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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정연.
작품등록일 :
2014.07.07 18:04
최근연재일 :
2016.05.02 21:57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53,094
추천수 :
1,999
글자수 :
42,266

작성
14.07.09 19:18
조회
1,757
추천
69
글자
8쪽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7

DUMMY

초록색 지폐들이 손끝에서 차르륵 미끄러졌다.

등 뒤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구경만 하면서 수군대던 몇 명이 드디어 용기를 내서 다가왔다.


“웬 돈이야? 로또 됐냐?”

“내가 맞혀볼게! 재벌 지갑 주워줬지!”

“아니면 폰? 어쨌든 쏘는 거야! 알았지? 피자 돌려!”


돈의 힘은 대단했다. 평소에는 말도 안 걸던 아이들이 몰려들어 유단을 둘러싸고 떠들어댔다. 교실 구석에 상주하는 온갖 잡것들도 신이 나서 우르르 몰려왔다. 또 인상을 쓰며 노려보려다가…….

그냥 그만뒀다.


“미안한데 이 돈은 쓸 데가 있어.”

“치사해!”


원성이 자자했다. 발을 구르는 아이도 있어서 무척 시끄러워졌다. 역시 이런 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평소처럼 붙임성 없는 표정을 지어서 전부 쫓아버릴 걸 그랬다.


“이대론 못 가! 아이스크림이라도 돌려!”


결국 몇 만원을 뜯긴 후에야 겨우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꽤 많이 남았다. 아마 충분할 거다.

교복 주머니에서 처음 돈뭉치를 찾았을 땐 어리둥절했다. 워낙 엄청난 일을 겪은 탓에, 요괴가 주머니에 돈을 찔러준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돈을 어떡해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금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유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를 탔다.

회화나무길은 여전히 조용하고 서늘했다. 고색창연한 기와지붕의 이층 건물도 여전했다.

유단은 반월당의 문을 밀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역시 이곳은 그것들이 보이지 않아서 좋다.

모처럼만에, 아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좋은 곳을 발견했는데 이대로 잊어버리라니 그게 말이 되나?

당당하게 성큼 들어섰다.

마침 도씨가 커다란 연잎 모양 벼루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지금 들어오는 게 누군지 알아보고는 바로 도끼눈을 떴다.


“아니, 이게 누구야? 천안을 갖고 계신 도련님 아니신가. 뭐 하러 또 왔어?”


자칫하면 우발적 실수를 가장해 벼루로 한 대 칠 것 같았다. 유단은 잽싸게 피하며 안으로 쑥 들어갔다.


“오늘은 뭘 좀 사려고.”

“사다니? 여기에 살 게 뭐가 있는데? 전부 뛰어난 감식안을 가지고 하나하나 정성껏 수집한 최고의 예술품으로, 어중이떠중이한테는 절대 팔 수 없는…….”

“이거 줘.”


도씨의 말을 끊고 바닥을 가리켰다.

『월간 동양화』.

그것은 오늘도 여전히 입구 한쪽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악성재고 더미를 바라보고, 다시 유단을 바라보는 도씨의 얼굴은, 과연 백만 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이, 이걸, 왜…….”


심지어 말까지 더듬는다. 유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집 거실이 좀 허전해서. 외사촌 형이 책 좀 사다 꽂아놓으라고 난리야. 이왕이면 뛰어난 감식안을 가지고 하나하나 정성껏 수집한 예술품을 꽂아놓고 싶어지네.”


도씨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울상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입을 벙긋벙긋하다가 간신히 한 마디 했다.


“하지만 이거 진짜 재미없던데…….”

“어라? 의외로 양심적이네?”

“뭐? ‘의외로’라니? 말 다 했나?”

“벼루 좀 내려놓지 그래! 일단 물건 값이나 받고. 택배비 정도는 여기서 내줄 거지?”


무슨 소란인가 하고 보러 왔던 흑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쌍둥이는 서로 마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게 뒤편으로 뛰어갔다. 놓칠세라 얼른 따라갔다. 길게 이어져 있는 빈 방 몇 개를 지나자, 정원이 나왔다.

뒤뜰은 매우 넓었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연못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정원으로, 앞쪽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처마 밑 차양처럼 높이 들어 올린 분합문 아래의 낡은 마루에, 흰 옷을 입은 여우요괴가 앉아 있었다. 수면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인기척을 들었는지 천천히 돌아봤다.

그러고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무슨……?”


채우가 얼굴이 파래진 채로 소리쳤다.


“거봐요! 땅 파서 먹고 사는 게 아니라느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곧이곧대로 듣고 이렇게 돈을 챙겨서 찾아오셨잖아요.”


돈을 세어보던 도씨는 머쓱한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백만 원이라는 큰돈을 구할 수는 없어.”


채설은 창백해져서 중얼거렸다.


“이게 다 아저씨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탓이야. 돈이 없는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뻔해. 틀림없이 그곳에 가서 그걸 판 거야! 체중이 백 그램쯤 줄었을 거고, 두 개였던 게 이제 하나밖에 없게 됐어. 망가지면 끝장이야. 소금을 먹이지 말아야 돼.”

“신장 안 팔았어!”


유단은 기가 막혀 소리쳤다.


“누가 신장을 팔아서 동양화 잡지를 사! 액구슬을 갖고 있던 요괴가 내놓은 돈이야! 어차피 불우이웃돕기 같은 데 써야 할 테니까.”

“누가 불우이웃이냐!”


흑요가 발을 쾅 구르며 소리쳤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 우리 가게가 적자가 좀 난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오라버니! 그 돈 받지 마세요!”

“왜 그래? 저 도련님의 독서열에 왜 찬물을 부으려고 그래?”

“오라버니! 제가 칼을 꼭 빼들어야겠습니까?”


모두 왁자지껄하게 떠들어서 소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여우요괴가 입을 여는 순간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도 여전하다. 그래도 두 번째니까, 처음만큼 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말했지만, 난 귀찮은 게 싫어.”


유단은 백란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 지저분한 것들이 날뛰는 건 더 싫어. 결국 인생은 싫은 것투성이야. 그나마 덜 싫은 걸 선택할 수밖에 없어. 그래도 비명횡사하고 싶진 않으니까 어지간하면 참아보겠지만…… 정말 못 참을 땐 여기 오면 되는 거야.”

“누가 그러라고 허락했습니까?”

“나도 잘하는 것 하나는 있단 말이야. 남의 말을 안 듣는 것.”

“정말 귀찮게 됐군요.”


백란이 벌떡 일어났다. 흰 소매가 이쪽을 향해 휙 날았다.

결국 본성을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그 거대한 창을 가볍게 휘두르던 모습을 상기하며, 화들짝 놀라 피했다.

백란은 의아한 얼굴로 손을 거뒀다.


“뭐 하십니까?”


오른손이 가벼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뭘 들고 있었더라?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 케이크…….”


백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사오는 손님은 무척 오랜만이라고, 다들 그렇게 좋아하셨으니까…….”


그러면서 리본을 풀었다. 상자를 열다가 손이 그대로 정지했다. 그대로 상자 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혹시 크림처럼 형태가 고정돼 있지 않은 물질을 흔들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셨나요?”

“……?”


유단은 당황했다.

저번에는 긴장해서 똑바로 들고 왔지만, 이번에는 팔이 경직될 이유가 없었다. 케이크를 든 채로 아무 생각 없이 버스 카드도 찍고 생수도 마셨을 뿐 아니라, 반월당에 들어온 후부터는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


“몰랐어. 그런 걸 사본 적이 별로 없어서. 흔들면 망가진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군요.”


백란은 고개를 들었다. 상당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바보 같다고 한 걸 사과 드려야겠군요. 바보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바보였던 겁니다. 그 두 가지 개념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케이크와 케이크 같은 것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요.”

“이거 먹을 수는 있는 걸까?”


채설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포크 말고 숟가락을 쓰면 될 거야. 숟가락으로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잖아.”


채우는 씩씩하게 주방으로 갔다. 도씨와 흑요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인간을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단을 쳐다봤으나,


“여섯 개 필요하죠?”


라는 채우의 질문에 아무 반론도 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일단 밖으로 쫓아내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걸로 됐다.

유단은 왠지 기뻤다.






                      <첫 번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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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네 번째 이야기: 귀화(鬼畵) #2 +10 14.07.20 1,075 45 1쪽
17 네 번째 이야기: 귀화(鬼畵) #1 +10 14.07.19 1,139 44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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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세 번째 이야기: 천 년의 달빛 #3 +4 14.07.17 1,083 44 1쪽
14 세 번째 이야기: 천 년의 달빛 #2 +8 14.07.16 1,129 47 1쪽
13 세 번째 이야기: 천 년의 달빛 #1 +6 14.07.15 1,138 48 1쪽
12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5 +13 14.07.14 1,111 51 1쪽
11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4 +4 14.07.13 1,129 49 1쪽
10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3 +4 14.07.12 1,299 52 1쪽
9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2 +6 14.07.11 1,268 53 1쪽
8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1 +2 14.07.10 1,612 55 1쪽
»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7 +8 14.07.09 1,758 69 8쪽
6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6 +3 14.07.09 1,590 68 8쪽
5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5 +3 14.07.08 1,639 57 14쪽
4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4 +9 14.07.08 1,808 73 16쪽
3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3 +6 14.07.07 1,807 65 12쪽
2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2 +5 14.07.07 2,108 77 13쪽
1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1 +8 14.07.07 3,043 8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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