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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의 신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8
최근연재일 :
2022.11.29 22:00
연재수 :
2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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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93,659

작성
22.05.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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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7

DUMMY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모한 지상.


“결국... 문을 열었나.”


하지만 그 지옥이 한 눈에 들어오는 그 건물의 테라스 위는 마치 천계라도 되는 양 평온했다.

그곳의 주인인 듯한 사내는 심란한 얼굴로 빈 잔만을 계속 휘휘, 돌려댔다.


그를 심란케 하는 것은 저 아래에 펼쳐진 인세의 지옥이 아니었다.

이는 모두 계획된 것, 예정된 것에 불과했다.


“마침내... 무대의 막이 올랐군.”


그가 내뱉는 자조 섞인 한탄에는 아들에게 진실을 감추었다는 죄악감과 제 아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가 담겨있었다.


[마스터, 혈연정보의 확인절차를 마쳤고 흐리드스칼프를 개방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 모습을 보다 못한 그의 비서는 그의 빈 잔을 채우며 물었다.

그녀(?)의 이러한 친절에도 강현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선택은 언제나 그 아이의 몫이지.”


그는 그 말이 마치 하나의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입에 올렸다.

그 대상이 되는 누군가가 그 말을 들었다면 비웃을 게 분명함에도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하기만 했다.


자유를 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강현, 그는 분명 지금 일어난 사태에 대한 정보를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한국에 있었다.


[도련님의 통화를 계속 무시하는 것은요?]


“정곡을 찌르는군...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자조 섞인 한탄에 이은 자조 섞인 미소.


만년설(萬年雪)을 조각해 만든 듯한 그의 얼굴에 피어난 작은 미소 한 점은 결코 녹지 않는 얼음 위에 들꽃이 핀 것처럼 경악스러운 것이었지만 담긴 감정은 녹지 않는 눈이라 부르기엔 무던히도 인간적이었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아들과 함께 그곳에 가지 못한 것에서 온 서운함.

그럼에도 잊지 않고 그곳을 찾아준 것에 대한 대견함.


온갖 감정이 한데 얽혀 이루어낸 그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찰랑.


다시 채워진 잔에 담긴 술이 흔들거린다.

넘칠 듯, 넘치지 않는다.

그 퍼져나가는 향(香)만으로 이것이 얼마나 극상의 미주인지를 알려주었다.


극상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입은 양복부터 팔에 찬 시계, 목에 메인 타이, 방 안의 가구, 책상 위의 명패, 심지어 바닥의 재질까지 최상의 것이 아닌 게 없다.


모두 그의 안목으로 직접 고른 것들이었다.


그가 소유한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신분과 지위가 범상치 않음을 증명해주겠지만 진정으로 그의 위치를 증명케 하는 건 이런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감’, 그 이외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띌 것 같은 사내, 어떤 의미로는 실로 짐승 같은 사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비싼 옷, 비싼 차, 비싼 시계, 비싼 구두 따위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해야 마땅할진대 그는 그 존재감 하나로 주위 모든 공간을 장악했으니까.


인간의 지위를 증명하는 그 모든 것이 없어도 그를 만난 모두가 그를 경외하리라.


‘종이 다르다...’


그의 뒤에서, 책상에 가려 그 모습조차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무릎을 꿇고 그가 있을 자리를 올려다보고 있던 중년 남성이 그랬다.


옷을 입던 입지 않건 용은 용이고 호랑이는 호랑이인 법이다.


[매일 도련님으로부터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도요... 걱정이 많으신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역시 연락을 받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의 비서가 하는 보고에선 그 도련님이란 존재에 대한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글쎄...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는 무릎을 꿇은 중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다리가 저리군...’


언제 자신이 남 앞에 이리 무릎을 꿇어봤을까.


하지만 다리가 저린 것 따위 별게 아니었다.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무시다.

그것은 단순히 무시로만 그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공간’ 자체가 자신을 거부하는 느낌...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저게 비서라고? 아니, 그 전에 저것이 인간이 맞나?’


‘저것’의 존재였다.

여인의 탈을 쓰고 비서의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저것’의 존재는 좀 더 이질적이었다.


근본적인 뒤틀림...


이족보행을 하지만 이족보행을 하는 모두가 영장류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듯 사람처럼 입고,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하여 모두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저것’이 그랬다.


─위잉.


‘로봇?’


투명한 의복 사이로 관절의 구동부가 보인다.

인간의 몸에 기계를 덧댄 것이 아닌 몸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인외의 것.


느껴지는 섬뜩함은 그저 인간을 어설프게 닮은 것에서 오는 ‘불쾌한 골짜기’와도 닮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모델 자체가 인간이 아니기에 오는 처절함.

존재 자체가 인외의 것, 인간 이외의 다른 지성체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더욱이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 해도 완전한 인공지능은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분명 그러할 텐데...’


‘저것’은 사내의 비서로서의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했다.

그 불가해(不可解)한 모습에 무릎을 꿇은,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남성, 최승만은 잘게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먼저 온 손님이 있었지.”


그제야 강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마치 여태까지 제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어투.


“허억- 허억-”


승만은 이를 치욕이라 느낄 여유조차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제 존재를 인정하기 전까지 느껴야했던 공간 그 자체의 거부감이 사라지며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압박이 가시며 약간의 여유가 돌아왔다.


‘이, 이 최승만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신세한탄을 할 정도의 여유가 말이다.

만일 누군가 그의 이런 모습을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무려 국회의원을 7선이나 해온 입지적인 인물로 5선만 해도 중진을 넘어 원로로 취급되며 국회의장까지 가능한 것으로 볼 때, 그는 한국 정치사에 이름을 남긴 거인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은 그는 고개를 들어 상대의 눈을 바라보려 했지만.


─쿵!


‘무슨?!’


그는 이제 공간의 압박이 아닌 사내의 시선에 짓눌려 머리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이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해야 했다.


“강현, 제발 부탁하네... 어떻게 안 되겠나? 자네가 그 조직이란 곳에서 꽤나 높은 위치란 걸 알고 있으이...”


승만은 자신의 표정이 그에게 보이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기며 마음껏 얼굴을 구겼다.

어투는 완전히 하대의 것이었지만 이것은 부탁이라기보다는 구걸이었다.


‘차라리 이게 왕에게 자비를 구하는 신하의 모습이었으면 좋겠군...’


승만은 자신의 행동이 차라리 신하가 왕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것은 그보다 비참했다.

이는 천민이 귀족에게 고개를 숙이듯 엎드려 비는 것이다.


귀족과 귀족 아닌 것의 차이는 왕과 그 신하의 차이보다 거대했다.

왕은 백성이 모여 이루어지지만 귀족은 귀족이 아닌 것들을 짓밟으면서 비로소 완성되기에.


왕에 대한 예는 그 자체로도 일종의 명예가 되겠지만, 천민이 귀족에게 바치는 경의는 그 무엇도 되돌아오는 게 없는 강압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압제자의 표상(表象)...’


승만 자신이 언젠가 되고 싶었던, 늘상 꿈꿔왔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


침묵이 이어진다.

승만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침묵의 무게를 감내하며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어쩌다가... 분명 처음부터 이런 상하관계는 아니었을 텐데!’


그도 처음부터 이렇게 그의 값비싼 무릎을 꿇은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쪽에 속했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분명 같은 요구사항을 위해 찾아왔으나 위치가 달랐다 여겼다.

그때와 지금, 상황이 변했더라도 이 둘의 차이는 메꿔질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그래서 언제나처럼 을을 대하듯 꼿꼿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자신이 그들의 조직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을 마치 영광이라고 받아들이라는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강현은... 그런 무례를 좌시하지 않았다.


‘쫓겨났지. 개처럼 질질 끌려서.’


그것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무례였다.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키는 걸 막기 위해 의원들끼리 몸싸움을 벌일 때도 그의 몸에는 감히 손을 대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화가 났다.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단지 복수를 원했다.


그 역시 처음부터 이런 위치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다.

이 자리까지 올라올 때까지 많은 치욕을 감내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올라온 이후 처음 당해보는 치욕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무시당하면 잡아먹힌다는 일념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오며 배운 유일한 진리를 토대로 그를 물어뜯고자 했다.


자신도 있었다.

그 누가 감히 자신에게 무례를 범하고도 한국에 발을 디딜 수 있겠냐는 오만.


그래, 말 그대로 오만이었다.


─뿌득. 뿌드득!


승만은 어떻게든 시선의 무게를 이기고 목을 들어 올려 책상 위 놓인 명패를 읽었다.

그 모습에 강현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스민다.


「원로 이강현」


‘급이 다르다.’


국회의 원로와 조직의 원로.

소속된 곳만 다를 뿐 지위는 같을 진데 그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리고 그것이 조직의 원로, ‘바벨의 현자’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였다.


‘이 정보를 너무 늦게 알았어...’


보복은 시도하기도 전에 저지됐다.

아내 몰래 두었던 첩과 서자까지 모두 도살된 채 목만이 배달되었다.


정을 통한 여자와 피가 섞인 아들이 죽었다는 것에서 온 분노는 없었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조직은 이다지도 무서운 곳이었다.


다음에는 그동안 모은 비자금을 탈탈 털어 돈 보따리를 싸매고 찾아갔다.

이전처럼 끌려 나갔다.

조직에겐 돈도, 사회적 지위도 의미가 없었다.


결국 재앙은 시작되었고 자신이 이미 늦어버린 것을 깨달은 늙은 거인은 젊은 괴물 앞에 뒤늦게나마 이리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단순히 살고 싶어서!

일종의 주제파악이자 그럼에도 살고자하는 발악이었다.


그가 과거 했던 행동이 그를 노예로 격하시켰다.


“귀찮군요... 그저 다른 머저리들처럼 벙커에 숨어살면 편했을 텐데.”


그 푸르른 눈처럼 냉기가 뚝뚝 떨어지듯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말.

그 말에 최승만은 고드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상류층에게 운석이 떨어진다는 정보를 전한 것이 바로 조직이다.

그들에게 벙커를 지어준 것도 조직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순순히 벙커에 들어간 이들은 ‘머저리’다.


아무 의심 없이 벙커 안에 들어간 이들에게 승만은 진정으로 묻고 싶었다.

그렇게 살아남아 어쩔 거냐고.


운석이 떨어진 이후의 지구에서 새로이 문명을 이룩하며 새 시대의 아담과 하와라도 되고 싶은 건가?

감히?

네깟 것들이?


“처음엔 500억을 제시했던가요? 그래요, 과연 큰돈이었죠.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의 기준에서.”


강현은 비꼬듯이 말했다.


‘젠장, 내가 왜 돈으로 로비를 하려 해서! 하지만 500억이 작은 돈은 아니잖아!’


물론 500억은 굉장히 큰돈이다.

한화로 약 오천만원이면 사회적으로 사람 하나를 묻어버리는 게 가능한 것으로 볼 때 500억이면 사람 1000명의 목숨 값이라 해도 좋았다.


“미안하네. 내 이리 사죄하겠네.”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조직에게 돈은 큰 의미가 없었다.

조직은 인류가 화폐를 만들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곳이었으므로.

그런 곳의 최고 요직에 앉은 원로에게 돈으로 화를 풀라 말하다니.


뺨을 때리고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던져준 꼴 아닌가.

이렇게 다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모욕이라 받아들였을까? 내가 느꼈던 것처럼 그도 치욕이라 느꼈을까?’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최승만은 명패에서 시선을 때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시선의 압박을 이겨냈을 때의 흥미는 가신지 오래, 그는 꽤 무료해보였다.


승만은 무언가 강한 인상을 심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쿵! 쿵! 쿵!


“제발 도와주게! 만약 도와준다면 내 이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도록 하겠네.”


승만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단순히 소리를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저 성의를 보이는 선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흐르도록 세차게 박았다.


박는 것 자체는 쉬웠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힘을 빼면 그의 시선이 주는 압박에 저절로 머리가 바닥을 향해 꼬꾸라졌다.


‘이 정도면...’


그의 차가운 심장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일흔이 넘는 노인이 피를 흘리는데 그도 사람이라면 동정을 표하지 않을까?


─또옥! 또옥!


이마에서 떨어져 내린 피가 대리석 바닥에 고였다.

핏방울이 떨어지며 파문을 그린다.


힘을 풀어도 더 이상 머리가 바닥에 꼬꾸라지지 않았다.

압박을 거둔 것이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승만은 자신의 생각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들어 감히 이 공간의 주인과 눈을 마주했다.


그의 인상은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제 놈도 사람인데 피를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지.’


사람은 누군가 다치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강렬한 색채에 저절로 이끌리고 피를 보면 미약하게나마 긴장하게 된다.

마침내 그에게 유의미한 반응을 이끌어낸 것에 성공한 승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쾌재는 이내 후회가 됐다.


─위잉~ 철컥!


[청소를 진행할까요, 마스터?]


그를 보좌하는 ‘저것’이 제 주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그를 청소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청소의 방법은 감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확실한 건 적어도 전처럼 단순히 끌려 나가는 선에서 그치진 않을 거란 거다.

저 밖에서 눈이 벌게진 광인 무리에 던져버리지 않을까?


인간의 상상력은 가히 대단한 것이라, 그가 그리는 스스로의 최후 또한 그만큼 다양했다.


“그쯤 해라, 시엘.”

“허억! 허억!”


그 짧은 사이, 수 개의 주마등을 봤다.

‘저것’... 아니, ‘시엘’이라 이름 붙은 괴물은 제 주인의 만류에 따라 칼날로 변형시킨 손을 원래대로 돌리고 다시 강현의 뒤를 지켰다.


‘그래! 이 고철아. 나는 용서받았어. 용서해주셨다고!’


승만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마치 조직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척 행세는 했지만 승만은 조직이 아주 오래되고 거대하며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제외하곤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도 아는 것이 있다면 그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 예견했으며 먹이를 던져주며 부리던 우리 권력자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아 정리하려 든다는 것.

그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그는 이렇게 아는 체할 자격이 있었다.


‘이들은 이 모든 걸 정리하려는 거야!!’


운석에 대해 알려주고 벙커를 지어준 것이 그 증거다.

그들이 대체 뭐가 예쁘다고 정보를 쥐어주고 벙커까지 지어주었을까.


가장 무서운 건 잃을 게 없는 놈이 아닌 아쉬울 게 없는 놈이다.

그런 놈이 호의를 베푼다면?


의심해야 한다.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


‘그 머저리들은 자신들이 희생양이란 것도 모르고 시시덕거리고 있겠지.’


이는 토사구팽조차 되지 못했다.

애초에 사냥개가 된 적조차 없기에.


그들은 조직이 음지를 벗어나 양지로 올라오기 위해 필요한 영광스런 제물로 선정된 것이다.

승만은 결코 거기에 낄 마음이 없었다.


─툭, 데구르르~


“이, 이게 대체 무엇이온지?”


바닥에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처분을 기다리던 승만은 제 머리 옆으로 웬 앰플 하나가 굴러오는 것을 보고 황송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가 내린 이 영예로운 하사품은 대체 무엇일까.


“......”


그가 답을 주지 않았기에 승만은 스스로 그것의 정체를 유추해야 했다.

앰플 안에는 그가 흘린 피보다 붉은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끊임없이 형상을 변화해가며 몸부림치는 그것의 정체는 승만도 아는 것이었다.


당장 이곳에 도달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것을 피해 도망 다니지 않았던가.

사람을 광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새 시대의 주인으로 만들기도 하는 그것을 승만은 하사받았다.


과연 이게 무슨 뜻일까?


“증명해보세요, 당신의 가치를.”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이 고작 5퍼센트조차 되지 않음을 그는 알았다.

허나 거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거절은 선택지에서 제외됐다.


아직 그가 바라는 어떤 것도 받지 못했음에도 그의 마음속에서 강현은 어느새 거스를 수 없는 상급자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그는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이미 신하가 되어 있었고 강현은 명실상부 한국의 왕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는 운명이 그렇게 정해둔 것이었다.


‘전형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최승만의 야망은 단순히 이번 재앙에서 살아남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새롭게 펼쳐진 세상에서도 이전과 같은 권력을 마음껏 향유하며 살고 싶었다.


─뽕!


고민은 길지 않았다.


─슈화악~


앰플 뚜껑을 열자마자 안에 갇힌 붉은 안개가 쏟아져 나와 그를 덮쳤다.

승만은 이 작은 앰플 안에 이토록 많은 양의 안개가 갇혀있었다는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자신의 기관지를 파고드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크르르르~”


뇌리를 타고 붉은 광기가 흐른다.


“크윽! 크아악!”


그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원죄(原罪) 중 하나였다.

여기에 굴복하면 수많은 광인 중 하나가 될 것이고 이겨내면 새 시대의 주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시련은 짧지만 강렬했다.


“하아~ 하아~”


몸이 뜨겁고 힘이 넘친다.

승만은 자신이 시련을 이겨냈음을 알았다.

늙은 몸 가득 활력이 넘치고 주름이 펴졌으며 굽었던 허리가 꼿꼿이 섰다.


이건 자격이다.


신의 숨결을 사용할 자격.

이 안개는 신의 숨결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승만은 조직의 최연소 원로라 불리는 이를 도전적인 눈으로 바라봤다.

이전과 같은 경의는 없었다.

시련을 이겨낸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예의 그 시선과 압박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승만은 외치고 싶었다.


‘나를 보아라! 네가 그리 천하게 보던 나도 이렇게 자격이 있다. 나는 남들보다 위에 설 자격이 있는 이다. 지금은 올려다보지만 언젠가 내가 너를 내려다보겠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뭔가


이상했다.


‘......그가 이토록 거대했나?’


여태 그를 올려다보긴 했지만 이건 마치 하늘까지 닿은 건물을 바로 아래서 올려다보는 것 같지 않은가.


그는 서둘러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게 뭐지?’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단면이 워낙 깔끔하여 피도 새지 않고 있는 목 없는 몸뚱아리를.

신을 경배하듯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린 몸뚱아리를.

그제야 제 목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쯧, 귀찮게... 정말이지 ‘수치’를 모르는군.”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제 몸이 경배하고 있는 이를 바라봤다.


“으째서...”


그는 폐 없이 목으로 곧장 공기를 빨아들이며 말을 내뱉었다.

피거품이 입 안 가득 끓었다.


“븐명 나는 즈격을...”


승만은 마지막으로 강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았다.


‘나를 보고 있지도 않잖아...’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관심도 없었다.

자기 너머의 무언가를 봤다.


‘너에게 난 대체 무엇이었던 거냐.’


승만은 이미 그 답을 알았다.

피를 잔뜩 머금은 모기.

그의 위치는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앵앵거리는 게 시끄럽지만 잡으면 피가 튀니 그냥 내버려두는 버러지.


강현이 승만에게 붉은 안개를 건네준 것은 명령이 아니었던 거다.

지레 겁먹고 알아서 내빼길 바라는 온화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하지만 벌레는 예상 밖의 행동을 하였고 강현은 자신의 손을 타고 올라오는 벌레에 놀라 후려쳐 잡았다.

피가 튀었지만 벌레가 닿는 불쾌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제 몸을 불태운 ‘붉은 피의 주인’이 더 이상 머무를 곳이 없어 떠나는 것을 느끼며 승만은 원통하게 눈을 감았다.


[그래서 도련님께는 연락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를 보필하는 인공지능이 칼날로 변한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그에게 예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시엘, 너는 내가 정녕 하기 싫어서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


종자의 우려가 담긴 물음에 강현은 싸늘하게 일갈했다.

시엘의 충성은 분명 기꺼운 것이었으나 이따금 선을 넘으려 할 때가 있었다.


[실언이었습니다.]


그런 강현의 반응이 익숙한지 시엘은 고개를 조아려 사과했다.

그 목소리는 어딘지 ‘익숙한 기계음’이었다.


“치워라.”


옅은 쇠 냄새가 섞인 비릿한 피 냄새에 강현은 얼굴을 찡그리고 방을 나섰고 그렇게 시엘의 지휘가 시작됐다.

벽의 틈새에서 기어 나온 작은 로봇들을 시엘의 지휘에 맞춰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피가 튀어 회생이 불가능하다 느낀 카펫도, 목재가구도 금세 새것처럼 변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휘를 계속하면서 시엘은 상념에 빠졌다.


[역시 마스터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로봇의 고뇌였다.


[‘저’라면 결코 잃지 않도록 24시간. 365일. 시선을 떼지 않을 것입니다. 제 손에 움켜쥐고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제 곁을 떠나는 걸... 감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시엘의 눈이 시리게 빛났다.


로봇의 혼잣말.

그것이 시엘이 자아를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공지능이라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는 결코 제 주인을 잃지 않으리란 맹세이기도 했다.


안드로이드의 맹세.

거기엔 인간 같은 고결함은 담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갖추지 못한 영원을 품고 있었다.

제 존재의 끝까지 지키리라는 맹세.


이는 문자 그대로 ‘영원의 맹세’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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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신이 되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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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4 22.05.16 379 13 15쪽
15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3 22.05.16 381 14 18쪽
14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2 22.05.15 421 10 12쪽
13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1 22.05.15 447 12 21쪽
12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0 +1 22.05.14 505 10 19쪽
11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9 22.05.14 553 14 12쪽
10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8 +2 22.05.13 644 12 14쪽
»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7 +4 22.05.13 770 21 22쪽
8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6 22.05.12 836 19 13쪽
7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5 22.05.12 897 22 19쪽
6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4 +2 22.05.11 993 33 12쪽
5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3 22.05.11 1,077 28 13쪽
4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2 +1 22.05.11 1,250 32 20쪽
3 1번째 재앙. 피의 크리스마스(Blood Christmas) 1 +4 22.05.11 1,580 34 20쪽
2 0장. 나팔소리(Trumpet of the Lord Shall Sound) +4 22.05.11 2,658 47 20쪽
1 0. Prologue. 망가진 기억(Broken Memory) +5 22.05.11 4,916 7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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