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편 – 대격돌
연재 시간은 월, 수, 금, 토 오후 7시 입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색깔과 어울리지 않는 성을 가진 핑크녀석의 중성화 수술을 했다.
색에 성별이 정해진 것이 아닌데 남녀차별이라고 꼬투리 잡히는 거 아니겠지?
‘왜 핑크가 여성의 색이라고 생각하시지요?’
‘저는 여성의 색이라고 생각한적 없습니다. 그 증거로 저 핑크 오크를 보십시오. 저는 핑크에 어울리게 중성화를 시킨 것이지 여성화를 시킨 것이 아닙니다. 핑크는 남성의 색도 여성의 색도 아닌 양성의 색인 것입니다.’
완벽한 답변이다.
양성평등 위원회 같은 데서 부르면 저렇게 이야기해야지.
잡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느덧 왕궁 앞 쌍둥이 수정탑 앞에 도착했다.
아까는 핑크색 오크들 뒤통수 치다가 괜히 어그로를 끌었지.
이번엔 자연스럽게 무리에 들어가서 흐름에 몸을 맡겨 싸움 없이 수정탑까지 올 수 있었다.
공성을 중지 했는지 쌍둥이 포탑 사거리 밖에 오크들이 도열해 있었다.
“잠깐만 지나갈게요. 길 좀 열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수정탑 사거리 안으로 전진을 안 하는 관계로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나섰다.
피아 식별을 뭘로 하는지는 모르지만 수정탑은 오크만 공격하는 모양이다.
명중률 100%, 오발률 0%, 수정탑 클라스 보소.
비리 없이 클린한 이세계 방위산업!
오크 사이를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라세티아 진영으로 들어가자 초긴장상태로 대치하던 양쪽 군대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릴리스! 어디 있어?”
일단 미드를 맡겼던 릴리스를 찾았다.
아무리 나의 측근이라지만 이 사단이 난 책임을 추궁해야 하지 않겠나?
나는 공과 사가 명확한 사람이라고.
잠깐, 이거 책임소재가 어떻게 되는 거지?
국왕이 고용한 용병이 맡고 있던 미드를 넘겨 받아 그대로 다시 릴리스에게 넘겼다.
릴리스가 미드 수성을 실패했으면 릴리스를 거기에 앉힌 내 책임인가?
아니지,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멀쩡히 미드를 잘 막고 있던 관우를 좌천시킨 국왕의 책임 아닌가?
하도급 관계가 복잡하니까 책임소재가 애매해졌잖아!
이런 내가 현실 세계의 나쁜 관행을 이세계에 가져와버렸잖아?
“아다스님. 돌아 오셨군요.”
나를 맞이하는 릴리스는 온몸에 상처를 입어 피투성이였다.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내가 입혀준 망토가 검은색으로 물들었을 정도였다.
“컴플리트 힐! 릴리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일단 릴리스의 상처를 치료하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물리방어 망토까지 입은 릴리스가 어떻게 이 지경으로 당할 수가 있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라세티아의 용사 아다스냐?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다르군.”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릴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손톱을 세웠다.
릴리스를 이렇게 만든 게 저 녀석이냐?
분노를 가라앉히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선명한 빨강, 에누리 없는 255, 0, 0의 RGB 값.
다른 붉은 오크와 비교해도 눈에 확 띄는 색 덕분에 불사대마왕이라 불리는 레지스탕스 오크의 공격대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과 비교하면 건장한 체구였지만 오크 치고는 왜소한 체격이었다.
다른 오크와 달리 치열도 가지런하고 착실한 인상의 얼굴이었다.
사각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안경을 쓴 것도 이상했지만 더욱 특이한 것은 복장이었다.
검은색 옆 선이 들어간 추리닝 바지와 가슴에 로고가 박힌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축구단 아니 게임단 유니폼인데?
“너야말로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너무 다르잖아? 전쟁 중이라는 자각이 있는 거냐? 그 헐렁한 유니폼은 뭐야?”
레드는 무언가 알았다는 듯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표정하나 몸짓하나 마다 느껴지는 여유로움에서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내가 주인공인데!
나도 저런 카리스마를 가지고 싶었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
보고 배우자.
이런 건 디테일이 중요한데, 어디 캠코더 없나?
“이세계에서 왔다고 해서 뇌가 좀 말랑말랑한 녀석인줄 알았더니 자기가 온 세계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막힌 녀석이었군. 다들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사는 법이지.”
“그래 나는 그렇다 치고, 전쟁 중에 웬 유니폼이냐고?”
“말귀를 못 알아 듣는 녀석이로군. 후훗”
후훗이 아니잖아.
레드의 여유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내가 부들부들 하고 있자 레드가 안타깝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이 옷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입었을 뿐이야. 말했잖아?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산다고.”
니 이야기 하는 거였냐?
원래 세계의 트라우마가 깨어날 것 같으니까, 자기 이야기 할 때 남 이야기 하듯 하지 말아줄래?
“인간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이제 오크들이 중심이 되어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을 것이다.”
“라세티아 인간들이 막장인건 솔직히 인정! 하지만 내가 용사야 니가 아니고. 어디 오크가 주인공 행세를 하려고 들어?”
레드가 점퍼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봉을 꺼냈다.
“인간은 이미 충분한 기회를 가졌어. 그리고 이미 라세티아를 이끌어나갈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지. 용사가 사라진다면 인간들도 희망을 잃고 현실을 받아들이겠지.”
레드가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우자 작은 봉에서 붉은 광선검이 튀어 나왔다.
오크 제다이냐?
릴리스가 당한 것도 이해가 가는군.
그래 봤자 이 승부는 이미 내가 이겼다.
광선검이 빨간색이면 악당인 거 알지?
“덤벼라! 불사대마왕의 명성도 오늘까지다. 네 별명 때문에 묘비 문구가 아이러니해 지겠구나.”
레드의 신호에 맞춰 커다란 방패를 든 하얀 오크가 먼저 쌍둥이 수정탑 안으로 뛰어들었다.
타워 다이브의 정석, 탱커가 포탑 어그로를 끈다!
이거 시간만 끌면 수정탑이 딜 다 해주겠는걸?
수정탑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이 하얀 오크의 방패에 맞아 불꽃을 튀겼다.
이 소리가 전쟁의 북소리처럼 신호탄이 되어 오크들이 일제히 진격했다.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오크들에게 맞섰다.
“릴리스! 레드는 내가 맡을 테니 다른 병사들을 도와줘!”
“아다스님, 조심하세요! 저 녀석 엄청나게 강해요!”
언데드킹과도 맞장 떴던 릴리스가 피투성이가 됐을 정도면 물론 엄청나게 강하겠지.
잠깐, 릴리스도 못 이긴 녀석을 육탄전으로 내가 어떻게 이기지?
힘은 물론 스피드도 릴리스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데?
아, 또 깜빡 했네.
아이템빨!
나에겐 전설의 완드가 있지!
그런데 저 녀석도 비슷한 거 들고 있잖아?!
“에라 모르겠다!”
불리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주춤거리지 않았다.
여태껏 살아오며 이것저것 재다가 많은 실패를 맛보았지.
난 너무 생각이 많았던거야!
무상무념 아무 생각 없이 뛰어들 때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쌍피를 버렸는데 상대가 먹고 쌀 수도 있잖아?
비유가 좀 쓰레기 같지만 나의 논지는 살아있다.
“내가 주인공이거든! 결정적인 순간에 운이 좋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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