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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정연.
작품등록일 :
2014.07.07 18:04
최근연재일 :
2016.05.02 21:57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53,087
추천수 :
1,999
글자수 :
42,266

작성
14.07.07 18:07
조회
3,042
추천
83
글자
12쪽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1

DUMMY

<첫 번째 이야기: 액받이>



----------------------------------------------------

합천 사또 아무개의 아들은 본래 오만방자하여 사람 구실을 못하였다. 하지만 해인사 주지의 가르침을 받고 개심해 이후 평양 감사의 자리에 올랐다. 주지는 모월 모일 모시에 한 승려를 보낼 테니 반드시 한 방에 데리고 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몇 년 후 과연 해인사의 승려가 찾아왔기에 감사는 큰스님의 당부대로 하였다. 도중에 비린내가 진동하여 불을 켜보니 스님은 배를 칼에 찔려 죽어 있었고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조사해 보니 이는 관노가 한 짓이었다. 감사에게 원한이 있었던 그는 아랫목에 당연히 감사가 누워 있으리라 생각하고 칼로 찔렀다 하였다.

큰스님은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서 일부러 스님을 보내 대신 액을 받도록 했던 것이었다.


                  - 청구야담 -

----------------------------------------------------



저물어가는 햇빛이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다.

지하철에는 단 둘뿐이었다.

다른 칸은 붐비는데 이 칸만 텅 비어 있는 것은, 백 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맞은편의 여학생은,

이상하다.

아까부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계속 꼼지락거린다. 갑자기 깜짝 놀라며 다리 밑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목덜미를 쓸어보기도 한다. 마치…….

유단(柳丹)은 고개를 돌렸다.

신경 쓰지 말자.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치켜 올라간 눈동자가 화면의 글자들을 훑었으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있다. 재미있다.


어디선가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젠장.

칭칭 둘러 감은 목도리를 끌어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콜록! 콜록!”


숨넘어가는 기침소리가 들렸다. 유단은 감았던 눈을 떴다. 여학생의 얼굴이 파랬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후회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른쪽 눈을 살짝 감았다.

지하철 안의 풍경이 뿌옇게 흐려졌다. 대신, ‘그것’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의 정체는 뱀이었다.

빨판이 달린 징그러운 뱀들이 소녀를 꽁꽁 옥죄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천장에서 기어 내려왔다. 범인은 지하철 선반 위의 괴생물체, 혹은 요괴라고 해야 할까? 온몸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줄줄 흐르는 추악한 모습을 한 채, 구슬에서 계속 괴물들을 꺼내 아래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역시나, 아무도 자신들을 보지 못하는 줄 알고, 오늘도 몰래 숨어서 해코지를 하는 그것들.

유단은 화가 났다.


“작작 좀 하지?”


선반 위 요괴가 깜짝 놀라 동작을 멈췄다. 여학생도 놀라서 이쪽을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너 말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선반 위를 노려봤다.


“재미? 이게 재미있냐? 이리 내려와! 그 재수 없는 구슬도 당장 내놓고!”


요괴는 사색이 되었다.

하나같이 똑같다. 비겁한 수작을 부리다 들키면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그것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눈치만 살폈다. 때마침 지하철 문이 열리자, 잘됐다는 듯 밖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유단은 혀를 찼다.

그것 봐. 역시 또 귀찮게 되어버렸다.

벌떡 일어나서,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뒤따라 나갔다. 동시에 여학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학생은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가뜩이나 인상 안 좋은 고등학생 오빠가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서 잔뜩 겁에 질려 있던 참이다. 그런데, 그 남학생의 손은 자기 목 바로 옆의 허공을 붙잡았다. 마치 거기에 뭔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 가슴이 탁 트였다. 숨 막히는 통증도 싹 가셨다.


“아……?”


여학생은 의아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어느새 문이 닫히고 있었다.



거리는 벌써 어두웠다. 술집 간판들이 별보다 더 먼저 깜박이고 있었다. 퇴근하는 직장인들 사이를, 요괴는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아, 귀찮아…….”


유단은 투덜대며 따라갔다.

설마 뒤따라올 줄은 몰랐는지, 그것은 대로변을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희생자를 물색했다. 혼자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아가씨를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갔다.

등 뒤에 슬그머니 달라붙으려 할 때, 목덜미를 낚아챘다.


“히익!”


요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미끈거리는 느낌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일단 잡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유단은 버둥거리는 그것을 그대로 끌고 가, 뒷골목 담벼락에 내동댕이쳤다.


“사람 말이 우습게 들려?”

“잘못했습니다!”


요괴는 바로 엎드려 빌었다. 부스럼과 진물로 뒤덮인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꼴이 되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아무에게라도 해코지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시끄러워! 누가 물어봤어? 사연 따위 듣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니까 꺼져! 제발 좀 내 눈에 띄지 말란 말이야!”

“그, 그게, 보통은 안 보여야 정상인데.”


요괴는 유단의 왼쪽 눈을 힐끔거렸다.


“그 눈, 어찌 그런 눈을…….”

“시끄러워!”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잠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요괴의 꼬리를 밟아 멈춰 세웠다.


“그건 주고 가셔야지.”

“예? 아, 그렇지.”


요괴는 뭉개진 손을 품에 넣어 돈뭉치를 꺼냈다. 유단이 어이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주머니에 직접 넣어주었다.


“뭘 하는 거야? 누가 돈을 내놓으래? 이거 말고 그 검은 구슬 말이야! 괴물을 부리는 구슬!”

“예? 하지만 그것은…….”

“어서 내놓지 못해?”


당황하는 것을 보니 제대로 약점을 찔렀다 싶었다. 재차 다그치자, 요괴의 흉측한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받아가시겠다고요? 아, 알겠습니다. 달라고 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드릴까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빨리 내놔!”

“아, 예…….”


요괴는 허둥지둥 다시 품에 손을 넣었다. 곧 새까만 구슬을 꺼내 유단에게 내밀었다.

손을 뻗어 받았다.

갑각류의 껍질 같은 묘한 재질이라,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표면은 무광이었으나 내부에는 묘한 광채를 품고 있었다.

이게 뭐지?

왼쪽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희미하게 물결치는 어둠에서, 참을 수 없이 사악한 냄새가 났다.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그때와 똑같다.

기억하려고 해도, 무슨 사고가 있었다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 순간 어둠 속에 나타났던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개의 불꽃. 정신을 차리니 모두 쓰러져 있었다. 엄마마저도.

그리고 왼쪽 눈이 몹시도 아팠다.

유단은 자기도 모르게 목도리 자락을 꼭 움켜잡았다.


“지긋지긋해.”


다른 손으로 구슬을 꽉 눌렀다.

흑색 표면에 가느다란 금이 가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었다.

껍데기가 부서지며, 먹물처럼 시커먼 기운이 터져 나와 이쪽을 덮쳤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이마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뭐지?

당황해서 요괴를 쳐다봤다.

찌그러져 있던 형체가 서서히 일어났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전신을 뒤덮은 고름과 진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로군.”


요괴. 아니, 정체 모를 그것의 목소리는 어느새 아주 당당해져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눈으로 그저 볼 수만 있을 뿐이었군! 눈이 아깝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것은 액을 담은 액구슬. 하도 오래 묵은 물건이라 나도 보물로 착각하고 잘못 주웠지. 일단 소유하게 된 이상 꼼짝없이 액을 받아야만 할 운명이었는데, 설마하니 그 액을 달라고 할 줄이야. 이제 난 자유가 됐다!”


그것은 몸을 꼿꼿이 폈다. 그 동안의 흉악한 몰골을 떨쳐 버리고 날개를 활짝 폈다.


“네가 나 대신 액받이가 됐으니까!”

“뭐? 액받이?”


유단은 되물었다.

발밑의 땅이 진동했다.

콘크리트 바닥이 쩍 갈라지며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아까 구슬 속에서 봤던 그 어둠이 이제는 무저갱이 되어 있었다. 까마득히 머나먼 저 밑바닥에서, 살아 있지 않은 존재들의 비명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이 유단을 부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뭐야?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구멍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뒷골목을 빠져 나와, 행인이 가득한 길거리로 도망쳤다.

보통 이런 것들은 제아무리 사악해도 사람이 우글대는 곳은 피한다. 잠시 모습을 숨기고 다시 유리한 때를 노린다. 그 동안 수없이 쫓겨본 덕분에 깨달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구멍은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삼키며, 포식자처럼 소리도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치자 더 빠르게 쫓아왔다.

눈앞이 캄캄했다.

액인지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게 관여하는 게 아니었는데. 남들이 무슨 일을 당하든 신경 껐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누군가 이미 경고한 적 있었다. 그런 식으로 기분 따라 무작정 그것들을 응징하면 언젠가 화를 입을 거라고. 순식간에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해 버릴 거라고.

유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말 이러고 싶진 않은데.

달리면서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나미아.

외사촌누나 또한, 자기만큼은 아니어도 이런 것들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해결책을 알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미아는 몇 번 만에야 겨우 받았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나 지금 영화 보러 나왔어.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제발 방해하지 말아줄래?」


옆에서 여자들이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평범한 여대생 흉내를 내고 있을 때 방해하면 호된 앙갚음을 당한다는 걸 잘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영화고 뭐고 나 지금 커다란 구멍한테 쫓기고 있어! 이거 어떻게 해야 돼?”

「뭐? 구멍?」

“그래! 날 삼키려고 해! 액이래! 내가 액받이가 됐다고 했어!”


순간, 전화기 너머의 공기가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여대생들이 조잘대던 소리가 뚝 그쳤다.


「방금 뭐라 그랬어? 액받이?」

“그래! 요괴한테 구슬을 빼앗아 깨뜨렸더니…….”

「그런 짓 하고 다니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일단 뛰지 마. 뛰면 더 빨라져. 침착해야 돼. 구멍이 얼마나 큰데?」

“몰라. 지름이 대충…… 5미터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냥 죽어. 네가 자초한 거야. 원혼이나 되지 마.」

“재수 없는 소리 말고! 빨리 어떻게 해결하는지나 알려줘 봐!”

「몰라. 나도 못한단 말이야.」


가슴이 철렁했다.


“왜?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왜 몰라?”

「그건 괴이(怪異)니까.」

“괴이?”

「난 그거 못 잡아. 하지만 거기선 할 수 있겠지. 거긴 ‘진짜’니까. 그런데 과연 해주실까? 그래, 공물을 바치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구 아는 사람 있어?”

「사람이 아니야.」


딱 잘라 대꾸하는 말에, 왜 그런지 몰라도 한기가 들었다.


「잘 들어. 네가 지금부터 가야 할 곳은 전통상점 반월당(半月堂)이란 곳이야. 어떻게 찾아가느냐 하면…….」


미아는 설명을 시작했다.

얼떨떨하게 생각하면서도, 유단은 어느 새 그녀가 알려주는 주소를 외우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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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일곱 번째 이야기: 곡두기 놀이 #2 +13 14.08.15 902 41 1쪽
30 일곱 번째 이야기: 곡두기 놀이 #1 +8 14.08.10 1,165 44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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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여섯 번째 이야기: 그믐밤의 귀녀 (上) +9 14.08.04 988 50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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