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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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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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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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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화 (12)

DUMMY

후우우우우웅!


사늘한 바람이 이찬의 전신을 감았다. 한겨울의 바람처럼 추웠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람은 그 어떤 것보다 따뜻했다.

이찬은 언젠가 이와 같은 느낌을 받은 적 있었다.

《관념》이 가진 지식의 정수를 얻기 위해 풍백의 행성, 그 서재로 갔던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성지화.」


동시에 그 서재에서 구매해 지금까지 유용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는 「오디오 북」이 여느 때와 같이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들의 전유물이자 격의 정수.

신들은 전부가 자신의 행성 혹은 성지(이하 성지)를 가지게 되어 있다. 행성은 신의 힘을 완전히 개방할 수 있게 해 주는 주요 수단으로 성지에서 신을 만났다면 살아갈 생각은 접는 것이 좋다.

여하튼 본론으로 돌아와 성지화에 대해 설명하자면 간략히 말해 성지의 일부를 신이 존재하는 위치에 덧붙이는 것이다.

성지화를 발현한 신은 마치 자신의 행성에 있는 것 같은 고양감을 느끼게 되며, 그 효과도 전술한 성지에 있을 때와 같게 된다. 그러니 성지화한 신이 당신의 적이라면 당장 성지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어쨌든 성지화는 완전한 성지처럼 완벽하고 성스럽지 않으니.」


이제야 이 기시감과 고양감이 이해되는 이찬이었다.

이 행성, 「폭풍의 눈」은 이찬이 와 보았던 곳이기에 기시감을 느꼈고, 풍백과 이찬 자신은 모종의 이유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성지의 영향을 비슷하게 받는 것이었다.


[감사를 전해야겠군. 네놈이 상상력을 남발해 허용 상상력을 생각없이 증축해 준 덕분에 성지화를 발현할 수 있었다.]


차크몰의 전신이 옅게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차크몰은 한 성단, 그것도 대성단의 수뇌부였던 만큼 성지화와 성지의 위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뛰어난 검수에게 자기 검의 예리함이 얼마나 뛰어난지 검수의 목에 갖다 대고 설명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풍백은 불길을 모두 걷어내고 차크몰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스슷.


무언가 스쳐가는 소리가 이찬의 왼편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자세히 관찰하니 일부가 잔디 바닥이 아닌 은빛의 대리석이 되어 있었다.

그걸 본 것은 이찬뿐만이 아니었다.


씨익.


차크몰이 그 광경을 보더니 입꼬리를 기분 나쁘게 말아 올렸다.


[역시 부족하긴 한가보군. 겨우 이 정도의 상상력으로 완벽한 성지를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지!]


이찬도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애초에 풍백의 성지 「폭풍의 눈」은 이렇게 초라하지 않았다.

마천루들이 속속들이 들어차 감탄을 자아내고, 바람은 이보다 배 이상 세차게 불어 여타 다른 물체들뿐만 아니라 생명체까지 날려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성지는 전혀 그런 위상에 어울리지 않았다. 바람은 그저 산뜻하게 불어올 뿐이었다.

비옥한 땅은커녕 푸석푸석 마른 땅뿐이었고, 마천루는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하나의 건물, 하나의 건축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미숙한 성지화 따위에 겁먹을 성싶으냐!]


허나 풍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려 걸음을 더 빨리 하여 차크몰을 구석으로 몰았다.


후우우웅!


풍백의 기분에 따라 분노한 듯한 바람이 차크몰을 감싸 묶었다.


[크흐윽!]


억제하지 못한 신음이 차크몰의 육성으로 튀어나왔고, 풍백은 어느새 차크몰의 지척에 닿아 있었다.


화악!


그 순간 차크몰은 제 나름의 기지를 발휘했다.


찌이익!


풍백이 성지화를 발현하며 순간 약해진 바람의 장막 사이로 기절한 이노를 데려간 것이다. 차크몰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비를 이용한 날카로운 격을 발현해 풍백을 협박했다.

차크몰은 그 옆에 있는 이찬은 관심도 주지 않았다. 어차피 격과 상상력을 다한 애송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차크몰이 이노를 데려가자 이찬이 섬찟 놀라며 차크몰의 손을 베기 위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하지만 부족한 상상력으로 오히려 격의 파장에 의해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찬!]


“전 괜찮습니다!”


멀리서 이찬이 무사하다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다가온다면 이 아이의 목숨은 저 멀리 《관념》의 어딘가로 보내질 것이다.]


풍백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멈추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서늘하고 날카로운 바람은 그 기개를 감추지 않고 대차게 불었다.

아무리 불안정하다고 한들 성지화는 성지화.

겨우 방금 부활한 신이 맞댈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차크몰은 비열해졌다.

더럽게 인질을 잡고 협박했다.


[패착이군. 저놈을 저리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었어.]


보호 장막 하나만 믿고 안심한 탓이었다.

차크몰이 기세를 잡았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협박의 강도를 높였다.


[당장 성지화를 해제해라.]


풍백이 고민을 거듭하자 초조해진 차크몰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빨리! 그렇지 않으면 이 새끼들을 전부 죽이겠다.]


어쩔 수 없이 풍백이 성지화를 해제하려 하는 순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서걱!


날카로운 물체가 차크몰의 얇고 작은 등을 베었다.


푸슉!


작은 체구에서 피가 솟구치며 차크몰이 이노를 놓쳤다.


[무슨··· ···!]


검의 주인이 그 틈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았다.


타닷!


빠른 보법이 이노뿐만 아니라 가스페르와 아윤까지 데리고 풍백의 뒤로 숨어들었다.

다름 아닌 이찬이었다.


[상상력을 전부 소진한 것 아니었나?]


쩌렁쩌렁 울리는 신언은 차크몰의 것이었다.


“그랬지”


셋을 풍백의 뒤에 눕혀 놓고 온 이찬이 풍백과 같은 선상에 섰다.


[그런데 어떻게!]


그건 풍백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루도 안 되어 이찬은 너무 많은 이들과 전투를 벌였다.

아무리 오랜 기간 모아온 상상력이 있다 해도 그 정도를 견디고 남을 상상력은 모두의 상상을 초월했다.


“어떻게는. 다 이 풍경 덕분이지.”


이찬이 폭풍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곧 죽을 거니까 말해 줄게. 나랑 이 사람은 연결되어 있어.”


[나 사람 아니다.]


“아잇. 말하고 있잖아요.”


[··· ···알았다.]


“다시 말하면 이곳에서 풍백이 받는 모든 이로운 효과들은, 내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얘기지.”


차크몰의 눈이 커졌다.

놀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풍백의 상상력을 회복해 주는 이 바람이, 나한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넌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 그게 네 사인일 거야. 눈치가 없다.”


차크몰이 치를 떨었다.


저벅저벅.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찬도 분노하고 치가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윤과 가스페르를 보란듯이 모욕했다.

이노를 인질로 삼았다. 죄 없는 무고한 인간에게 피해를 줬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며 이찬은 화가 났다. 그러나 참았다.

그것이 장점이었고, 단점이었다.


콰아앙!


풍백의 강토(疆土)를 세차게 밟은 이찬이 앞으로 나섰다.


후우웅!


웅혼한 바람이 이찬의 기도에 감기며 휘둘러졌다.


쾅!


차크몰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나는 대성단 <마야>의 주신. 차크몰. 이 곤욕을 영광으로 바꾸어 천하의 통일을 이루리!]


“무슨 소리야?”


[이찬 조심!]


풍백의 경호성이 강하게 들려오며 이찬이 차크몰에게서 훌쩍 멀어졌다.


[크으으아아아아!]


기이할 정도로 크고 이질적인 신언이 이찬의 귀에 때려 박혔다.


“크흑!”


차크몰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전방위적으로 발현되었고 그 비명을 따르듯 모든 빗방울과 물방울이 일제히 차크몰에게 몰렸다.

공기중의 수분과 체내의 수분까지 빨아가는 것만 같았다.

긴박한 상황 속 사태를 전부 파악한 풍백이 이찬의 곁으로 당도했다.


[하림(下臨)이다··· ···.]


아까 가스페르의 몸에서 허완이 하림했듯, 차크몰은 저 남자아이의 몸으로 하림하는 것이었다.


“멈춰!”


이찬이 고속으로 달려가 하림을 막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미 늦었다.]


풍백의 얼굴이 굳었다.


콰아아아앙!


성지화된 「폭풍의 눈」의 일부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그락.


차크몰이 그 물에서 비롯한 파장을 뚫고 나왔다.

그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초점과 기운을 잃은 남자아이의 뒤로 건장한 남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퍼런 눈에 머리에는 마야의 사람들이 입었을 것 같은 길쭉한 모자를 쓰고 코는 매부리코에 입술은 퍼렇게 질려 있었다.

멀리서 보아하니 그 모습은 가히 재앙을 연상케 했다.


[기어이··· ···.]


꾸구구국!


짓누르는 것 같은 상상력이 위압감을 뽐내며 이찬을 꿇렸다.


[하림하게 만드는구나.]


반투명한 몸체에서 폭발적인 상상력이 발출되었다.

아무리 차크몰이 격 높은 신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풍백의 성지. 결코 전부의 힘을 낼 수는 없었다.

본디 해로운 것이 억제된다고 하면 대개 기뻐하거나 안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저게 전부가 아니라면, 대체 전부는 얼마나 강한 거지··· ···?


이찬이 패닉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풍백이 앞으로 다가섰다.


[기어이 네놈이 법칙을 어그러뜨리는구나.]


그러자 차크몰의 진체에서 기형적인 표정이 드러났다.

확실히 인간의 것 아니, 생명체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이찬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걸 평범한 생명체에 대입하여 느낀다면, 저건 분명 ‘웃음’의 감정일 것이었다.


[내가 법칙을 어그러뜨린다고? 아니지 아니야. 법칙을 먼저 부순 건 너다. 감히 행동자를 살려 두는 것도 모자라 보호까지 하고 나선다? 가소롭기 짝이 없군.]


차크몰의 얼굴이 기형적으로 흐트러지고 뭉치기를 반복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한가?]


차크몰이 서서히 움직였다.

남자아이는 그대로 자리에 머물렀고, 다가오는 것은 그의 하림한 진체뿐이었다.


[너를 죽이고 저 행동자도 죽인다. 그리고 난 《관념》을 배반한 성단의 천신과 희대의 반역자를 죽이며 영웅이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어때, 아름다운 시나리오 아닌가?]


이찬도 풍백도 느끼고 있다.

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숨을 쉬고 있는 매초마다, 상상력의 회복이 더뎌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숨을 자유로이 쉴 수 있겠군.]


필히 저 차크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게 끝인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이찬의 귀에 속삭였다.

아니나 다를까.


[풍백. 네가 하는 것을 내가 못 할리 없지. 안 그런가?]


츠즈즈즛!


일순간 차크몰의 뒤로 낯설고 불길한 광경이 펼쳐졌다.

넓디넓은 호수와 그 안에 고이 모셔진 하나의 석상. 그리고 호수 안으로 넓게 펼쳐진 탁한 물.

틀림없다. 이것은.


[성지화. 「신성한 우물(Sacred Cenote)」.]


차크몰의 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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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경계 (3) 24.03.27 20 0 10쪽
115 경계 (2) 24.03.24 17 0 11쪽
114 경계 (1) 24.03.22 18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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