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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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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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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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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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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5화

DUMMY

나나는 잔디를 한 번 손바닥으로 쓸어보고는 아예 마른자리를 찾아 털썩 앉았다.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는 도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겠다는 의도에서였다. 도진은 그런 그녀의 태도를 보고 자신 역시 그녀가 이야기를 듣기 좋은 쪽을 찾아,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나는 다시 물었다.


“백면의 내생으로 태어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백면의 일부로 남아있어야 하죠.”

“무슨 소리야?”


다리를 쭉 뻗은 나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백면은 월계의 12성인 중 한 명이었어요. 그래서 계속 죽어도 계속 같은 사람으로 태어날 운명이었죠.”

“12성인?”

“나나 씨가 사는 세계에는 다양한 신이 있고 또 다양한 신을 믿지만, 월계에 있는 신은 이 12성인이 전부예요.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또 인간처럼 죽고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신’이라 부르지 않고 ‘성인(聖人)’이라고 부르죠. 인간들이 바라는 모습의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백면이었던 것이죠.”


‘성인이었다고?’ 도진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나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어떻게든 나나를 이해시키고 싶은 도진은, 자신의 턱 끝을 몇 번 문지르더니 말을 이어갔다.


“백면은 인간의 감정 중 하나인 ‘허무’를 주관하는 성인이었다고 해요. 12성인은 각자 자신이 관장하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을 통해 월계인들의 인생을 다스리는 것이죠. 월계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벌을 주면서.”


도진이 거울 펜던트 목걸이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나나에게 보여준다.


“12성인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증거 중 하나가 이 거울입니다. 이것 역시 12성인의 물건 중 하납니다. 이 거울은 흑석 님의 소유고, 나는 흑석 님으로부터 이걸 잠시 빌린 거죠, 세계에 있는 백면의 영혼을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말이에요.”

“잠깐만.”


도진의 손안에 들린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나가 고개를 들어 도진을 마주했다.


“성인이라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며. 인간처럼. 그러면 백면은 내가 아니라 이곳에서 자기 자신으로 태어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바로 백면이, ‘저주받은 성인’이 된 이유가 돼요.”

“저주받은 성인이라고?”

“백면은 자신의 마지막 인생이 끝나기 전에, 다른 성인들에게 다시 태어나면 ‘세계’로 갈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쯤, 백면의 영혼은 조각났고 그 조각들이 월계와 세계로 흩어졌다고 해요. 벌을 받은 것이죠.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고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우리가 태어난 겁니다.”


그 순간, 나나는 떠올렸다. 나름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자신의 인생을. 백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그건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다 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반면에, 백면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외’의 영역에 도전했었다. 나는 정말 그의 환생이 맞는 것일까? 나나의 머릿속엔 그렇게 또 하나의 의문이 피어나다.


“그게 왜 저주받은 게 돼?”

“그건 잘 모르죠. 아무도 알려주시지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내 영혼이 여러 개로 쪼개진다고 하면 좀 슬프지 않을까요? 몸의 여러 부분이 찢기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걸 고려하지 않아도··· 백면의 선택 덕에 내가 저주받았다는 건 잘 느낄 수 있더군요.”


도진의 한 마디에 둘 사이의 분위기는 갑자기 내려앉았다. 그의 운명은 저주받은 것일까, 아니면 그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있는 것일까.


도진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애써 웃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백면을 ‘저주받은 성인’이라 처음 부른 것은 당시의 월계인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나나 씨에게 정확하게 설명해줄 수는 없어요.”

“그래서 날 데려온 이유가 뭔데? 백면을 되살리려고 그러는 거야?”

“ 백면이 사라진 후 성인들은 11명으로만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이후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얼마 전, 11명의 성인이 아니라 12명의 성인이 모두 모여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생겼어요.”

“그게 뭔데?”


도진은 대답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나나는 엉겁결에 자신 또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건 가서 들을까요? 나나 씨가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아까처럼 무작정 데려다 놓지 말고 설명을 해주고 가.”

“그건 좀··· 더 늦어지면 안 됩니다.”


이번에도 도진은 나나의 뒤로 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우선, 걸어보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심보였다. 당황을 하는가 싶더고 그러다 몸이 굳는가 싶더니 결국엔 기절을 해버리고 말았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제 발로 걸어 나가는 나나였다.

시간이 더 지체되지는 않겠단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작게 쉰 도진이 나나에게 말을 건다.


“근처에 바다가 있어요. 그 바다를 건너면 우리의 목적지가 있는데, 저녁이 되면 바다를 건널 수 없어서죠.”

“거긴 왜 가는 거야?”

“나머지 성인들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아직도 자신의 등을 쭉쭉 밀고 있는 도진을 미운 눈초리로 돌아보던 나나가 다시 앞을 보더니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 바다야? 또 거울을 비춰서 이동해?”

“아뇨.”


싱글벙글 재밌는 듯, 도진 역시 바다 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바다가 아니라,


“배 타고 가죠.”


한 구석에 정박된 작은 나룻배를 가리키는 거였지만.


“뭐? 그 거울로 가면 더 빠를 거 아니야.”


세상에, 나나는 자기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배가 아날로그가 아닌 그저 구닥다리로 여겨지는 건 생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나의 시선에 비친 작은 배는 고물 그 자체다. 문명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한순간에 선진적이면서도 또 한순간에 구식이 되니까 말이다.


“아무데나 다 쓸 수 있는 거울은 아니에요. 게다가 원래 이 바다를 건너려면, 인간은 평범하게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야 하죠.”

“백면의 환생이라며, 그럼 되는 거 아니야?”

“우린 온전한 백면이 아니잖아요.”


다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도대체 백면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왜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는 월계를 떠나 세계로 가고자 한 것일까?

그리고 그의 영혼이 조각나서, 그중 하나의 파편으로 자신이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그녀를 고뇌에서 건져 올린 것은, 분위기를 다시 살려보기 위해 서둘러 배에 올라 나나의 이름을 부르는 도진의 밝고 큰 목소리였다.


“얼른 타요, 나나 씨!”


어느 외딴 섬에 팔려 가는 것은 아니겠지.

딴 의심을 한 번 해본 나나가 달려가 배에 올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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