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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정연.
작품등록일 :
2014.07.07 18:04
최근연재일 :
2016.05.02 21:57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53,097
추천수 :
1,999
글자수 :
42,266

작성
14.07.09 19:13
조회
1,590
추천
68
글자
8쪽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6

DUMMY

전혀 예상치도 못했고 이해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데.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말 대신, 바람에 너풀거리는 흰 소맷자락 한쪽 끝을 덥석 붙잡았다.


“왜 네가 대신 액을 받아? 날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무언가를 착각하고 계신데─,”


백란은 소매를 뿌리치며 말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실패해서는 안 되고, 실패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그뿐입니다.”


순간, 반월당의 도씨와 흑요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상대에게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당당하게 도움을 요구하지 말라는 이야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그들에게 짐을 지우는 거니까.

이 여우요괴는 당연하다는 듯 그 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기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심지어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명분마저도 갖다 붙이려 하지 않고, 그냥 애초부터 이렇게 될 줄 안 것처럼 태연하게, 자기 대신 그 거대한 액을 뒤집어쓰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던 천호의 긍지라는 건가?


“하지만 너무하잖아!”


여우를 밀치고, 그토록 피하려 했던 구멍 속에 뛰어들었다.

어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와락 감싸 안았다.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에 그것은 작은 존재였다. 나쁜 기운이 자연스레 뭉친 것에 불과했다. 그 정도의 액이라면, 그냥 돈을 잃거나 작은 사고를 당하는 걸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것도 아닌데, 모두 질겁하며 피했다.

액은 슬펐다.

세상 모든 것이 늘 밝고 즐거울 수는 없는데. 어둠도 그늘도 전부 다 뜻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이 살아가는 이치인데.

모두 작은 불행마저도 싫어서 이렇게 피하면 어떡해. 누가 날 받아줘야만 나도 편안해질 수 있는데. 그래야만 새로 태어날 수 있는데.

다들 싫다고 서로 떠넘기기만 했다. 그렇게 속고 또 속았다. 슬픔이 커질수록 몸집도 따라서 커졌다. 거대하고 묵직해진 몸을 이끌고 한없이 떠돌았다.

모두 나를 피하기만 해. 그러면 나는 어떡해.

액이 느끼는 고통과 분노가 가슴을 짓눌러 왔다.

유단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기분 알아.”


너무나도 익숙한 감정이다.

어릴 때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상한 것들을 그대로 말했다. 다들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어디를 가도 자신의 자리가 없는 기분이었다.

눈가가 시큰해져 왔다.

결국 다 비슷비슷하잖아.

비로소 깨달았다. 어떤 것은, 싸우는 걸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유단은 어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새까만 어둠이 확 안겨왔다. 커다란 동물 같기도 하다.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거대한 덩어리를 어색하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편안해져도 돼. 액을 받을 사람이 왔으니까…….


짙고 짙은 어둠이 갑자기 확 밝아졌다.

유단은 눈을 찡그렸다.

눈앞이 새하얗게 밝았다. 눈부신 빛 덩어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별이 팽창하듯 훅 부풀어 올랐다가 어느 순간 수없이 작은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마치 반딧불처럼 어둠 속에 광채를 흩뿌리며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빛 속에서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수백 수천 가닥의 빛줄기 속에 여우가 서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눈부신 빛 덩어리들을 바라보는 옆얼굴이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어딘가 부드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멸했습니다.”

“소멸할 수 없다고 했잖아?”

“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사람에게 도저히 자신을 씌울 수가 없었기에.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를 향해 그 기운의 방향을 돌이켜 자신을 멸한 것입니다.”


빛이 공간에 수없이 많은 무늬를 그렸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유단은 넋을 잃고 모든 걸 바라봤다.


“그렇게 해서 제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제자리…….”


여우요괴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래야 하는 거구나. 난 정말 몰랐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윽박질러서 멀리 쫓아 보내기만 했는데. 그런 건 소용없구나. 만약 할 거라면,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거구나…….”


가슴이 따끔했다.

조각조각 찢어진 기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진작 알았다면 그날 엄마와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그 악마를 쫓아버릴 수 있었을까?


“……그랬을까?”

“그것은 그냥 사고였다니까요.”


백란이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누군가가 알고 도와줬다면 좋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세상이 옛날 같지 않다고 했지.”


유단은 고개를 들었다.


“난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이야. 남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하지만, 어쩌면 조금쯤은 도와줄 수도……. 나도 도움을 받았으니까…….”

“됐습니다.”


역시, 백란은 딱 잘라 거절했다.


“자기 앞가림도 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 끼어들겠다는 그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군요. 방해 말고 그냥 사라져 주시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 어차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든, 내일이면 다 잊어버릴 테지만.”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여우요괴는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보셨습니다. 인간의 의식에는 무리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인간에게는 괴이를 잊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고요. 이 모든 일은 곧 전부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잠깐만.”


그 말 가운데서 뭔가가 무척 신경 쓰였다. 그때까지 무심히 넘겼던 한 가지 사실에 비로소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까지 너한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전부 너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거야?”

“그들에게는 나쁜 꿈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큰 도움을 받았는데?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래서 그랬군.”


유단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허무하게 힘을 쓴다고 했는지.

인간을 구하는 게 허무하다고 한 게 아니었다. 기억에조차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달라.”


불쑥 말해놓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지 않아.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너도 마찬가지야. 전부 잊고 있었어.

머리가 아득해졌다.

뭘? 내가 뭘 잊고 있었는데?

여우요괴의 모습이 흔들렸다. 어떤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뭐지? 이 기시감은? 분명히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가슴이 서늘해졌다.


“넌 누구지?”

“누구냐니요?”


백란은 돌아섰다.


“정신이 혼미해지시는 걸 보니 벌써 시작된 모양이군요. 이제 그만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세요. 나쁜 꿈은 끝났습니다.”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돌아가세요. 흙 없는 산을 넘어, 바닥 없는 다리를 지나, 물 없는 강을 건너, 돌아가세요. 날개 없는 날짐승들을 따라, 발 없는 들짐승들을 따라 돌아가세요.”


노래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한 말을 듣고 있으려니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깊고 포근한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반겨주는 어둠.

그 속에서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 자면 영영 잊어버리고 만다.

분명히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는데.

머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유단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려고 애썼다.


“안 돼!”


허우적거리다 눈을 번쩍 떴다.

모든 것이 새하얬다.

커튼으로 반쯤 가려진 침실 창문에서 눈부신 아침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리려다가, 자신이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손을 폈다.

손바닥 안에 작은 종잇조각이 있었다.

불타오르다 남은 부적 조각이었다.

무척 드물게도, 유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거봐.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투명하게 반사된 햇빛이 손바닥 안쪽에도 와 닿았다. 부적 조각이 얼음처럼 스르륵 녹아내리며 푸른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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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네 번째 이야기: 귀화(鬼畵) #2 +10 14.07.20 1,075 45 1쪽
17 네 번째 이야기: 귀화(鬼畵) #1 +10 14.07.19 1,139 44 1쪽
16 세 번째 이야기: 천 년의 달빛 #4 +14 14.07.18 922 55 1쪽
15 세 번째 이야기: 천 년의 달빛 #3 +4 14.07.17 1,083 44 1쪽
14 세 번째 이야기: 천 년의 달빛 #2 +8 14.07.16 1,129 47 1쪽
13 세 번째 이야기: 천 년의 달빛 #1 +6 14.07.15 1,138 48 1쪽
12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5 +13 14.07.14 1,111 51 1쪽
11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4 +4 14.07.13 1,129 49 1쪽
10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3 +4 14.07.12 1,299 52 1쪽
9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2 +6 14.07.11 1,268 53 1쪽
8 두 번째 이야기: 넋보자기 #1 +2 14.07.10 1,613 55 1쪽
7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7 +8 14.07.09 1,758 69 8쪽
»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6 +3 14.07.09 1,591 68 8쪽
5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5 +3 14.07.08 1,639 57 14쪽
4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4 +9 14.07.08 1,808 73 16쪽
3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3 +6 14.07.07 1,807 65 12쪽
2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2 +5 14.07.07 2,109 77 13쪽
1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1 +8 14.07.07 3,043 8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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