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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의 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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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8
최근연재일 :
2022.11.29 22: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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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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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19쪽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0

DUMMY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짙은 어둠에 가리어져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왜 이리... 어둡지?”


내가 어디 있는지는 물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내 눈을 가리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손을 휘저었다.


“눈가리개 같은 건 없는데?”


하지만 손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은 없었다.

만져보니 눈도 제대로 달린 것 같았다.


“여긴 대체 어디야.”


나는 어떻게든 주변을 더듬으며 전등의 스위치라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손끝에 닿는 감촉은 낯설기만 했다.


거칠지만 따스한 느낌을 주는 벽지가 아니다.

매끈하면서도 단단한 이 느낌은... 대리석?


“어두운 건 싫은데...”


만약 내 목소리가 들리는 이가 있으면 제발 불 좀 켜달라며 칭얼대본다.


어둠은 분명 잠을 청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포근함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언제든지 맹수가 튀어나올 수 있는 깊은 숲과도 같은 두려움이었다.

눈을 뜨든 감든 차이가 없었음에도 그 두려움 때문에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조금 보인다. 어디서 미약하게라도 빛이 들어오고 있는 건가?”


다행히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고는 있는지 눈이 조금씩 어둠에 적응해가며 주변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이 주변에서 그나마 가장 선명한 곳, 아마도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으리라 판단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척 샛노란... 마치 짐승의 눈과도 같은 달이 적막하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여긴 대체...”


그렇게 조금이나마 앞이 보이고 어느 정도 주변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으나 나는 오히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언제 온 거지? 누가... 데리고 온 거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누군지, 여긴 어딘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것까지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납치인가?”


나는 가장 먼저 납치를 의심했지만 세상 어느 납치범이 인질을 이렇게 무방비하게 둔단 말인가.

더군다나 기억까지 지워서...


주위에 보이는 수많은 돌기둥과 손끝으로 느껴지는 섬세한 무늬는 마치 내가 신전 안에라도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혹시 나는 지금 에로스에게 납치된 프시케와도 같이 된 것이 아닐까?

한 번 실패한 전적이 있는 그 장난기 많은 신은 아예 기억을 지우는 편이 더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건 기억이 안 나면서 이런 건 또 기억이 나네.”


자꾸 봐서 그런지 주변 환경이 묘하게 정겹게 다가왔다.


“나는... 여기서 살고 있던 건가?”


기억은 마치 ‘수면 위의 달’처럼... 닿을 듯 닿지 않았다.

억지로 떠올리고자 손을 뻗으면 수면이 흔들리며 그나마 있던 기억들마저 흩어져버렸다.


스윽─ 스르륵─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소음이 적막을 깼다.

돌에 철갑이 스치면 이러할까? 그것은 거친 표면을 단단한 무언가로 긁어내는 듯한 소리였다.


어쩌면 이 소리의 주인이 내 기억을 찾는 열쇠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혼잣말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하지만 소리는 얼마 안 가 멈추었다.

이에 나는 소리가 근원지라고 생각되어지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그극─ 그그극─


그러자 다시 소리가 났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왜... 소리가 자꾸 날 따라오는 것 같지?”


소리는 마치 ‘따라오는 달’처럼 내 움직임을 쫓았다.


이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봤다.

그러자 소리 역시 함께 멈추었다.


“설마 나한테서 소리가 나는 건가?”


나는 내 몸 여기저기를 샅샅이 훑었지만 어떠한 것도 찾을 수 없어 결국 소리가 난다고 추정되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몸이 굳었다. 바들바들 떨렸다.


“소리가... 달에서 들려.”


달이다, 달이 지금 움직이고 있다.

내가 이를 눈치챘을 때, 샛노란 달의 한가운데가 길게 찢어지더니 어떤 거대한 생물의 눈이 되었다.


‘세로동공’, 그것은 뱀, 악어, 상어와 같은 고위 포식자들에게서만 나타난다는... 일명 ‘포식자의 눈’이었다.

사냥감의 모습과 거리를 정확히 포착해내는 눈.


“저, 저게 대체 뭐야!”


달의 눈을 가진 이는 결코 내 기억을 풀어줄 열쇠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대화가 통하기나 할지 의문이다.


머리는 당장 도망가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다리가 굳은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끼이익~


그때 신전의 창문이 열리더니


“쉬이익~”


하늘에서 붉은색 끈이 내려왔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저것은 그것이 가진 혀다.

녀석은 혀로 공기를 핥아 나의 냄새를 맡았다.


“침착하자... 괜찮을 거야. 덩치도 커 보이는데 여기까지 들어오진 못할 테니까.”


반대로 저 덩치라면 이 신전을 옥죄어 으스러트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러한 가능성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일단 도망가야 했다.

저 혀가 언제 나를 낚아챌지 모른다.


움찔-


좋아, 마비가 풀렸다.

다리가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타다다다다


차르륵─ 차르르륵─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나를 쫓고 있음을.

소리가 녀석의 위치를 실시간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신전을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게 꽁꽁 에워 싸맨 그것은 믿기지 않지만 거대한 크기의 뱀인 듯했다.

그렇게 내 뜀박질 소리와 녀석의 비늘이 신전을 스치는 소리가 신전 안을 가득 메웠다.


깜빡─ 깜빡─


신전에 나있는 여러 창문을 통해 그것의 눈이 스쳐갈 때면 신전이 미미하게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졌다.

저 뱀의 눈이 이곳의 유일한 광원(光源)이었다.


내 걸음으론 결코 녀석에게 도망칠 수 없음을 느낀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허억- 허억-!”


차르륵─ 차르륵─


깜빡─ 깜빡─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나를 따라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 행동은 마치 어디 입구가 없는지 찾아보는 것 같기도 하였고, 나를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덜덜덜.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서 떨고만 있었다.


무기력함이 올라온다.

스스로 현실을 바꿀 수 없을 때,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사람은 무기력해지는 법이다.


그야말로 뱀 앞의 쥐 꼴... 아, 쥐가 아니라 개구리던가?

상관없다. 어차피 피식자인 것은 같으니까.


“쉬르르륵~”


마침내 관찰이 끝났는지, 그것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위치로 돌아가 신전을 비쳐주는 ‘적막한 달’이 되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후우우......”


그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나처럼 작은 존재를 먹으려고 신전을 부술 노력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는 건가...”

“샤아아아-!!”

“히, 히익!”


그것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찢어지는 쇳소리로 역정을 표했고 나는 달이 다시 내게 관심을 가지기 전에 서둘러 달아났다.


─턱


“으악!”


하지만 너무 서두른 탓일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다행히 무언가가 내 얼굴을 받쳐주어 바닥에 얼굴이 갈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퉤퉤! 털이 입안에 들어왔어.”


그래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카펫인지 뭔지의 털이 한 움큼 입안으로 들어갔으니까.


“이건 뭐지?”


적막한 달에게서 너무 멀어져버린 탓인지 나는 나를 받아준 그것의 정체를 오직 촉감만을 사용해 특정해야했다.


“카펫? 아니, 태피스트리인가?”


카펫이 이렇게 부피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테니 아마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아냐, 그렇다고 하기엔 털이 너무 많아. 그럼 이불인가?”


신전과 털 이불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건 마치 ‘첫사의 깃털’처럼 보드랍고 ‘구름’처럼 폭신했기에 어떻게든 연관 지을 수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이불을 조물 거렸다.

부드러운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는 힘이 있다더니, 과연 놀란 마음이 점차 진정되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손길은 점차 과감해져갔고 그때...


─뚝 뚝


내 머리 위로 물이 흘렀다.


“물? 신전인데 비가 샌다고? 관리 소홀이 신성모독으로 직결되는 문제 아냐?”


빗물이라 생각하여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를 넘기려 했지만 그것은 빗물이라기엔 따스했고 일정 이상의 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우연하게도...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한 액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혀 밑 침샘에서 분비되는 아밀라아제 가득 담긴 액체, 바로 ‘침’이었다.


“설마?!”


무언가를 깨달은 나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릉-”


내 머리 위에서 또 다른 짐승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침을 뚝뚝 떨구는 그것은 나를 보며 으르렁댔다.


초대형 스피커를 옆에 두고 음향을 최대치로 높인다면 이러할까, 마치 깊은 동굴을 칼로 긁어내는 것 같은 음성에 단순 귀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내장 속까지 그 떨림이 전해져온다.


“하, 하하... 안녕? 너 털이 참 곱구나.”


뱀의 눈이 달이라면 그것의 눈은 태양이었다.

한 쌍의 빛나는 태양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그 안에 나를 담았다.


그래, 그것은 늑대의 눈이었다.


“후우욱-”


늑대의 뜨거운 숨결이 내게 닿았다.

그 숨결만으로 내 온몸은 축축이 배어들어갔다.


늑대는 뱀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컸다.

과장 조금 보태서 집채만 했다.


─할~짝!


녀석의 혀가 나를 한번 훑었다.

온몸이 침투성이가 됐다.

다행히 냄새가 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게 꼭 먹이를 먹기 전 혀로 핥아 맛을 보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그만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더는 싫어...”


─털썩.


눈가에 가득 눈물이 고인다.

내 시야를 가득 메운 은색 털에 나는 극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늑대의 눈에 내가 담긴다.


이글거리는 늑대의 눈에 내가 담기자 그 안에 담긴 나 역시 그 불길을 따라 일렁였다.

나는 그러지 않음을 알면서도 내 몸에 실제 불이 붙은 게 아닐까 싶어 몇 번이고 내 몸을 재확인해야했다.


“멀어져야 해...”


머릿속이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나는 오직 손만을 사용하여 기어야만 했다.

그동안 내 몸을 떠받들어주던 든든한 다리는 완전히 풀려버려 지금 이 순간, 족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두, 두고 봐. 날 여기 데려온 게 누군지 몰라도 후회하게 해줄 거야.”


맹수에게 등을 보이는 건 공격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최대한 등을 보이지 않게 노력했다.

나는 복수를 맹세하며 최선을 다해 뒤로 기었다.


효과가 있었다!

늑대는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오거나 하지 않았다.


아무리 거대한 것도 멀리서 보면 작아 보인다는 건 일종의 상식과도 같지만 이곳은... 아니, 이곳의 존재들은 상식에 사로잡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뒤로 가면 갈수록, 늑대의 거대한 육체는 그 거대한 덩치를 다시 한 번 내게 각인시켰다.


늑대는 신전 안에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컸다.

제 덩치에 비해 천장이 낮은지 한껏 몸을 움츠린 그것은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들어 보여 내가 뒤돌아 달려도 쫓아오는 것엔 무리가 있겠다 싶었다.


“하, 하하하! 저, 저 상태면 애초에 날 쫓을 수 없었겠구나... 뭐 하냐, 나...”


그걸 깨닫고 나서야 나는 안정을 찾고 기는 것을 멈추었다.

목줄이 걸린 짐승이 두려워 땅을 기다니... 사실 뱀은 내가 아니었을까?


“하아~ 하아~”


늑대가 이제 한눈에 들어온다.

특이한 점은 늑대에게서 어떠한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내가 사냥할 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거냐? 아니면...”


어쩌면 이 늑대는 기억을 잃기 전의 나와 친밀한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이렇게 순할 리 없으니까.


나는 두려움에서 한 걸음 물러나 늑대를 제대로 마주했다.


그 눈빛은 내게 꼭 더 이상 쓰다듬어주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저 눈을 가진 존재가 누굴 해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기했다, 더 이상 늑대가 무섭지 않았다.

또한 우스웠다, 이렇게 쉽게 경계심이 풀리다니...


나는 마치 초롱아귀의 불빛에 이끌린 사냥감처럼 홀린 듯 늑대를 향해갔다.


“안 물 거지...?”

“끼잉-”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늑대의 귀가 축 쳐진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냐는 듯이....


이에 나는 마치 죄 없는 짐승에게 돌을 던진 것 같은 죄악감을 느꼈다.


“미, 미안.”


나는 서둘러 늑대에게 사과했다.


─붕~ 붕~


늑대는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인지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다만 그것은 그 성향을 떠나 그 강인한 육체만으로도 흉기와 다르지 않았다.

늑대의 꼬리가 일으키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근처에 무언가 잡을만한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책상처럼 보였고 나는 망설임 없이 이를 잡았다.


“아야!”


빠르게 손을 떼어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팟!


그와 동시에 바람이 멎고 신전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

요사스런 보랏빛 불꽃은 주변을 밝히기 보단 오히려 주위를 더 음습하게 만들었지만 그 불빛 덕분에 나는 내가 책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건 ‘책상’이 맞았다.

다만 그 재료가 일반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 이게 뭐야! 이빨이랑... 손톱?”


나가야한다.

당장이라도 이 미친 곳에서 벗어나야한다.


나는 제발 이 책상이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사용하던 게 아니길 바랐다.


이런 괴팍한 취미라니... 어쩐지 기억을 찾기가 두려워졌다.

손바닥을 확인하니 그곳엔 손톱자국과 이빨자국이 가득했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누구야!”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책상에 누군가 앉아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누구도 앉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음에도...


“네, 네가 날 이곳에 데려온 거야? 목적이 뭐야!”


나는 어떻게든 두려움을 감추고자 크게 소리쳤다.

내 목소리가 신전 벽에 튕겨져나와 웅웅- 울렸다.


하지만... 상대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나는 두려움도 잊고 상대를 자세히 확인했다.

그리고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건... 인형?”


인형이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얼굴을 절반을 기점으로 한쪽은 흰색, 한쪽은 검은색으로 칠해진 인형은 책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이 책상도, 이 인형의 주인도 제 정신이 아니다.

어떤 취향 나쁜 사람이 이런 인형을 가지고 다닐까, 예쁘긴 했지만 너무 괴이했다.


“인형이... 맞지? 맞는 거지?”


아, 나도 결국 미쳐버렸는가.

자꾸만 이 인형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분장한 사람이 아닐까?

아니, 제발 그랬으면 했다.


나를 이곳에 납치하고, 손도 대지 않고 초를 키고, 기억을 지우고, 잠깐 뒤돈 사이에 인형을 책상 앞에 앉히는 불가사의한 존재보단 분장한 사람 쪽이 훨씬 덜 공포스러우니까.


“마, 만진다...?”


나는 확신을 얻기 위해 허락을 구하고 인형의 볼에 조심히 손을 가져다대었다.


─말캉.


인형의 볼은 마치 ‘처녀의 살결’처럼 보드라웠다.

하지만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역시 인형이구나...”


미약한 실망.

살아있는 존재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열’이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요? 거기 누구 없어요?!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이만 나와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이제 나를 이곳에 데려온 누군가를 향해 애원했다.


낮인지, 밤인지, 내가 누구인지, 여기에 왜 있는지,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고 대답할 존재조차 없다.

차라리 예의 그 뱀을 찾아가 잡아먹어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다.


─끔뻑.


그러자 내 물음에 답을 주듯 인형이 눈을 떴다.


“우어엇!”


우당탕, 소리와 함께 나는 거하게 바닥에 나자빠졌다.

자기가 만지던 인형이 갑자기 눈을 뜬다면 누구나 놀랄 거다.


“이, 이런 것 좀 안하면 안 돼? 나 이런 거에 약하단 말이야...!”


나는 나를 이곳에 데려왔을 누군가에게 따졌다.

더 이상 놀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소녀의 형상을 한 인형은... 아니, 인형의 형상을 한 소녀는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이 기묘한 소녀가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생긴 것은 괴이해도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그것이 납치범이든 살인범이든 묘한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어린 게 말이야. 벌써부터 사람을 놀리기나 하고...”


웃는 것이 귀여워 더 화를 낼 마음도 사라진 나는 땅바닥에서 일어나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소녀와 나의 관계는 무얼까?

이 소녀는 기억을 잃기 전의 나를 알고 있었을까?


“Eut...”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은지 소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제 좀 살아있는 것 같네. 웃는 게 더 보기 좋다.”


그런 내 말에 대답하기 위해서인지 소녀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소녀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솔직히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미친 듯이 땀을 흘리며 소녀의 입안을 바라봤다.


─고오오오!!


그곳엔 심연(深淵)이 있었다.

무저갱(無底坑)이 있었다.

지옥(地獄)이 있었다.


<PŦĦ£ ■æ& Ŧ*@. or!e %!∞!>


만약 누군가 그림을 언어로 나타낸다면 이러할까?

소녀는 말은 뜻은 들리되 이해하기란 가히 난해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겐... 이를 해석할 수 있는 시간 따위 주어지지 않았다.

소녀가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서 무언가의 인력이 발생하여 주위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으니까.


“으아아악!!”


나는 책상을 꼭 쥔 채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버텼다.

다행히 손톱과 이빨로 만들어진 이 책상은 바닥에 박혀있었고 우둘투둘하여 잡기 좋았다.

손에 손톱과 이빨이 박힐 수 있다는 사소한 문제를 뺀다면 말이다.


“앗...!”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손톱이 손끝에 박혔다.

통증에 나는 나도 모르게 힘을 뺐다.

그와 동시에... 나는 소녀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내가 작아진 것인지 소녀가 커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를 한입에 삼키는 소녀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아...”


─삐비비빅! 삐비비빅!


알람소리와 함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꿈이구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무척 무서운 꿈을 꾼 것 같다.


“세상은...”


하지만 나는 곧 현실이 꿈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현실조차 무서운 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애착베개처럼 안고 잔 시리우스가 어제 있었던 일들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이래서 아침이 싫어.”


아침은 미래를 실감하는 시간이다.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하는 건 그날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잠이 모두 달아나버려 나는 씻기 위해 일어났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을 때는 이미 그 꿈의 내용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저... 아련한 그리움만이 남았다.


-마침내 신성이 깨어났군. 계약은 성사됐다.


작가의말

오늘도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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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6 22.05.12 836 19 13쪽
7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5 22.05.12 897 22 19쪽
6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4 +2 22.05.11 993 33 12쪽
5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3 22.05.11 1,078 28 13쪽
4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2 +1 22.05.11 1,250 32 20쪽
3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 +4 22.05.11 1,580 34 20쪽
2 0장. 나팔소리(Trumpet of the Lord Shall Sound) +4 22.05.11 2,659 47 20쪽
1 0. Prologue. 망가진 기억(Broken Memory) +5 22.05.11 4,916 7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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