들보단 뒤처졌지만 그래도 10km를 40분대에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마라톤 풀코스? 계속 달리면 언젠가 완주할 수 있어. 넌 어리잖아”
“그래도, 좀 빨리해보고 싶어서요”
그러자 음료수를 나눠주던 동호회장님이 수건을 내 목에 걸어주며 말했다.
“그러면 한 번 10월 마라톤을 목표로 해봐. 제일 큰 대회 나가보는 거지”
“제일 큰 대회요?”
이어진 회장의 말이 큰 산처럼 다가왔다.
“춘마. 춘천마라톤 한 번 나가 봐”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