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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의 신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8
최근연재일 :
2022.11.29 22:00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43,537
추천수 :
1,474
글자수 :
1,693,659

작성
22.05.11 10:32
조회
2,658
추천
47
글자
20쪽

0장. 나팔소리(Trumpet of the Lord Shall Sound)

DUMMY

소녀의 몸은 검게 타들어가다 못해 이내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아. 그냥 들어줘. <<당신은 이제......>>”


그것은 약속의 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

하지만 소년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피어난 불길이 본인마저 태워서?

아니, 망막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겨서.


마침내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것의 관측자가 된 소년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소녀를 보았고, 작아지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 끝에서... 문밖에 서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은 채 그저 떨고만 있는 한 나약한 사내를.


그 사람은...


“아... 빠?”


화마(火魔)가 이내 모든 것을 삼키었다.


-울지 마요.


그 아비의 눈물까지도.


***


겨울이 왔다.


“하아~”


입김을 부는 대로 허공중에 허연 김이 서렸다.

모든 날이 1년에 한 번뿐이기에 특별하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더 특별한 날이었다.


성탄절(聖誕節), 다른 말로는 크리스마스.


자신이 태어난 해를 기점으로 자그마치 세계의 서력기원(西曆紀元)을 바꿔버린 기독교의 성자(聖子)가 태어난 날이자,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날.

그리고 이젠 12월 6일의 성 니콜라우스 축일과 결합되어 종교관계 없이 전 세계인이 즐기는 휴일 중 하나가 되어버린 날이다.


또한 오늘은 선물을 파는 회사의 입장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의 날이기도 했다.

언제나 호시탐탐 소비자의 지갑을 노리는 승냥이와도 같은 그들은 검은 옷 산타와 그의 절친한 악마인 크람푸스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현대에 와서는 소비자들의 작은 시선 한 자락이라도 걸치고자 온갖 장식들로 온 거리를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로 물들였다.


나는 이제 이 날이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인지, 자본주의를 형상화한 날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모든 날들이 1년에 한 번뿐이잖아.

-난 이 날이 진짜 싫어.


“아, 시끄러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

인간들은 밝게 빛나는 전구로 치장한 가로수들이 아름답다 느낄지 몰라도 그들에겐 자신들을 옥죄는 것도 모자라 잠도 잘 수 없게 하루 종일 불을 밝히는 끔찍한 날이었다.


그래도 보통 사람은 식물의 말을 이해할 수 없기에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인간... 죽어...

-자고 싶어. 자고 싶어. 자고 싶어. 자고 싶어.

-졸려... 너무 밝아...


“시끄럽다니까!”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미친 사람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누군가에 사람들은 얽히지 않고자 걸음을 재촉했지만 귓가에 울리는 식물들의 아우성은 내게 부끄러움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래서 밖에 나오기 싫었던 건데...”


우리는 과묵한 사람을 빗대어 ‘나무’, 뇌사상태의 사람을 빗대어 ‘식물인간’이라 부르지만 식물은 이렇듯 수다스러웠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이 식물과 소통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환청을 동반한 병은 너무나 많았기에 의사가 아닌 나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명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어차피 나만 괴로울 뿐, 남에게 해를 끼치는 종류도 아니다.

나는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목적지까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크리스마스다.

가족, 친구, 연인 중 누구를 만나도 좋은 날.

시간이 허락된다면 모두와 만남을 가져도 좋겠지만 이런 좋은 날 역시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길 가족은 외국에, 다정한 연인은 꿈속에, 연락할 친구는 오직 망상 속에.


내게 있어 크리스마스는 그저 내 외로움을 부각시키는 날밖에 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게도 친구 하나쯤은 있었으니까.


─딸랑~


이 친구는 내 기분을 달래주는 대가로 자본을 요구했기에 그리 좋은 친구라곤 할 수 없었지만 정말 오랜 우정을 이어가고 있는, 내게 남은 유일한 친구였다.


“어서 오세요.”

“오, 하나 남았다!”


오늘 나와 어울려줄 친구는 계산대 맨 앞에 진열되어 내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한정판매인데도 예약이나 배달을 받지 않는 괘씸한 녀석.


“이걸로 주세요.”


당분만큼 인간에게 진실된 친구는 없다 생각하며 나는 주문을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스페셜 케이크 주문받았습니다. 초는 몇 개 넣어드릴까요?”

“올해가 2056년이니까 2056개?”


예수님의 나이가 아마 그쯤 되었을 거다.


“네?”


내 회심의 조크가 통하지 않았는지, 점원의 그 감정이 담기지 않은 영업용 미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아~ 1000살짜리 2개, 10살짜리 5개, 1살짜리 6개로 총합 13개 넣어드리겠습니다. 각자 길이가 다르니 알아서 꽂아 쓰세요.”


하지만 역시 프로는 프로.

잠시 나를 향해 경멸의 눈길로 쳐다보긴 했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고 여러 진상들로 다져졌을 그 솜씨로 서로간의 합의점을 빠르게 찾아냈다.


‘그래. 내 상황도 그리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그 모습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적어도 돈을 벌기 위해 휴일을 반납하고 이렇게 남이 먹을 케이크나 계산하며 손님의 철없는 농담이나 어울려주는 저런 상황보다야 낫지 않은가.

하지만 저 사람도 집에 가면 반겨줄 가족이 있으리라.


‘데이트 앱으로 여자라도 사귀어야 하나?’


혼자 지내기엔 너무도 넓은 집이 생각나며 어쩐지 안구에 습기가 찼다.


“어?”


그와 동시에 눈앞이 빙그르르 돌아간다.

설마 몸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서둘러 벽에 붙은 거울을 확인해보니 그곳엔...


눈동자가 네 개 달린 내가 있었다.


“망할 렌즈, 아버지가 밖에서 빼지 말라고 했는데.”


괘씸한 렌즈가 표면장력(表面張力)에 의거하여 나를 네눈박이로 만들어 수치를 주려 한다.


내가 그렇게 한때 무기물이라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무기물일 것이 분명한 것의 반란에 충격을 받는 사이, 주문한 케이크가 나왔다.


“주문하신 크리스마스 스페셜 케이크, 올해로 2056세가 된 고객님을 위한 제품이 나왔습니다!!!”


점원은 복수인지 일부러 카페 전체에 다 울리도록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손님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이쪽을 쳐다봤고 점원은 오븐에서 빵을 꺼내는 척, 빠르게 자리를 이탈했다.


결국 창피함은 내 몫이었다.

이번에는 내 부끄러움을 가려줄 귓가의 아우성이 없었다.


나는 창피함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자리를 이탈한 렌즈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빵집을 빠져 나왔다.

다음부터는 맛이 좀 떨어져도 배달이 되는 곳을 이용하겠노라 맹세하면서.


“내가 다시 여기 오나 봐라!”


기분 나쁘라고 문이 부서져라 쾅,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빵집의 문은 자동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렌즈가 불편해진 이 시점에서 렌즈를 빼버리거나 했겠지만 나는 약간 상황이 달랐다.


렌즈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두 가지 목적성, 시력의 보조(補助)와 미용(美容) 중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니까.

아, 어쩌면 미용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춘다는 의미에서.


서둘러 달려가다 보니 어느새 집 앞.


“다녀왔습니다.”


혼자 살게 된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인사하는 법을 배웠다.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신발장 위의 거울을 보며 렌즈를 먼저 빼낸다.


거울 안에는 동양인 특유의 흑갈색 눈동자가 아닌 마치 황금을 녹인 듯 선명한 금색 눈동자를 가진 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눈이 내가 렌즈를 끼게 된 이유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눈이지만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이 눈을 무척 싫어했으므로.


아니, 싫어하지는 않던가? 어쨌든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은 맞았다.


“하아~ 이 나이가 되서도 아버지 말이나 따르는 꼴이라니...”


스스로를 책임지기 충분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생활비를 비롯한 온갖 부분을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내가 일을 구하거나 하면 아버지가 막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빠르게 합리화를 시작했다.


무언가를 받는다는 건 때론 속박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가 밥을 주는 인간의 목줄을 달게 받듯이 나는 돈을 주는 아버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나라고 아버지 몰래 일을 구하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감시라도 붙였는지 만약 렌즈를 안 끼고 집밖으로 나가거나, 집에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거나, 밤이 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내 핸드폰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걸었다.


어렸을 때는 이 점을 이용해 항상 바쁜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싶을 때면 이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젠 어떤 반항도 포기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늘 나를 감추고 싶어 했다.

대체 왜?


“설마... 나는 혼외자식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혼외자식이라고 하기에는 내 외모는 엄마와 누나를 너무 많이 닮았다.

누나하고는 거의 쌍둥이 수준으로 가끔 누나를 보면 여장한 내 모습 같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아버지만 다른... 이건 너무 갔나?”


고개를 흔들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마저 털어버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도 독립하고 싶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아버지는 내게 입학 선물로 이 렌즈를 건네주며 이리 말씀하셨다.


-한국에서나 희귀한 금안(金眼)이라 높게 쳐주지. 외국에서는 ‘악마의 눈’이란다. 다 널 위해서 그런 거니 항상 몸가짐에 신경 쓰렴.


“남자애한테 몸가짐을 신경 쓰라는 게 뭐야. 내가 누나도 아니고...”


이런 유교적이기 그지없어 서당의 훈장님 정도가 제격일 것 같은 아버지의 직업은 ‘고고학자(考古學者)’다.

기술이 발전할 만큼 발전한 21세기에, 지구를 넘어 우주를 탐험해도 모자랄 판에 고고학자라니...

과거만 파다보니 옛 사고방식에 빠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나름 자신의 직업 안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가끔 TV에도 출연하고 여러 대학에 강의 초빙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간간히 들려올 정도로.


초등학생 때나 아버지 말에 충실히 따랐지.

머리가 좀 큰 뒤부터는 그의 말에 조금씩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협박 대신 다른 방법을 썼다.

아니, 이것도 협박이던가?


그는 나를 자신의 방에 앉히고는 영화를 틀어줬다.

무척 오래된... 하지만 굉장히 유명한 영화, 스타X즈를...


내가 영화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때쯤이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 눈은 포스의 어두운 면에 잠식되어 노랗게 물든 거란다.


지금은 농담임을 알지만 당시에는 아버지의 웃음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 진지한 얼굴에 속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인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시스의 군주가 되었다며 엉엉 울었다.

아버지는 설마 내가 울어버릴 줄은 몰랐는지 서툰 손길로 뒤늦게 나를 달랬지만 결국 엄마와 누나에게 들켜 등짝을 얻어맞았다.


아버지는 이렇듯 아주 못돼먹은 어른이다.

난 절대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고작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내가 벌써 성인이라니...

나는 아직도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밥 먹기는 귀찮고 케이크를 먹기엔 이른데... 뭐 대충 먹을 게 없나?”


나는 냉장고에 케이크를 집어넣으며 뭐 먹을 것이 없나 뒤져보았다.

내가 과일을 좋아하기에 남자 혼자 사는 집답지 않게 냉장고엔 제철과일들이 넘쳐났다.


“오렌지나 먹을까?”


키위를 먹을까, 오렌지를 먹을까 찰나지만 영원과도 같은 고민을 이어가던 나는 마침내 간택 받은 오렌지를 들어 싱크대로 가져가 물에 대충 씻은 뒤 벗기기 좋게 껍질에 칼집을 냈다.


칼집을 내는 도중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부착된 스티커가 나를 방해해오지만 가볍게 떼어, 떼어... 내지 못했다.

이건 왜 쓰잘데기 없는 곳에서 접착력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오렌지에서 손가락으로 붙은 채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스티커를 보며 요즘 시장은 소비자에 대한 PR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인가 생각하며 스티커에 적힌 글자를 읽어본다.


「멜몬트, 캘리포니아 산 오렌지」


이젠 하다하다 오렌지까지 해외여행을 한다고 나를 놀린다며 괜스레 짜증을 내본다.

그리고 스티커를 접착 면끼리 마주보게 접은 뒤 떼어냈다.

오렌지 껍질에서 나온 특유의 기름 성분 때문에 손끝이 미끌거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 종일 손에서 오렌지 향이 날 것 같다.


그렇게 평소라면 통째 들고 가면서 먹었을 오렌지를 굳이 접시에 옮겨 담아 소파로 가려 하는데-


─쿠구구구구


“뭐, 뭐야!”


바닥을 타고 진동이 올라왔다.


─쨍강!!


오렌지를 담으려던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며 파편이 비산한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 하지 않는 짓을 하면 안 되나 보다.


“지, 지진?!”


누군가 건물을 드릴로 꿰뚫는 것 같은 격렬함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가장 유사한 현상에 대해 말했다.

남의 집을 대상으로 누가 함부로 공사를 시작할 리도 없으니 원인은 지진뿐이다.


“이럴 땐 책상 아래로 들어가라고 했던가? 아닌가?! 그러면 오히려 책상이 무너져 더 위험해진다고 그랬나?!!”


나는 이도저도 못하다가 넘어지지 않게 싱크대에 몸을 기댔다.


─끼익! 끼익! 끼익!

─덜컹 덜컹 덜컹!


책장이 좌우로 흔들리며 거친 신음 소리를 냈고 창문은 돌이라도 얻어맞은 양, 크게 덜컹였다.


“......끝났나?”


다행히 지진은 얼마 가지 않아서 멎었다.

벽에 금이 간 곳도 없었고 접시가 하나 깨진 것 외엔 벽지가 찢어지거나 물건이 떨어져 난장판이 되는 일도 없었다.


처음 겪는 지진에 놀라긴 했지만 오직 그뿐.


“접시는... 나중에 치우고 TV나 보자.”


만약 나중의 내가 깜빡하고 저 접시 파편을 밟기라도 한다면 지금의 나에게 저주를 퍼붓겠지만 세상의 대부분의 불안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껍질을 깐 오렌지를 통째 들고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오렌지 껍질에서 묻어나온 기름 성분이 리모컨 채널 버튼에 묻어 미끄덩댔다.

이걸로 리모컨에서도 당분간 오렌지 향이 날 것이다.


“으엑-”


TV가 켜짐과 동시에 나오는 이례적인 화면, 나는 마치 역병이라도 닿은 듯 서둘러 채널을 돌렸다.


“왜 뉴스가 나오는 거야.”


나는 뉴스를 싫어하고 그쪽 채널에는 손도 대지 않으니 아마 아까의 지진으로 인해 긴급뉴스 같은 게 뜬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삑- 삑- 삑-


나는 그렇게 크리스마스 특집 예능이라도 기대하며 열심히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응?”


치직-


치직-


치지지직─!


화면이 도통 전환되질 않는다.

화면의 절반을 채운 저 재미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뉴스 데스크가 도통 사라지질 않고 있다.


“방송사고?”


어쩌면 지진으로 인해 위성안테나에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모든 채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방송사고가 일어날 리는 없으니까.


─쿠당탕! 쿠당!


뉴스데스크 앞을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


얼마나 지났을까.

뉴스데스크에 사람이 와 앉았다.


-긴급속보입니다!


어찌나 급한지 그는 인사 한 마디 없이 뉴스를 진행시켰다.


-현재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으로 인해 하와이와 태평양 일대가 초토화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해안가 인근에 계시는 주민 분들께서는 다가오는 지진해일에 대비하여 최대한 높은 곳으로 피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운석? 지금 시대에 운석이라고?”


21세기, 인류는 무수한 발전을 이루어 운석 따위는 사전에 잡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 내 착각이었나 보다.

역시 사람은 역사가 아닌 미래를 보며 우주로 나가야 했다.


‘역시 아버지는 직업선택에 실패했어!’


열심히 과거를 밝히면 뭐하나, 그 모든 역사가 지워지는 건 이렇게 일순(一瞬)이거늘.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이는 실제상황입니다. 하와이에 떨어진 운석으로 지진이 발생했으니 해안가 인근에 사시는 주민 분들께서는... 아, 지금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화면이 전환된다.

백발이 성성한 중년 남성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었다.


확실히 이 정도로 심각한 일이라면 대통령이 나올 법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화면에 집중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25대 대통령 설백도입니다.


뭔가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대통령.


내가 뉴스나 사회이슈 등에 관심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최근 국회의원을 비롯한 사회 상류층들이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우선 심심한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정부는 사실 운석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순간 내 귀가 잘못됐나 의심했지만, 그들은 친절하게도 화면 아래 자막까지 띄워주었다.

아무래도 생방송이 아니라 미리 녹화된 영상을 보낸 것 같다.


-하지만 정부 역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충격을 받든 말든 녹화된 대통령은 변명을 이어갔다.


-이는 저희 정부 개인이 내린 결정이 아닌 세계국제연맹기구에서 내린 결정으로 운석이 지구에 도달할지 도달하지 못할지 확신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혼란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최근 활동을 자제한 게 이거 때문이었어...?”


-여태까지 이러한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해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심심한 사죄를 표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심심한 사죄가 ‘심할 심(甚)’에 ‘깊을 심(深)’을 사용한 진정성 있는 사과인지, 아니면 무료하다는 의미로 심심을 썼는지에 대해 깊은 의문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 앞으로의 대처가 어떨지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갈릴 것이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 다가오는 새해. 지구로 찾아올 두 번째 방문자에 대비하십시오. 이번 운석의 크기는 지름이 최소 20km 이상으로 추정되며 이는 과거 공룡을 멸종시켰던 운석보다 거대한 크기입니다.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요. 살아서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뭐?”


그는 도망쳤다.

도망가 버렸다.


이전과 달리 제대로 들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제발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직경 20km라니...”


공룡을 멸종시켰다고 추정되는 운석, 칙술루브 충돌체(Chicxulub impacor)가 직경 10~15km로 추정된다.

그런데 직경 20km라면...


“멸망 확정이잖아, 이거.”


어쩌면 다가오는 새해가 지구에 두 번째 달이 생기는 날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운석이 떨어진 충격으로 운석이 떨어진 지구의 반대쪽 땅덩어리가 떨어져 우주로 방출될 테니까!!’


-쿵!


벙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통령의 모습을 끝으로 녹화된 영상이 끝났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뒤돌아서는 그의 입가가 미미하게 올라가있는 것을.


“웃은 거야...? 저거 웃은 거냐고! 우리가 모두 죽는 이 순간이 웃겨?!”


나는 어느새 TV를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 하하! 아하핳하!! 여태까지 내 인생이 코메디인 줄 알았는데 스릴러였네?”


다시 화면이 전환된다.

녹화된 영상이 꺼지고 아까의 그 뉴스데스크가 나왔다.


-오, 오늘이 만우절이었나요? 농담이죠?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요! 당신 대통령이잖아! 국가 원수잖아! 어떻게든 해보란 말이야! 이 원수 같은 새끼야! 선배... 선배는 이거 알았어요?


패닉에 빠진 건 나뿐만이 아닌지 뉴스의 앵커는 근처의 카메라맨의 멱살로 추정되는 것을 잡고 괴성을 질렀다.

절규하는 앵커의 얼굴이 카메라에 생생히 잡혔다.


“하...”


웃음이 멎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세상이 온통 고요한 적막에 휩싸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재앙이 찾아왔다.

인간이 감히 항거할 수나 있을까 싶은 수준의 거대한 재앙이.


“꺄아아아악!!!”


잠시 뒤, 저 밖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며 적막을 깼다.


그게 꼭 묵시록의 시작을 알린다는 천사의 나팔소리 같아서,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어서,


인류는 이제 ‘각자’가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최후를 준비해야했다.


작가의말

프롤로그가 조금 튀어나왔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70 다위
    작성일
    22.05.18 19:28
    No. 1

    난해한 프롤로그...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8 아함(阿含)
    작성일
    22.05.18 19:57
    No. 2

    확실히 프롤로그가 난해하단 의견이 많군요...
    독자님들의 시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에 그런 걸까요?
    아니면 진행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럴까요?

    아무래도 250화 가량 써둔 상태에서 프롤로그를 다시 쓰다보니 복선을 넣고 하는 와중에서 많이 복잡해진 것 같네요.

    작가로서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의미심장하게 시작하고 싶은 제 욕심 때문이겠죠.
    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73 정사장
    작성일
    22.05.28 16:25
    No. 3

    글에대한 애정도 있으신거같고 막글처럼 눈에 안들어오는것도아닌데 흠 글은 술술읽히게 잘쓰십니다. 근데 뭔가 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6 so*****
    작성일
    22.10.23 16:58
    No. 4

    주인공 나이가..?
    성년이 됐다는 것 같은데 생각이나 말이나 중딩같아요.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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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신이 되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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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4 22.05.16 379 13 15쪽
15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3 22.05.16 381 14 18쪽
14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2 22.05.15 421 10 12쪽
13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1 22.05.15 447 12 21쪽
12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0 +1 22.05.14 505 10 19쪽
11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9 22.05.14 554 14 12쪽
10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8 +2 22.05.13 644 12 14쪽
9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7 +4 22.05.13 770 21 22쪽
8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6 22.05.12 836 19 13쪽
7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5 22.05.12 897 22 19쪽
6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4 +2 22.05.11 993 33 12쪽
5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3 22.05.11 1,077 28 13쪽
4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2 +1 22.05.11 1,250 32 20쪽
3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 +4 22.05.11 1,580 34 20쪽
» 0장. 나팔소리(Trumpet of the Lord Shall Sound) +4 22.05.11 2,659 47 20쪽
1 0. Prologue. 망가진 기억(Broken Memory) +5 22.05.11 4,916 7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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