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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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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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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멸의 비애 (3)

DUMMY

[너는 누구니?]


귀에 때려 박히는 굉음에 이찬이 뒤로 발작하듯 뛰어 도망쳤다.


“크윽.”


지각을 대차게 긁으며 겨우 밀려가는 속도를 늦춘 이찬이 영혼도, 신도,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미지의 존재를 그윽이 응시했다.

이찬이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생김새를 분석했다.


‘평범한 사람의 신체에 보라색이 덕지덕지 붙은 검은 드레스.’


지금까진 너무나도 평범한 인간의 형태였지만, 비밀은 머리카락에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일제히 몇 갈래로 갈라지더니 이내 서로 엉겨붙어 송곳처럼 뾰족한 모양새를 여럿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중 둘은 키트리노스를 쥐어짜듯 콱 움켜쥐고 있었고, 다른 여섯 가닥은 이찬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미세한 신호라도 주어지면 이찬을 꿰뚫을 듯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찬과 머리카락의 치열한 신경전을 깬 건 결박된 키트리노스였다.


“헤카테!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것이냐! 넌 분명··· ···.”


헤카테.

그 순간 이찬의 머릿속에서 저것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기 시작했다.


「헤카테.

그리스 로마 신화, 다시 말해 <올림포스>의 여신으로 관념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많은 양의 격을 소유하고 있다. 주술과 마법. 달과 밤. 그림자와 영혼. 이외에도 여럿 다양한 능력을 부릴 수 있는 신이다. 오래 전 마지막 행동자가 세상의 너머로 사라지자 그를 따라 간 듯 사라진 신이다.」


이찬에게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화에 박식했기에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데다가 저런 흉흉한 기운을 힘든 내색 하나 않고 내보내고 있다는 것부터 그녀의 능력이 전술한 저것과 비슷한 것임을 모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찬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단 하나.


‘마지막 행동자와 함께 사라졌다··· ···.’


행동자의 정체를 아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간 것이다.

이찬은 헤카테에게 던져낼 질문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겨우 몇 가닥 뭉치의 머리카락이 압도적임을 자아내고 있었고, 그랬기에 움직임은 제약당할 수밖에 없었다.


“헤카테, 너는 분명 필리브크랩트 그 녀석과 함께 너머로 간 것 아니었나··· ···?”


키트리노스가 멀어지는 숨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헤카테는 연신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에 답해 주었다.


[그래. 나는 필리브와 함께 《이상》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왜··· ···.”


[왜냐니. 난 거기서 세상의 심연을 봤지. 지구를 비롯한 《현실》, 자신들이 뭐든 다 알고 있다고 지껄이는 자들을 한데 모아 놓은 《관념》. 그것들의 말로와 현실을, 심연과 암흑을 겪었단다.]


헤카테는 초연한 얼굴로 키트리노스를 응시했다.


[나도 너처럼 무지했다면, 세계를 즐길 수 있었을까.]


“넌 내가 이 세계에서 놀고 있는 걸로 보이나?”


[아니지. 제우스의 똥닦개. 너는 세상을 즐길 자격 따위 없는 놈이야. 진정 세상을 즐기는 녀석은.]


헤카테의 시선이 잠깐 이찬에게 머물렀다.


[그런 놈들이지.]


“이찬! 날 풀어줘라.”


[흠.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 어떻게 네가 주술을 깨고 나올 수 있었을까?]


이제야 헤카테가 이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그래. 아무래도 저 아이가 변수였으려나.]


이찬은 그녀의 시선에 몸이 굳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위압감도 이찬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너는··· ··· 신인가··· ···?”


신화에서도 《관념》에서도 신을 자처하는 이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허나 헤카테는 이찬의 말 뜻을 이해했다는 듯 조소했다.


[역시 재밌어. 대답을 원하니? 짧고 간결하게 말하자면, 아니. 난 신이 아니야.]


“역시.”


이찬이 그럴 줄 알았다며 동조했다.


[그런데 네가 지금 나한테 그렇게 시시콜콜 말을 걸어올 입장이니? 나는 손가락을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너를 죽일 수 있단다. 알고 있잖니?]


맞다.

절실하게 알고 있다. 지금 이찬은 그 누구보다 사선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되려 반문했다.


“과연 손가락을 하나 까딱해서 날 죽일 수 있을까?”


[그건 또 무슨 소리람?]


헤카테가 온화한 말투로 이찬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넌 날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지. 그런데 넌 날 죽이지 않고 있어.”


이찬의 기도가 헤카테에게 닿을 듯 말 듯 아른거렸다.


“다시 묻지. 넌 나를 죽이지 않는 거냐.”


쉬익!


이찬의 몸체가 바람을 가르고 헤카테에게 다가왔다.


“죽이지 못 하는 거냐.”


쐐애액!


이찬의 기도가 빠르게 헤카테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피하지 못할 헤카테가 아니었기에 가볍게 뒤로 한 번 물러나 아슬아슬하게 이찬의 기도를 피했다.

그러나 이찬이 노린 건 헤카테의 목이 아니었다.


‘목을 벤다는 압박을 주어 피하게 만들고, 본 목표를 노린다.’


이찬의 기도가 닿은 곳은.


‘머리카락.’


키트리노스를 움켜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향해 이찬이 기도를 휘둘렀다.


촤아. 카가각!


무언가를 베는 소리는 들렸으나, 그 소리가 명쾌하거나 깔끔하지는 않았다.


‘파묻혔어?’


이찬의 기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파고 들다가 멈춰 버렸다. 잘린 부분은 잘리지 않았던 것처럼 모르쇠로 일관했다.


[겨우 그 정도 힘으로 이 찰랑이는 머릿결을 해치려 한 거니?]


이찬의 옆으로 다가온 헤카테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독자도, 그 누구도 심지어 키트리노스도 들리지 않을 만큼 말이다.


[아직 너무 약해.]


타닷!


「풍화」를 사용해 빠르게 뒤로 물러난 이찬이 다시 기도를 그러쥐었다.


‘빈틈이 보이지 않아.’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약점을 찾으려 노력해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한밤중 불 꺼진 드넓은 방에서 연필을 찾으려는 것만 같다.


‘이판사판이다.’


이찬이 전격을 발현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녀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선사하진 못했다.

중력장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찬의 상상력만 소모될 뿐이었다.

심지어 광개토대왕의 「정벌」과 「유척당지지」마저 그를 배신한 듯 제힘을 내지 못했다.

키트리노스, 다시 말해 제우스의 번개는 너무나도 연약했다. 숙련도가 쌓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찬은 문득 이런 의문이 스쳐갔다.


왜 내가 키트리노스의 격을 발현할 수 있는가. 난 왜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지만 현상황에서 이런 망상은 까딱하면 그저 죽음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했기에 이찬은 망상을 털어냈다.


‘어라?’


모든 격이 힘을 내지 못 하는 상황에서 단 하나. 「한계 돌파」가 이례적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주··· ···약하진 않나?]


헤카테가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 와중에도 키트리노스는 번개를 사용해 헤카테의 머리카락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제우스의 마지막 남은 아이여. 부질없는 짓이다. 넌 이 결과가 어찌되는 죽을 것이다. 그게 네 운명이야.]


“운명은 저항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네가 지금 나를 걱정할 처지인가?”


문득 헤카테가 이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나 이찬은 온데간데없고 흔적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얼핏 ‘도망갔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찬은 지금껏 그 어떤 전투에서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콰아아앙!


헤카테의 뒤에서 굉음과 폭음이 한데 뒤섞여 난무했다.

적잖게 당황한 헤카테가 키트리노스를 꽉 쥔 상태로 날아드는 흙의 파도를 피해냈다. 하지만 그것은 흙의 파도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이찬의 휘두르는 기도였다.

그 능력이 너무나도 강대하여 마치 자연재해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흐아아아앗!”


이번에야말로 이찬이 키트리노스를 감싼 머리카락을 끊어낼 듯 종으로 기도를 그렸다.


촤자작!


이번엔 너무나도 명쾌하고 깔끔한 소리가 기도의 끝에서 발생했다.


‘기연이다.’


본디 한계 돌파란. 그저 신체 능력을 부각하는 격이 아니다.

무디트의 사용 방식이 그것에 적합하고, 또 가장 잘 맞았기에 그렇게 사용했던 것뿐. 격은 그것의 소유자가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린다.

그리고 이찬은 그런 무디트의 한계 돌파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 보았던 것이다.


“고유격 발현. 「한계 돌파」.”


시스템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이었지만, 시스템의 형태가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예컨대 시스템이 이곳에 존재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고유격 「한계 돌파」가 당신의 고유격을 전원 증강시킵니다.”


이찬의 손아귀에 이질적이지만 너무도 익숙한 느낌이 느껴졌다.


「한계 돌파」의 영향으로 고유격 「정벌」이 「정복」으로 변화합니다.

「한계 돌파」의 영향으로 「유척당지지」가 「영락」으로 변화합니다.


“고유격 발현. 「정복」, 「영락」.”


마침내 제힘을 모두 되찾은 광개토대왕의 1격과 2격. 「정복」과 「영락」이 합일되며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뿜어냈다.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초월하라.]


세상에서는 이것을 한계 돌파, 초월이라고 불렀다.


“고유격 발현. 「고적마」.”


광개토대왕의 애마였고, 이제는 이찬의 동료가 된 고적마가 진정한 주인을 찾은 듯 힘차게 부르짖었다.


“가자.”


빠르게 고적마에 올라탄 이찬이 기도에 서린 대왕의 힘을 고스란히 느끼며 헤카테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아!


고막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폭음이 울려 퍼졌지만,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묶인 키트리노스도, 공격의 주체인 이찬도, 공격을 받는 헤카테도 동요가 없긴 매한가지였다.


[흔한 소년만화 같군요. 싸우면서 강해지다니.]


이찬은 들은 체도 않고 계속해서 검격을 이어갔다.

이제는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난 키트리노스도 낙뢰를 퍼부었다.


[거기까지.]


헤카테가 손을 들자 고적마가 공중에 앞발을 든 채 멎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지막지한 낙뢰를 떨어뜨리던 키트리노스도 공중에 양팔을 벌린 채 굳어 버렸다.

멀쩡한 것은 격을 발현한 헤카테와 이찬뿐이었다.


[거슬리니까.]


헤카테가 키트리노스의 어깨를 검지로 건드리자 그의 몸이 점점 석화하듯 잿빛으로 굳더니 이내 이찬을 만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듣는 귀가 많으면 좋지 않잖니.]


헤카테가 이찬으로부터 등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따라오렴. 널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있단다.]


이찬은 홀린 듯 그녀의 발자취를 쫓았다.

이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 발을 옮기는 이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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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멸의 비애 (3) 24.04.12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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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영멸의 비애 (1) 24.04.07 1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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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경계 (6) 24.04.03 18 0 10쪽
118 경계 (5) 24.03.31 19 0 11쪽
117 경계 (4) 24.03.29 14 0 11쪽
116 경계 (3) 24.03.27 20 0 10쪽
115 경계 (2) 24.03.24 1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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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성지화 (11) 24.03.13 22 0 11쪽
109 성지화 (10) 24.03.10 28 0 12쪽
108 성지화 (9) 24.03.08 2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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