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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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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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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성지화 (13)

DUMMY

[위험하다.]


풍백이 저 성지를 보자마자 입 밖으로 내뱉은 감상이었다.

성지의 힘은 분명 신들이 각각 가진 어떤 힘보다 강한 힘이다.

허나 이찬은 풍백의 감정에 의문이 들었다.


“척 봐도 저희 쪽 성지가 더 강한데요? 왜 위험하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지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다. 저 잠재력이 가장 위험하다.]


“잠재력?”


이찬이 되물었지만 풍백은 대꾸하지 않았다.

저 괴물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파지직!


성지와 성지가 서로 맞댄 강역(疆域)에서 상상력의 부조화가 온 듯 일렁이며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당장에는 풍백의 성지가 더 강했다. 아무래도 지구의 상상력에 적응했기 때문임이 분명할 터였다.


[지금 내 성지가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결국 우리 성지가 밀려 점유율을 잃어 갈 것이다.]


“왜··· ···.”


이찬이 더 물어보는 것이 실례인 듯 말을 흐렸다.

허나 풍백과 이찬은 감정의 일부까지도 연결되어 공유하는 사이.

그것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말해 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놈은.]


풍백이 저 멀리 아직 허용 상상력의 부족으로 남자아이의 몸에서 많이 떨어지지 못하는 차크몰을 진하게 응시했다.


[주신(主神)이었다.]


주신.

영웅<하신<지신<천신<주신≤창세신으로 이루어진 계급에서 최상위에 달하는 격을 가진 신으로 주로 한 성단의 주축이 되는 이들을 일컫는다.


위의 이야기는 「오디오 북」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닌 그저 이찬의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에서 끄집어 낸 정보였다.


“저 신이 주신이었다고요··· ···?”


[그래. 대성단 <마야>의 주신이었던 놈은 서서히 설화와 신화의 이야기 전승이 끊기며 상상력이 공급되지 않자 상상력을 얻기 위해 무작위로 타 신들의 상상력을 빼앗아 연명하다 결국 시스템의 통제로 소멸한 신이다. 아니, 소멸’했던’ 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군.]


“그럼 저 신은 살아 돌아온 겁니까?”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중요한 건 놈이 지금 우리를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단 거겠지.]


이찬이 저도 모르게 진득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야 이 이질적이고도 압도적인 느낌을 일부 해소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찬은 주신급의 신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 언젠가 쿠에비코를 만나 아윤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받으러 갔을 때쯤이었다.

그때 아직 ‘공포의 눈’ 사용에 익숙지 않았던 이찬은 실수로 다른 신의 행성에 착륙하고 말았다.

그곳의 신은 자신의 행성에서마저 온전한 자신의 힘을 뿜지 못했었다.

그 신의 이름은 츠쿠요미. 쿠에비코가 따르고 있는 신이자 일본 성단의 주신이었다.


“어쩐지 그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더라니.”


그때도 그러했다.

느껴지는 격의 크기나 상상력의 양은 확실히 반의 반도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의 이찬을 짓누르기엔 충분한 정도였다.


쩌저적!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성지는 풍백의 말 대로 차크몰이 점점 우세를 점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에 따라 차크몰의 진체도 점점 기세가 상승해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정도까지 상승했다.


[잡담이 많았다.]


풍백의 냉철한 지적에 이찬이 다시 기도를 그러쥐었다.

기도의 손잡이는 이미 땀에 의해 절어 있었다.


뜨드드득!


뭔가를 뜯어내며 질주하는 차크몰에 이찬이 잠시 압도되었다.

그 압도를 정화시킨 건 풍백의 펄럭이는 한복이었다.

그의 보법, 「바람 걸음」을 이용해 하늘로 솟아오른 풍백이 자신의 성지에서만 발할 수 있는 성명절기와도 같은 격을 발현했다.


[고유격 발현. 「왕바람」.]


콰가가가가각!


보퍼트 풍력 계급(Beaufort scale)을 기반하여 창조한 격 중 가장 강한 것에서 한 단계 내려온 11계급의 왕바람이 작렬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폭풍이나 이 성지를 감싸고 있는 바람들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다.


[흐아아앗!]


그러나 이 격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천재지변(天災地變).]


풍백이 천재지변을 외치자 왕바람의 안에서 작은 물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촤라라라락.


그것은 비였다.

이찬은 당황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있는 그들의 적은.


[푸하핫! 풍백! 드디어 노망이 난 건가?]


마야 신화 ‘비’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풍백 뭐하는 겁니까!”


하지만 저런 풍속의 바람에서는 상상력이 담긴 말들조차 쉽사리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이찬은 자신의 흐려져만 가는 믿음을 다시 다잡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풍백은 절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할 신이 아니다.

이찬은 그 믿음을 무덤까지 가져가 보기로 했다.


“흐라아앗!”


별안간 고함을 내지르며 이찬이 기도를 내리쳤다.


카강!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했지만 막상 부딪은 것은 가장 단단한 쇠로 만든 이찬의 기도와 차크몰의 진체의 팔이었다.


[약하다.]


투쾅!


가까스로 검을 회수하긴 했다만 안타깝게도 차크몰의 팔은 두 개였다.

차크몰의 오른팔을 맞고 저 멀리 성지의 끝까지 날아간 이찬이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아직 풍백은 격을 모으고 있다. 공교롭게도 차크몰은 풍백이 뿌리는 비 때문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성지를 업은 신이 낯선 환경에 적응한다면, 이만큼 절망적인 시나리오도 전 우주에 몇 개 없을 것이 분명했다.


“크윽.”


이찬이 잠시 차크몰의 시야에서 벗어났고, 그 잠깐의 틈으로 생각의 생각을 여러 차례 거듭했다.

그리고 이찬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


[풍백. 이만 내려와라. 이젠 지루할 지경 아닌가. 네 오만한 판단이 빚어낸 결과다. 행동자는 저 멀리 날아가 전투 불능이 되었고, 그 동료라는 작자들은 저기 엎드려 네놈이 이 위기를 타파해 주길 기도하고 있지. 어쩌면 기도도 못 할 정도인가.]


이제는 완전히 자기가 우위에 선 것을 확신하듯 차크몰이 조소했다.


[<마야>가 다시 정상에 설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나는 시발점이 될 것이고, 나를 주축으로 <마야>는 다시 새로 태어날 것이다. 정식으로 고맙다는 말을 남기지!]


풍백은 격에 집중하여 그런 것인지 그 격의 파장으로 인해 들리지 않은 것인지 차크몰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차크몰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다.

평소의 차크몰이었다면 그저 스쳐 지나갈 만한. 모든 감각이 극에 달한 지금은 느낄 수 있는 격이었다.

이 둘의 성지에 비집고 들어와 자기의 존재를 밝힐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당돌한 격.


푸흐흐흐흥!


갑자기 차크몰의 오른편에서 튀어나온 붉은 말이 차크몰을 강하게 들이받았다.


카앙! 쿠우웅!


둔중한 소리와 함께 이찬도 떨어뜨리지 못했던 차크몰의 두 발을 떼어놓는 것뿐만 아니라 저 멀리까지 밀려나게 했다.


[다 된 밥상에 무슨 소란이냐.]


“한반도 출신도 아닌 게 어디 한반도 속담을 마음대로 인용해 갖다 써?”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3식.

말의 현신, 고적마가 차크몰과 부딪힌 부위가 찝찝한 듯 털어냈다.

본디 지구의 허용 상상력이라면 고적마는커녕 1식이나 2식마저 꺼내기 찝찝하고 불편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두 신의 성지에서 발생하는 상상력은 허용 상상력을 거의 꽉 채울 듯 부풀었고, 덕분에 고적마가 생성될 수 있는 충분한 허용 상상력을 얻었다.


“그리고 다 된 밥에 소란을 부리는 게 아니고.”


다시 말에 올라탄 이찬이 이젠 고적마의 격과 융합해 달려들었다.


“재를 뿌리는 거다 이 새끼야!”


캉! 쿠구구국!


하지만 이전의 기습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차크몰이 고적마와 이찬의 합공을 견딘 것.


[가여우니 힌트라도 줘야 하나? 지금 이 몸은 타격을 입지 않는다.]


“뭐? 그딴 게 어딨··· ···.”


이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차크몰의 성지가 이젠 그의 접근마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찬은 불굴의 화신.

차크몰의 말을 들은 즉시 분석에 나섰다.


‘그럼 차크몰을 때릴 때마다 들리던 그 소리는 뭐지? 게다가 놈과 부딪힐 때마다 내 눈에 희미하게 보이던 그 장벽은 또?’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덧 풍백의 왕바람은 그의 성지는 물론 차크몰의 성지까지 덮어버릴 듯 거대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런 풍백의 바람을 따라가던 이찬은 차크몰의 숙주, 이름 모를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이찬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고, 그렇다고 아이를 죽이진 않을 것이었다.


지직.


이찬의 접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차크몰의 상상력이 그를 붙들었다. 이에 굴복할 이찬이 아니었고, 빠르고 정확하게 남자아이를 향해 달려들어 검을 내질렀다.

차크몰이 그 행동에 반응하듯 맞붙던 고적마를 뿌리치고 이찬에게 달려들었으나, 순순히 보내 줄 고적마가 아니었다.


카가각!


그러나 이런 고적마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찬의 일격은 남자아이에게 통하지 않았다.

차크몰의 진체와 같은 보호막이 아이의 몸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쿠우웅!


어느덧 고적마를 팽개치고 온 차크몰이 이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필 이찬은 풍백의 성지를 벗어나 차크몰의 성지 한복판에 도달해 있었기에 격의 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했다.

이찬은 다른 생각을 했다.


‘아직 거리는 멀어.’


신이라면 이 정도 거리를 좁히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허나 이찬은 그 찰나를 흘려보내지 않았고, 자신의 왼쪽, 탁한 호수와 그 중앙에 위치한 차크몰 진체의 형상을 본뜬 석상이 놓인 돌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찬은 그곳에 차크몰의 진체나 남자아이의 주변에 씌워져 있던 보호막이 없는 것을 명확히 보았다.


“흐아아앗!”


다시 한번 고함을 내지른 이찬이 석상에게 다가가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촤아아아악!


위치를 불문하고 솟아오른 무수한 손이 이찬의 접근을 방지했다.

화들짝 놀란 이찬이 「풍화」를 발현하여 가까스로 빠져나오긴 했지만 소득은 충분했다.


‘접근을 의도적으로 강하게 방해하고 있다.’


자가 방어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저런 기믹을 숨겨놓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푸흐흥!


어느새 막아서던 고적마를 때려눕힌 차크몰이 다가왔다. 그런 차크몰을 반기듯 이찬이 말했다.


“야! 너 이제 죽는다!”


명확하고 정확한 계획이 수립되었음을 은연중에 흘렸다.

물론 이미 상상력에 잠식된 차크몰은 알 턱이 없었지만.


스르르륵.


차크몰의 공격을 「풍화」로 유유히 흘린 이찬이 고유격 고적마를 해제하고 다시 풍백의 성지로 복귀했다.

때마침 풍백의 신언이 들려왔다.


[준비됐다. 잘 버텼군.]


“더 지속됐으면 위험했을 겁니다.”


[준비 시간이 길었던 만큼 위력은 보장할 수 있다.]


“생각이 있습니다. 범위가 클 필요도 없습니다. 그 바람을 전부 저 석상에 쏟아부어 주십시오.”


[어이 차크몰!]


차크몰을 호명한 풍백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격을 발현한 게 내 패착이라고 했던가? 아둔하고 멍청하고 오만한 건 내가 아니라 너다.]


“전보다 좀 뭐가 많이 늘어난 거 같은데··· ···.”


사라라락.


풍백이 뿌렸던 빗물이 다시 왕바람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많은 상상력을 가지고 말이다.


[뭐··· ···뭐냐!]


순식간에 상상력을 절반가량 빼앗긴 차크몰이 당황한 신언을 뱉었다.


[그러게, 잘 보고 먹어야 하는 것 아니더냐.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미 죽은 송장은 이 무대에서 퇴장하라.]


왕바람의 크기가 절반으로 줄었고, 줄어든 만큼 위력이 반비례해 차크몰의 성지 한 가운데 있는 석상을 전례 없는 위력으로 가격해 부숴버렸다.


[안 돼애애애애애애애!]


차크몰이 부르짖는 절규는 어떤 종류의 것보다 처절해 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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