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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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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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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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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화 (3)

DUMMY

가스페르가 질끈 감은 눈을 얕게 뜨며 상황을 살폈다.

아페토르의 오른손이 격이 담긴 화살을 자신의 복부 쪽에 찔러 넣고 그로 인해 육체를 파고드는 화살의 소리가 들렸다.

이때 가스페르가 느낀 감정은 아프다, 고통스럽다 따위가 아니었다.

평온하고, 편안했다.

따뜻하고 온화한 상상력이 자신을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가스페르에게는 더없이 친근한 격이었다. 그리고 가스페르의 눈앞에 당도한 광경은 꽤나 당황한 안면을 한 아페토르와 그 앞에 나타난 한 남자였다.

가스페르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완··· ···?”


이어 아페토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 ···너는 신··· ···?]


취임식 때의 가스페르와 완벽히 같은 복장을 입고, 같은 장발에, 금발이다. 키는 훤칠했고, 눈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그런 의지였다.


[하··· ···하림(下臨)?]


하림.

신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떤 장소에 현현(顯現)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써, 이전 헤랴에서 달의 신과 해의 신이 강림했던 것도 이와 같은 하림의 형태였다.


[그래도 감각은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허완의 허세 넘치는 말과 달리 그의 복부에는 아페토르가 찔러 넣은 화살이 깊게 박혀 있었다.

아페토르는 그 허완의 복부를 흘기더니 다시 기고만장해지며 굽혔던 어깨를 폈다.

아무리 신이라도 저만한 격이 담긴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다면 아무리 신의 하림이라 한들 타격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 그 자신감에서 비롯된 거만함이 아페토르를 지배했다.

안타깝게도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과녁 정중앙에 박힌 화살처럼 정확한 지적이었고, 그에 따른 정당한 거만함이었다.


“성주님··· ···.”


가스페르가 걱정이 한껏 섞인 목소리로 허완을 개의했다.

허완의 뒤를 돌아 씨익 웃었다.

어쩐지 가스페르는 그 미소에 퍽 안심하고 말았다.


[걱정은 접어두고.]


허완이 다시 고개를 들어 아페토르를 응시했다.

아무리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신은 신.

그 눈빛을 맞은 아페토르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그것으로는 그의 기세를 막기 한없이 부족했다.


[감히 한눈을 팔아? 지금 내가 네 배에 찌른 화살은 점점 네 상상력을 앗아갈 거다. 활과 화살은 무궁무진하거든.]


그러자 가스페르와 허완이 동시에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명을 단축하는군.]


허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아니야. 너무 웃겨서 말이야.]

[그러니까, 뭐가 웃기냔 말이다.]


그러자 허완이 대답으로 자신의 복부에 찔려 있던 화살과 그것을 잡고 있던 아페토르의 오른손을 잡아채 벗어나지 못하게 장력을 펼쳤다.

당황한 아페토르가 거구의 힘을 이용해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허완의 손이 이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천천히, 허완이 입을 열었다.


[활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여기 네놈의 눈앞에 있는 이 둘이 훨씬 더 잘 알거든?]


허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스페르가 허완의 뒤에서 튀어나와 아르코 솔을 휘둘러 아페토르의 머리를 가격했다.

아페토르는 다급히 남아도는 왼손으로 아르코 솔을 막았지만 부서지는 부위가 다를 뿐 위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저 멀리 날아간 아페토르가 신음을 짙게 내뱉으며 저 멀리 튕겨져 날아갔다.

문자 그대로 찌그러진 왼손을 부여잡고 일어난 아페토르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아무리 신이라지만, 상상력을 앗아가는 특제 화살이 배 깊숙이 박혔다.

쓰러지기는커녕 다시 화살을 잡아 자신의 움직임을 봉했다.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화살이 더 깊게 들어가기도 했다.

말로 다 이루지 못할 고통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맞섰다.


[젠장. 더 늦춰지면 안 돼.]


상황은 가스페르 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우··· ···.]


심호흡을 깊게 내쉰 허완이 힘이 드는 듯 주저 앉았다.


“성주님.”


다급히 허완을 부축한 가스페르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허완의 형체가 발끝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성주님 몸이··· ···!”


[걱정 마. 죽는 거 아니야. 그저 잠깐 잠에 드는 거지. 나중에 이찬에게 말해 줘. 도술사를 헤랴에 보내 달라고.]


헤랴라는 말에 가스페르의 몸이 움찔했다.

아직 헤랴에 대한 걱정을 모두 숨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가스페르의 뒤에서는 치열한 전투의 열기로 인해 일대가 초토화되고 있었다.


[헤랴에는 내가 있을 거야. 안정화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당분간 부르지도 못하겠지만 부르지 마. 이따 보자.]


속사포처럼 말들을 뱉은 허완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가스페르가 미량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분명 가스페르도 알고 있다. 허완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저 상상력의 소진으로 자신의 행성에 돌아간 것뿐.

동시에 느꼈다.


이제 또 한동안 억겁의 세월을 견디겠구나. 신이 사라진 기분을 ‘그때’ 이후로 또 느끼겠구나.


가스페르의 고개가 다시 하늘을 향했다.


하지만 그때도 견뎌냈으니 지금이라고 다를 것 없다. 이제 내게는.


가스페르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동료가 있다.


가스페르가 다시 아르코 솔을 집어 아페토르가 날아갔던 방향을 조준했다.

평소와는 다른 궤적으로 시위를 당겼다.

하늘을 보고,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감각 하나에 의존해 쏘는 두 발의 화살이었다.


피육!


공기를 대차게 가르는 소리에 아페토르가 흠칫하며 정면을 보자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는 화살이 보였다.


슈우우욱!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아페토르가 이미 부서진 왼팔을 오른손으로 지탱해 들어 왼팔에 화살이 박히도록 설계했다.


[겨우 이 따위 위력으로 나를 죽이려 했나?]


이어 가스페르가 나타나 언덕의 정상에서 아페토르를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보지 마라. 불쾌하니까.]


자세를 낮춘 아페토르가 가스페르도 쫓기 힘든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크윽!”


가스페르가 아페토르와 함께 저 멀리로 나아가며 혈투를 벌였다.


[나는 활도 잘 다루지만, 육탄전도 여타 신들만큼 아니, 신들보다 강하다.]


콰앙! 콰아앙!


가스페르를 내려 찍는 소리와 함께 가스페르의 온몸이 부서지고 있었다.

순간 기지를 발휘해 「광휘의 발걸음」을 발현하고는 혼자만 속력을 빠르게 줄여 멈추고는 아페토르가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정확히 그곳을 응시한 가스페르가 다시 아르코 솔을 장전해 여과없이 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화살은 하나가 아니었다.

위에서 아래로 공격을 가할 때 그 위력이 몇 배로 불어나는 명실상부 가스페르가 가진 최강의 격.


“고유격 발현. 「총격포화」.”


수십 개로 등사된 화살이 일제히 아페토르를 덮쳤고, 그 폭발이 끝나 생긴 안개에서 어떤 물체가 튀어나와 가스페르를 향해 돌진했다.

먼지와 피로 범벅된 아페토르였다.


“으엇!”


당황한 가스페르가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피했으나 등에 무시할 수 없는 생체기가 생겼다.


[그 거슬리는 신은 죽은 모양이군. 그럼 그렇지. 내 화살을 정통으로 처맞았는데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설령 살았다고 해도 회복하기는 불가능할걸?]


아페토르의 도발에 가스페르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마지막은 좀 아팠다. 덕분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군.]


그에게 자비는 없었다.

가스페르가 고개를 숙인 틈을 타 아페토르가 가스페르에게 달려들어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잡았다.


쿠당탕!


가스페르가 지반에 강하게 내동댕이쳐졌고, 이 기회를 놓지 않은 아페토르가 오른팔을 하늘 높이 들어 가스페르의 머리통을 부수려는 순간.


“너는 두 가지 실수를 했어.”


가스페르의 살인적인 미소가 아페토르를 반겼다.


“첫 번째는 내게 총격포화를 허용한 것이고, 두 번째는, 아까 내가 화살을 쐈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거야.”


휘이익!

푹!


아페토르의 아킬레스건에 두 발의 화살이 각각 꽂혔다.


[뭣!]


아페토르는 다급히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으드득!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마비되어 더 이상 운신할 수 없어진 아페토르였다.


“아, 방금 하나 추가됐어. 세 번째, 너와 나 사이에 거리가 벌어진 것. 궁수라는 놈이 이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하지 않다니. 어차피 도망치지도 못하겠지만.”


허완과 가스페르의 합공과 총격포화로 누적된 피해가 중첩되어 아페토르의 체력과 지구력, 내구도를 지속적으로 감소시켰다.

그리고 그 종지부를 찍은 것은 가스페르가 아까 전 수직으로 공중을 향해 날려 놓은 화살이었다.

완벽한 가스페르의 계산으로 양발이 묶인 아페토르를 향해 가스페르가 자비없이 화살을 날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피육!


“나의 신은 죽지 않았다.”


[원래 다들 그렇게 생각—]


“아직 내 말 다 안 끝났어.”


피육!


[크윽!]


“넌 내가 천천히 죽여 줄게.”


그렇게 가스페르와 아페토르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고, 마침내 가스페르가 그의 앞에 도착했을 때는 종잇장 하나 꽂을 수 없을 정도로 빈 곳이 존재하지 않는 아페토르의 신체와, 피로 덮인 화살들. 그리고 목숨을 잃어 그 어떤 기운도 담기지 않은 아페토르뿐이었다.

그 광경을 눈에 담은 가스페르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더니 스르륵 쓰러져 기절했다.

어두운 하늘 아래 내리쬐는 달빛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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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성지화 (11) 24.03.13 22 0 11쪽
109 성지화 (10) 24.03.10 28 0 12쪽
108 성지화 (9) 24.03.08 24 0 11쪽
107 성지화 (8) 24.03.06 23 0 10쪽
106 성지화 (7) 24.03.03 2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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