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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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예요.”
잠시, 나나는 묵념에 잠겨야 하는지 망설였다. 옆을 바라보니 도진이 능숙하게 잡초를 뽑고 있었다. ‘자주 왔던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원래부터 월계의 사람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묵념 대신에 무릎을 구부려 앉은 나나는 비석을 어루만졌다. 비석에는 단 두 글자만이 새겨졌다.
‘백면(白面)’.
대낮에 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을 때는 아직 꿈속에서 헤매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진의 설명을 듣고도 믿을 수 없던 나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고, 거의 수평으로 젖힌 고개를 바로 든 것은 도진이 말을 걸었을 때였다. 그가 꺼낸 말은 “꿈이 아니에요. 현실이에요.”였다.
도진은 몇 번이고 이곳이 정말 월계가 맞다고, 거짓도 아니며 꿈도 아니라고 나나를 설득하였다. 설령 자신이 마술로 꾸민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늘에 걸린 달은 마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거라고. 그리고 자신은 마법을 부릴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까지 그녀에게 고백했다.
시간이 흘러도 17층에 닿지 않던 승강기부터 믿었어야 했던 걸까? 나나는 자신을 왜 데려와야 했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도진은 대답 대신에 나나에게 자신과 함께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하늘에 달이 뜬 이상, 그가 한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이야기는 모두 믿어야 한다고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나나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어 놀란 도진은 기쁘게 웃으며 그녀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나나는 그렇게 앞장서려는 도진을 붙잡고 그의 구두를 돌려주었는데, 그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신발이기도 했으며 만약 도진의 말이 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가 자신의 구두를 연못에 버린 것은 자신을 구하기 위한 행위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진은 그 구두를 신지 않았다.
“만약 내가 다른 구두를 신고 왔다면, 나나 씨 구두처럼 나 역시 연못에 구두를 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이 구두는 그럴 수 없는 물건이라서요. 대신에 나도 맨발로 걸어갈게요.”
도진은 구두를 꽤나 소중히 들었는데, 그 장면에 나나는 어째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자신도 그 구두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의 구두를 연못에 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도 도진의 구두를 던져버릴 심산이었는데 막상 손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둘은 연못 뒤쪽으로 자리한 푸섶길을 걸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하였는지 도진은 왼팔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시선이 닿은 끝에는 작은 무덤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길가에 방치된 것 같은 어정쩡한 자리임에도 사람이 꽤 다녀가는 모양인지, 노란색의 튤립이 몇 송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상사화 몇 송이가 드뭇하게 피어 있었다.
“나 처음 봐.”
“예?”
“상사화 말이야. 지금까진 사진으로만 봤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어릴 때였다. 예전에 당신이 직접 키운 것이라며 나나의 어머니는 어렸던 나나에게 상사화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붉고 고운 것이 고혹적이었기에 나나는 이 꽃을 직접 보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했다. 어머니는 물론 다음에 상사화를 보여주겠노라고 약속했었다.
“백면이 죽고 나서 생긴 꽃이라고 하더군요.”
“근데 백면이 누구야? 이 무덤 주인 같은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나나의 눈길에 도진은 어째선지 말해서는 안 될 비밀을 말하는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언제고 이 순간이 올 때면 도진은 무언지도 모를 감정을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고 치부했지만, 한편으로는 죄인지 벌인지 모를 그 무언가를 삼켜야만 하는 숙명을 느꼈다. 자신의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자신을 자라게 하는 그 숙명.
“우리의 전생(前生)이에요.”
도진은 애꿎게 마른침을 삼켰다. 홍연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켰던 첫날이 떠오른다. 나나를 쳐다보니 벌써 그녀는 또 눈썹을 구부리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내가 나나 씨를 데려온 이유도 그래서고.”
“난 이 월계 쪽 사람도 아니잖아. 그런데 내 전생이라고?”
“조금 복잡해요.”
나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진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네?”
“아까 네가 보여준 거울. 나 돌아갈래. 어떻게 사용하면 돼?”
고작 그런 소리나 들으려고 지금까지 마음을 졸였단 말인가. 그녀는 조금 화가 났다. 지금까지 도진이 한 말을 모두 믿는다고 해도, 그리고 지금 들은 이 한 마디까지 전부 다 믿는다고 해도, 고작 그런 소리나 들으려고 이런 고생을 해단 생각에 갑자기 화가 난 것이다. ‘사실이라고 지자. 그런데 지나간 사실이 무슨 소용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당황한 도진이 그녀를 막아서자, 그녀는 도진의 어깨를 쳤다.
“윽,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거짓말이 아니면 뭐. 결국 소용없는 이야기잖아.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외계인이 내 전생이라고? 그걸 믿어서 뭘 어쩌라는 건데? 다 지나간···”
갑자기 격분한 도진이 나나의 말을 끊었다.
“백면이 과거의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백면이에요!”
“우리라고?”
“말했잖아요. 백면은 ‘우리’의 전생이라고.”
나나는 그의 정강이를 공격하려던 오른쪽 다리를 내려놓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의심과 불만이 가득 섞인 얼굴로 그를 대하여 왔지만, 상대 쪽도 잔뜩 흥분하여 이쪽을 바라본 건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라고 나나는 생각했다.
“우리에겐 지금의 삶이 현생(現生)이겠지만, 백면에게 있어 우리의 삶은 내생(來生)이에요. 백면은 한 명이었지만, 백면의 내생을 사는 사람은 여러 명이고요. 그중 하나가 저, 나도진이고, 또 그중 하나가 나나 씨, 당신인 거예요.”
나나에게 백면과 그리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도진의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졌고 조금씩 떨렸다. 목이 멘 탓이다.
“이봐, 나도둑인지 나도진인지 뭔지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나도 백면의 내생으로 태어나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나나는 도진의 이야기를 듣자 속 깊은 곳에서부터 허무함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허무함이 차오른다고? 나나는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된 나나가 아직 풀지 못한 의문을 담고 도진에게 말을 건넸다. 도진 역시 혼란스러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태도에 그가 거짓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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